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82)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82화
자매 (6)
어둠이 내려앉은 폐건물.
아지랑이처럼 피어오르는 메케한 연기 사이로 푸른 귀화가 타오르는 두 눈동자가 카시아를 향했다.
오진은 카시아의 목을 틀어쥔 채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아무리 발버둥 쳐도, 이사벨라가 될 수는 없어. 될 이유도 없고.”
“…….”
카시아는 오진에게 목이 잡힌 채 옅은 미소를 지었다.
당장에라도 부서질 것처럼 위태로운 미소를.
“…알고 있어요.”
“그렇다면….”
“이미 늦었어요.”
늦었다니.
대체 뭐가 늦었단 말인가.
“죄송해요, 오진 님. 저는… 포기 못 해요.”
“카시아…!”
콰득!
검은 뱀 한 마리가 카시아의 목을 틀어쥔 오진의 손을 깨물었다.
순간적으로 힘이 풀리며 카시아를 놓쳤다.
“크윽!”
손을 깨문 뱀을 뇌전으로 태워 없애버린 뒤 다급히 거리를 벌렸다.
이어지는 카시아의 공격을 일단 피할 생각이었지만.
“허억, 허억, 허억!”
카시아는 가슴을 움켜쥔 채 괴롭다는 듯 거친 숨을 내쉬고 있을 뿐이었다.
“…….”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결과이리라.
이미 그녀는 싸우기도 전부터 당장 쓰러져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로 극심한 내상을 입은 상태였으니까.
‘사실 지금까지 버틴 것만으로 대단한 건지.’
솔직히 훨씬 더 간단하게 그녀를 제압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막말로 말해 산소 호흡기 달고 중환자실에 누워있어야 할 환자랑 싸운 거니까.’
그만큼 카시아의 상태는 처참하기 그지없었다.
‘이사벨라겠지?’
카시아 정도 되는 강력한 각성자에게 저런 치명적인 내상을 입힐 수 있는 존재는 많지 않으리라.
오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카시아에게 겨눴던 창을 내렸다.
“하아, 하아. 왜 창을 내리시는 거죠?”
“그 상태로 더 싸울 수 없다는 건 네가 더 잘 알 텐데?”
“후후. 더 싸우고 말고는 제가 정해요.”
카시아는 차가운 조소를 머금은 채 그림자 뱀에게 묶여 있는 이사벨라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창을 들어 올리시지 않으면 벨라가 다칠 거랍니다?”
“…카시아.”
“빨리 저랑 싸우라고요!”
히스테릭하게 외치는 카시아를 보며 오진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그는 기절한 채 그림자 뱀에 묶여 있는 이사벨라를 돌아보며 창을 움켜쥔 손에 다시 힘을 줬다.
“그래요. 벨라를 구하시려면 절 죽이는 방법 말고는 없답니다?”
카시아는 숨을 헐떡이면서도 만족스러운 미소를 입가에 지었다.
오진은 까득 이를 갈며 기절한 채 묶여 있는 이사벨라를 살폈다.
지금에야 기절만 해 있을 뿐 어디 다친 곳은 보이지 않았지만, 이대로 카시아의 말을 따르지 않으면 이사벨라의 목숨이 어떻게 될지는 알 수 없었다.
‘어쩔 수 없….’
그때.
처음 카시아를 봤을 때부터 느껴졌던 기이한 위화감이 다시 한번 오진의 등골을 타고 퍼졌다.
‘어?’
끼릭, 끼릭.
맞물리지 않은 톱니바퀴처럼.
어긋난 퍼즐 조각처럼.
질척한 불쾌감이 머리를 뜨겁게 달군다.
‘…뭐지?’
뭐가, 언제 어디서부터 잘못된 거지.
뭘 놓치고 있던 거지.
“…….”
고개를 돌려 다시 이사벨라를 바라본다.
상처 하나 없이 깨끗한 얼굴.
눈을 감은 채 의식을 잃은 그녀의 모습은 이런 상황에서조차 숨 막힐 정도로 아름답게 느껴졌다.
그리고.
“아.”
오진의 입에서 나지막한 탄성이 흘러나왔다.
절로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실소.
어깨를 들썩이며 웃음을 터트리고 싶은 걸 간신히 참으며 손으로 얼굴을 가렸다.
