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52)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52화
별빛 (4)
“베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휑하니 비어있는 신전 안에 메아리쳤다.
은발의 여신은 오진의 부름이 들리지 않기라도 하는 것처럼 묵묵히 뒤돌아서 있었다.
저벅.
한 걸음.
그녀를 향해 발걸음을 옮긴다.
[멈추거라.]우우우우웅!
환하게 타오르는 은빛.
베가를 향해 다가가던 오진의 몸이 투명한 벽에 가로막힌 것처럼 우뚝 멈춰 섰다.
‘성역.’
오진은 앞을 가로막은 투명한 벽을 손으로 조심스럽게 매만졌다.
파직, 파지직!
가볍게 손을 가져다 대기만 했는데도 손바닥이 찢어질 것 같은 강한 반발력이 느껴졌다.
베가는 오진에게 눈길 하나 주지 않은 채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 이상 한 걸음이라도 다가오면 크게 다칠 것….]“흣차.”
일말의 망설임 없이.
조금의 주저함 없이.
베가가 펼친 성역을 향해 크게 한 걸음 내디뎠다.
파자자자자작!
“커헉! 컥!”
전신을 강타하는 푸른 뇌전.
고압 전류가 흐르는 펜스에 몸을 던진 것처럼 어마어마한 뇌전의 격류가 오진의 몸을 헤집었다.
안 그래도 리아크와의 전투로 인해 넝마가 되어 있던 오진의 몸이 거세게 뒤로 튕겨 나갔다.
끔찍한 격통과 함께 아직 채 아물지도 않은 상처가 벌어지며 핏물이 흘러나와 옷을 적셨다.
[나, 나의 아이야!]기겁한 베가가 몸을 돌려 오진이 있는 곳으로 달려오려다, 이내 입술을 잘근 깨물며 다시 되돌아섰다.
[다, 다가오면 다친다고 하지 않았느냐!]나무라는 말투로 외쳤다.
튕겨 나갔던 오진은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그리고 다시 한 걸음.
베가의 성역을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파지지지직!
투명한 막에 닿자 다시 강한 반발력과 함께 뒤로 튕겨 나갔다.
[오, 오지 말거라!]“…베가.”
오진은 후들거리는 다리를 손으로 억누르며 몸을 일으켰다.
흑천의 힘을 사용하면 베가의 성역에도 어느 정도는 저항할 수 있겠지만, 굳이 그러지 않았다.
고통을 억누르며 다시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
파지지지직!
푸른 뇌전이 타오르며 오진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어찌.]베가는 넝마가 된 채 바닥을 나뒹구는 오진을 돌아보며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상처 입은 오진의 모습이 뇌리에 새겨져 사라지지 않았다.
[어찌… 어찌 이리도 본녀의 말을 안 듣는단 말이냐!]슬픈 눈으로 그를 바라보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오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아프다.
말 한마디, 한마디를 내뱉을 때마다 가슴을 송곳으로 쑤시는 것처럼 욱신거린다.
[인제 와서… 인제 와서 무슨 할 얘기가 있다고 그러는 게냐!]울부짖듯 외친다.
[그대는 본녀를 속였느니라! 처음부터, 계속!]그날 게이트에서 처음 그와 만났을 때부터.
오진은 줄곧 그녀를 속여왔다.
흑천의 주인이라는 사실을 감춘 채 가면을 쓰고 그녀를 대했다.
그래.
그녀가 마음속에 품었던 그의 모습은.
애달프게 가슴을 떨리게 했던 그의 모습은.
모두 가면을 쓴 모습에 불과했던 것이다.
[그대와 할 얘기는 더 이상 없느니라!]가슴을 저미는 배신감.
이제까지 오진과 나눴던 기억들이 파노라마처럼 그녀의 머릿속을 스쳤다.
오진과 처음 만났을 때의 기억.
떨리는 손으로 자신을 뺨을 어루만지며 보고 싶었다고 말했던 그의 모습.
지키지 못한 미래를 후회하며 이번에는 꼭 세계를 구원하리라 다짐하던 그의 모습까지.
기억의 페이지가 한 장 넘어갈 때마다 그 모든 것이 다 거짓이었다고 생각하니 미쳐버릴 것만 같았다.
