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55)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55화
3등분의 휴가 (1)
“쓰으으읍.”
천천히 숨을 들이쉰다.
왼쪽 가슴 안, 맥동하는 심장에 온 정신을 집중한다.
상상하는 것은 검은 하늘.
별빛을 집어삼키는 탐욕스러운 먹구름을 떠올린다.
‘흑천.’
쿠르르륵!
전신의 모공을 통해 검은 먹구름이 사납게 뿜어져 나왔다.
뿜어져 나온 먹구름이 거세게 날뛰며 트레이닝 룸의 벽과 바닥을 부수기 시작했다.
수십 종의 결계로 보호되고 있는 벽이었지만, 흑천의 구름은 오히려 좋은 먹잇감을 찾았다는 듯 결계를 이루고 있는 마력을 탐욕스럽게 먹어 치웠다.
예전에는 성흔의 마력을 흡수하는 것 외에 별다른 물리력을 갖지는 못했지만, 열 번째 개화를 한 이후에는 이처럼 흑천의 구름 자체에 강력한 물리력이 깃들게 되었다.
‘천마가 니플헤임을 폐허로 만들 수 있던 것도 이런 이유였나.’
흑천의 구름의 물리력 자체는 압도적이라고 할 만큼 강하진 않았다.
물론 천마처럼 구름의 해일을 일으킬 수 있을 정도로 터무니없는 양의 흑천의 구름을 내뿜을 수 있다면 얘기는 다르겠지만, 아직 오진에게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흑천의 구름이 사기적인 건 단순히 파괴력이 강해서가 아니지.’
겹겹이 중첩된 트레이닝 룸의 결계를 박살을 낸 것에서 볼 수 있듯, 흑천의 구름은 성흔의 마력으로 이뤄진 결계, 보호막 등의 방어 수단을 먹어 치워버린다.
즉, 흔히 게임에서 말하는 ‘트루뎀’에 가까운 피해를 줄 수 있다는 것.
이건 막대한 양의 마력을 지닌 고위 각성자급 이상의 적과의 전투에서 사기적이라고 불러도 좋을 정도로 강력한 힘을 발휘했다.
고위 각성자가 강한 이유는 그 육체가 초인적인 것도 있지만, 초인적인 육체에서 뿜어져 나오는 막대한 성흔의 마력이 그 힘의 근간이었으니까.
‘그럴 일은 없었으면 좋겠지만… 만약 검은 별의 성좌랑 싸울 일이 생기면 더 효과가 커지겠지.’
성좌야말로 성흔의 마력의 집약체라고 볼 수 있었으니까.
쿠르르르르륵! 쿠득!
우리에서 풀려난 맹수처럼 날뛰는 검은 먹구름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만.”
쿠르륵.
사납게 날뛰던 검은 먹구름들이 우뚝 멈추더니 목줄이 채워진 것처럼 오진에게 모여들기 시작했다.
‘확실히 처음 열 번째 개화를 했을 때보다 훨씬 다루기 쉬워졌어.’
흑천 자체가 온순해졌다거나 약해진 건 아니었다.
흑천의 구름을 수월하게 다룰 수 있게 된 원인은 따로 있었다.
‘거문고자리의 성흔이 강해졌어.’
검은 하늘 사이에 찬란하게 빛나고 있는 한 줄기 별빛.
직녀성의 빛이 강해지면서 흑천의 구름을 점차 뜻대로 조종할 수 있게 되었다.
“…베가 때문인가?”
성소에서 베가에게 진실을 밝히고 그녀와 연인이 된 이후로 거문고자리의 성흔이 급격하게 강해지고 있었다.
‘아니 근데 성좌랑 사귄다고 성흔이 강해져?’
사실 앞뒤가 맞지 않은 얘기였다.
성좌가 나무라면 성흔은 그 나무의 씨앗 같은 존재.
옆에 다 성장한 나무가 붙어 있다고 씨앗이 잘 자라는 건 아니지 않은가.
‘베가도 전에 성좌가 각성자의 성장을 직접적으로 도와줄 수는 없다고 했는데.’
대체 원인이 뭔지는 모르겠지만.
어쨌든 거문고자리의 성흔의 빠른 속도로 강해지고 있는 건 사실이었다.
“그럼 마지막으로….”
오진은 손바닥 위에 뭉친 흑천의 구름에 정신을 집중했다.
왼쪽 가슴에 새겨진 거문고자리의 성흔이 빛을 뿜으며 성흔의 마력이 흑천의 구름에 흘러 들어가기 시작했다.
원래라면 흑천의 구름에 마력이 닿는 순간 개미 떼 사이에 탄산음료를 쏟은 것처럼 달라붙어 게걸스럽게 먹어 치워야 했지만, 이번에는 역으로 거문고자리의 성흔이 흑천의 구름을 빨아들였다.
파직, 파지지직!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은 검은빛으로 타오르는 칠흑의 뇌전.
“크으….”