‘왜 이 간단한 걸 눈치채지 못한 거야.’
처음부터 느껴졌던 위화감의 정체는 헛웃음이 나올 정도로 간단했다.
이렇게 될 때까지 깨닫지 못했다는 사실에 살짝 자괴감이 밀려올 정도로.
‘그래, 그렇게 된 거구나.’
오진은 씁쓸한 눈으로 카시아를 바라봤다.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숨을 헐떡이면서도 날카롭게 자신을 노려보고 있는 여인.
소녀처럼 가녀린 그 몸으로 얼마나 많은 것을 짊어져 왔던 걸까.
‘이제 끝내야지.’
이딴 웃기지도 않은 조잡한 연극 따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막을 내릴 것이다.
오진은 천천히 창을 들어 카시아를 겨눴다.
파직, 파지직!
왼쪽 가슴에 새겨진 성흔이 어둠을 밝히며 찬란히 타올랐다.
“알았어. 그게 네가 원하는 거라면 어쩔 수 없지.”
“후훗. 이제야 제 말을 들을 생각이 드신 건가요?”
카시아는 여유로운 미소를 입가에 지은 채 가볍게 어깨를 으쓱였다.
표정은 여유로웠지만, 오진은 알 수 있었다.
저 여유를 가장한 가면 아래 고통에 일그러진 얼굴이 숨겨져 있다는 걸.
“하아.”
나지막이 숨을 토해내며 왼쪽 가슴에 정신을 집중한다.
성흔이 새겨진 가슴 아래, 잠들어 있는 검은 하늘을 깨운다.
쿠르르르륵.
검은 먹구름이 요동치며 전신을 뒤덮은 푸른 뇌전과 뒤섞인다.
흑뢰.
성좌의 성역조차 찢어발기는 흑천의 뇌전이 창끝에 모여들었다.
“고통은 없을 거야.”
“흥, 마치 다 이겼다는 듯이 말씀하시네요.”
카시아가 불쾌하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그림자 속에서 검은 뱀이 꾸물꾸물 기어 나와 그녀의 몸을 지키듯 똬리를 틀었다.
“전 그렇게 쉬운 여자가 아니랍니다?”
“…….”
그래.
그렇겠지.
이제까지 그래도 꽤 많은 여인들과 얽히게 됐지만, 그녀처럼 속이 베베 꼬인 여자는 또 처음이었다.
오진은 움켜쥔 창을 뒤로 당기며 자세를 낮췄다.
“간다.”
팽팽하게 당겨진 활시위를 놓듯, 폭발적인 가속과 함께 돌진했다.
샤아아아!
검은 뱀이 솟구쳐 오르며 앞을 막아섰다.
오진은 달려드는 뱀들을 어깨로 들이받으며 그대로 돌진했다.
전신을 뒤덮은 검은 뇌전에 잘게 조각난 뱀들이 후두둑 바닥에 쏟아졌다.
“…….”
카시아는 허망하게 뚫리는 뱀의 장벽을 보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짧은 한숨을 내쉰 후 사납게 다가오는 검은 뇌전을 향해 두 팔을 벌렸다.
마치 자신을 죽여달라고 말하는 것처럼.
“…헤헤.”
어째서일까.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았다.
각오했던 있던 일인데, 예상했던 일인데.
인제 와서 후회되다니.
자조 섞인 미소가 입가에 떠올랐다.
‘미안해.’
카시아는 마지막으로 묶여 있는 이사벨라를 돌아보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파직, 파지지직!
뇌전이 사납게 타오르는 소리가 가까워진다.
불행 중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아까 그 검은 뇌전에 서린 막대한 기운을 생각해보면 고통이 없을 거라는 말은 사실이겠지.
이제야 끝나는 것이다.
오랫동안 그녀를 괴롭혀 왔던 모든 고통이.
파지지지직!
오진은 뒤로 당겼던 창을 전력으로 내질렀다.
검은 뇌전이 타오르는 창이 카시아의 몸을 꿰뚫으려고 한 순간.
“흐읍!”
쿠웅!
거칠게 진각을 밟으며 내디딘 발을 중심으로 반 바퀴 몸을 회전시켰다.
그리고 이어지는 투창.
오진의 손을 떠난 창이 향한 곳은.
허공에 묶여 있는 이사벨라가 있는 쪽이었다.
