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63)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63화
3등분의 휴가 (9)
당연하지만.
베가의 거짓말이 능숙했던 건 아니었다.
별의 무덤에 관한 이야기에는 허점도, 결점도 많았다.
하지만 그럼에 오진이 그녀의 말을 딱히 의심하지 않았던 것은.
‘그럼 별의 무덤에 관한 전설이 다 구라였다고…?’
다름 아닌 그 거짓말을 한 대상이 베가였기 때문이었다.
[나, 나의 아이야. 그, 그게 말이다.]“…….”
베가가 누군가.
수백에 달하는 성좌 중 단 셋 밖에 존재하지 않다는 북극성의 성좌이자, 성좌들 사이에서도 차갑고 무뚝뚝하기로 유명한 성좌가 아니던가.
물론 오진의 앞에서는 차갑고 무뚝뚝한 모습보다는 약간 허당끼 있는 귀여운 모습을 자주 보여주고는 했지만.
기본적으로 그녀는 거짓말이라는 걸 한 줄 모르는 지극히 정의롭고 도덕적인 성품을 지닌 여신이었다.
그런데 베가가 말했던 별의 무덤에 대한 미신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니.
속았다는 분노보다는 황당함이 앞섰다.
“…허.”
입술 사이로 절로 새어 나오는 헛웃음.
망치로 뒤통수를 한 대 후려맞은 듯한 얼얼함을 느끼며 끄응 침음을 삼켰다.
‘대체 왜?’
굳이 자신에게 거짓말까지 하면서 별에 무덤에서 해야 할 필요가 있던 걸까.
의문이 담긴 눈으로 베가를 돌아보니 우물쭈물 입술 달싹이며 붙잡힌 죄인처럼 고개를 푹 숙였다.
[그, 그편이 더 가능성 있을 거라 생각했느니라.]“가능성?”
무슨 가능성 말인가?
[…그대와 맺어질 가능성 말이니라.]베가는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답했다.
“그게 무슨 말… 아.”
오진의 입술 사이로 나지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러니까.’
일종의 ‘명분 만들기’를 했다는 의민가.
오진은 두 눈을 질끈 감은 채 파르르 어깨를 떨고 있는 베가를 바라보며 실소를 흘렸다.
그의 입장에서야 연인 사이에 몸을 섞는 것에 무슨 명분 같은 게 필요하냐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베가의 입장은 좀 달랐으리라.
경험이 많은 오진과 달리 베가의 입장에선 수백, 수천 년에 달하는 기나긴 삶을 살아오면서 처음 겪어보는 일이었을 테니까.
게다가.
‘베가가 누나나 벨라처럼 적극적인 성격도 아니고.’
아마 그녀 나름 열심히 머리를 굴려 생각해낸 술책이 바로 별의 무덤에 관련된 미신이었지 않을까.
[소, 속여서 미안하구나.]“…….”
이걸 등잔 밑이 어둡다고 해야 하나.
‘술책’이라고 부르기에는 너무나 지리멸렬한 작전이었기에 오히려 의심 없이 속아 넘어가 버리고 말았다.
‘에이, 설마 이걸 거짓말이라고 했겠어?’라고 안일하게 생각한 것이다.
“아니, 뭐 속았든 아니든 나야 별 상관없긴 한데.”
오진의 시선이 스피카에게 향했다.
그녀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으려는 듯 입을 꾹 틀어막은 채 바들바들 몸을 떨고 있었다.
그리고.
빵.
“꺄하하하하하핫! 뭐야, 언니? 있지도 않은 미신을 만들어가면서까지 파군성을 유혹했던 거야?!”
스피카가 눈가에 눈물을 글썽이면서까지 폭소를 터트렸다.
베가는 수치심에 얼굴을 붉힌 채 주춤주춤 뒷걸음질 쳤다.
[시, 시끄럽구나!]“아이고~ 우리 언니 귀여운 거 봐! 아주 소녀가 따로 없다니깐 소녀가!”
[으, 으으.]“뭐어~? 별의 무덤에서 맺어진 연인은 서로 백년해로를 한다구우~?”
[그, 그만.]“이상하네~? 난 그런 소문 들어본 적 없는데에~?”
[…….]먹구름이 드리워진 듯 베가의 황금색 눈동자가 빛을 잃어가기 시작했다.
‘어?’
오진의 등골을 타고 퍼지는 오싹한 전율.
본능적인 직감이 위험하다는 경보를 보내고 있었다.
[…그래. 그대는 들어본 적 없단 말이구나.]액화 질소를 들이부은 듯 차가워진 분위기.
서릿발처럼 싸늘해진 베가의 눈동자가 스피카를 향했다.
“어, 언니?”
