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87)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87화
막간-그래도
“나는… 인정 못 해.”
이사벨라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카시아를 노려봤다.
“네가 인정하고 아니고가 중요하니?”
“언니는 오진 씨를 속이고 검은 별의 성좌 앞까지 데려왔잖아!”
무슨 이유에서인지 뫼비우스가 순순히 물러났기에 오진이 크게 다치지는 않았지만.
자칫 잘 못 하면 그의 목숨이 위태로울 수도 있던 상황이었다.
아니, 어찌 뫼비우스와의 싸움에서 살아남는다고 해도 오진은 ‘그 기술’을 사용해야만 했겠지.
그리고 그 기술을 사용한 대가는 그녀 또한 잘 알고 있었다.
‘오진 씨의 기억이… 또 사라졌을 수도 있어.’
그게 설사 자신에 대한 기억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추억이 강제로 도려내진 그가 얼마나 속으로 괴로워할지 생각하면 감히 가볍게 생각할 수 없었다.
“그건….”
“날 위해서였다고?”
이사벨라의 입가에 차가운 조소가 걸렸다.
“정말 날 위했다면 그러면 안 됐지, 언니.”
* * *
자신에게 오진이라는 존재가 얼마나 소중한지는 카시아 또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럼에도 그녀는 오진을 속여 이곳으로 불러들였다.
검은 별의 성좌가 숨어 있는 위험천만하기 그지없는 함정으로.
“…….”
“왜? 내가 구해줬다고 고마워할 줄 알았어?”
독기어린 눈으로 카시아를 노려보는 이사벨라.
납치된 동생을 구해주겠다고 목숨까지 희생하려고 했던 언니에게 보일 태도는 아니었지만.
‘고맙다’라는 말을 하기엔 카시아가 저지른 짓은 이사벨라로서 절대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애초에 왜 날 구하려고 했던 거야? 언제는 날 끔찍하게 증오한다며 죽이려 하지 않았어?”
“그건….”
할 말을 생각하던 카시아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모르겠네.”
“모르겠다니? 뭘 모르겠다는 거야?”
“널 왜 구하려고 했는지, 깜빡 잊어버렸단다?”
옅은 미소를 지으며 어깨를 으쓱이는 카시아.
이사벨라가 입술을 잘근 깨물며 눈살을 찌푸렸다.
“…뭐야, 그게.”
“뭐, 어쨌든 결과가 좋으니 된 거 아니겠니? 벨라 너도 무사하고, 오진 님도 크게 다치지 않으셨으니까.”
“결과만 좋으면 된다는 거야?”
“결과까지 나쁜 것보단 낫지 않니?”
교차하는 카시아와 이사벨라의 시선.
자매가 만들어내는 험악한 살기가 폐건물 안을 가득 채웠다.
“그만.”
둘이 서로 해결하기를 가만히 기다리고 있던 오진은 이대로는 안 되겠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팽팽하게 대치하고 있던 두 자매의 시선이 오진에게로 향했다.
“일단 상황 정리부터 하자. 카시아, 몸은 좀 괜찮아?”
“아….”
그제야 자신이 심각한 내상을 입은 상태라는 걸 자각한 카시아가 어색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저었다.
“마력을 사용하지 않아서 아까보다 통증은 덜하긴 하지만… 좋다고는 하기 힘들겠네요.”
“이리 와봐.”
“예? …꺄악!”
오진은 카시아의 허리에 팔을 둘러 허벅지 위에 그녀를 앉힌 후 그녀의 왼쪽 가슴에 손을 올렸다.
“오, 오진 님?”
“뭐, 뭐 하시는 거예요?!”
첫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발그레 뺨을 물들인 채 시선을 피하는 카시아와 발끈한 표정으로 자리를 박차고 일어서는 이사벨라.
두 자매의 서로 다른 감정이 섞인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지만, 지금은 그를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가만히 있어. 물병자리 성흔은 자주 안 써봐서 익숙하지 않으니까.”
오진은 카시아의 왼쪽 가슴, 정확히는 그녀의 왼쪽 가슴에 새겨진 뱀주인자리의 성흔 위에 손을 가져다 댄 채 물병자리의 성흔을 활성화했다.
