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80)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80화
자매 (4)
처음부터 그 아이를 미워했던 건 아니었다.
그 아이가 태어났을 때, 동생이 생겼다며 누구보다 기뻐했던 건 나였으니까.
하지만.
시간이 흘러, 그 아이가 점점 커갈수록.
그 아이는 나와는 ‘다르다’는 걸 알 수 있었다.
내가 가지지 못한 것을.
내가 누리지 못한 것을.
내가 해내지 못한 것을.
그 아이는 너무나 쉽게, 마치 당연하다는 듯 지니고 있었다.
아아.
아무도 알 수 없으리라.
뒤틀려가는 뼈와 근육의 고통 속에서 감옥처럼 답답한 휠체어에 갇혀 있을 때.
환한 미소를 지으며 정원을 뛰어놀던 그 아이가 만들어준 화관을 본 순간.
살을 저미듯 파고들던 비참함을, 처참함을.
햇볕 아래 드러난 벌레처럼 추악한 감정을.
감히 어떻게 한낱 단어로 표현할 수 있을까.
-내가 네 천마가 되어 주마.
검은 하늘처럼 어두웠던 삶에 한 줄기 별빛이 반짝이던 날.
정신을 잠식하던 천마의 목소리에서 그녀를 구원해준 ‘가짜 천마’를 만나게 된 순간.
오랫동안 잊고 살았던 희망이 가슴 속에 싹트기 시작했다.
어쩌면 이번에야말로 내가 가지고 싶은 걸 손에 넣을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하지만.
하지만.
하지만.
-사랑해요, 오진 씨.
자신의 모든 것을 앗아갔던 그 아이는.
뻔뻔하게도 이번엔 그의 옆자리에 서서 다정하게 그의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었다.
‘가증스러운 년.’
이제까지 다 제가 가져갔으면서.
하나도 빠짐없이 독차지했으면서.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던 삶 속에서 겨우 찾아낸 별빛을.
그토록 간절하게 바라왔던 구원을.
네년이 가져가?
왜, 왜, 왜, 왜, 왜.
대체, 왜.
너만 다 가지고 있는 건데.
너만 다 가실 수 있는 건데.
자매잖아.
너랑 나랑 같은 피가 흐르고 있잖아.
그러면.
하나라도… 단 하나라도.
내가 가지면 안 되는 거야?
-카시아 언니!
하지만, 어째서일까.
마음속 한편에 자리 잡은 추악한 질투와 증오가 커지면 커질수록.
-헤헤. 난 언니가 젤루 좋아!
들꽃보다 환하게 피어있던 네 미소가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는 걸까.
왜.
나는 널…….
* * *
“지금, 뭐 하는 짓이야.”
오진은 목덜미에 닿은 뾰족한 송곳니의 감촉을 느끼며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카시아를 노려봤다.
“왜라뇨? 보시면 모르겠나요?”
카시아는 방긋 미소 지은 채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뱀처럼 기다란 혓바닥을 날림거리며 요염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벨라를 납치한 범인이 누군지… 아직도 모르겠어요?”
“…….”
오진의 시선이 허공에 묶인 채 기절해 있는 이사벨라를 향했다.
이사벨라의 전신을 속박하고 있는 검은색 뱀.
그건 분명 자신의 그림자 속에서 기어 나왔던 뱀과 똑같은 외형을 지니고 있었다.
“…왜?”
자연스럽게 그 말이 입 밖으로 새어 나왔다.
이사벨라를 납치한 범인이 카시아라면 그 이유가 있을 거 아닌가.
적어도 오진의 머릿속에선 카시아가 뜬금없이 이사벨라를 납치할 이유가 떠오르지 않았다.
“벨라는 제가 가지지 못한 걸 모두 갖고 있으니까요.”
카시아는 옅은 미소를 입가에 띄며 ‘뱀’에 묶여 있는 이사벨라를 돌아봤다.
“건강한 육체도, 뛰어난 재능도, 가문의 인정도… 제가 그토록 가지고 싶었던 걸 저 아이는 노력 하나 없이 손에 거머쥐었어요.”
가녀린 손이 오진의 뺨을 어루만졌다.
“그리고 하나 더.”
뱀의 비늘처럼 차가운 감촉이 뺨을 타고 전해졌다.
“당신까지.”
카시아의 눈동자에 섬뜩한 살기가 번들거렸다.
“참 욕심 많은 아이죠? 모든 걸 다 가졌으면서 하나도 제게 양보하지 않다니 말이죠.”
