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62)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62화
3등분의 휴가 (8)
[으으음.]흑천의 잔재로 만든 침대에 누워있던 베가가 부스스 눈을 떴다.
조심스럽게 옆자리를 더듬거리더니, 이내 손에 잡히는 게 아무것도 없자 서운한 표정을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나의 아이야?]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깊은 한숨을 내쉬며 머리를 쥐어뜯고 있는 오진의 모습이 보였다.
[나, 나의 아이야!]혹시 오진에게 무슨 일이 생긴 게 아닐까.
베가가 경악한 표정으로 튀어 오르듯 몸을 일으키며 오진이 있는 곳으로 순식간에 날아갔다.
[어, 어디 아픈 게냐?]“엉?”
머리를 쥐어뜯고 있던 오진이 고개를 저었다.
“어디 아픈 건 아니야.”
[그렇다면 방금은 왜 그리 머리를 쥐어뜯고 있던 게냐?]“어… 그건.”
[왜 대답을 못 하는 게냐!]“아니 그게.”
아무리 오진이 철면피라고 하지만 농밀한 별의 교접을 즐겼더니 10성이 됐다고 어찌 말할 수 있겠는가.
차마 말을 잇지 못한 채 입술을 달싹이기만 하는 오진.
[어서 대답하거라!]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여신님.
말 못 할 사연이 있습니다.
[또, 또 본녀에게 사실을 숨길 셈이냐!]“그런 게 아니라요.”
[어찌… 어찌 그대는 이리도 본녀를 믿지 못하는 게냐?]“아니.”
[아프다면 아프다고, 괴롭다면 괴롭다고 말하는 게 뭐가 그리 어렵단 말이냐!]“진정하고 내 말을 들어봐.”
[지금이 진정할 상황이더냐?!]베가는 눈물을 글썽이며 오진의 머리를 끌어당겨 가슴에 품었다.
고통스럽다는 듯 머리를 쥐어뜯던 오진의 모습.
아마도 그건 그녀가 모르는 흑천의 부작용이리라.
언제나 그래왔듯, 자신 혼자 괴로워하는 것이 들키지 않으려고 남들에게 아프다는 말 한마디 하지 않은 채 속으로 고통을 삭여왔겠지.
[부탁이니라… 더 이상 그대 혼자 고통을 끌어안고 있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구나.]눈가를 촉촉하게 물들이며 서글픈 목소리로 말하는 베가.
오진은 그녀의 부드러운 가슴골 사이에 파묻힌 채 입을 열었다.
“하 힙헝이 했허.”
[으음? 무슨 말이느냐?]“푸하!”
간신히 그녀의 품에서 벗어난 오진은 뺨에 잔향처럼 남아있는 부드러운 감촉에 크흠, 헛기침을 흘리며 답했다.
“나, 10성이 됐다고.”
[뭐, 뭐라?]베가의 눈이 토끼처럼 동그랗게 뜨였다.
10성?
갑자기 10성에 도달하다니?
[혹시 별의 무덤에 있는 기운 때문이더냐?]“…….”
그래.
뜬금없이 10성이 됐다는 얘기를 들으면 당연히 저렇게 반응하겠지.
“…하아.”
예전이었다면 적당히 그렇다고 둘러댔을 테지만.
‘이젠 그렇게 살지 않기로 했으니까.’
오진은 짧은 한숨을 내쉬며 베가를 돌아봤다.
[왜, 왜 갑자기 한숨을 내쉬는 것이냐? 역시 어디 아픈….]“별의 무덤의 영향은 아니야. 안 그래도 최근 들어서 거문고자리 성흔의 힘이 강해지고 있었거든.”
[최근이라면….]“베가 너랑 연인이 되고 난 이후에.”
[……!]연인, 이라는 아직 낯선 단어에 베가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것도 잠시.
[자, 잠깐. 그렇다면 설마….]베가 또한 오진이 10성에 도달할 수 있었던 원인에 대해 깨달은 모양.
여신의 양 뺨이 불에 달군 듯 새빨갛게 달아오르기 시작했다.
[벼, 벼, 별의 교접 때문에 그대가 10성에 도달했다는 말이냐?!]“…아마도.”
오진은 자신도 믿기지 않는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답했다.
정확한 원인에 대해서는 그도 알 수 없지만.
베가와 몸을 섞음으로써 거문고자리의 성흔이 강해진 건 확실했다.
[그, 그렇다면 본녀와 그대가 그… 계, 계속 교접을 하게 되면….]“그만큼 성흔의 힘이 강해지겠지.”
[……!!!]부릅떠진 여신의 두 눈.
