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83)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83화
자매 (7)
불쾌한 습기에 가득 차 있던 숲속.
형체조차 찾기 힘들 정도로 갈가리 찢긴 트럭의 잔해를 따라 그를 찾아갔을 때.
-저도 카시아에게 부탁하고 싶은 게 있는데.
뱀주인자리의 성좌는 그녀에게 한 가지 거래를 제안했다.
-파군성이라고 부르던가요? 그를 제게 데려와 주셨으면 합니다.
-…오진 님은 왜 만나려는 거죠?
-하하. 가벼운 호기심입니다. ‘그분’이 말한 또 다른 흑천의 주인이 누군지 보고 싶거든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말하는 뫼비우스를 향해 카시아는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거절할게요.
-그래요? 이거 참… 안타깝게 됐네요.
뫼비우스는 진심으로 아쉽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카시아에겐 이사벨라라는 동생이 있었죠? 카시아를 닮아서 아주 아름다운 아이더라고요.
-…갑자기 이사벨라 얘기가 왜 나오는 거예요?
-글쎄요?
눈웃음을 지으며 방긋 웃는 뫼비우스의 모습에 오싹한 전율이 퍼졌다.
* * *
그가 지금 이사벨라를 빌미로 거래를 빙자한 협박을 하고 있다는 것을 모를 정도로 카시아는 어리석지 않았다.
-아쉽게도 벨라랑은 사이가 나빠서요.
-그래요? 그럼 그 아이가 어떻게 돼도 상관없다는 거네요?
-그건….
거대한 뱀이 몸을 옥죄여 오는 듯한 압박감.
카시아는 말끝을 흐리며 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카시아는 참 착한 아이네요.
뫼비우스는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그 아이에게 모든 걸 빼앗겼어도 미워할 수 없는 거죠?
-당신이 뭘 안다고….
-혈육의 정이란 참 대단하네요. 혈육에 대한 개념 자체가 없는 성좌로서는 평생 가도 느껴보지 못할 감정이겠죠.
-…….
섬뜩하게 빛나는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보며 카시아는 초조한 표정으로 주먹을 쥐었다.
-당신 뜻대로 되게 두지 않을 거예요.
-이거 참… 아쉽게 됐네요. 비록 제 아이가 아니라 해도 성흔을 준 카시아에게 상처를 주고 싶진 않았는데.
뫼비우스는 가볍게 혀를 차며 서서히 몸을 일으켰다.
그림자 속에서 기어 나온 새하얀 뱀이 숲을 가득 채웠다.
그리고….
“하아, 하아! 안 돼요, 오진 님.”
카시아는 거친 숨을 헐떡이며 뫼비우스와 대치하고 있는 오진을 향해 비틀비틀 걸어갔다.
그녀는 초조한 표정으로 오진의 팔을 잡아끌었다.
“뫼비우스와 싸우면… 안 돼요.”
고통에 일그러진 표정으로 오진을 말리는 카시아.
전에 그와 싸울 때 무슨 일이 있었던 건지 팔을 잡아끄는 카시아의 표정은 창백하게 질려 있었다.
“흐음? 카시아가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요?”
뫼비우스는 무슨 소릴 하냐는 듯한 표정으로 카시아를 바라봤다.
“잊었나요? 이곳에 그를 데려온 건 제가 아니라 카시아랍니다?”
“그, 그건….”
카시아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그를 배신하고 이곳으로 유인한 건 어디까지나 카시아의 의지였잖아요?”
“그건 당신이 벨라를…!”
“벨라를 지키기 위해서 어쩔 수 없었다, 라는 건가요?”
뫼비우스는 방긋 미소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흠흠. 그렇군요. 그럼 카시아에게 있어서 파군성보다 동생이 더 소중했다는 거네요?”
“그, 그런 게 아니….”
“그런 게 아니라면 파군성을 이곳으로 불렀으면 안 됐잖아요? 아니, 부르기만 했을까. 직접 카시아의 손으로 죽이겠다고까지 제게 말하지 않았나요?”
비릿한 조소를 머금은 해 어깨를 으쓱이는 하얀 뱀.
“그게 배신이 아니라면 대체 뭐가 배신이란 거죠?”
“…….”
꿀먹은 벙어리가 된 카시아가 굳게 입술을 다물었다.
