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88)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88화
역천의 별 (1)
“드디어….”
현관 앞에선 오진은 감격에 찬 표정으로 눈시울을 붉혔다.
평양에서부터 이사벨라를 데리고 오는 내내 두 자매의 살벌한 신경전에 시달렸던 터라 그리 오래 자리를 비운 것이 아님에도 집 현관이 이렇게 반갑게 느껴질 수 없었다.
“…네. 그렇게 부탁해요, 로베르토.”
로베르토와 통화를 하며 뒤따라오던 이사벨라가 전화를 끊고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로베르토는 뭐래?”
“지금 당장 경호 인원을 열 배로 늘리겠다는 걸 간신히 뜯어말렸어요.”
이사벨라의 납치 소식에 평소 점잖기 그지없던 로베르토가 얼마나 당황했는지를 생각하면 당연한 반응이었지만.
“뭐… 솔직히 경호 인원을 늘려봤자 의미 없을 테니까.”
“그렇죠.”
상대는 한때 북극성과 비견될 정도로 강력했던 뱀주인자리의 성좌였다.
경호 인원을 열 배로 늘리건, 백 배로 늘리건 아무런 의미 없으리라.
‘뫼비우스까지 갈 필요도 없이 이사벨라만 해도 쓸어버릴 수 있는 수준일 테니까.’
이사벨라 본인보다 약한 경비 인원이 무슨 쓸모가 있겠는가.
“그래서 그냥 이번에 죽은 승무원이랑 경호원들 유족들에게 최대한 챙겨줄 수 있는 보상이나 챙겨달라고 했어요.”
같은 비행기 안에 타고 있던 사람들을 생각했는지 이사벨라는 다소 어두워진 표정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이사벨라야 뫼비우스 손에서 상처 하나 없이 풀려났다고 해도 다른 사람들은 아니었다.
그들은 비행기가 평양에 추락하기 전부터 이미 뫼비우스의 손에 잔혹하게 살해당했다.
“너무 마음에 두지 마.”
“…예, 알고 있어요.”
머리를 쓰다듬는 오진의 손길에 이사벨라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 콜그란데 가문의 전용기에 탄 인원들은 모두 콜그란데 가문에 목숨을 바치겠다 서약한 이들이었다.
애초에 경호 임무 중에 인명 피해가 발생하는 건 어쩔 수 없는 노릇.
콜그란데의 이름을 짊어진 그녀에겐 이런 인명 피해는 익숙한 일이었지만.
“그래도 맘이 편치 않네요.”
뫼비우스의 손에 허망하게 죽은 사람들을 생각하자 무거운 돌이 가슴을 짓누르는 듯 답답했다.
“우리 벨라가 그래도 아직 순진한 구석이 있네.”
카시아가 피식 실소를 흘리며 기다란 백금발 머리칼을 쓸어올렸다.
“경호원이 죽는 것 하나하나에 그렇게 동요해서 제대로 콜그란데 가문을 이끌 수 있겠니?”
“흥. 뛰어난 리더일수록 부하의 목숨을 소중하게 생각해야 한다는 것도 몰라? 아, 하긴. 언니는 가문에서 추방당했으니 알 리가 없나?”
“어머머, 생각 없이 피를 끊었다가 손도 써보지 못하고 부하를 잃은 리더가 할 말이 아닌데?”
이사벨라와 카시아가 살기 어린 눈빛으로 서로를 노려봤다.
“이제 집 도착했으니까 둘 다 그만해.”
오진은 머리가 아프다는 듯 절레절레 고개를 저으며 현관문을 열었다.
머리끄덩이를 잡으며 싸움을 한 이후 그래도 둘 사이에서 흐르는 분위기가 달라졌기에 살짝 둘 사이가 다시 전처럼 좋아진 게 아닐까 기대했지만, 그런 소년 만화 같은 일은 쉽게 일어나지 않았다.
“누나, 나 왔어.”
집에 도착하자마자 바로 하은을 찾았지만.
“음?”
하은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설마 이사벨라에 이어 하은까지 납치된 게 아닐까 하는 불안함에 다급히 하은과 직통으로 연결되어 있는 통신용 성유물을 찾았다.
우우우웅.
스마트폰과 달리 게이트 안에 들어가 있어도 통신을 할 수 있는 성유물이 빛을 뿜었다.
-어? 무슨 일이야?
통신용 성유물에서 홀로그램이 떠오르며 동그랗게 눈을 뜬 하은의 모습이 보였다.
오진은 안도에 찬 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지금 어디야 누나?”
-나 성소.
“성소는 또 왜?”