‘개천’을 사용하지 않은 상태에서 검은 뇌전을 만들어내는 건 막대한 마력과 정신력의 소모를 일으킨다.
하지만.
“충분히… 고생한 값은 하지!”
오진은 사납게 타오르는 검은 뇌전을 트레이닝 룸의 벽을 향해 쏘아냈다.
쿠르르르릉!
천둥이 치는 듯한 소리와 함께 검은 뇌전이 쏘아졌다.
흑천의 구름을 내뿜었을 때처럼, 아니 그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수십 겹의 결계들이 뚫고 트레이닝 룸의 벽을 박살 냈다.
흑천의 구름이 결계 안에 담긴 마력을 먹어 치워서 없애는 거라면 검은 뇌전은 마력 자체를 ‘찢어발기며’ 뚫어버리는 느낌.
당연히 그 속도와 위력에서 엄청난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하아, 하아.”
고작 한 번의 검은 뇌전을 쏘아냈을 뿐인데도 끝을 모를 정도로 차올라 있던 마력이 뭉텅이로 빠져나갔다.
오진은 거친 숨을 헐떡이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후우. 이건 좀 더 익숙해질 필요가 있겠네.”
아직 거문고자리의 성흔과 흑천을 섞어 만든 검은 뇌전을 자유자재로 사용하는 건 힘들었다.
“음… 이건 따로 스킬로 만들어지지는 않네.”
오진은 오랜만에 상태창을 열어 스킬 목록을 확인했지만, 거문고자리의 성흔과 흑천을 융합해 사용하는 검은 뇌전은 따로 ‘스킬’로 만들어져 등록되지 않았다.
‘뭔가 정해진 규격을 벗어난 걸 만든 건가?’
애초에 시스템의 원리나 작동 방식에 대해서 모르니 알 방법이 없었다.
“뭐, 그럼 대충 ‘흑뢰’라고 부를까.”
반드시 스킬로 등록되어야 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직관성을 위해 대충 흑뢰라고 부르기로 했다.
파직, 파지지직!
흑뢰를 사용할 수 있게 된 건 오진에게도 고무적인 일이었다.
‘이제까지는 개천을 써야지만 흑뢰를 쓸 수 있었으니까.’
이대로 개천을 사용해야지만 사용할 수 있던 걸 하나, 둘씩 사용할 수 있게 되면 언젠가 아예 개천을 사용할 필요가 없지 않을까, 라는 희망적인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쉽진 않겠지만.”
오진은 씁쓸히 웃으며 주변에 내뿜었던 흑천의 구름을 다시 몸속으로 되돌렸다.
“하아.”
개천에 대해 떠올리니 깊은 한숨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이번에 잃은 기억이 뭔지조차 모르겠어.’
천마의 흑천을 막기 위해 개천을 사용한 건 분명하지만.
그로 인한 ‘대가’가 뭐였는지는 오진도 알 수 없었다.
개천의 후유증으로 잃은 기억은 애초에 무슨 기억을 잃었는지 스스로 깨달을 수조차 없을 정도로 말끔하게 지워져 버렸으니까.
“…쓸데없는 기억이었으면 좋겠네.”
원장 새끼 얼굴이라던가.
오진은 씁쓸히 웃으며 이마에 흐르는 땀을 수건으로 닦았다.
얄팍한 희망을 담아 그렇게 말했지만.
그 자신도 잘 알고 있었다.
이번에도 예전과 마찬가지로 소중히 간직하고 있던 기억 하나가 사라졌을 거란 걸.
‘뭐… 일단 지금 생활이나 관계에는 영향을 주지 않는 기억인 것 같으니까.’
일단 하은이나 이사벨라, 베가와 얘기를 나눴을 때 기억의 빈자리를 느끼는 부분은 없었다.
“…….”
무언가를 잃었다는 것.
하지만 대체 뭐를 잃었는지조차 알 수 없다는 것.
미지에 대한 공포와 불안은 좀벌레처럼 그를 갉아먹었다.
느리지만, 확실하게.
“와 씨, 다 때려 부숴라, 부셔.”
그렇게 쓰디쓴 상념이 이어지고 있을 때.
상념을 순식간에 날려버릴 만큼 달콤한 목소리가 귓가를 간질였다.
하은은 난장판이 된 트레이닝 룸 안에 들어오며 쯧쯧, 혀를 찼다.
“여기 부서지지 말라고 협회 애들 불러서 결계 엄청 빡시게 치지 않았냐? 그걸 이렇게 다 걸레짝을 만들어 놓은 거야?”
“어쩌다 보니 이렇게 됐네.”
“어쩌다 보기는 개뿔. 이거 벨라가 변상하라고 하는 거 아니야?”
지금 오진과 하은이 사용하고 있는 트레이닝 룸은 이사벨라가 오진에게 선물해준 빌딩을 개조해 만든 것.