그의 말마따나 이곳에 뫼비우스가 있다는 걸 알고 있음에도 오진을 불러들인 건 다름 아닌 카시아 본인의 의지였다.
“제가 파군성이었다면 꽤 섭섭했을 것 같네요. 카시아를 흑천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줬는데, 정작 카시아는 그를 죽이려고 했으니까요.”
“저, 저는….”
카시아가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뒷걸음질 쳤다.
오진의 팔을 잡아당기던 손이 맥없이 풀렸다.
오진은 뒷걸음질 치는 카시아를 슬쩍 돌아보더니 피식 실소를 흘리며 뫼비우스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가만히 듣고 있자니 가스 냄새가 진동해서 못 참겠네.”
가스라이팅도 정도가 있지 이사벨라를 납치해서 협박한 장본인이 지금 카시아를 나무랄 자격이 있겠는가.
“뭐가 그렇게 혓바닥이 길어? 아, 뱀이라 그런가?”
“흐음. 카시아를 변호해주시는 건가요? 이거 참. 확실히 그분과 달리 꽤 물러터지셨군요.”
“물러터진 건 네 대가리고.”
절로 새어 나오는 쌍욕을 입에 담으며 쯧, 혀를 찼다.
“카시아가 잘 못 했고 말고를 정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야.”
엄밀히 말하면 카시아의 행동이 ‘배신’이라 부를 수 있는 건 맞았다.
이사벨라가 인질로 잡혀 있고 아니고를 떠나 그를 속이고 뫼비우스가 있는 곳으로 유인한 건 맞으니까.
‘나를 직접 죽이겠다고 말했다고 했던가.’
카시아가 무슨 생각으로 그런 말을 했는지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진짜로 날 죽일 생각은 없었겠지.’
죽일 생각이었다면 처음에 목에 칼날을 들이대며 어설픈 협박을 하는 게 아니라, 그대로 목을 그어버려야 했다.
하지만 카시아는 그러지 못했다.
그럴 수 없었다.
그녀에게선 오진도, 동생도 어느 하나 포기할 수 없는 존재였으니까.
그래서.
그러므로.
그렇기에.
자신이 죽는 것을 택했다.
철저하게 그를 몰아붙이다가 예상치 못한 반격을 당해 죽는다면.
실수가 아닌 실패를 한다면.
오진과 이사벨라 둘 다 구할 수 있을 거라고.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멍청하고, 어리석지만.
다른 방법은 없다고.
조잡한 연극의 막을 올렸을 것이다.
“그런가요? 그럼 파군성의 생각은 어떻죠? 동생이 인질로 잡혀 있으니 어쩔 수 없다고 너그럽게 넘어가실 생각인가요?”
“그럴 리가.”
단호하게 고개를 젓는 오진의 모습에 카시아가 흠칫 어깨를 떨었다.
“이유가 뭐가 됐든, 이번에 카시아가 한 짓은 용서가 안 돼.”
“오진 님….”
카시아가 슬픈 눈으로 등 돌린 오진의 뒷모습을 바라봤다.
자신이 용서받을 수 없는 짓을 했다는 것을 그녀 또한 잘 알고 있었지만.
오진의 입에서 직접 ‘용서할 수 없다’라는 말을 듣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아파.’
뾰족한 송곳으로 가슴을 찌르는 듯한 날카로운 통증.
죄책과 자책이 뒤섞인 끈적한 감정이 목을 조였다.
‘나는.’
그의 말마따나.
자신이 한 일은 용서 받을 수 없는 일이다.
용서받아서는 안 되는 일이다.
‘어쨌든 오진 님에게 거짓말을 한 거니까.’
이사벨라가 뫼비우스에게 납치당했다는 사실을 속이고 그를 이곳으로 유인했다.
자신이 직접 이사벨라를 납치한 척 연기를 펼치며 그를 공격했다.
‘나는 오진 님을… 배신한 거야.’
검은 먹구름에 뒤덮인 채 꼭두각시로 살아왔던 나날.
한평생 지독한 고독과 외로움에 시달리며 살아왔던 그녀에게 처음으로 손을 내밀어준 사람.
갚을 수 없는 은혜를 준 사람에게 따스한 감사는 표하지 못할망정 차가운 칼날을 들이밀었다.
