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47)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47화
막간–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2)
빠악!
거친 주먹질이 뺨을 때렸다.
현실이 아닌 무의식의 공간일 텐데도, 입 안이 찢어져 비릿한 피비린내가 퍼졌다.
오진은 자신의 위에 올라탄 채 미친 듯이 주먹을 내려치고 있는 천마를 올려다봤다.
‘아까랑 반대가 됐네.’
입 안이 찢어져 알싸한 통증이 퍼지고 있는데도 왠지 모르게 입꼬리가 올라갔다.
세상 태평하던 천마가 이렇게 흥분해 있는 것만으로 그의 계획이 완전히 틀어져 버렸다는 걸 알 수 있었으니까.
“네가! 네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건지 알아?!”
일그러진 표정으로 주먹을 내려치는 천마.
“다, 다 끝낼 수 있었어!”
직녀성만 흡수했다면.
흑천의 제어권을 얻어 소멸시킬 수 있었다.
지나긴 기다림의,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연극의 막을 내릴 수 있었다.
그런데.
그런데.
그런데.
“네가! 네가 다 망쳤다고 이 새끼야!”
베가는 흑천에 몸을 던지는 것 대신 오진에게 축복을 줌으로써 막는 걸 선택했다.
오진에게 깃든 직녀성의 축복만으로는 흑천을 소멸시키는 건 불가능했다.
언제 다시 이런 기회가 올 수 있을까.
아니, 어쩌면 이제 영영 이런 기회는 오지 않을 수도 있었다.
지금도 그의 흑천은 사납게 넘쳐흘러 그를 영혼부터 잠식하고 있었으니까.
“이번이 마지막이었어! 마지막 기회였다고!”
하은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기회.
다가오는 멸망에서 그녀를 구원할 수 있는 마지막 기회가 허망하게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왜, 왜, 왜 네가 회귀자가 아니라고 말한 거야!”
절규하듯, 울부짖듯 외친다.
쓰러진 오진의 멱살을 틀어쥔 채 쌓인 울분을 토해냈다.
“그러면… 안 되는 거잖아.”
천마의 뺨을 타고 눈물이 흘러내렸다.
메마르고, 마모됐던 그의 눈빛에 절망이 맴돌았다.
“다른 사람은 그럴 수 있어도… 너는, 너만은 그러면 안 됐잖아.”
살아온 삶은 다르더라도.
걸어온 길은 다르더라도.
서로 같은 오진이라면.
“너는… 나여야만 했잖아.”
멱살을 틀어쥐었던 천마의 손이 힘없이 축 늘어졌다.
늘어진 어깨가 가늘게 떨렸다.
오진은 입가에 흐르는 핏물을 손등으로 쓱 닦아내며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천마를 올려다봤다.
“너는, 나여야만 했다고?”
뭔가 어색한 말이지 않은가?
오랫동안 준비해온 계획을 망친 것에 분노한 건 이해할 수 있다.
백번 양보해서 베가를 희생양 삼아 하은을 지키겠다고 한 것도 이해할 수 있었다.
만약 자신도 그의 입장이었다면 비슷한 생각을 했을 수도 있을 테니까.
하지만.
‘너는 나여야만 했다, 라.’
오진의 눈이 가늘어졌다.
천마를 처음 봤을 때 느꼈던 기이한 이질감.
인간과 꼭 닮은 마네킹을 보는 것만 같았던 불쾌한 감각이 다시금 느껴졌다.
“…너는.”
어딘가 일그러져 있다.
무언가 뒤틀려 있다.
어긋나고, 비틀려 있다.
다리가 아닌 팔로 걷는 사람을 마주친 듯한 기괴한 불쾌함.
오진은 떨리는 천마의 눈동자를 바라보며 그 불쾌함이 어디서 기인한 건지 알 수 있었다.
“하.”
입술 사이로 마른 웃음이 흘러나왔다.
오진은 위에 올라탄 천마를 밀쳐내며 몸을 일으켰다.
싸늘하게 식은 눈으로 실 끊어진 인형처럼 고개를 떨구고 있는 천마를 내려다봤다.
“너는… 내가 되려고 했구나.”
부모가 이루지 못한 꿈을 자식에게 투영하는 것처럼.