“…그래서 납치한 거야?”
“후훗. 다른 이유가 더 필요하나요?”
요염한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이는 카시아.
오진은 가늘게 뜬 눈으로 카시아를 응시했다.
“…….”
아까 느꼈던 위화감이.
구역질 날 것 같은 뒤틀림이.
뒤죽박죽 섞인 채 난잡하게 머릿속을 헤집었다.
“그래서 지금 뭘 하고 싶은 건데.”
이사벨라를 납치해서까지 자신을 이곳으로 불러들인 이유가 있을 거 아닌가.
“그야 물론….”
“설마 지금 이사벨라의 목숨을 살려줄 테니 너한테 오라, 뭐 그런 헛소리를 하려는 건 아니지?”
“어머, 안 되는 건가요?”
“그걸 말이라고 해?”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카시아를 바라봤다.
아무리 그녀가 제정신이 아니라고 해도 그런 말도 안 되는 협박이 통할 리는 없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을 터.
“아쉽게 됐네요.”
그녀도 잘 알고 있는 모양인지 전혀 아쉽지 않다는 듯 태연한 표정으로 기다란 혀를 날름거렸다.
그리고.
“크윽!”
푸욱!
목에 닿고 있던 그림자 칼날이 아슬아슬하게 목을 스쳐 지나갔다.
본능적으로 몸을 틀지 않았더라면 목 전체가 뜯겨 나갔을 터.
오진은 목에서 솟구치려는 피를 손바닥으로 억누르며 카시아를 바라봤다.
카시아는 칼날에 묻은 오진의 피를 혀로 핥으며 섬뜩한 미소를 지었다.
“그럼 가질 수 없다면… 부숴버릴 수밖에 없겠네요.”
광기에 번들거리는 에메랄드빛 눈동자.
오진은 눈을 찌푸린 채 카시아를 노려봤다.
‘천마의 지배를 받고 있는 건… 아니야.’
그녀에게서는 천마의 상징이라고 할 수 있는 흑천의 기운이 거의 느껴지지 않고 있었다.
눈동자가 약에 취한 듯 몽롱하게 풀려 있는 것도, 목소리가 흔들리는 것도 아니었다.
그렇다면.
“…이게 지금 뭐 하자는 짓이야.”
지금 카시아는 온전한 정신으로, 그녀의 의지에 따라 자신을 죽이려고 한다는 것.
‘대체 왜?’
카시아와의 관계가 다른 여인처럼 살가웠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래도 이렇게 서로 칼을 겨눌 사이는 절대 아니라고 생각했는데.
“벨라가 나쁜 거예요.”
스르륵, 스륵.
카시아는 오진을 향해 느긋이 걸어오며 말을 이었다.
“너무 눈부시게 빛나니까, 제가 불타버릴 것 같잖아요.”
자신이 가지지 못했던 모든 걸 가지고 태어난 아이.
그녀에게 있어 이사벨라는 태양이나 다름없었다.
“그렇게 생각하고 싶지 않은데… 자꾸만, 자꾸만 생각나게 만들잖아요.”
이사벨라가 환하게 빛나는 태양이라면, 그녀는 그늘 아래 드리워진 그림자였다.
추악하고 역겨운 벌레들이 햇볕을 피해 몸을 숨기는 그림자.
이사벨라를 볼 때마다.
환한 햇볕이 그림자를 밝힐 때마다.
자신이 품고 있는 욕망과 질투가 얼마나 추잡하고 역겨운지 깨닫게 된다.
생각하고 싶지 않아도.
생각하게 된다.
“…….”
오진은 당장에라도 무너질 것처럼 위태로운 눈빛을 한 채 다가오고 있는 카시아를 바라보며 입술을 짓씹었다.
창을 움켜쥔 채 성흔의 마력을 일으켰다.
푸른 뇌전이 타오르며 그의 전신을 휘감았다.
오진은 차갑게 카시아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그래서… 그 몸으로 날 죽일 수는 있고?”
아무리 흑천이 열한 번째 개화를 했다고 한들.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카시아를 상대로 싸워 이기는 건 불가능했겠지만, 아까 확인했듯 지금 카시아의 몸은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것도 당장 피를 토하며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치명적인 내상을.
“어머, 나름 숨겼다고 생각했는데, 어떻게 아신 거죠?”
“지금 어떻게 알았는지가 중요한 게 아닐 텐데?”
“후훗. 그렇긴 하죠.”
카시아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며 오진을 향해 손을 들어 올렸다.
슈우우욱!
