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54)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54화
막간–삼자대면
“그래서….”
확장 공사를 통해 넓어진 거실.
소파에 앉은 하은은 오진과 그의 옆에선 베가를 돌아보며 가늘게 눈을 떴다.
여자의 직감이라고 해야 할까, 오진과 베가 사이에 흐르는 분위기가 달라졌다는 걸 어렵지 않게 눈치챌 수 있었다.
하아.
하은의 입에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사벨라 다음은 베가야?”
“…그게.”
오진은 하은의 시선을 피하며 말끝을 흐렸다.
하은은 시선을 피하는 오진을 날카롭게 쏘아보며 입꼬리를 사납게 비틀어 올렸다.
“혼자 성소로 훌렁훌렁 가더니 둘이 돼서 돌아왔네?”
“…….”
“아주 씨벌 둘이 들어가면 셋이 돼서 나오겠어?”
“크흠.”
이사벨라 때도 그랬지만,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판사 앞에 선 범죄자처럼 경건하게 머리를 조아린 채 판결을 기다리고 있을 때.
[나, 나의 아이의 잘못이 아니니라!]베가 변호사님이 번쩍 손을 들어 올리며 변호에 나섰다.
“흐응. 오지니의 잘못이 아니라니?”
[본녀가 먼저 마음을 고백했느니라.]“호오.”
[그대와 연인 사이라는 걸 알면서도 참지 못한 본녀의 잘못이다.]베가는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위축된 표정을 지었다.
하은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소파에 늘어지며 이마를 짚었다.
“하아, 그래. 이렇게 될 것 같긴 했어. 알고 있었다고.”
오진이 베가에게 사과를 하러 간다며 성소로 향했을 때 어렴풋이 짐작은 했다.
어쩌면 그의 연인이 하나 더 늘어날 수도 있겠다고.
하지만 머리로 아는 것과 가슴으로 받아들이는 것 사이에는 큰 차이가 있었다.
“그래도 좀… 꼴 받네?”
“어떤 벌이라도 달게 받겠습니다.”
오진은 죄책감을 이기지 못하고 자수한 범죄자처럼 얌전히 머리를 조아렸다.
[아, 아니니라! 벌이라면 본녀가 대신 받겠느니라!]“우리 마조 여신님은 들어가 있어.”
[…마조가 무엇이냐?]고개를 갸웃거리는 베가에게 오진이 살며시 다가가 귓속말로 그 뜻을 전했다.
불에 덴 토끼처럼 펄쩍 뛰어오르는 베가.
[보, 본녀는 그런 파렴치한 여인이 아니니라!]“얼씨구, 그러셨어요?”
하은은 입술을 비틀어 올리며 베가의 뒤로 슬쩍 다가갔다.
“쓰읍. 가만히 있어 봐.”
작은 의체 상태가 아닌 본래의 모습으로 현신해 있는 베가의 드레스를 꾸욱 움켜쥐고 좋아하는 여자애에게 짓궂은 장난을 치는 초등학생처럼 훌러덩 치마를 들쳤다.
드레스가 뒤집히며 새하얗고 탐스러운 여신의 엉덩이가 만천하에 드러났다.
[꺄아아아아악!]베가의 입에서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비명이 터져 나왔다.
[무, 무, 무, 무슨 짓을 하는 게냐!]수치심에 얼굴을 붉힌 채 어버버 입술을 달싹이는 베가.
하은은 빨갛게 부풀어 있는 베가의 엉덩이를 바라보며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여기 오기 전에 둘이서 아주 즐거운 시간을 보내고 왔나 봐?”
[그, 그런 게 아니니라!]“아니기는 여기 빵댕이에 이렇게 참 잘했어요 손도장이 찍혀 있는데 뭐가 아니야.”
[무, 무엄하구나!]“무엄한 건 그동안 삐져서 문고리 걸어 잠그고 뻐기고 있다가 화해하자마자 엉덩이부터 들이미는 여신님이고요.”
[…….]상상을 초월한 수위의 팩트 폭력.
이 정도면 차라리 흉기로 얻어맞는 게 나을 거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신랄한 언변에 베가는 영혼을 잃은 듯 공허한 눈으로 풀썩 쓰러졌다.
[보, 본녀는… 그, 그런 게….]“베가.”
[흐윽. 본녀가 뭘 그리 잘못했다고….]“베가!”
반응이 없다.
그냥 시체인 것 같다.
