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86)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86화
자매 (10)
“…하아.”
땅이 꺼질 듯 무거운 한숨.
이사벨라는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제가… 납치당했다고요?”
도저히 지금 상황을 이해하기 어렵다는 듯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응. 기억 안 나?”
“예. 아무것도 기억 안… 아, 잠시만요.”
눈살을 찌푸린 채 비행기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리던 이사벨라가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전용기를 타고 가고 있던 도중… 갑자기 시야가 어두워졌어요.”
“그리고?”
“비명소리가 들렸고… 아, 뱀. 뱀을 봤어요.”
“하얀 뱀이었지?” “맞아요.”
이사벨라는 조금씩 기억이 떠오른다는 듯 파르르 어깨를 떨었다.
“하얀 뱀들이 비행기 안을 뒤덮었고… 그리고… 으.”
고통스럽다는 듯 신음을 흘리는 이사벨라.
오진은 이사벨라의 어깨 위에 조심스럽게 손을 올렸다.
“너무 무리해서 떠올릴 필요 없어.”
“…죄송해요. 그다음은 기억이 없어요.”
이사벨라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오진은 그녀의 등을 쓰다듬으며 가늘게 눈을 떴다.
‘그럼 이사벨라는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순식간에 당한 건가.’
이사벨라가 11성을 눈앞에 둔 강력한 각성자라는 걸 생각해 보면 뫼비우스의 힘이 대체 어느 정도인지 짐작조차 가지 않았다.
‘이 정도면 개천을 써도 답 없는 거 아니야?’
문뜩 그런 생각이 머리를 스쳤지만.
“저… 그, 벼, 변명할 생각은 없지만, 그때 제가 정상적인 상태는 아니었어요.”
오진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겠다는 듯 이사벨라가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정상적인 상태가 아니었다니?”
“그… 이탈리아를 가고 난 이후부터 피를 한 번도 마시지 않아서 평소보다 훨씬 약해져 있었거든요.”
“아.”
그러고 보니 거머리자리 성흔을 지닌 각성자는 주기적으로 피를 마시지 않으면 급격하게 힘이 약해진다고 들은 적 있었다.
‘이탈리아를 가고 난 이후라면….’
일본으로 넘어가 안셀라두스와 격전을 치르고, 집중 치료실에 들어가 내상을 회복하고 나와 한국으로 돌아올 때까지 쭉 피를 입에도 안 댔다는 건가.
‘확실히 약해질 만하네.’
3일만 피를 안 마셔도 성흔의 힘이 약해진다고 들었는데 2주가 훌쩍 넘는 시간 동안 피를 입에 대지도 않았으니 그녀의 몸 상태는 최악에 가까웠으리라.
“근데 그렇게 될 때까지 피는 왜 안 마셨던 거야?”
흡혈 충동을 없애기 위해서는 직접 피를 빨아야 한다지만 단순히 성흔의 힘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굳이 흡혈까지 할 필요는 없었다.
콜그란데 가문 저택에 있는 이사벨라의 방에 왜 굳이 대량의 혈액팩이 보관되어 있었겠는가.
하다못해 동물의 피라도 섭취했다면 이렇게 무기력하게 뫼비우스에게 납치당할 일은 없었으리라.
“그, 그게….”
이사벨라는 당황한 표정으로 말끝을 흐렸다.
입술을 달싹이며 발을 동동 구르던 이사벨라가 슬쩍 시선을 피하며 입을 열었다.
“…어서요.”
“엉?”
“마, 맛없어서요!”
귀까지 빨개진 얼굴로 외치는 이사벨라.
오진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맛없어서 피를 안 마셨다고?”
“하, 하지만… 이젠 오진 씨 피가 아니면 만족할 수 없는 몸이 되어버렸는걸요?”
뭔가 야한 말처럼 들리지만 따지고 보면 존나 섬뜩한 말이잖아 이거.
“아니 아무리 그래도 몸이 그렇게 될 때까지 안 마시면 어떻게 해?”
“그렇지만…. 차, 참았다가 먹는 게 훨씬 더 맛있다고요.”
“…….”
약간 뷔페 가기 전에 일부러 굶는 것과 비슷한 건가.
‘아무리 그래도 2주는 안 굶어 이 아가씨야.’
오진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차라리 밥을 2주 동안 안 먹으면 그나마 낫지.
거머리자리 성흔을 지닌 각성자에게 있어서 피를 끊는다는 건 영혼 자체가 말라비틀어지는 갈증과 함께 극심한 고통을 수반하는 일이었다.