선물로 줬으니 소유권 자체는 오진에게 있지만 실제 비용의 9할 이상을 이사벨라가 지불한 상태니 변상하라고 해도 할 말이 없었다.
“…싹싹 빌면 용서해 주지 않을까?”
“고년 성격에 몸으로 지불하라 할 것 같은데.”
“뭐, 그럼 어쩔 수 없이….”
열심히 세워… 아니, 뭔 말을 하는 거야.
“쨌든, 슬슬 밥무러 가자.”
“엉.”
하은을 따라 집으로 돌아갔다.
한창 저녁 식사를 준비중이 이사벨라에게 트레이닝 룸을 박살 내버린 것에 대해 얘기하니.
“어머, 그럼 수리 비용은 오진 씨의 몸으로 받으면 어떨까요?”
더없이 좋은 아이디어라는 듯 초롱초롱 눈을 빛내는 이사벨라.
하은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오진을 돌아봤다.
“거봐, 내가 이럴 거라 했지?”
“…….”
이사벨라의 끈적한 시선을 받으며 오진은 끄응, 침음을 삼켰다.
[수련할 장소가 마땅치 않으면 본녀의 신전에 와서 하는 건 어떠냐?]오진의 머리 위에 걸터앉아 있던 베가가 손가락을 튕기며 제안했다.
오진은 난처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아무리 그래도 성소에서 흑천을 사용하는 건 좀 그래서.”
최근 흑천과 거문고자리의 성흔을 섞어 사용하는 기술 위주로 수련하고 있는 오진에게는 받아들이기 어려운 제안이었다.
“끄응. 마경에 있을 땐 맘 편히 때려 부술 수 있어서 좋았는데.”
너무 강해지다 보니 좁은 빌딩 안에 만든 트레이닝 룸으로는 제대로 수련에 집중하기 함들었다.
“걱정 마세요, 안 그래도 상암 쪽에 오진 씨가 마음껏 수련하실 수 있는 시설을 마련 중이에요.”
“상암에?”
“예전에 경기장으로 쓰였던 곳이라고 하더라고요.”
“…….”
설마.
서울월드컵경기장을 말하는 건가.
‘아니 미친 그걸 내 개인 트레이닝 시설로 만든다고?’
최초의 균열 열린 이후 스포츠 시장이 완전히 사장되어버린 탓에 사실상 공실로 남아있다고 해도 너무 스케일이 크지 않은가.
“…대체 돈이 얼마나 많은 거야.”
마경에 다녀온 이후 세계적인 명성을 가지게 된 오진도 감히 상상할 수 없는 재력이었다.
하긴.
아무리 세계적인 인지도를 얻는 톱스타라고 할지라도 대기업을 운영하는 사업가가 지닌 재력에는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는 걸 생각하면 이사벨라가 이렇게 돈이 많은 것도 이해할 수 있었지만.
“오진 씨를 위한 일인 걸요?”
살며시 팔을 끌어안으며 녹아내릴 듯한 목소리로 속삭이는 이사벨라의 모습을 보면 너무 무리하는 게 아닐지 걱정이 앞섰다.
“아, 그런데 공사가 끝나기까지 앞으로 3일 정도 더 걸릴 것 같아요.”
“그래?”
원래 사용하던 트레이닝 룸도 이번에 박살 내버렸으니 그동안은 근처 야산에라도 가서 개인 수련을 해야 하나 생각하고 있을 때.
“그럼 공사가 끝날 때까지는 우리 휴가라도 가자, 휴가!”
하은이 눈을 반짝이며 제안했다.
“휴가?”
“엉. 우리 마경 갔다가 돌아와서 제대로 쉬지도 못했잖아?”
“그건 그렇긴 한데.”
언제 천마가 움직일지 알 수 없는 상황에 태평하게 휴가를 즐길 수는….
“에잇.”
하은이 오진의 양 뺨을 잡아 쭈욱 늘렸다.
“으브브브브.”
“너도 좀 쉬어야지 새끼야. 얼굴이 반쪽이 됐는데 맨날 트레이닝 룸에만 처박혀 살고. 그러다가 번아웃 왔을 때 천마가 쳐들어오면 어쩌려고?”
“…….”
그녀의 말마따나.
지구로 돌아온 이후 오진은 제대로 된 휴식을 한 번도 취한 적이 없었다.
[공사가 끝날 때까지만이라도 푹 쉬는 게 어떠냐?]베가까지 거들며 나서자 오진의 입장에서 거절할 명분이 없었다.
“끄응, 알았어. 휴가는 어디로 가게?”
“아, 그거 말인데.”
하은이 이사벨라 쪽으로 힐끔 눈빛을 보냈다.
이사벨라는 방긋 미소를 지으며 오진의 목덜미를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저희끼리 얘기를 좀 해봤는데요. 아무래도….”
섬뜩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이번 기회에 나누는 게 좋을 것 같아요.”
나누다니?
나누긴 뭘 나눠?
“오진 씨요!”
…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