그는 이뤄질 수 없는 꿈을, 이상을 자신에게 투영하고 있었다.
비록 자신은 흑천과 함께 소멸할지라도.
‘오진’이 되어 살아간다는 생각과 함께.
“그래서 그렇게 너랑 내가 같다는 것에 집착한 거냐?”
“…….”
“나는, 너여야만 했으니까?”
그래야만 자신의 비루한 죽음에 대해 위로받을 수 있었을 테니까.
내가 죽더라도.
네가 되어 살아갈 수 있을 테니까.
“…닥쳐.”
천마는 야차처럼 일그러진 얼굴로 오진을 노려봤다.
“네가… 네가 뭘 안다고 그런 소릴 지껄이는 거냐.”
하은을 구하기 위해 시간의 순리를 거스르고 과거로 돌아왔다.
미친 듯이 날뛰는 흑천에게 정신이 잠식당하며, 소중했던 기억들을 하나하나 잃어갔다.
마모되는 기억 속에서 작디작은 희망을 부여잡은 채 살아왔다.
언젠가.
하은과 함께할 수 있을 거라는 희망을.
“나는, 나는….”
하지만.
머지않아 깨달을 수 있었다.
자신이 죽어야만 그녀를 지킬 수 있다는 걸.
천마라는 존재는, 그녀의 행복을 방해하는 걸림돌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을.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천마는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고개를 떨군 채 부서지라 주먹을 움켜쥐었다.
“…견딜 수 없었단 말이다.”
오진에게 자신을 투영하지 않고서는.
너를, 나라고 생각하지 않고서는.
그를 짓누르는 아득한 절망을 견딜 수 없었다.
“…….”
오진은 고개를 숙인 천마를 내려다보며 굳게 입을 다물었다.
입 안에 쓴맛이 퍼졌다.
그의 삶을 긍정하지는 않지만, 공감할 수는 있었다.
만약 자신이 그의 입장이었다면 같은 생각을 했을 테니까.
“시작은 너나 나나 같았겠지.”
인간의 본질이 타고난 건지, 아니면 살아가면서 바뀌는 건지는 모른다.
그런 철학적인 물음에 답할 수 있을 만큼 고등교육을 받지도, 공부에 매진하지도 않았다.
하지만 한 가지 확실한 건.
“나는 더 이상 너처럼 살지 않을 거야.”
그가 걸어왔던 길을 똑같이 답습하지는 않을 것이다.
같은 길을 걷기에는.
이제껏 걸어온 길이 너무 달랐으니까.
“나는 네가 되지 않겠다.”
칼로 내리치듯 단호하게 말했다.
“…….”
고개를 숙인 천마의 어깨가 움찔 떨렸다.
쿠르르륵.
그의 왼쪽 가슴에서 시작된 검은 먹구름이 점차 그의 전신을 잠식해가기 시작했다.
“…그래?”
천마는 숙였던 고개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메마른 사막 같았던 그의 눈빛에 푸른 귀화가 사납게 타올랐다.
“그렇다면, 계획을 바꿔야겠지.”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화르르르륵!
칠흑과도 같은 검은 화염이 그의 손 위에 타올랐다.
검은 불꽃이 오진을 덮쳤다.
“크윽!”
오진은 다급히 몸을 굴러 불꽃을 피했다.
현실이 아닌 무의식의 공간이지만, 본능적으로 느낄 수 있었다.
‘닿으면 뒤진다.’
영영 무의식의 공간에 갇히게 되거나, 아니면 이 공간 채로 불타버리게 되거나.
어찌 됐든 멀쩡하게 살아있을 수 없다는 직감이 머리를 스쳤다.
“흐읍!”
파지지지직!
푸른 뇌전이 타오르며 검은 불꽃과 격돌했다.
“그걸로는 안 돼.”
천마의 조소 섞인 목소리와 함께 푸른 뇌전이 허공에 흩어지듯 사라져버렸다.
“이런 미친…!”
뇌전과 격돌했음에도 검은 불꽃에는 조금의 흠이나 머뭇거림도 없었다.
마치 질주하는 트럭 앞에 솜털로 만든 공을 던진 것과 같은 광경.
“타올라라.”
나지막한 주문과 함께.