-아니 너 오늘 벨라랑 같이 있는 다길래 심심해서 아줌마랑 노가리나 까려고 왔지.
-누가 아줌마라는 게냐!
홀로그램 너머로 발끈한 표정의 베가가 보였다.
그녀의 손에는 하은이 챙겨간 걸로 보이는 맥주 캔이 쥐여 있었다.
-아, 하긴. 나이 생각하면 할머니라 부르는 게 맞나?
-나, 나이 얘기는 하지 말라고 하지 않았느냐!
-히히, 농담이야. 삐지지 마, 우리 성좌님.
-흥. 본녀는 그대와 같은 사도를 둔 기억은 없느니라.
태평하게 베가와 농을 나누고 있는 하은.
‘이사벨라가 납치됐다는 얘긴 못 들은 건가.’
하긴.
오진이 공항으로 마중 나가 있을 때부터 성소에 가 있던 거라면 그녀와 직통으로 연결할 수 있는 통신용 성유물이 없는 로베르토 입장에선 하은과 연락할 수단이 없었으리라.
-그나저나 쟤는 또 왜 우리 집에 있는 거야?
하은은 오진의 뒤편에 서 있는 카시아를 바라보며 가늘게 눈을 떴다.
아무리 당시 천마의 손에 조종당하고 있었다고 하나 한때 그녀에게 성흔을 다루는 방법을 가르쳐줬던 탐랑성을 죽인 카시아를 곱게 볼 수는 없었다.
카시아는 오진의 앞으로 나서며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
“이렇게 정식으로 인사드리는 건 처음이네요. 카시아 콜그란데라고 해요.”
-어… 응.
하은은 어색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제가 천마의 지배를 받고 있을 때 저질렀던 일들에 대해서는 지금도 깊이 후회하고 있어요. 하은 님의 스승님에게 해를 끼쳐 죄송해요”
-뭐, 네 의지도 아니었으니까.
천마의 지배가 얼마나 강력한지는 전에 니플헤임에서 탈출했을 때 고통을 호소하던 카시아와 이사벨라의 모습만 봐도 어렵지 않게 짐작할 수 있었다.
물론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다고 해도 아무런 감정이 남지 않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당시 천마의 도구에 가까웠던 상태로 세뇌당해 있던 그녀에게 모든 책임을 물을 수는 없었다.
카시아가 칼이라면 그 칼자루를 쥐고 휘두른 건 천마였으니까.
-그나저나 우리 집에는 무슨 일이야?
“사정이 있어 들리게 됐어요.”
-사정? 무슨 일이라도 있었어?
“음… 그건 성소에서 돌아오시면 자세하게 말씀드릴게요.”
이사벨라가 납치된 얘기를 영상 통신으로 설명하기는 너무 장황했다.
-어, 알았어. 그럼 나중에 돌아가서 듣지 뭐.
“네. 앞으로 잘 부탁드려요, 하은 님.”
-엉? 앞으로?
“후훗. 아무것도 아니에요.”
방긋 미소 지으며 뒤로 물러나는 카시아.
하은은 왠지 모를 불길함을 느끼며 멀어지는 카시아를 바라봤다.
오진이 크흠, 헛기침을 흘리며 앞으로 나섰다.
“누나는 언제 오게?”
-어…? 아, 좀만 더 있다가 가려구. 우리 성좌님이 혼자 많이 심심했는지 자꾸 엉겨 붙더라고.
-누가 엉겨 붙었다는 말이냐!
-뭐, 나중에 돌아갈 때 연락할게.
“엉.”
시끌벅적한 소리와 함께 통신이 끊겼다.
“…그래도 이해해주셔서 다행이네요.”
천상길을 죽였던 일을 마음에 담아두고 있었던 걸까.
카시아가 안도에 찬 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네 의지가 아니었다는 건 누나한테 미리 말해뒀으니까.”
“고마워요, 오진 님.”
“그건 그렇고… 뫼비우스에 관해서 물어볼 게 좀 있어.”
불길한 빛나던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지닌 성좌를 떠올리며 말을 이었다.
“혹시 뫼비우스가 말한 ‘목적’이라는 게 뭔지 알아?”
이신혁의 기억 속에서도 들었던 목적.
물론 전생의 목적과 지금의 목적이 같을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과연 천마와 같다는 그의 목적이 뭔지 의문이 들었다.
“아뇨. 저도 그분의 목적에 대해선 몰라요.”
“그래?”
“제가 알고 있는 거라고는… 성좌를 끔찍하게 싫어하는 것 정도에요.”
“성좌를 끔찍하게 싫어한다고?”
“예.”
카시아가 고개를 끄덕였다.
“으음.”
