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90)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90화
역천의 별 (3)
“그래서….”
싸늘한 냉기가 맴도는 거실.
당장에라도 얼어붙을 듯한 차가운 분위기 속에서 이글거리는 불꽃이 오진을 향했다.
“성역을 전개하기 위한 수련 중이셨다?”
“옙, 맞습니다. 누님.”
불꽃처럼 활활 타오르는 두 눈빛 앞에서 오진은 얌전히 머리를 조아렸다.
피부로 느껴지는 뜨거운 시선이 등골을 서늘하게 했다.
예전에 마경에서 데이모스를 상대할 때였나, ‘차가운 불꽃’이라는 말도 안 되는 기술을 본 적이 있었는데 설마 하은도 그와 같은 기술을 사용할 수 있을 줄이야.
“지금 그 말을 나보고 믿으라고?”
거실로 들어온 하은이 본 것은 두 자매 사이에 낀 채 코피를 쏟아내고 있는 오진의 모습.
그래, 그건 뭘 어떻게 봐도….
“그… 뭐라 부르냐, 그거? 자매… 볶음밥?”
갑자기 볶음밥은 왜.
“아씨, 뭐라 부르는지 까먹었네. 여튼 그거 하느라 코피 쏟는 거 같잖아!”
“아니.”
* * *
그래.
솔직히 오해의 여지가 있는 모습이었다는 건 인정하겠다.
하지만 카시아와 이사벨라, 두 자매 사이에 샌드위치처럼 끼어 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성흔의 마력을 한층 수월하게 전달하기 위함이었다.
성흔의 마력이라는 것이 기본적으로 ‘성흔’에서 뿜어져 나오는 이상, 성흔이 새겨진 신체 부위를 접촉한 상태에서 마력이 쉽게 오갈 수 있는 게 당연하지 않은가.
‘문제는 그 성흔이 하필이면 왼쪽 가슴 위에 새겨져 있다는 건데.’
그거야 오진이 원해서 거기에 새긴 것도 아니고 만국 각성자 공통으로 왼쪽 가슴 위에 새겨져 있는 걸 대체 어쩌란 말인가.
“진짜 성역 수련 때문에 어쩔 수 없었던 거라니까.”
이미 전과(?)가 많았기에 어지간한 건 그냥 잘못했다 하고 넘어가고 싶었지만, 이건 좀 억울하지 않은가.
‘여기서 확실히 오해를 안 풀어두면 나중에 성역 수련을 할 때도 귀찮아져.’
무식한 방법이긴 하지만 성역에 다른 각성자의 마력을 흘려 넣어 강제 부순 후, 새로 만드는 과정에서 더욱 성역을 견고하고 넓게 펼치는 수련은 꽤나 효과가 좋았다.
물론 정상적인 수련 방법이 아닌 만큼 고통도 크고 무슨 후유증이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지금 그런 걸 따지면서 힘을 기를 상황이 아니지 않은가.
“…진짜야?”
“내가 거짓말하는 거 봤어?”
“어, 졸라 많이.”
앗.
“크흠! 이번에는 진짜 거짓말 아니야. 마력을 흘려 넣기 쉽게 하려고 밀착해 있던 것뿐이라고.”
“흐으음.”
“누나도 신체가 밀착해 있어야 마력을 더 쉽게 전달할 수 있는 건 알고 있잖아?”
“그렇긴 한데.”
하은은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영 수상쩍다는 눈빛을 지우지 못했다.
이대로는 안 되겠다 싶었는지 오진은 얌전히 거실 소파에 앉아 있는 카시아를 돌아보며 도움을 요청했다.
“그렇지 카시아?”
“…흐윽.”
“어?”
소파에 앉아 있던 카시아가 갑자기 눈물을 훔치며 고개를 돌렸다.
‘아니.’
갑자기 이 타이밍에 울면 어떻게 해.
“처음엔 거절했어요… 하지만, 오진 님이 명령이라며 억지로….”
“아니, 아니, 아니. 잠깐만요 거기 아가씨.”
말씀을 그렇게 하시면 어떻게 해요.
“가슴이 닿는다고 말했는데… 오히려 그게 더 좋다면서….”
“저기요?”
이렇게 나오시면 제가 많이 곤란하잖아요.
“죄송해요… 하은 씨가 오진 님의 연인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는데…!”
카시아가 기어이 울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떨궜다.
“…….”
그런 카시아를 가늘게 뜬 눈으로 지그시 바라보던 하은은 이내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진짜 수련한 거 맞네.”
“어머, 들켰나요?”
“오지니가 아무리 발정기 짐승 같은 놈이라고 해도 억지로 손대는 쓰레기는 아니거든.”
“신뢰가 두텁네요.”
“내가 오지니랑 1, 2년 같이 지낸 줄 알아?”
신뢰가 두터운 거 맞아 이게?
“뭐, 어쨌든. 이제 집에 왔으니 설명해줘. 왜 카시아가 여기 있는지.”