용서받을 수 있다고 기대하는 것조차 불경한 일이겠지.
하지만.
그럼에도….
“오진 님. 벨라를 데리고 여길 떠나세요.”
카시아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오진 앞에 섰다.
건물 잔해 위에 여유롭게 걸터앉아 있는 뫼비우스를 노려보며 검은 뱀들을 소환했다.
멀쩡한 상태로도 감히 상대할 수 없었던 뫼비우스에게 다 죽어가는 몸으로 싸운다는 건 자살행위나 마찬가지였지만.
“적어도 시간은 끌 수 있을 거예요.”
비장한 각오를 새기며 그림자를 넓게 펼쳤다.
“하하. 인제 와서 그를 지키려고 하는 겁니까?”
뫼비우스는 실소를 흘리며 고개를 저었다.
“후회해도 늦었어요. 눈을 감아도 세상이 사라지는 것이 아니듯, 인제 와서 입장을 바꾼다고 한들 당신이 그를 배신했다는 사실은 바뀌지 않으니까요.”
“알고 있어요.”
용서받을 생각 따위는 없다.
끓어오르는 죄책감을 덜어내기 위한 자위에 불과하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자신의 도움으로 그가 도망칠 시간을 조금이라도 벌 수 있다면.
그늘 아래 몸을 숨긴 추악한 벌레와도 같았던 삶이 실낱만큼의 도움이라도 된다면.
그를 위해 기꺼이 이 목숨을 바치리라.
“시간을 벌겠다고?”
“예. 오래는 버티지 못할 거예요. 지금이라도 빨리….”
“거참, 동생이나 언니나 자매가 쌍으로 사람 속 터지게 하는 건 마찬가지네.”
전에 이사벨라랑도 비슷한 일이 있었지.
오진은 마경에 갇혔을 때를 떠올리며 쯧, 혀를 찼다.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디며 카시아의 뒷덜미를 움켜쥐었다.
“오진 님…? 꺄악!”
와이어를 이용해 그녀의 몸을 묶은 후 거칠게 뒤로 집어 던졌다.
카시아가 비명을 내지르며 기절한 이사벨라와 함께 바닥을 굴렀다.
“지, 지금 뭐 하시는 거예요?!”
“뭐하긴, 싸우는 데 걸리적거리니까 뒤로 치워둔 거지.”
오진은 마음에 들지 않다는 듯 눈을 찌푸리며 카시아의 앞에 섰다.
마치 그녀를 지키려는 것처럼.
넓은 등을 바라보는 카시아의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아까 용서할 수 없으시다고….”
“어, 용서 못 해.”
특히 스스로 목숨을 내던지려고 한 멍청하기 짝이 없는 행동은 절대 용서할 수 없었다.
“그러니까, 나중에 잔뜩 혼내줄게.”
“…예?”
“엉덩이 빨개질 때까지 맞을 각오 하고 있어.”
제가 또 이쪽에서는 경력이 좀 있거든요.
“…….”
카시아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오진을 바라봤다.
엉덩이 빨개질 때까지 맞을 각오하라고?
“오진 님… 바보예요?”
기가 차서 말조차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전 오진 님을 배신했다고요! 벨라를 미끼 삼아서 여기로 오진 님을 유인한 거라고요!”
그것뿐일까.
“오진 님을 다치게까지 했잖아요!”
궁극적으로는 그에게 죽을 생각이었지만.
그를 속이기 위해 쏟아낸 공격에는 난폭한 성흔의 마력이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실제로 그의 몸에 적지 않은 상처를 내버렸다.
그런데.
그런 자신을 구하기 위해 성좌와 싸우겠다고?
세상에 그런 멍청한 짓이 어디 있단 말인가.
“알고 있어.”
“그렇다면 왜…!”
“어… 그러니까.”
잠시 할 말을 생각하던 오진은 이내 귀찮다는 듯 툭 대답했다.
“생긴 게 마음에 들지 않아.”
“…예?”
“저 자식 저거 생긴 거 봐, 딱 봐도 사기꾼처럼 생겼잖아?”
다른 사람 눈에는 그저 인상 좋은 훈남처럼 보이겠지만.
오진의 눈에는 저 온화한 미소 속에 숨겨져 있는 날카로운 독니가 선명하게 보였다.
“난 사기꾼을 가장 싫어하거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