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85)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85화
자매 (9)
-괜히 나대지 말고 거기 가만히 찌그러져 있어.
퉁명스러우면서도 어딘가 따스함이 느껴지는 그의 말을 듣는 순간.
쿵.
안 그래도 사납게 뛰고 있던 가슴에 묵직한 폭발이 일었다.
각성제를 통으로 들이켠 것처럼 엔도르핀이 솟구치며 머릿속에 벼락이 떨어졌다.
지금 그녀가 느끼는 전율을 비유하자면 한평생을 눈이 먼 채 살아가던 장님이 처음으로 세상의 모습을 봤을 때와 비슷할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클지도 몰랐다.
“아, 으.”
카시아는 터질 듯이 뛰는 가슴을 부여잡은 채 몸을 수그렸다.
아득한 과거, 고요한 복도에서 들려왔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그래도 다행이에요. 벨라까지 그랬으면 전 정말… 하아.
어딘가 안도한 듯한 어머니의 한숨 소리.
그녀의 삶을 송두리째 짓뭉갰던 한숨 소리 이후.
그녀의 삶은 그늘 아래 드리워진 그림자처럼 어두웠다.
춥고, 외롭고, 고독했다.
아무것도 아닌 척했지만.
아무것도 아니었던 건 아니었다.
“흐윽… 흑.”
고독은 치유되지 않는 병이다.
시간이 흐를수록 조금씩 잠식해 영혼부터 썩어들어가게 만드는 병.
가문을 나와 아이슬란드의 병원에 맡겨졌을 때도.
몰려드는 마수를 피해 설원을 헤맸을 때도.
천마의 꼭두각시가 되어 그의 계획에 방해가 되는 존재들을 죽이며 다녔을 때도.
‘아무도….’
그녀의 곁에는 아무도 없었다.
그녀의 삶은 언제나 고독했고, 끝나지 않을 것처럼 외로웠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제 살을 잘라내듯 마음을 깎아내는 것.
혼자서도 괜찮다고, 다른 사람 따윈 필요 없다고 어설픈 변명을 되뇌는 것.
하지만.
‘오진 님.’
그런 그녀의 삶에 거침없이 발을 들이민 남자가 있다.
어둡고 음습한 그림자를 밝혀준 별빛이 있다.
태어나 처음으로.
그녀를 곁을 지켜준 사람이 있다.
-몰라.
-…모른다뇨?
-말 그대로야, 나도 내가 왜 이러는지 모른다고.
왜 자신을 지켜주냐는 물음에 그는 분명 ‘모른다’고 답했다.
이유 따윈 중요하지 않다고 말해줬다.
‘아아.’
알 수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그는 지금 자신을 지켜주기 위해 목숨을 걸려고 하는 것이다
이사벨라가 아닌.
오로지 자신 하나만을 위해.
‘따듯해.’
설원처럼 얼어붙어 있던 마음이 녹아내린다.
그림자 속에 환하게 타오르는 별빛이 그녀의 영혼을 잠식하고 있던 고독을 몰아냈다.
“하아, 하아.”
카시아는 가쁜 숨을 내쉬며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뫼비우스와 싸우며 생긴 내상 탓에 제대로 서 있기조차 힘든 상태였지만.
‘이제… 잃고 싶지 않아.’
사람의 온기가 주는 따스함을 맛본 그녀에게 있어 몸을 짓이기는 듯한 내상은 중요하지 않았다.
지금 그녀의 눈에 들어오는 것은 뫼비우스와 대치하고 있는 오진의 모습뿐.
특히 새하얀 뱀에게 물어뜯겨 피가 흘러나오고 있는 그의 옆구리를 볼 때마다 가슴이 타들어 가듯 초조해졌다.
‘내가… 오진 님을 지켜야 해.’
끝없는 추위 속에 찾은 온기.
그건 메마른 사막 속에서 찾은 오아시스보다도 더욱 그녀를 절박하게 만들었다.
“하읏.”
풀썩.
다리가 엉키며 카시아의 몸이 바닥을 뒹굴었다.
아무리 절박하다고 한들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깊은 내상이 갑자기 치유되지는 않는 법.
카시아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엉금엉금 바닥을 기었다.
비참하게 바닥을 기어서라도 오진이 있는 곳으로 다가가려고 했다.
그때.
“으음.”