화르르르르륵!
검은 불꽃이 사방을 불태우며 소용돌이치기 시작했다.
불꽃은 마치 살아있는 생물체처럼 자유로이 허공을 부유하며 사방에서 오진을 노리고 덮쳐 들어왔다.
“크윽!”
오진은 침음을 삼키며 필사적으로 날아드는 불꽃을 피했다.
‘이건.’
자유롭게 허공을 누비는 불꽃을 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오진에게 있어서는 아주 익숙한 광경.
“네가 왜… 용자리의 성흔을 가지고 있는 거냐!”
다급히 몸을 구르며 외쳤다.
화르르륵!
방금 전까지 서 있던 자리를 검은 불꽃이 휩쓸고 지나갔다.
“글쎄, 왜일까?”
천마는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손가락을 튕겼다.
사납게 허공을 누비던 불꽃이 갑작스럽게 사라졌다.
그리고.
화르르르르륵!
오진을 중심으로 거대한 불의 장벽이 치솟아 올랐다.
“제길!”
어딜 둘러봐도 도망칠 곳은 보이지 않았다.
‘베가의 힘이 안 통한다면!’
오진의 손에서 검은 뇌전 줄기가 무시무시한 기세로 뿜어져 나왔다.
불의 장막과 격돌한 뇌전은 그 기세에 비해 허망할 정도로 쉽게 사라졌지만, 사람이 겨우 지나갈 수 있을 법한 아주 작은 틈을 만들어냈다.
“크윽!”
뇌전이 만든 틈으로 가까스로 몸을 던진 오진.
장막을 지나는 동안 전신이 불에 그슬렸다.
화상으로 일그러진 피부에서 끔찍한 고통이 느껴졌다.
“하아, 하아!”
오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천마를 노려봤다.
예상은 하고 있었지만.
천마와의 격차는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아득했다.
“흐음.”
그런 압도적인 격차를 보여줬음에도.
뭐가 못마땅한지 천마는 눈을 찌푸리며 손바닥 위에 타오르는 검은 불꽃을 바라봤다.
“역시 다른 사람의 무의식 안에서는 제대로 힘을 쓰기 어려운가.”
나지막한 중얼거림에 오진의 등골을 타고 오싹 소름이 퍼졌다.
제대로 힘을 쓰기 어려운 거라고?
방금 그게?
‘…빌어먹을.’
천마가 제대로 힘을 사용한다면 얼마나 더 격차가 벌어질지 생각하니 뒷덜미가 오싹해졌다.
천마는 오진을 향해 몸을 돌리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아까 나보고 네가 되려고 한다고 했던가?”
이젠 그럴 필요가 없어졌다.
오진과 천마는 달랐으니까.
너는, 내가 아니었으니까.
“너는 소중한 게 너무 많아졌어.”
모든 걸 끝낼 수 있음에도.
오진이 베가에게 진실을 밝힌 이유는 그에게 있어 베가가 소중한 존재였기 때문이다.
베가만이 아니다.
“리아크랑 카시아… 또 이사벨라라고 했던가?”
하.
천마의 입술 사이로 차가운 조소가 흘러나왔다.
“한 명조차… 단 한 명조차 제대로 못 지켰던 놈이 욕심을 부려?”
이글거리는 눈으로 오진을 쏘아봤다.
“지금 네가 누나 곁에 있을 수 있는 건, 모두 내가 널 도와준 덕분이야.”
이신혁을 과거로 보내 그에게 역천의 별을 건네주지 않았다면.
지금 오진은 이 자리에 서 있지도 못했겠지.
“네가 지금 누리고 있는 것들! 네가 가지고 있는 것들! 네가 웃고, 떠들고, 즐거워하는 모든 것들은!”
그그그그그긍!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무의식의 공간이 뒤흔들렸다.
“다, 다, 다, 전부 다!!! 내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스산하게 타오르는 푸른 귀화가 오진을 응시했다.
“…됐다. 이제 넌 필요 없어.”
쿠르르륵.
검은 먹구름이 완전히 그의 몸을 잠식했다.
“넌, 누나 곁에 있을 자격이 없다.”
전신이 검은 먹구름으로 변한 천마가 오진을 향해 씹어뱉듯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