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94)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94화
역천의 별 (7)
결과적으로 말하면.
별의 교접(?)을 통해 흑천의 힘을 제어하겠다는 원대한 계획은 실패로 끝났다.
‘더 이상 거문고자리 성흔의 마력이 안 늘어나.’
정확히 말하면 늘어나긴 했다.
다만 그 양이 열두 번째 개화를 한 흑천을 제어하기엔 턱없이 부족할 뿐.
‘하긴 흑천이 그리 쉽게 제어할 수 있는 거였으면 그놈이 그렇게 되지도 않았겠지.’
아쉬움을 완전히 지워낼 수는 없었지만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한 일이었다.
오진은 왼쪽 가슴 위에 새겨진 거문고자리 성흔에 손을 올렸다.
‘흑천을 완전히 제어하기 위해서는… 12성이 돼야 해.’
12성.
최초의 균열이 생긴 이후 수많은 각성자가 나타났음에도 단 한 명도 오르지 못한 경지.
칠성이라 불리는 각성자들도, 흑성회의 일인자 자리를 당당하게 차지하고 있던 카시아조차 아직 12성의 경지에는 올라서지 못했다.
인제 와서는 12성이라는 경지가 실제 존재하는 건지조차 알 수 없었지만.
‘있겠지.’
* * *
‘성’이 올라갈 때마다 성흔 옆에 반원을 그리며 새겨지는 획.
무려 열한 개의 획이 새겨진 성흔 옆에는 딱 한 자리가 비어 있었다.
오진뿐만이 아니라 대부분의 각성자도 ‘12성’이라는 경지가 존재한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아무도 그 경지에 올라서지 못했을 뿐이지.
모래알처럼 많은 각성자 중 아무도 올라서지 못한 경지.
오진이 도달해야 할 종착지는 그 누구도 올라서지 못한 미답(未踏)의 영역이었다.
‘뭐, 역천의 별이라 불릴려면 그 정도는 해야겠지.’
누구나 도달할 수 있는 경지에 올라서 놓고 세계의 구원자니 운명을 다시 쓸 별이니 거창하게 떠들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 생각을 하며 각오를 다지고 있을 때.
[왜, 왜 그리 심각한 표정을 짓는 게냐?]주섬주섬 드레스를 입은 베가가 불안한 표정으로 오진의 옷깃을 꾸욱 잡았다.
[호, 혹시… 본녀와의 그… 교, 교접이 만족스럽지 않았던 게냐?]“엉?”
눈을 내리깔며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베가.
그제야 오진은 자신이 그녀에 대한 배려가 없었음을 자각했다.
“그런 거 아냐.”
[하, 하지만 뭔가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았더냐!]“아니 그게.”
오진은 식은땀이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감각을 느끼며 허둥지둥 베가를 달랬다.
“베가 때문에 그런 거 아니야.”
[그럼 왜 그런 표정을 지었던 게냐?]“그… 기대했던 것만큼 성흔의 힘이 늘어나지 않아서 그랬어.”
베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대는 성흔을 키울 목적으로만 본녀와 몸을 섞는 게냐?]“그럴 리가 없잖아.”
[흥! 그런 것 치고는 바로 실망스러운 표정을 짓지 않았더냐?]“그건 그러니까….”
단단히 삐진 베가를 달래기 위해서는 꽤나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베가를 끌어안고 등을 토닥이며 몇 번의 입맞춤까지 나눈 후에야 그녀의 분노가 조금 누그러졌다.
[앞으로는 그… 벼, 별의 교접을 할 때는 다른 생각 말고 본녀만 생각하거라.]“명심하겠습니다.”
그래도 어떻게 베가의 화를 푸는 데 성공한 오진은 안도에 찬 한숨을 내쉬며 가슴을 쓸어내렸다.