스피카도 무언가 잘못되어가고 있다는 걸 느꼈는지 떨리는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베가가 방긋 미소 지으며 스피카를 향해 뚜벅, 뚜벅 발걸음을 옮겼다.
[그럼 본녀가 직접 알려줘야겠구나.]파직, 파지지직!
베가의 몸 주변으로 푸른 뇌전이 사납게 타올랐다.
스피카는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미, 미안해 언니!”
[무엇이 미안하단 말이냐? 모르는 건 죄가 아니니라. 모르면서도 알고자 하지 않는 것이 죄이지.]“히익!”
스피카는 꼬리에 불이 붙은 토끼처럼 오진을 향해 우다다 뛰어왔다.
“파, 파군성! 베가 언니를 좀 말려줘!”
공포에 질린 그녀의 표정을 보며 오진은 걱정하지 말라는 듯 스피카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리고.
“뿌린 대로 거두는 법이죠.”
베가를 향해 있는 힘껏 스피카를 밀쳤다.
“너, 너어어어어어!”
꺄아아아악! 살려줘어어어!
단말마의 비명을 내지르는 스피카를 뒤로 하고 오진은 후련한 표정으로 몸을 돌렸다.
‘돌아갈까.’
휴가의 마지막 날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 * *
“으… 죽겠네.”
녹초가 된 몸을 이끌고 성소를 빠져나오니 내리쬐는 아침 햇살 아래로 분주하게 하루를 시작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오진은 스마트폰을 꺼내 시간을 확인했다.
오전 6시 36분.
“…20분 정도 남았네.”
그의 연인들끼리 나눈 협약(?)에 따르면 교대 시간은 오전 7시.
지금으로부터 20분 정도 후에는 마지막 차례인 하은과의 하루를 시작해야 했다.
“하아.”
오진의 입술 사이로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결국 이틀 동안 제대로 잠 한숨 자지 못하고 또 3일째를 맞이하게 됐다.
“끄응.”
‘거짓말’을 사용한 것도 아닌데 천마의 환영이 눈앞에 나타나 비릿한 조소를 보내고 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래… 다 내 업보다 새끼야.”
어쩌겠는가.
욕심을 부린 건 자신이니 불평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뭐, 피곤한 건 사실이지만 그렇게 썩 나쁜 기분도 아니고.’
지난 이틀 동안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자 입가에 옅은 미소가 지어졌다.
몸과 정신이 녹초가 되긴 했지만, 그만큼 얻은 게 많은 시간이었다.
‘덕분에 10성에 올라서기도 했고.’
자신만이 아닌 이사벨라도 흡혈을 통해 11성의 문턱까지 도달할 수 있었다.
“…뭔가 훈련이나 그런 걸로 강해진 게 아니라서 기분이 좀 그렇긴 하지만.”
모로 가도 서울로만 가면 된다는 말이 있지 않은가.
솔직히 말해 트레이닝 룸에 처박혀 수련하는 것보다 이쪽이 더 효과적이라고 생각될 정도였다.
‘그렇다고 수련을 소홀히 할 수는 없지만.’
베가와 이사벨라를 통해 얻는 힘이 일종의 보너스라고 하면 수련은 꾸준히 강해질 수 있는 월급 같은 개념이었다.
보너스를 타겠다고 월급을 받지 않을 수는 없지 않은가.
‘그리고 뭐 성흔의 힘만 강해진다고 전투에서 이길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무슨 부루마블 게임도 아니고 성흔의 마력이 강하고 많은 쪽이 무조건 이기는 건 아니었다.
아무리 날카로운 명검이라고 해도 다루는 자의 실력이 형편없으면 기념품 가게에서 사는 플라스틱 검이나 다름없었으니까.
“후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 어느새 현관 앞까지 도착해 버렸다.
“흣차.”
양 뺨을 가볍게 때리며 노곤해진 정신을 일깨웠다.
아무리 지치고 힘들다고 해도 하은과의 하루를 망칠 수는 없는 노릇이었으니까.
“나 왔어, 누나.”
달칵.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가자 소파에 앉아 과자를 오물거리며 TV를 보고 있는 하은의 모습이 보였다.
“어, 왔냐?”
돌핀 팬츠에 흰색 크롭티를 입은 하은이 오진을 향해 휘휘 손을 흔들었다.
“베가랑은 어땠어?”
“뭐… 잘 쉬다가 왔지.”
성소에 있었던 일을 알려주기에는 하은이 창백하게 질린 채 비명을 지르던 스피카 꼴이 날 것 같아 차마 말할 수 없었다.
“흐응. 그래?”
하은은 가늘게 눈을 뜬 채 엉덩이를 움직여 옆자리에 앉은 오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은근한 눈빛으로 오진을 바라보던 하은이 주먹을 쥔 채 검지와 중지 사이에 엄지를 끼웠다.