그림자 속에서 솟구쳐 오른 검은 뱀 한 마리가 오진을 향해 쏘아졌다.
촤악!
가볍게 몸을 비틀며 창을 튕기듯 올려 쳤다.
푸른 뇌전이 타오르는 창날이 뱀의 몸통을 두 쪽으로 갈랐다.
“그렇다고 착각하시면 곤란해요.”
카시아는 비릿한 조소를 머금은 채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이런 몸 상태로도, 오진 님 하나를 상대하는 것 정도는 문제도 아니랍니다?”
그 말을 시작으로.
‘온다.’
샤아아아아아!
카시아의 그림자 속에서 기어 나온 수십, 수백에 달하는 검은 뱀들이 동시에 오진을 향해 쇄도했다.
속도는 빠르지만, 한 마리 한 마리의 내구도 자체는 그리 단단하지 않았다.
“쓰읍.”
왼쪽 가슴에 새겨진 거문고자리의 성흔이 환하게 빛나며 거대한 마력이 전신에 퍼졌다.
전신을 휘감으며 타오르는 푸른 뇌전을 창끝에 집중시킨 후, 창대를 두 손으로 잡고 크게 횡으로 휘둘렀다.
파지지지지지직!
부채꼴로 펼쳐진 뇌전 다발이 해일처럼 밀려오는 검은 뱀들을 일시에 불태웠다.
뇌전에 닿은 뱀들의 몸이 조각조각 터져나가며 후두둑 바닥에 쏟아졌다.
‘확실히 약해.’
일전에 놀이공원에서 카시아와 싸웠을 때와 비교하면 그 힘이 많이 약해졌다는 게 느껴졌다.
쫓을 수 없을 정도로 빠르지도, 막을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하지도 않았다.
“흐응. 그새 또 강해지셨네요?”
카시아는 흥미롭다는 듯 눈을 빛내며 오진을 바라봤다.
“하긴, 안셀라두스를 꿀꺽 집어삼키셨으니까요.”
“…카시아.”
오진은 그녀에게 겨눴던 창을 천천히 내리며 고개를 저었다.
“그만하자.”
“그만 하자뇨?”
“이딴 의미 없는 싸움 말이야.”
이곳에서 그녀와 목숨을 건 혈전을 펼친다고 한들.
대체 누가 행복해질 수 있단 말인가?
“의미 없다, 라….”
카시아는 꺄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맞아요. 이건 아무도 행복해지지 못하는 싸움이겠죠.”
승패와 상관없이.
이 자리에 모인 세 사람은 서로 잃을 것만이 남은 싸움이다.
그 누구도 웃을 수 없고.
그 누구도 승자가 될 수 없는.
멍청하고 어리석기 짝이 없는 싸움.
“하지만 말이에요.”
그림자 아래 몸을 숨긴 추악한 욕망의 말로로는 가장 어울리는 싸움이지 않겠는가?
“상상해 보면 너무 즐겁지 않나요?”
“…뭐가 즐거운데.”
“만약… 만약에 말이죠.”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마치 춤을 추듯 빙그르르 몸을 돌리며 양팔을 넓게 펼쳤다.
“벨라가 눈을 떴을 때 죽은 오진 님의 시체가 눈앞에 있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상상하면 너무 즐겁잖아요?”
꺄르르르.
광기에 찬 웃음소리가 낡은 폐건물 안에 울려 퍼졌다.
“…….”
오진은 지그시 입술을 짓씹으며 창끝을 다시 들어 올려 카시아를 겨눴다.
아직 머릿속이 뒤죽박죽 뒤엉킨 듯 혼란스럽기 짝이 없었지만.
한 가지만은 확실히 깨달을 수 있었다.
‘말로 해결될 문제가 아니야.’
일단 카시아를 제압한 후에 대체 왜 갑자기 그녀가 이렇게 극단적인 행동을 하게 된 이유를 알아낼 수밖에 없을 것 같았다.
‘본인은 이사벨라에 대한 열등감 때문이라고 했지만.’
과연 열등감이라는 이유 하나로 이렇게 극단적인 일을 벌일 수 있을까?
그것도 이렇게 뜬금없는 타이밍에?
“뭔가 다른 이유가 있지는 않을까, 하는 눈빛이네요.”
카시아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며 뱀처럼 기다란 혓바닥을 날름거렸다.
“아쉽게도 그런 건 없어요, 오진 님.”
그녀의 발아래 드리워져 있던 그림자가 폭발하듯 넓게 펼쳐지며 폐건물 안을 뒤덮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