“…누나.”
“아, 미, 미안. 이건 좀 심했나 보네.”
질책하듯 노려보니 어색하게 웃으며 머리를 긁적이는 하은.
베가의 반응이 워낙 훌륭하다 보니 자기도 모르게 선을 넘어버리고 말았다.
하은은 바닥에 주저앉아 무릎을 끌어안은 채 훌쩍이고 있는 베가에게 다가갔다.
“어쨌든, 앞으로 오지니 잘 부탁해.”
[그 말은… 보, 본녀를 인정해주겠다는 말이냐?]공허했던 눈에 황금빛 별빛이 반짝였다.
하은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인정하고 자시고 오지니 선택에 전적으로 따르겠다고 말한 건 나였으니까.”
그래도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년을 데려오는 게 아니라 예전부터 쭉 같이 있던 베가라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할까.
아니, 그렇게 만사태평하게 넘어가기엔 좀 괘씸하긴 했다.
“아주 그냥 잘라버려야 해.”
“…뭘?”
살벌한 말을 중얼거리며 오진의 옆구리를 세게 꼬집는 하은.
살점이 뜯겨 나갈 것 같은 통증에 눈이 번쩍 뜨였지만, 그래도 지은 죄가 있으니 얌전히 하은의 분풀이를 몸으로 받아냈다.
달칵.
그때.
현관문이 열리며 한 여인이 집 안으로 들어왔다.
순간 주변이 환해진 것 같은 착각이 들 정도로 아름다운 여인.
이사벨라는 벗어놓은 신발을 정갈하게 정리하며 안으로 들어왔다.
“다녀왔어요~”
봄바람처럼 포근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음?”
베가를 발견한 이사벨라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머, 두 분 화해하신 건가요?”
“화해만 했겠냐, 아주 그냥 서로 좋아 죽으려고 하던데.”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언니?”
이사벨라는 차갑게 가라앉는 눈으로 오진과 베가를 돌아봤다.
하은은 쯧, 혀를 차며 손가락 세 개를 펼쳤다.
“이제 세 명이 됐다 이거지.”
“…아.”
이사벨라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 미, 미안하구나.]“어머, 저한테 미안하실 게 뭐가 있어요?”
이사벨라는 방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제 입으로 말하긴 좀 그렇지만, 제 입장도 베가 님과 그리 다르지 않은걸요?”
오진과 하은이 연인 사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음에도 둘 사이에 끼어든 건 이사벨라 본인도 마찬가지였다.
[그, 그렇구나. 그렇게 말해주니 고맙….]“하지만.”
입은 웃고 있지만 어째서인지 눈은 전혀 웃고 있지 않은 그녀.
“역시 저는 이런 건 위아래가 확실해야 한다고 생각하거든요.”
[…위아래?]“간단하게 말해서 서열이죠.”
“아니 뭔 서열이야.”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오진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끼어들려고 했지만.
“오진 씨는 가만히 계세요.”
단칼에 거절당하며 순식간에 쭈그리가 되어버린 오진.
“우선 첫 번째는 의심할 여지 없이 하은 언니죠. 오진 씨와 가장 먼저 만난 사이고, 처음 연인 사이가 된 것도 언니니까요.”
“흠흠. 뭐, 그, 그렇지?”
괜히 으스대듯 콧대를 세우는 하은.
그 모습은 마치 재상에게 모든 실권을 빼앗긴 허수아비 황제를 보는 듯한 기분이었다.
이사벨라는 오진의 팔을 살짝 끌어안으며 손가락을 두 개 펼쳤다.
“그리고 두 번째는 저죠.”
[뭐… 연인이 된 순서로 따지면 그렇겠구나.]딱히 서열 같은 건 관심 없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는 베가.
“그러니까.”
이사벨라는 짓궂은 미소를 지으며 끌어안은 오진의 팔에 찰싹 몸을 밀착시켰다.
“오진 씨 옆자리에 남은 자리는 없다는 얘기죠.”
반대편은 하은이 차지한다고 하면 확실히 양옆에 남은 공간 없었다.
영역 표시를 하는 강아지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는 이사벨라를 보며 가늘게 눈을 뜨는 베가.
우우우웅!
그녀의 몸이 빛나더니 손바닥만한 크기의 의체의 모습으로 바뀌었다.
[그럼 본녀의 자리는 여기로 하마.]뽈뽈뽈 날아 오진의 어깨 위에 사뿐히 안착하는 베가.