물병자리의 성흔의 경우 이렇게 직접적인 치유보다는 포션이나 약 등을 제조하는데 특화된 성흔이었지만, 그렇다고 아예 치유 능력이 없는 건 아니었다.
‘그리고 이 치유 능력을 극대화하기 위해선.’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천천히 흑천의 힘을 일으켰다.
‘성역 전개.’
우우우우웅!
은은한 빛무리가 몸을 뒤덮었다.
물병자리의 성흔으로 성역을 만들어내는 건 처음이었지만, 원리 자체는 거문고자리의 성흔의 성역을 만들어냈을 때와 비슷했다.
막대한 마력이 썰물처럼 빠져나가는 감각과 함께 등골을 짜릿하게 울리는 전능감이 느껴졌다.
“아… 내상이.”
성흔을 타고 흘러드는 물방울처럼 맑은 마력.
난잡하게 찢겨 있던 마력 회로가 조금씩 치유되는 게 느껴졌다.
물병자리의 마력이 한 차례 카시아의 몸을 일주(一周)한 후.
“후우.”
오진은 지친 기색이 역력한 표정으로 성역을 해제했다.
그의 몸을 뒤덮고 있던 은은한 빛무리가 허공에 흩어지듯 사라졌다.
“완전히 치료는 못 했지만 그래도 통증은 훨씬 나아졌을 거야.”
“…고마워요.”
카시아는 어딘가 약에 취한 듯 몽롱한 눈빛으로 오진을 올려다봤다.
아직 몸 안에 잔향처럼 남아 있는 물병자리의 마력의 감촉.
내상이 치유되며 줄어든 통증의 자리를 간질간질한 행복감이 채웠다.
“그럼….”
“잠깐만요.”
카시아는 가슴에서 떨어지려는 오진의 손을 붙잡아 꾸욱 눌렀다.
터질 듯이 뛰는 심장 박동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조금만 더… 이대로 있어 주세요.”
카시아는 가슴을 타고 전해지는 온기에 환한 미소를 지었다.
가녀린 그녀의 손과 달리 남자라는 게 느껴지는 넓은 손.
이대로 영원히 시간이 멈췄으면 좋다겠다는 생각이 들 정도로, 그의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온기는 따스했다.
“어… 이, 이대로 있으라고?”
오진은 당황한 표정으로 헛기침을 흘렸다.
치료 목적으로 손을 댔을 때는 별로 신경 쓰이지 않았지만.
이렇게 가만히 손을 올리고 있자니 가녀린 체형임에도 어느 정도 자기주장을 펼치려고 분발(?)하고 있는 부드러운 감촉이 손바닥을 통해 전해졌다.
“조금만 더는 뭔 조금만 더, 야? 치료 끝났으면 빨리 안 떨어져?”
이사벨라가 오진의 허벅지 위에 앉아 있는 카시아를 잡아당기며 사납게 표정을 일그러트렸다.
그렇게 강제로 떨어지게 된 카시아는 아쉽다는 듯 오진의 손이 닿아 있던 왼쪽 가슴을 매만졌다.
“모처럼 좋은 시간이었는데… 그렇죠, 오진 님?”
“흥, 그런 껌딱지가 좋기는 뭐가 좋아?”
“…지금 뭐라고 했니?”
카시아의 에메랄드빛 눈동자가 섬뜩하게 빛났다.
“뭐라고 하긴? 껌딱지를 껌딱지라고 한 것뿐인데?”
이사벨라는 입꼬리를 올리며 팔짱을 꼈다.
교차한 팔 위로 거대한 두 봉우리가 육중한 존재감을 뿜어냈다.
“읏….”
카시아도 체형에 비해서는 작은 편은 아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일반적인 기준일뿐.
저 상식을 벗어난 봉우리 앞에선 그녀가 지닌 건 차량 방지턱 정도에 불과했다.
“기껏 생각한 게 신체적인 차이를 가지고 으스대는 거라니, 너무 유치해서 대꾸할 생각도 안 드네.”
“응, 껌딱지.”
“하, 그런 버르장머리는 어디서 또 배운 거니? 정말 벨라 너는 정원에서 천방지축 뛰어다니던 때와 하나도 변한 게 없구나.”
“네 다음 껌딱지.”
“이, 이…!”
때로는 가장 유치한 도발이 효과적인 법.
특히 형제자매 사이에서 이런 원초적이고 저질스러운 도발은 빛을 발하기 마련이었다.