“그건….”
“내가 설명할게.”
순간 표정이 굳어버린 카시아를 뒤로하고 오진은 그녀와 있었던 일들을 천천히 하은에게 얘기했다.
이사벨라가 검은 별의 성좌에게 납치당한 것부터 카시아가 동생을 구하기 위해 오진을 속여 유인한 것까지.
일단 최대한 카시아 쪽을 변호하며 말하긴 했지만 있던 일을 숨기지는 않았다.
그건 카시아도 바라는 일이 아니었을 테니까.
“그러니까… 오지니를 속여서 검은 별의 성좌 앞으로 떡하니 데려갔단 말이지?”
얘기를 모두 들은 하은은 사나운 눈초리로 카시아를 노려봤다.
흠칫.
카시아는 어깨를 떨며 죄인처럼 눈을 내리깔았다.
“변명은 하지 않을게요. 제 생각이 짧았어요.”
“…그래?”
무거운 침묵이 장막처럼 내려앉았다.
째깍째깍 시계 초침이 움직이는 소리가 천둥처럼 들려올 만큼 조용한 침묵.
판사의 판결을 기다리는 죄수처럼 카시아는 두 주먹을 움켜쥐며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그렇게 몇 시간처럼 느껴지는 몇 분이 흐른 후.
눈을 감은 채 생각에 빠져 있던 하은이 천천히 눈을 떴다.
“밥 아직 안 먹었지?”
“…예?”
전혀 예상치 못한 말에 카시아는 물론 오진과 이사벨라의 눈동자도 동그랗게 뜨였다.
“그럼 밥부터 먹자.”
하은이 주방으로 몸을 돌렸다.
“누, 누나!”
“하은 언니!”
오진과 이사벨라가 다급히 하은의 양팔을 붙잡았다.
“어, 엉? 왜 그래 갑자기?”
“카시아는 이사벨라를 구하기 위해서 어쩔 수 없는 선택을 했던 거야!”
“아무리 언니가 오진 씨를 속였다고 해도 이건 너무 가혹한 벌이에요!”
“아니 내가 뭘 했다고.”
오진은 잘근 입술을 깨물며 하은을 향해 소리쳤다.
“지금 누나가 직접 만든 요리를 억지로 먹이면서 카시아를 고문하겠다는 거잖아!”
“아니, 씹. 그런 거 아니야 새끼야!”
“거짓말하지 마! 그러면 갑자기 왜 주방으로 가는 건데?!”
“어제 치킨 시킨 거 남은 거 있어서 꺼내려고 한다! 아니, 그리고 왜 내가 만든 요리를 먹이는 게 고문인데!”
“아.”
그제야 하은의 팔을 놓은 오진은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쉬었다.
“후우. 누나가 사람 하나 잡으려는 줄 알았네.”
“아무리 언니가 잘못을 저질렀다고 해도 그건 너무했죠.”
“아니 나한테 왜 그러는데!”
발끈 표정으로 외치는 하은을 바라보며 오진은 피식 실소를 흘렸다.
“고마워, 누나.”
하은이 무슨 이유로 갑자기 밥을 먹자고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적어도 카시아를 나무라며 내칠 생각이 없다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내칠 사람에게 같이 밥을 먹자고 할 리가 없으니까.’
어쨌든.
밥을 먹자는 건 하은 나름의 마음 씀씀이였을 것이다.
“고마… 워요.”
카시아는 떨리는 목소리로 하은을 향해 고개를 숙였다.
겉으로는 여유로운 척하고 있었지만 그녀 또한 속으로는 걱정하고 있었으리라.
만약 하은이 오진이 카시아와 함께 있기를 거부했다면, 아마 오진은 그녀의 말을 따랐을 테니까.
“착각하지 마, 널 용서한 건 아니니까.”
“…….”
“하지만.”
카시아가 정말 이사벨라를 구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까지 내던지려고 했다면.
“기회 정도는 줘도 괜찮다고 생각했던 것뿐이야.”
“…아.”
“오지니를 지켜줄 사람은 많을수록 좋으니까.”
번에 카시아가 오진을 위험해 처하도록 만든 건 사실이지만.
그녀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오진과 이사벨라를 지키려고 했던 것도 역시 사실이었다.
“그러니까 앞으로도 오지니를 위해준다면… 뭐, 같이 있어도 상관없어.”
“무, 물론이에요!”
카시아는 동아줄을 발견한 오누이처럼 눈을 반짝이며 다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저는 오진 님의 몸종인걸요! 앞으로 제 목숨을 바쳐 오진 님을 지킬게요!”
“응응. 그래, 알았… 어? 방금 뭐라고 했어?”
“제 목숨을 바쳐 오진 님을 지킨다고….”
“아니, 그전에.”
하은은 자신이 잘못 들은 게 아닌지 의심스럽다는 눈빛으로 카시아를 바라봤다.
“…몸종이라고?”