베가는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발을 동동 구르더니 주먹을 불끈 움켜쥐며 환호성을 터트렸다.
[나이스니라!]“…엉?”
[아, 아, 아니! 안 나이스니라!]어느 쪽이야.
안 나이스는 대체 어느 나라 말이고.
[크, 크흠! 그럼 앞으로도 지속적으로 그대와 교접해야 할 이유가 생겼구나!]“일단 이제 막 10성에 도달했으니 당분간은 괜찮….”
[무슨 소릴 하는 게냐!]베가가 양 허리에 손을 착 올리며 반찬 투정을 부리는 아이를 꾸짖듯 엄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대에게는 세계의 운명을 바꿔야 한다는 중요한 사명이 있지 않으냐!]“아니 그렇다고 해서….”
[어허!]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베가.
[이건 우리 둘만을 위한 것이 아닌, 두 아이를 위한 일이지도 않으냐!]“…그건.”
뭐, 거문고자리 성흔의 힘이 강해지면 그만큼 하은과 이사벨라를 더 확실하게 지킬 수 있을 테니 틀린 말은 아니지만.
[크흠, 이건 어쩔 수 없겠구나!]베가가 어색하게 헛기침을 하며 슬며시 고개를 돌렸다.
[보, 본녀의 뜻은 아니지만! 세계의 운명과 다른 두 아이를 위해서라도! 본녀가 이 한 몸 희생해야겠구나!]나름 비장한 대사를 내뱉는 것 치고는 씰룩씰룩 올라가는 입꼬리를 주체할 수 없는지 베가의 입가가 파르르 떨렸다.
오진은 피식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굳이 그렇게 억지로 이유를 만들지 않아도 괜찮아.”
[어, 억지가 아니니라!]“만약 거문고자리의 성흔이 강해지지 않았다고 해도, 앞으로 언제든 같이 있을 수 있으니까.”
[읏.]베가의 허리에 가볍게 손을 올리며 입을 맞추자 베가의 머리 위로 파직, 파직 스파크가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스, 슬슬 돌아가자꾸나.]베가가 허둥지둥 몸을 돌려 별의 무덤 밖으로 성큼성큼 걸어갔다.
오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뒤를 따랐다.
[조, 조금 더 가까이 와도 되느니라.]서로에 대한 사랑을 확인했기 때문일까.
처음 데이트를 시작했을 때보다 한결 긴장이 풀린 표정으로 오진의 손을 잡아당겼다.
[으음.]“왜?”
맞잡은 손을 내려다보며 무언가 고민을 이어가던 베가가 이내 조심스럽게 오진의 팔을 끌어안았다.
한층 더 몸이 밀착하며 부드러운 감촉이 팔을 타고 퍼졌다.
베가는 고개를 슬쩍 돌리며 변명하듯 다급히 입을 열었다.
[벨라나 하은을 보면 항상 이렇게 하지 않느냐.]그녀의 말마따나.
하은과 이사벨라 모두 오진과 손을 맞잡기보다는 팔을 끌어안아 몸을 밀착시키는 걸 더 좋아하긴 했다.
“굳이 그렇게 둘을 의식할 필요는 없어.”
베가에게는 베가 나름의 매력이 있지 않은가.
이사벨라와 하은의 행동을 의식하며 억지로 행동을 맞출 필요는 없었다.
[…딱히 그 두 아이를 의식하고 한 일은 아니니라.]“하지만 방금….”
[시, 시끄럽구나!]베가가 오진의 옆구리를 꼬집으며 홱 고개를 돌렸다.
오진은 고개를 돌린 베가를 바라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벨라랑 누나를 의식하는 것처럼 말하더니.’
그저 팔을 끌어안을 적당한 핑계가 필요했던 것뿐인가.
“가자.”
괜히 걱정했다는 걸 깨달은 오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몸을 돌렸다.
별의 무덤을 왔을 때는 뇌전의 구체를 만들어 마치 근두운을 타듯 이동했지만, 돌아가는 길은 아직 남아있는 달콤한 여운을 되새기며 천천히 걸어갔다.
[오늘 하루는 무척 즐거웠느니라.]“나도.”
[후후. 앞으로는 더 바빠지겠지만, 언젠가 또 이런 날이 있었으면 좋겠구나.]“기회야 만들면 되지.”
끌어안은 오진의 팔에 머리를 기대며 행복에 겨운 여운을 즐기고 있을 때.
“언니이이이!”
저 멀리서 분홍빛 머리칼을 휘날리며 처녀자리의 여신이 우다다 달려왔다.