파지지지직!
창에 맺혀 있던 흑뢰가 사방으로 뻗어나가며 이사벨라를 묶고 있던 검은 뱀들을 꿰뚫었다.
흑뢰에 꿰뚫린 뱀들이 ‘하얀색’으로 변하며 바닥에 후두둑 떨어졌다.
‘지금!’
타앙!
오진은 와이어를 발사해 떨어지는 이사벨라의 몸을 재빠르게 캐치했다.
“후우.”
안전하게 이사벨라를 받아든 오진은 안도에 찬 숨을 내쉬었다.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며 눈을 감고 있고 있던 카시아가 당황한 표정으로 외쳤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뭘 하긴.”
오진은 기절한 이사벨라를 카시아에게 건네주며 하얀 뱀이 떨어진 곳을 돌아봤다.
“이 빌어먹을 연극의 막을 내리는 중이지.”
“…….”
연극, 이라는 말을 들은 카시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짝짝짝짝.
침묵이 내려앉은 폐건물 안.
나지막한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조각난 채 바닥을 나뒹굴고 있던 하얀 뱀이 꾸물꾸물 모여들더니 사람의 형상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놀랍네요.”
‘새하얗다’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백발의 남자.
설원처럼 흰 피부와 머리칼을 지닌 남자는 오진을 바라보며 상냥한 미소를 지었다.
“나름 기척을 숨기는 데는 자신이 있었는데… 어떻게 제가 여기 있는 줄 알아차리신 거죠?”
“상처.”
“상처… 라고요? 으음. 무슨 상처를 말씀하시는 거죠?”
백발의 남자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오진은 카시아의 품에 안긴 채 기절해 있는 이사벨라를 돌아보며 말을 이었다.
“상처가 없잖아.”
눈을 감고 있는 이사벨라에게선 작은 생채기 하나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상하지 않아?”
카시아는 제대로 걷기도 힘들 정도로 심각한 내상을 입은 상태였다.
그런데 그녀가 납치한 이사벨라한테 상처 하나 없다고?
둘 사이에 몸싸움이 없었다기엔 카시아가 입은 내상이 설명되지 않고, 있었다면 이사벨라의 상태가 지나칠 정도로 멀쩡했다.
물론 이사벨라를 상처 하나 없이 멀쩡하게 제압하기 위해 필요 이상의 내상을 입었을 수도 있었지만.
‘그럴 이유가 없지.’
자신을 죽여 이사벨라에게 절망을 주는 것이 카시아의 목적이었다면.
굳이 그녀를 상처 하나 없이 제압할 이유는 없었다.
“흐음. 상처가 없다, 라. 생각해보니 그렇네요.”
백발의 사내는 자신의 실책을 깨달았다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오진은 백발의 사내를 돌아보며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카시아의 내상은 이사벨라를 제압할 때 입은 게 아니야.”
오히려 그 반대.
이사벨라가 납치되는 걸 막기 위해 백발의 사내와 싸우다 입은 상처였다.
‘그리고 실패했겠지.’
그 뒤는 굳이 보지 않아도 뻔했다.
이사벨라를 붙잡은 백발의 사내는 카시아에게 제안했겠지.
동생을 살리고 싶다면 이곳으로 자신을 유인하라고.
유인해서, 죽이라고.
“그렇지? 뫼비우스.”
이사벨라를 인질로 붙잡힌 채 협박당하고 있던 건 자신이 아니라.
카시아였다.
“하하. 흑천의 주인이 이런 미천한 성좌를 알아주시다니, 영광이네요.”
설원처럼 새하얀 사내, 뫼비우스는 나지막한 웃음을 흘리며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그분께서 ‘자신과는 다르다’고 했으니 처음 뵙는다고 해야 맞겠죠?”
보는 것만으로 평온해지는 온화한 미소 너머에는.
“뱀주인자리의 성좌, 뫼비우스라고 합니다.”
독사처럼 섬뜩한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 * *
-카시아 언니!
하지만, 어째서일까.
마음속 한 편에 자리 잡은 추악한 질투와 증오가 커지면 커질수록.
-헤헤. 난 언니가 젤루 좋아!
들꽃보다 환하게 피어있던 네 미소가 더욱 선명하게 떠오르는 걸까.
왜.
나는 널….
미워할 수가 없는 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