[그나저나.]베가는 주변을 둘러보며 살짝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은하수의 샘이… 사라져 버렸구나.]찬란한 별빛으로 반짝이던 샘은 이제 모조리 흑천의 구름 속으로 흡수되었다.
오진은 어딘가 씁쓸한 눈으로 말라붙은 샘의 바닥을 내려다보는 베가를 돌아봤다.
“샘이 사라지면 성소에 무슨 문제가 생긴다거나 그런 건 없어?”
[글쎄… 본녀가 태어난 이후로 은하수의 샘이 말라붙은 건 처음이라 잘 모르겠구나.]아.
하긴.
폴라리스가 흑천에 의해 한 번 세계가 멸망하기 전부터 살아 있었다면 은하수의 샘이 말라붙은 건 베가로서도 처음 보는 광경일 것이다.
‘혹시 성소가 무너진다거나 그런 건 아니겠지?’
괜한 불안감이 스멀스멀 올라왔다.
[그리 걱정할 필요 없느니라. 은하수의 샘이 위치한 곳은 성소와는 또 다른 공간이니.]“또 다른 공간?”
[이곳에 올 때 걸어서 온 것이 아니지 않으냐?]“아.”
그러고 보니 그랬지.
[이 장소 자체는 사라질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성소에 영향은 없을 것이니라.]“그건 다행이네.”
고개를 끄덕이며 샘이 말라붙은 자리를 바라봤다.
‘생각보다… 작네.’
샘의 물이 가득 차 있었을 때는 진짜 밤하늘의 은하수를 올려다보는 것처럼 아득함과 경외감이 느껴졌었는데.
물이 모조리 말라붙은 은하수의 샘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좁고, 초라해 보였다.
‘이런 곳에서 헤아릴 수 없는 시간을 홀로 견뎌왔던 건가.’
흑천의 구름을 향해 스스로 몸을 던진 성좌의 모습을 떠올리자 입 안에 씁쓸함이 번졌다.
[…폴라리스.]마침 베가도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 말라붙은 샘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슬슬 돌아가자.”
[잠시만 기다리거라.]베가가 말라붙은 샘 중앙, 폴라리스가 처음 서 있었던 자리로 걸어갔다.
[오랜 세월 홀로 괴로움을 견뎌왔던 작은곰자리의 별이여.]기도하듯 두 손을 모은다.
베가의 몸 주변을 흘러나온 찬란한 은빛이 말라붙은 샘을 은빛으로 물들였다.
초라하게 말라붙어 있던 샘이 눈부신 은빛으로 반짝였다.
“아….”
절로 새어 나오는 탄성.
오진은 주변을 가득 채우는 은빛을 돌아보며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이게 거문고자리의 성역.’
자신이 펼치는 조잡한 성역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었다.
몸을 굽혀 은을 녹여 들이부은 것처럼 찬란한 은빛으로 빛나는 바닥을 손에 댔다.
파직, 파지지직!
“크읏!”
가볍게 손을 가져다 대기만 했을 뿐인데도 사납게 푸른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함부로 손을 대면 아무리 그대라 해도 위험할 것이니라.]성역 전개를 마친 베가가 오진을 향해 천천히 걸어왔다.
“이건….”
[그래도 북극성이 마지막으로 머물렀던 자리를 말라붙은 채로 내버려 둘 수 없지 않으냐.]이건 베가가 폴라리스에게 보내는 일종의 경의이리라.
오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베가의 손을 잡았다.
손바닥을 타고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가 마치 배려심 깊은 베가의 마음을 보여주는 것 같았다.
같은 북극성이라 불릴지라도, 사실 그녀와 별다른 인연이 없었을 폴라리스의 죽음에도 진심 어린 애도를 해줄 수 있는 따스한 마음 지닌 여인.
그런 그녀를 향해 오진이 해줄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그런 것치고는 방금 전까지 여기서 뜨거운 별의 교접을….”
[이익!]뻐억!
베가의 주먹이 오진의 명치를 사납게 후려쳤다.