[본녀는 그대를….]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술을 짓씹는 베가.
“…….”
오진은 그런 그녀를 향해 천천히 다가갔다.
어떤 변명조차 입에 담지 않은 채, 묵묵하게.
[이익!]베가가 사납게 표정을 일그러트리며 오진을 향해 손을 뻗었다.
쿠르르르릉!
푸른 뇌전의 격류가 오진을 향해 쏘아졌다.
마경에서 사용했던 것과는 차원이 다른 힘이 서린 뇌전의 격류.
율법의 제약이 없는 성소에서만 발현할 수 있는 직녀성의 뇌전이 오진을 집어삼킬 듯 밀려왔다.
쿠웅!
오진은 별다른 방어조차 하지 않은 채 뇌전의 격류를 몸으로 받아냈다.
거칠게 튕겨 나간 오진의 몸이 신전 벽에 처박혔다.
살점이 타들어 가는 메케한 연기.
전신의 피부가 흉측하게 일그러지며 몸 안까지 침투해 들어온 뇌전에 내부 장기가 익어버렸다.
[아….]베가는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신전 벽에 처박힌 오진을 향해 다가갔다.
[왜, 왜 막지 않은 게냐!]방금 건 자칫하면 목숨을 잃을 수도 있을 정도로 위험한 공격이었다.
오진이라고 해서 모를 리 없을 텐데.
대체, 왜.
“…….”
오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은 채 창을 지팡이처럼 짚고 몸을 일으켰다.
“쿨럭!”
목구멍을 타고 검게 죽은 핏물이 쏟아져 나왔다.
까맣게 탄 내장 조각이 핏물에 섞여 바닥을 뒹굴었다.
‘아.’
이거 진짜 죽을지도 모르겠는걸.
괜히 북극성의 성좌라고 불리는 게 아니라는 듯, 제약에서 벗어난 베가의 힘은 경이롭기 그지없었다.
‘그래도.’
또다시 한 걸음.
그녀를 향해 다가간다.
앞을 가로막고 있는 성역에 튕겨 나가 다시 바닥을 굴렀다.
“아, 으.”
이젠 일어설 힘조차 없다.
타앙!
덜덜 떨리는 팔을 들어 올려 와이어 슈터를 천장으로 발사했다.
실에 묶인 인형처럼 와이어에 대롱대롱 매달린 채 몸을 일으켰다.
[그, 그만.]주춤주춤 뒷걸음질 치는 베가.
오진은 흐릿해지는 의식을 부여잡으며 다시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
와이어 묶인 그의 몸이 한 걸음, 한 걸음 성역을 향해 가까워졌다.
다시금 성역에 막혀 튕겨 나가려고 했을 때.
[그만! 그만하거라 이제!]절규하듯 외치는 그녀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신전 안에 울려 퍼졌다.
[그래, 본녀에게 하고 싶은 말이 있다 했지? 어디 한번 말해보거라!]저렇게 넝마가 되어가면서까지 그는 무슨 말을 전하고 싶었던 걸까.
베가는 사납게 뜬 눈으로 오진을 노려봤다.
“…….”
오진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올렸다.
핏물에 젖은 입술을 어렵게 움직여 쥐어짜듯 입을 열었다.
“미안해.”
꺼질듯한 미소를 지으며 한 걸음, 그녀에게 다가갔다.
“이제까지 속여서… 미안해.”
사과한다고 해결될 일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다.
그녀를 속여왔던 걸 용서받을 수 있다고 생각하지도 않는다.
하지만.
그래도 말하고 싶었다.
말해야만 한다고 생각했다.
[그, 그런 꼴이 돼서 하는 말이 고작 미안하다는 말이느냐?]베가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오진을 바라봤다.
손톱에 찢기고, 뇌전에 그을린 채 넝마가 된 몸.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심한 상처를 입어가면서까지 하고 싶은 말이 고작해야 미안하다는 말 한마디라니.
“응.”
오진은 어딘가 후련하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더 이상 할 말은 없다는 듯이.
[이….]베가는 고운 눈썹을 일그러트리며 팔을 들어 올렸다.