“이 싸가지 없는 꼬맹이가!”
“동생 남편한테 들러붙는 언니한테 들을 말은 아니거든?!”
이젠 뭐 체면이고 자시고도 없다.
서로를 향해 달려든 두 자매는 머리끄덩이를 잡아당기며 싸우기 시작했다.
“…….”
차마 눈을 뜨고 보기 힘든 두 여인의 모습에 오진은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나 폐건물 밖으로 나갔다.
밤하늘에 고고하게 뜬 달빛이 그를 내리쬈다.
“하아.”
집에 가고 싶다.
“하아, 하아.”
“으… 이게 뭐야 진짜.”
한 차례 격렬한 전투(?)를 마친 두 사람은 폐건물 바닥에 누워 거친 숨을 헐떡였다.
“…껌딱지.”
“어머, 지방 덩어리에 주둥이도 달려 있네?”
폐건물 바닥에 누운 채 서로를 노려보는 자매.
당장에라도 다시 서로에게 달려들 것처럼 흉악한 살기가 요동쳤지만, 둘 중 누구도 먼저 움직이는 사람은 없었다.
“하아.”
“…뭐 하는 걸까 우리.”
전쟁의 끝은 늘 허무하다고 했던가.
두 여인은 밀려오는 현탐 속에 서로 입을 다문 채 등을 돌렸다.
고요하게 이어지던 침묵을 먼저 깬 것은 이사벨라였다.
“언니.”
“왜?”
“왜 날 구해주려고 했던 거야?”
“…까먹었다고 했잖니?”
“거짓말.”
카시아의 어깨가 흠칫 떨렸다.
등 뒤로 이사벨라의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다.
“언니는 날 싫어하는 거 아니었어?”
“싫어해.”
어떻게 좋아할 수가 있을까.
그녀는 가지지 못한 걸, 이사벨라는 마치 당연하다는 듯 지니고 있는데.
“그렇다면 왜….”
“그래도.”
빙글 몸을 돌리는 카시아.
카시아는 이사벨라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헤헤. 난 언니가 젤루 좋아!
잊으려 해도 잊히지 않았던 기억.
지우려 해도 지워지지 않았던 추억.
낡고, 녹슬고, 빛바랬지만.
“너는 내 동생이잖니?”
소중했던 한때를 떠올리며 카시아는 방긋 웃었다.
“…….”
이사벨라는 망치로 머리를 한 대 맞기라도 한 것처럼 멍한 표정으로 입을 벌렸다.
무언가 말하려는 듯 입술을 달싹이던 이사벨라는 이내 얼굴을 붉힌 채 고개를 돌렸다.
“흠흠. 그나저나 슬슬 일어나지 않을래?”
어색한 침묵을 깨며 카시아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드레스 속에서 작은 손거울을 꺼낸 카시아는 봉두난발이 된 머리와 망가진 화장을 보며 눈을 찌푸렸다.
이게 친동생과 머리끄덩이를 붙잡으며 싸운 결과라고 생각하니 말로 표현 못 할 수치심이 느껴졌다.
“이렇게 비참한 기분이 드는 건 또 처음이네.”
투덜거리는 카시아를 돌아보며 이사벨라가 삐쭉 입술을 내밀었다.
“그러게 왜 남의 남편한테 들이대서는.”
“누가 들으면 오진 님이 진짜 네 남편인 줄 알겠네. 그래봤자 벨라 너도 두 번째인 거 아니니?”
“그, 그건…!”
“그리고 얼마 전에 그 은발 성좌 님도 합류한 것 같고.”
“…읏.”
입술을 잘근 깨무는 이사벨라를 바라보며 카시아가 나지막한 웃음을 터뜨렸다.
“원래 처음이 어렵지 두 번째는 더 쉽지 않겠니? 아, 지금은 세 번째인가?”
“제, 제정신이야? 언니랑 나는 자매잖아!”
버럭 소리치는 이사벨라.
“어머, 자매는 같은 남자 좋아하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니?”
“아니 그… 이, 이상하잖아.”
“자매기 때문에 오히려 더 좋은 것도 있단다?”
“…뭔 뜻이야 그게?”
“글쎄? 무슨 뜻이라고 생각하니?”
카시아는 꺄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어깨를 으쓱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