뫼비우스와 눈이 마주쳤다.
엉금엉금 바닥을 기어 오던 그녀를 발견한 뫼비우스는 방긋 미소 지었다.
“아뇨, 여기까지 하죠.”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가로젓는 뫼비우스.
오진과 짧은 대화를 마친 그는 아무 미련 없다는 듯 몸을 돌렸다.
그의 몸이 그림자 속으로 사라지기 직전.
-카시아.
카시아의 머릿속에 뫼비우스의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번에는 어떻게 잘 넘어갔지만… 과연 이걸로 끝일까요?
뱀의 혓바닥이 귓가를 간질였다.
-그의 기억 속에는 언제나 카시아가 자신을 배신했던 기억이 남아있겠죠.
오싹한 전율이 카시아의 전신에 퍼졌다.
-카시아는 버림받을 거예요. 언제나처럼.
그때는 저를 찾아와요, 카시아.
뫼비우스는 그렇게 말하며 나지막한 웃음을 터트렸다.
머릿속에 메아리치던 뱀의 목소리가 사라졌다.
“…아.”
카시아는 창백하게 질린 얼굴로 파르르 몸을 떨었다.
뫼비우스가 남기고 간 마지막 말이 그녀의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나는… 오진 님에게 버림받을 거야.’
어찌 생각하면 당연하지 않은가.
눈을 감아도 세상이 사라지지 않듯.
그녀가 오진을 배신했다는 기억은 그의 머릿속에 결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오진 님에게 버림받는다면….’
언제나 그렇듯.
언제나 그래왔듯.
또.
또, 또, 또, 또, 또.
그 지독한 고독 속에━
“괜찮아?”
그때.
걱정스러운 표정을 한 오진이 그녀에게 다가왔다.
“아, 으.”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 치던 카시아는 오진을 향해 네발로 바닥을 기어 왔다.
머릿속을 가득 채우는 것은 뫼비우스가 남긴 ‘버림받을 것’이라는 말들뿐.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용서해 주세요. 이, 이제 버려지고 싶지 않아요. 혼자 있고 싶지 않아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죄송해요.”
카시아는 그의 다리를 끌어안은 채 절박한 표정으로 애원했다.
“거, 거짓말할 생각은 없었어요. 다치게 할 생각도 없었어요. …아, 벼, 변명하려는 게 아니에요! 죄송해요! 잘못했어요! 저, 저는….”
다리를 끌어안은 팔에 힘을 더하며 횡설수설 말을 더듬었다.
“…….”
카시아를 내려다보면 오진이 눈을 찌푸렸다.
어딜 어떻게 보더라도 지금 카시아의 상태는 정상이 아니었다.
“요, 용서해 주세요… 제발.”
오진의 다리에서 떨어진 카시아는 바닥에 납작 엎드려 그의 발등에 입을 맞추려는 듯 고개를 숙였다.
“그만.”
오진은 바닥에 엎드린 카시아의 어깨를 잡아 세웠다.
눈물에 범벅이 된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그를 향했다.
어딘가 툭 건들면 부서질 것처럼 위태로운 모습.
오진은 가늘게 눈을 뜨며 물었다.
“놈한테 무슨 말 들었어?”
“……!”
카시아의 어깨가 흠칫 떨리는 게 느껴졌다.
‘정답이었나.’
어째 너무 얌전히 물러난다 싶더니.
오진은 쯧 혀를 차며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뭐라고 했어?”
“아무 말도….”
“지금 말 안 하면 앞으로 다시 나 볼 생각하지 마.”
“그, 그건!”
카시아가 퍼뜩 고개를 들어 올리며 다급한 표정을 지었다.
“버림… 받을 거라고 했어요.”
“버림받는다고?”
“예. 오진 님이 절… 요, 용서해 주시지 않을 거라고.”
“…….”
오진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실소를 흘렸다.
솔직히 카시아가 왜 그렇게 자신에게 집착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제발 절… 버리지 말아 주세요.”
아니 버리고 말고 애초에 가진 적도 없긴 하다만.
오진은 절박한 표정으로 자신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있는 카시아를 내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대체 내가 뭘 했길래 이 정도까지 집착하는 거야?’
그래.
천마에게 조종돼서 원치도 않은 학살을 저지르고 다니고 있는 걸 풀어주긴 했지.