[이, 이, 이 멍청한 놈!]짜악!
오진의 뺨을 때리며 그의 멱살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본녀를 속여온 이유가 있을 것 아니냐!]“…….”
[무슨 변명이라도 해보거라! 그대가 원해서 그런 게 아니라고, 어쩔 수 없었다고 말이라도 해보란 말이다!]가늘게 떨리는 목소리.
베가의 뺨을 타고 투명한 눈물 한줄기가 흘러내렸다.
[왜… 왜,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냐.]오진의 멱살을 쥔 손에 힘이 스르륵 풀렸다.
베가는 무너지듯 자리에 주저앉은 채 눈물을 흘렸다.
[흐윽… 흑.]처음 그에게 속았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이제까지 봐온 그의 모습이 모두 거짓말이었다는 걸 알았을 때.
치밀어 오르는 배신감에 다시는 그를 만나지 않겠다고 맹세했었다.
[그래서… 그래서 신전의 문까지 닫았거늘….]그와 만나기 전의 삶처럼.
아무도 없는 신전에서 시간을 보냈다.
그 누구와도 만나지 않고.
그 누구와도 말하지 않고.
언제나 그래왔듯.
홀로.
[그걸로… 괜찮다고 생각했는데.]고작해야 몇 년 전의 삶으로 돌아온 게 아닌가.
오진과의 만남은 그의 말처럼 거짓말이라고 생각하면 됐다.
모두 허상이고, 가짜였다고.
분명 그녀에게 있어 홀로 있는 삶이 훨씬 더 익숙할 터인데.
[그대의 모습이… 계속 떠오르더구나.]낙인처럼 뇌리에 새겨진 오진의 모습은 무슨 수를 써도 사라지지 않았다.
오히려 시간이 흐를수록 계속해서 더 선명해져만 갔다.
베가는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떨었다.
오진이 자신을 만나기 위해 신전 앞에 도착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
조심스럽게 신전의 문을 노크했을 때.
절대 문을 열지 말라는 리아크의 당부에도 불구하고 바로 신전의 문을 열어버리고 말았다.
[후우. 정말… 어리석은 여인이로구나. 그렇게 속았으면서도… 그대를 포기하지 못하다니.]베가는 쓸쓸히 웃으며 굳게 입을 다물고 있는 오진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와 다시는 만나지 않겠다고, 얘기조차 섞지 않을 거라 맹세했지만.
그게 불가능한 일이라는 건 처음부터 알고 있었다.
이미 그녀의 삶에 있어 오진은 빼낼 수 없는 가시와도 같은 존재가 되었으니까.
[제발… 무슨 말이라도 해주거라.]오진의 손을 두 손을 포개 쥔 채 애원하듯 말했다.
그가 이제까지 왜 자신에게 거짓말을 해 온 건지.
그 이유가 무엇이든 상관없다.
[어쩔 수 없었다고 한마디만….]“아니.”
묵묵하게 입을 다물고 있던 오진이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어쩔 수 없었다고?
처음에야 베가에 대해 전혀 모르니 그럴 수 있다고 해도, 나중에는 달랐다.
“어쩔 수 없었던 건 아니었어.”
말할 수 있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베가라면 자신이 흑천을 가지고 있던, 아니던 믿어줬을 테니까.
이제까지 말하지 못했던 것은 그저 자신이 겁쟁이였기 때문이다.
[…….]베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졌다.
그녀는 씁쓸한 눈빛으로 고개를 돌렸다.
[그대도 참 미련하구나.]이미 자신이 신전의 문을 열었다고까지 말하지 않았는가?
[거짓말이라도 좋으니 그렇다고 말했으면 본녀는 그대의 말을 믿었….]“아니.”
오진은 베가의 어깨에 손을 올리며 말을 이었다.
“이제 거짓말은 안 해.”
구차한 변명을 하기 위해 그녀를 찾아온 것이 아니다.
“포기하지 못하겠다고 했지?”
고개를 돌린 채 시선을 피하고 있는 베가의 턱을 조심스럽게 잡았다.
“나도 마찬가지야.”
베가의 턱을 잡아당기며 그녀의 입에 입술을 겹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