“아, 예! 저는 오진 님의 충성스러운 노예랍니다?”
“…….”
화르르륵!
사납게 타오르는 불꽃.
강렬한 열기가 넓은 거실 안을 가득 채웠다.
“아까 뭐라고 씨부렸더라? 뭐? 오해?”
“…….”
빌어먹을.
이어진 식사 자리는 예상과 달리 꽤 화목했다.
“어머, 이게 치킨이란 거니?”
“언니 처음 먹어봐?”
“단순히 닭을 튀긴 요리라면 자주 먹어봤지만… 이건 이제까지 먹었던 거랑 맛이 다른데?”
카시아는 에어 프라이어에 데운 치킨을 먹으며 연신 감탄사를 흘렸다.
바삭바삭한 튀김과 염지가 된 닭다리살이 환상의 조화를 이루며 입 안 가득 육즙을 내뿜고 있었다.
와구와구 치킨을 먹는 카시아를 보며 하은이 아쉽다는 듯 혀를 찼다.
“아, 이거 치킨 새로 시킬 걸 그랬나?”
“바로 먹는 거랑 맛이 그렇게 차이 나나요?”
“엄청 차이 나지. 아예 다른 음식이라고 해도 믿을 수준일걸?”
“어머, 그거 기대되는데요?”
시끌벅적 화목한 식사 자리.
이사벨라의 언니답게 화려한 입담을 지닌 카시아는 아주 자연스럽게 하은과 대화를 이어나갔다.
이사벨라도 카시아와의 신경전을 잠시 접어두고 화기애애한 분위기를 만들었다.
모두가 화목한 식사 자리… 아니, 정확히 말하면 한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가 화목한 식사 자리였다.
“…나도 치킨 먹을 줄 아는데.”
“넌 거기서 얌전히 닭뼈나 씹어먹고 있어.”
“…….”
너무해.
“하아.”
오진은 자신의 그릇 위에 쌓인 닭뼈를 내려다보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원래 먹을 것에 대한 욕심은 거의 없다시피 한 그였지만, 다른 사람들이 신나게 치킨을 뜯어 먹는 자리에서 혼자 닭뼈가 쌓인 그릇을 바라보기만 하는 건 꽤나 신선한 비참함을 선사했다.
‘내가 뭐 노예가 되라고 시킨 것도 아니고.’
자기가 원해서 노예를 자처하는데 뭐 어떻게 하란 말인가.
차오르는 억울함에 그릇 위에 닭뼈를 하나 집어 오도독 씹었다.
‘뭐… 그래도 최악의 사태는 피해서 다행이네.’
사실 하은이 격렬하게 카시아를 거부했다면 꽤나 상황이 골치 아파질 뻔했다.
단일 전력으로 놓고 보면 어지간한 칠성은 가볍게 찍어누를 정도로 강력한 존재가 바로 카시아였으니까.
당장 오진만 해도 개천을 사용하지 않은 상태에선 카시아와 싸워 이길 자신이 없었다.
아니.
굳이 그런 이유 때문만이 아니라도.
“이렇게 다 같이 모여 먹는 식사 자리는 오랜만인 것 같네요.”
“그래? 아, 근데 어차피 너도 여기 눌러앉으려는 거 아냐?”
“…하은 씨만 허락해 주신다면요.”
“뭐, 누구 씨가 확장 공사를 해주신 덕분에 남는 방은 많으니까.”
“그, 그러면…!”
“시간 맞으면 이렇게 모여 먹자.”
“아… 네! 그렇게 해요!”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는 카시아의 모습을 보니 절로 입가가 느슨해졌다.
외로움과 고독에 점철되어 있던 억지 미소보다, 지금이 그녀의 입가에 걸린 환한 미소가 훨씬 더 보기 좋았다.
“아, 맞다. 말하는 걸 깜빡했네.”
식사 자리가 끝나갈 무렵, 하은이 뭔가 떠올랐다는 듯 오진을 돌아봤다.
“베가가 너 시간 될 때 성소로 한 번 오라더라.”
“뭐, 그거야 어려운 거 아닌데… 어차피 베가 조금 있으면 율법의 제약이 풀리는 거 아니었어?”
율법의 제약이 풀리고 의체 상태로 현신할 수 있다면 굳이 베가를 만나러 가기 위해 성소로 갈 필요는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베가가 아니라 다른 성좌가 널 찾는다고 하더라고.”
“다른 성좌가 나를? 누군데?”
“어… 잠만. 누구였더라?”
눈살을 좁히며 생각을 이어가던 하은이 손가락을 딱, 튕겼다.
“아, 맞다. 폴라리스. 폴라리스란 이름이었어.”
“…뭐?”
작은곰자리의 성좌, 폴라리스.
최초이자 최고(最高)의 성좌.
가장 찬란히 빛나는 별이라 불리는, 북극성 중에서도 정점에 위치한 존재.
“걔가 왜 날 찾아…?”
오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