손을 뻗어 오진의 귓불을 잡아당기거나 뺨을 쓰다듬을 수도 있는 그녀만의 지정석이었다.
“으음. 그런 방법이 있었네요.”
이사벨라는 한 방 먹었다는 표정으로 침음을 삼켰다.
뭔가 이대로 넘어가는 게 괜히 분한지 잠시 고민을 이어가던 이사벨라가 좋은 생각이 났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그리고 앞으로 베가 님은 저희에게 ‘언니’라고 불러야 해요.”
[…뭐라?]베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성좌가, 그것도 수백에 달하는 성좌들 중 정점에 위치한 북극성의 성좌가 ‘언니’라는 존칭을 사용해야 한다니?
국방부 장관이 갓 입대한 새파란 현역병들에게 ‘형’이라 부르는 것 이상으로 끔찍하게 이질적인 호칭이었다.
“오, 그래그래. 한 번 언니라고 불러보지?”
[그, 그대까지 왜 그러는 게냐?]하은이 재밌겠다는 듯 눈을 빛내며 베가의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베가를 놀리는 두 여인을 보니 갓 입대한 신병을 골려주는 선임을 보는 듯한 느낌이었지만.
[나, 나의 아이야.]“크흠. 뭐… 내가 껴들 얘기는 아니니까.”
솔직히 들어보고 싶다.
베가의 입에서 언니라는 존칭이 나오는 장면을.
[으으으으.]베가는 눈을 찌푸린 채 입술을 잘근 깨물더니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쓰읍, 후우.]심호흡을 한 번 하고.
[앞으로 잘 부탁해요… 어, 어, 언니들.]“푸흡!”
“풉!”
하은과 이사벨라가 동시에 입을 틀어막으며 옷 속에 벌레라도 들어간 것처럼 온몸을 비틀었다.
“꺄하하하하! 언니래! 언니! 들었어?!”
“하하하하!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안 어울리네요!”
꺄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베가를 놀리는 하은과 이사벨라.
[그, 그래서 싫다고 하지 않았느냐!]베가가 버럭 소리치며 얼굴을 붉혔다.
이사벨라는 눈가에 살짝 맺힌 눈물을 닦아내며 베가의 어깨를 토닥였다.
“아… 죄송해요 베가 님. 솔직히 이 정도로 안 어울릴 줄은 몰라서요.”
“아 씨, 나 닭살 돋았어.”
뒤늦게 위로를 해봤지만 이미 무너진 성좌로서의 자존심은 회복되지 않았다.
[다들 무엄하기 그지없구나!]베가는 짐짓 엄한 표정을 지으며 조그마한 의체에서 다시 원래의 모습으로 되돌아왔다.
[아무리 본녀가 편하게 그대들을 대해준다고 한들 본녀는 성좌이니라!]이제까지 쌓여온 게 많았는지 열변을 토해내는 베가.
[무릇 성좌란 태초의 거인에게서 탄생한 신적인…!]달달달 시작된 잔소리를 들으며 지뢰를 밟았다는 표정으로 서로를 바라보는 하은과 이사벨라.
“오, 오진 씨?”
“오지니 이 새끼 어디 갔어?”
둘은 오진 쪽을 향해 구원의 눈빛을 보냈지만, 어느새 오진은 허깨비처럼 자취를 감춘 이후였다.
[어허! 어딜 한눈을 파느냐! 지금 성좌의 막 탄생과 역사에 대해 설명하고 있는 중 아니더냐!]베가에게 붙잡힌 두 여인의 깊은 한숨이 아련하게 울려 퍼졌다.
‘그래도 잘 해결돼서 다행이네.’
베가가 폭발하려는 걸 보자마자 몰래 빠져나와 흑막을 사용해 기척을 감춘 오진은 세 연인을 바라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한 명조차… 단 한 명조차 제대로 못 지켰던 놈이 욕심을 부려?
문뜩.
증오에 가득 찬 눈으로 자신을 노려보던 천마의 눈빛이 떠올랐다.
오진은 씁쓸한 눈으로 피식 웃었다.
‘네 말대로 주제넘은 욕심을 부리고 있는지도 모르지.’
하지만.
욕심이면 어떤가, 이기적이면 어떤가.
‘난 포기 안 해.’
너와 달리.
반드시.
굳은 맹세를 가슴속에 새기며 세 여인, 아니 세 연인을 향해 다가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