“이건 했고?”
“…저기요 아줌마.”
손동작이 너무 천박해요.
“새끼 했네, 했어!”
하은이 낄낄 웃음을 터트리며 오진의 옆구리를 쿡쿡 팔꿈치로 찔렀다.
‘어디서 중년 아저씨의 영혼이라도 깃들었나.’
오진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흘렸다.
“베가 고년 온갖 고상한 척은 다 하더니 사귄 지 얼마 됐다고 바로 덮쳐 버리네.”
“베가 앞에선 절대 그 얘기 하지 마.”
전기 통구이가 될지도 모르니까.
“알고 있어 인마.”
히은이 어깨를 으쓱이며 피식 웃었다.
“그래도 다행이네.”
“뭐가 다행이야?”
“베가랑 있던 일 잘 해결된 것 같아서.”
“…….”
그 와중에도 자신과 베가 사이를 걱정해 주고 있었던 건가.
“…미안.”
자신의 욕심 때문에 하은이 감수해야 했던 것들을 떠올리자 마음이 무거워졌다.
“미안하면 그만큼 잘해줘, 인마.”
“본부대로 하겠습니다, 누님.”
양심이라는 게 존재한다면 하은에게만큼은 소홀히 할 수 없었다.
사실 그가 이런 호사를 누릴 수 있는 것도 모두 하은의 배려 덕분이었으니까.
“아침은 먹었냐?”
“아니 아직.”
아침은커녕 베가와 성소를 간 이후로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누나가 만들어줄까?”
“사실 아침 먹고 왔어.”
너무 배불러 지금.
“아니 왜! 나도 이제 요리 잘하거든?!”
“우리 고귀하신 누나의 손에 물을 묻히게 할 수는 없지.”
믿을 게 따로 있지.
하은의 요리 실력만큼은 믿을 수 없었다.
“내가 만들게.”
오진은 냉장고를 열어 남은 재료를 체크했다.
하은이 오진의 목덜미를 잡아당겼다.
“어허. 손 떼 이 자식아.”
“아니, 내가 만든다니깐?”
“쓰읍! 누나 실력 보여줄 테니까 가만히 있어.”
하은의 강경한 태도에 오진은 울상을 지으며 쫓겨났다.
불안에 찬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오진에게 하은이 씨익 엄지를 추켜올렸다.
“누나가 기막힌 거 만들어 줄 테니까 얌전히 기다리고 있어 인마!”
그렇게 당당한 표정으로 하은이 준비한 아침은.
“…라면?”
보글보글 끓고 있는 라면이었다.
그것도 물 조절에 실패해서 메마른 사막처럼 국물이 쪼그라든.
“뭐, 불만이야?”
“아니요.”
그래.
차라리 이게 낫다.
오진은 단념한 표정으로 후루룩 면을 건져 먹었다.
면을 입 안에 넣는 순간 드넓게 펼쳐진 바다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어, 어때?”
“짜.”
염전을 퍼먹는 기분이야.
“새, 새끼 이거 최신 트렌드를 모르네! 이, 이게 그 뭐냐… 아! 쿠지라이식 라면? 그거야 인마!”
“되는대로 갖다 붙이지 마.”
그냥 물을 적게 넣은 거잖아.
“씨이….”
하은이 침울한 표정으로 어깨를 떨궜다.
오진은 피식 웃음을 흘리며 밥솥에 있는 밥을 한 공기 가져와 라면에 비볐다.
밥을 한 공기 비비니 라면이 아닌 개밥과 죽 사이에 있는 무언가가 됐지만.
“오, 개 맛있다 이거.”
“그치?”
짜게 끓인 라면에는 밥만 한 게 없는 법.
오진은 하은과 같이 라면을 먹어 치운 후 다시 거실 소파에 앉았다.
“그래서 오늘은 어디 가고 싶어?”
배도 채웠으니 이제 본격적으로 하은과의 하루를 시작해야 할 때였다.
“으음… 글쎄다.”
입술에 검지를 얹은 채 고민을 이어가던 하은이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집.”
“집?”
“엉. 오늘은 걍 집에 쭉 있자.”
생각지 못한 하은의 대답에 오진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아니 그래도 기껏 휴간데.”
“너 벨라랑 베가한테 시달리느라 제대로 쉬지도 못했잖아?”
“그건….”
정곡을 파고드는 그녀의 지적에 오진은 흠칫 어깨를 떨었다.
하은은 다 알고 있다는 듯 낄낄 웃음을 터트리며 오진의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오늘은 어디 가지 말고 푹 쉬자 오지나.”
“…누나.”
오진은 사막에서 발견한 오아시스를 보는 듯 글썽거리는 눈으로 하은을 바라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