성좌를 싫어한다는 것만으로 뫼비우스의 목적을 추측하는 건 힘들었다.
안셀라두스가 그러했듯, 애초에 성소에서 추방당한 ‘위성’들은 기본적으로 성좌들에 반감을 지니고 있었으니까.
“도움을 못 드려서 죄송해요.”
“아니, 뭐. 어쩔 수 없지.”
카시아는 자조 섞인 미소를 지으며 말을 이었다.
“사실 뫼비우스 님에 관해서는 저도 많이 알지는 못해요. 뱀주인자리의 성흔을 받기는 했지만… 그분의 ‘아이’로 인정받았던 건 아니었으니까요.”
“아이로 인정받지 않았다고?”
오진은 이해할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기본적으로 성좌들은 자신의 성흔을 나눠준 인간을 ‘아이’라고 불렀다.
물론 명칭만 같을 뿐 ‘아이’를 대하는 태도는 성좌마다 제각각이었지만.
“예. 그분이 자신의 ‘아이’라고 부른 사람은 한 명뿐이에요.”
그럼 카시아 말고 다른 뱀주인자리의 각성자가 있다는 건가.
“누군데?”
“이름이 ‘이브’라는 것 말고는 저도 잘 몰라요.”
뱀주인자리의 성흔을 받은 각성자의 이름이 이브라.
자연스럽게 성경의 한 장면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으음. 그 이브라는 각성자는 만나 본 적은 없는 거야?”
“아뇨. 만나고 싶어도 만날 수 없어요.”
“만날 수 없다니?”
“이미 오래전에 죽었다고 들었거든요.”
아.
오진의 입술 사이로 낮은 탄성이 흘러나왔다.
“그 각성자가 최초로 뱀주인자리의 성흔을 받은 각성자라고 들었어요.”
“그러면 그 이브라는 각성자 말고는 아무도 자신의 ‘아이’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거야?”
“제가 알기론 그래요.”
“…그렇단 말이지.”
그 이브라는 각성자에 대해서 좀 더 정보가 있다면 좋았으련만.
오진은 아쉬운 마음을 달래며 일단 뫼비우스에 대한 생각을 접었다.
지금 당장은 뫼비우스의 목적보다 더 중요한 게 있었다.
‘이로써 검은 별의 성좌들이 본격적으로 지구에서 움직이고 있다는 게 확실해졌어.’
안셀라두스와 뫼비우스만이 아니다.
마경에서 만났던 고양이자리의 성좌, 펠리스를 비롯해 다른 검은 별의 성좌들도 지구에 현신했을 것이다.
‘좀 더 빨리 강해져야 해.’
지금 같은 속도로는 어림도 없었다.
더욱 빠르고, 확실하게.
힘을 쌓을 방법이 필요했다.
‘일단 성역 전개부터 확실히 몸에 익혀야 해.’
몸 주위에 옅게 펼치는 성역 정도로는 부족했다.
안셀라두스가 사용했던 ‘용궁’처럼 주변 환경 자체를 바꿔버릴 정도로 강력한 성역을 전개할 수 있어야 비로소 검은 별의 성좌들과 제대로된 일전을 벌일 수 있으리라.
‘그러기 위해선.’
오진의 시선이 이사벨라와 카시아에게 향했다.
“두 사람한테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
“말씀하세요, 오진 씨.”
“후훗. 부탁이 아니라 명령을 내려주셔도 괜찮답니다?”
두 여인은 무슨 부탁인지 얘기조차 듣지 않고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다.
“성역을 수련하는 데 도움을 줘.”
“으음… 구체적으로 어떤 도움을 말씀하시는 거죠?”
“일단 간단한 대련부터 부탁해.”
제대로 성역을 수련하기 위해서는 성좌가 지닌 ‘성역’을 뚫을 정도로 강한 힘을 지닌 각성자가 필요했다.
“후훗. 오진 님의 도움이 된다면 얼마든지요. 그럼 저부터 상대해 드릴까요?”
“아니, 둘 다 동시에 상대할게.”
성좌를 상대하기 위해 하루빨리 성역 전개를 몸에 익혀야 하는 지금 이제까지 해왔던 것처럼 일반적인 수련을 할 수는 없었다.
‘개천도 안 쓴 상태로 이사벨라랑 카시아를 동시에 상대하는 건 불가능하겠지만.’
불가능하기에 오히려 더욱 혹독하게 자신을 몰아붙일 필요가 있었다.
“어머, 동시에라니… 힘도 좋으셔라~”
카시아가 뺨을 발그레 붉히며 뱀처럼 베베 몸을 꼬았다.
“…….”
얘는 또 왜 이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