“오진 씨가 나쁜 거예요!”
이사벨라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며 버럭 외쳤다.
“오, 오진 씨 피가 너무 맛있으니까 다른 피는 입에도 못 대개 됐잖아요!”
“그게 왜 내 잘못이야.”
내가 원해서 맛있게(?) 태어난 것도 아니고.
‘아니 내가 뭐 소야?’
주인을 알아볼 정도로 지능도 높고 애교와 귀여운 외모까지 두루 갖췄지만, 너무 맛있다는 이유로 애완동물이 되지 못했던 불행한 동물을 떠올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아무튼! 설마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습격당할 줄은… 미처 생각 못 했어요. 죄송해요.”
그래도 자신은 실책은 인정하는지 이사벨라가 한숨을 내쉬며 다시 자리에 앉았다.
“뭐… 그건 어쩔 수 없지.”
솔직히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갑작스럽게 성좌에게 습격당할 거라고 그 누가 예상할 수 있었겠는가.
안일했다고 다그치기에는 상황이 너무 뜬금없던 건 사실이었다.
“그건 그렇고….”
이사벨라의 시선이 오진에게 향했다.
정확히는 오진의 옆에 거머리처럼 찰싹 달라붙어 있는 한 여인에게로.
“…언니는 왜 저래요?”
이사벨라는 대화하는 내내 오진의 팔을 끌어안은 채 말없이 그의 어깨에 뺨을 비비적거리고 있는 카시아를 노려보며 도끼눈을 떴다.
“…나도 몰라.”
“아까 전에 오진 씨 앞에서 당당히 엉덩이까지 까고 있었는데 모른다는 게 말이 돼요?”
“아니 진짜 모른다고.”
카시아가 자신에게 목을 매는 이유는 얼추 예상됐지만 그렇다고 해서 갑자기 무슨 유아 퇴행을 한 것마냥 찰싹 달라붙은 채 떨어지지 않는 이유는 오진도 알 수 없었다.
“잠깐 떨어져 봐 언니.”
“…….”
“저기요? 제 말 안 들려요?”
“하아. 오진 님… 너무 따듯해요.”
“이년이?”
이사벨라의 눈에서 불똥이 튀어 올랐다.
카시아의 어깨를 붙잡고 억지로 떼어내려고 해도 무슨 뱀이 똬리를 튼 것처럼 오진의 팔을 다리 사이에 끼워가며까지 달라붙어 있는 탓에 좀처럼 떨어트릴 수가 없었다.
“아니 좀 떨어지라고! 남의 애인한테 뭐 하는 짓이야?!”
“…싫어.”
“뭐?”
“안 떨어질 거야.”
카시아는 표독스러운 눈빛으로 이사벨라를 노려봤다.
“이제 오진 님은 내 것… 아니, 내 몸과 마음은 오진 님 거니까.”
“…뭐?”
뜬금없는 폭탄 발언에 이사벨라의 두 눈이 부릅떠졌다.
“그, 그게 무슨 헛소리야?”
당황한 표정으로 바라보는 그녀를 향해 카시아가 슬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후훗. 네가 기절한 사이… 오진 님과 깊은 육체의 대화를 나눴단다?”
“잠깐만.”
치고받고 싸웠다는 걸 그렇게 말하니까 뭔가 이상하잖아.
“어떻게든 버텨보려고 했지만… 결국 나는 오진 님의 굳센 힘을 이기지 못하고 몸도, 마음도… 오진 님에게 굴복하고 말았지.”
처맞고 졌다는 걸 되게 색다르게 표현하시네요?
“나는 깨달아 버리고 말았단다. 이제 나는… 이분의 온기 없이는 살아갈 수 없는 몸이 됐다는 걸.”
약에 취한 듯 몽롱한 눈빛으로 오진의 팔을 끌어안는 카시아.
“……오진 씨?”
오진을 바라보는 이사벨라의 눈동자가 빛을 잃었다.
“이게 대체… 무슨 상황이죠?”
“오해입니다.”
절로 흘러나오는 존댓말.
“무슨 오해요?”
“이게 그… 한국말이라는 게 같은 말이라도 어떻게 하냐에 따라서 의미가 많이 달라지거든요.”
이탈리아 사람이라서 좀 이해하기 어려울 수도 있는데요.
“그래서, 제가 기절한 사이 언니랑 육체의 대화를 나눴다는 얘기네요?”