베가는 끌어안고 있던 오진의 팔을 다급히 놓으며 당황스러운 표정으로 스피카를 바라봤다.
[어, 어, 어찌 그대가 이곳에….]“궁금해서 언니가 나오길 기다리고 있었지!”
밤하늘에 뜬 별처럼 초롱초롱 눈을 빛내며 베가와 오진을 바라보는 스피카.
사랑 얘기라면 자다가도 벌떡 깰 정도로 좋아하는 그녀에게 있어 베가와 오진의 시크릿 무덤 데이트의 내용이 궁금하지 않을 수 없었다.
“별의 무덤은 어땠어? 응? 응? 거기가 좀 그렇긴 해도 되게 이쁜 곳이긴 한데.”
촐싹거리며 다가오는 스피카.
베가는 살며시 눈을 찌푸리며 스피카를 향해 손을 뻗었다.
파지지지직!
손 끝에 푸른 뇌전이 타올랐다.
“으갸갸갸갸갸갹!”
[과도한 호기심은 화를 부르는 법이니라.]스피카를 전기구이로 만들어 버린 베가는 흥, 콧방귀를 뀌며 고개를 획 돌렸다.
오진과 오붓한 시간을 방해받은 것이 영 불편한지 고개를 돌린 베가의 표정은 썩 좋지 않았다.
“으으. 미안 언니… 그래도 너무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어.”
스피카 또한 자신이 연인 사이의 오붓한 데이트를 방해했다는 걸 잘 알고 있지만.
도저히 궁금해서 참을 수 없었다.
‘직녀성의 여신이 인간 연인과 데이트라니!’
수백에 달하는 성좌들 사이에서도 정점에 위치한 북극성의 성좌.
그중에서도 실제 ‘냉기’를 다루는 별자리인 백조자리의 성좌, 데네브보다 더 백조자리에 어울리는 게 아닐까, 라는 말이 나올 정도로 차갑고 무뚝뚝했던 베가가 데이트를 한다는 소식에 어찌 가만히 있을 수 있겠는가.
‘그건 처녀자리 성좌 실격이야, 실격!’
스피카는 흥분에 찬 콧김을 내뿜으며 베가에게 성큼 다가갔다.
“5분! 딱 5분만 얘기해주면 귀찮게 안 할 테니까 제발!”
[어허. 성좌라는 것이 아이 앞에서 어찌 이리도 칠칠맞게 구느냐.]베가가 엄한 표정으로 스피카를 나무라려고 했을 때.
“…응?”
스피카가 동그랗게 눈을 뜨며 고개를 갸웃거렸다.
킁킁.
갑자기 사냥개자리의 성좌라도 된 건지 베가에게 바짝 다가온 스피카가 냄새를 맡기 시작했다.
베가의 표정이 한층 더 사납게 일그러졌다.
[지금 무슨 짓을 하는….]“언니 설마… 별의 무덤에서 했어?”
[……!]베가의 입이 쩌억 벌어지며 경악에 찬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어, 어찌, 어찌 그대가….]“내가 어디 별자리의 성좌인지 잊었어?”
처녀자리의 성좌.
순결과 사랑의 여신인 그녀에게 있어서 베가의 변화를 눈치채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이, 인간 연인이 생긴 것도 모자라 야외 플레이라니….”
[그, 그런 게 아니니라!]스피카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떨리는 눈으로 베가를 바라봤다.
베가가 수치심에 이성을 잃기 직전, 오진이 둘 사이에 끼어들었다.
“제가 먼저 하자고 한 겁니다.”
이대로 있다가는 베가가 다시 신전에 틀어박힐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화살을 자신에게 돌렸다.
“…네가?”
스피카는 가늘게 눈을 뜨며 오진을 돌아봤다.
오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태연한 말투로 말을 이었다.
“별의 무덤에 얽힌 전설에 대해서는 스피카님도 잘 알고 계시지 않습니까?”
사랑 얘기에 환장하는 사춘기 소녀와도 같은 성격을 지닌 여신이다.
다른 성좌도 아니고 스피카가 무덤에서 맺어진 연인이 백년해로하게 된다는 전설을 모를 리 없겠지.
그래.
분명 모를 리 없어야 하는 게 맞는데.
“응? 뭔 소리야 그게?”
[자, 잠깐! 잠깐 기다리거라 나의 아이야!]수치심에 몸을 떨고 있던 베가가 기겁한 표정으로 오진의 입을 틀어막았다.
스피카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오진을 바라봤다.
“별의 무덤에 얽힌 전설이 뭔데?”
“……아.”
오진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엿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