마경에서도 혼자 천마봉인 풀리는 거 막겠다고 설치는 거 도와주기도 했어.
이번엔 동생 구하겠다고 뒤통수 후려갈긴 거 그냥 넘어가 주고 죽으려고 하는 거 구해준 것뿐….
‘어? 뭐야.’
생각보다 많은 걸 했네?
“오, 오진 님…?”
한동안 말이 없다 불안한 표정으로 자신을 올려다보는 카시아.
오진은 그녀의 초조함에 가득 찬 눈을 내려다보며 끄응, 침음을 삼켰다.
‘뭐, 그렇다고 해도 지금 이런 모습이 정상은 아니지만.’
아마 이 정도로 자신에게 집착하는 이유는 그녀의 과거와도 얽혀 있을 것이다.
전신의 근육과 뼈가 뒤틀리는 불치병에 걸린 채 다가올 죽음을 하루하루 기다려야 했을 삶.
콜그란데라는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어도… 아니, 오히려 그런 가문에서 태어났기에 그녀가 느낄 비참함은 더 컸겠지.
‘그리고 그건 이사벨라가 커가면서 점점 심해졌을 거고.’
불치병에 걸린 언니와 천부적인 재능을 타고난 동생.
둘 중 누가 ‘콜그란데’의 이름을 짊어지게 될지는 집에서 키우는 고양이도 알고 있었으리라.
‘그런 상황에서….’
과연 그녀의 편을 들어줬던 사람이 단 한 명이라도 있었을까.
“…….”
오진에게는 그래도 하은이 있었다.
어렸을 적부터 하은이 있었기 때문에 적어도 외롭다는 생각은 하지 않았다.
하지만 카시아는?
좁디좁은 휠체어에 갇힌 채 다가올 죽음을 기다리던 소녀에게는 그런 사람이 있었을까?
“…하아.”
그래.
이제 카시아가 왜 이렇게 자신에게 집착하는지는 대충 알 것 같았다.
남은 건 자신의 선택뿐.
‘받아들이냐, 밀어내느냐.’
대답은 그녀를 대신해 뫼비우스 앞에 섰을 때부터 정해져 있었다.
“용서해 주길 바라?”
“예, 예! 오진 님이 시키는 거라면 뭐든 할게요! 그, 그러니 제발….”
카시아는 다급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오진의 입꼬리가 씨익 올라갔다.
“그럼 아까 말한 ‘벌’을 받아야겠지?”
목에 칼이 드리워진 것처럼 절박한 표정을 짓고 있는 카시아를 조금 진정시키기 위해 괜히 장난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아까 말한 벌이라면….”
“엉덩이 대.”
“엣… 어, 엉덩이요?”
당황한 표정으로 동그랗게 눈을 뜨는 카시아.
이걸 다행이라고 해야 할지는 모르겠지만, 방금 오진의 말 한 번으로 툭 건들면 유리그릇처럼 부서질 것 같았던 표정이 놀람에 뒤덮여 사라져 있었다.
“오, 오진 님의 명령이라면.”
카시아가 뺨을 붉히며 우물쭈물 몸을 돌려 오진을 향해 엉덩이를 내밀었다.
뭐, 엉덩이를 내밀었다고 해도 치렁치렁한 검은 드레스에 가려 제대로 보이지도 않았다.
“드, 드레스도 벗어야겠죠?”
“아니 그럴 필요까지는….”
“벌, 이니까요.”
카시아는 아까 전에 훌러덩 드레스를 들어 올렸을 때와는 달리 수치심에 가득 찬 표정으로 드레스 자락을 양손으로 잡아 서서히 들어 올렸다.
새하얀 엉덩이와 그를 감싸고 있는 검은색 레이스 팬티가 서서히 그 유혹적인 자태를 드러내고 있을 때.
“으음.”
뫼비우스가 뭔가 손을 써둔 걸까, 그가 사라지자마자 기절해 있던 이사벨라가 몸을 뒤척이며 부스스 일어났다.
“여긴….”
고개를 두리번거리던 이사벨라의 눈에 보인 건 오진에게 엉덩이를 향한 채 드레스 자락을 들어 올리고 있는 카시아와 그런 그녀의 뒤에 바짝 서 있는 오진의 모습.
“…꿈인가?”
이사벨라는 눈을 비비적거리며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