“아뇨, 그… 육체의 대화라고 하면 어감이 좀 이상하잖아요. 싸운 겁니다, 싸운 거. 아까 말씀드렸잖아요. 처음에 벨라 씨를 납치한 게 언니분인 줄 착각했다고.”
“무슨 소년 만화도 아니고 사람이 싸웠다고 이렇게 돼요? 솔직하게 말하세요. 정말 ‘싸우기만’ 하신 거 맞아요?”
“아니 그게요.”
오진은 난처한 표정으로 이사벨라의 시선을 피했다.
사실 뫼비우스의 앞을 막아서려는 카시아를 대신해 자신이 뫼비우스와 싸웠던 건 이사벨라에게 말하지 않았다.
‘말하면 욕먹을 게 뻔하니까.’
카시아를 지키기 위해 검은 별의 성좌와 싸웠다는 사실을 이사벨라가 알게 된다면 무슨 반응이 돌아올지는 굳이 상상할 필요조차 없었다.
‘아니 이게 애인의 친언니를 도와주는 게 원래 당연한 일이긴 한데.’
카시아와 이사벨라 사이를 생각하면 그런 ‘당연한’ 일조차 당연하지 않게 되어버리는 것이 문제였다.
“그러니까 이게 어떻게 된 거냐면….”
“오진 님은 내 목숨을 구해주셨단다.”
오진의 말을 자르며 카시아가 입을 열었다.
이사벨라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언니 목숨을 구해주다니? 그게 무슨 말이야?”
“날 지키기 위해 뫼비우스와… 뱀주인자리의 성좌를 상대로 용맹하게 맞서 싸워주셨지.”
“그건 이사벨라를 지키기 위해서….”
“어머? 벨라를 지키고 싶으셨다면 저를 두고 벨라랑 같이 도망가셨어야죠? 제가 시간까지 벌어준다고 했는데 절 냅다 뒤로 집어 던지신 건 오진 님이었잖아요?”
“…….”
제기랄.
그렇게 말하니까 할 말이 없잖아.
“그래서… 오진 씨가 언니 목숨을 구해줬다고 그렇게 달라붙어 있는 거야?”
“어머? 생명의 은인에게 호감을 갖는 건 당연한 거 아니니?”
물론 그녀가 오진에게 집착하게 된 이유는 단순히 그가 ‘생명의 은인’이기 때문은 아니었다.
과거부터 줄곧 그녀를 괴롭혀 왔던 외로움.
끝없이 펼쳐진 설원처럼 춥고, 고독했던 그녀의 삶에 나타난 오진이라는 존재는 단순한 생명의 은인을 넘어 썩어들어가던 그녀의 영혼 자체를 구원해준 구원자였다.
설사 당사자인 오진이 그런 생각까지 하며 그녀를 구한 건 아니라 할지라도.
“나는 오진 님에게 내 모든 걸 바치기로 결심했단다.”
결과적으로 그녀는 구원받았고.
추위와 고독에 병들어 가던 가슴에는 환하게 빛나는 별빛이 떠올랐다.
“아니 그게 동생 남편한테 언니가 할 소리야?”
“저… 아직 우리 결혼은.”
“오진 씨는 닥치고 계세요.”
“넵.”
이사벨라는 날카롭게 카시아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오진 씨한테는 내가 있으니까 언니가 낄 자리는 없어.”
“어머, 벨라 너 말고도 두 명이 더 있는 거 아니니?”
“그, 그건… 어, 어쨌든! 언니는 안 된다고!”
“후훗. 그건 걱정하지 말렴.”
키사아는 아무렇지 않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말을 이었다.
“난 딱히 오진 님과 연인이 되고 싶은 게 아니니까.”
“…뭐?”
담담하게 이어진 카시아의 말에 이사벨라의 눈이 동그랗게 뜨였다.
“아까 벨라 네가 오진 님의 피 없이는 살 수 없는 몸이 됐다고 했지?”
“…그게 뭐?”
“그거랑 비슷한 거란다.”
딱히 오진의 연인이 되지 않아도 좋다.
사랑받지 않아도 상관없다.
“오진 님의 곁에 있을 수만 있다면… 나를 몸종으로 여기셔도, 써먹기 좋은 도구… 그래, 씻고 나와서 쓰는 발닦개 정도로 여기셔도 나는 만족한단다.”
카시아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어질어질한 말에 이사벨라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어째서일까.
광기마저 느껴지는 카시아의 모습에 예전 자신의 모습이 겹쳐 보이는 이유는.
‘누가 친언니 아니랄까 봐.’
아무래도.
카시아의 상태는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심각해 보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