“커헉! 쿨럭, 쿨럭!”
아마 이 광경을 다른 연인들이 본다면 입을 모아 말했으리라.
처맞을 만했다고.
작은곰자리의 성흔을 흡수한 오진은 베가와 함께 성소 밖으로 나왔다.
“이제 제약은 다 사라진 거야?”
[아직 조금 남아 있지만 의체로 있는 것 정도는 문제 되지 않느니라.]의체 상태로 오진의 머리 위에 올라탄 베가는 마치 마차를 끄는 마부처럼 오진의 머리칼을 쭈욱쭈욱 잡아당겼다.
“아니 왜.”
[아까 전에 그대가 한 무례한 농담이 계속 떠오르는구나.]“크흠. 미안하다니까 그러네.”
뭐가 너무 심각한 분위기라서 자기도 모르게 농담을 내뱉어버리고 말았다.
[이잇, 이잇. 용서할 수 없느니라.]아직 화가 덜 풀렸는지 계속해서 머리칼을 잡아당기는 베가.
오진은 침음을 삼키며 베가를 머리 위에 태운 채 집으로 향했다.
[그나저나 아까 전에 뱀주인자리 성좌와 만났다는 건 무슨 얘기느냐?]“아, 그거?”
오진은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뫼비우스와 있었던 일들을 차근차근 베가에게 늘어놓았다.
모든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베가는.
[이잇! 이잇!]더욱 격렬하게 오진의 머리칼을 잡아당겼다.
“이러다 머리털 다 뽑히겠어요, 여신님.”
[흐응! 그대처럼 말 안 듣는 아이는 대머리가 돼도 되느니라!]아니 그건 좀.
[본녀가 뫼비우스만큼은 주의하라 경고하지 않았더냐!]“뭐… 내가 원해서 만난 건 아니야.”
엄밀히 말하면 오진도 피해자였다.
베가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방금 전까지 신나게 잡아당기던 오진의 머리칼을 상냥하게 쓰다듬었다.
[그래도 그대가 무사하다니 다행이구나.]“운이 좋았지.”
아마 뫼비우스와 끝까지 싸웠다면 어떻게 됐을지는 장담할 수 없었다.
‘다시 만났을 때는 얘기가 좀 다를 거야.’
오진은 이번에 얻은 힘들을 떠올리며 현관문을 열었다.
“어머? 생각보다 빨리 오셨네요?”
“응? 베가도 왔네? 이제 제약 다 풀린 거야?”
“기다리고 있었어요.”
집에 들어가자 이사벨라와 하은, 카시아가 오진을 반겼다.
“성소에서는 별일 없으셨나요?”
“일이라고 하면 좀 있었지.”
오진은 성소에서 있었던 일들을 세 여인에게 설명했다.
“허… 그러니까 네가 진짜 역천의 별이었다는 거야?”
“그렇다고 하더라고.”
“으음…. 뭔가 그리 거창한 타이틀을 다니까 내가 아는 오지니가 아닌 것 같은데.”
하은은 팔짱을 낀 채 오진을 위아래로 훑어봤다.
“뭐, 신경 쓰지 마. 어차피 역천의 별이라고 떡 하나 더 주는 것도 아니니까.”
“그러면 이제 성좌분들도 오진 씨가 흑천의 주인이란 걸 다 아시는 건가요?”
[그건 아니니라.]이사벨라의 물에 베가가 고개를 가로저었다.
[나의 아이가 역천의 별이라는 건 알고 있지만, 다른 성좌들이 아는 ‘역천의 별’은 어디까지나 회귀자라고만 알고 있을 것이니라.]“그럼 오진 씨가 또 다른 흑천의 주인이라는 건 성좌들에게 숨겨야겠네요?”
[아마… 그리해야 할 것 같구나. 본녀의 증언이 있다고 한들 흑천에 대한 거부감은 다들 가지고 있을 것이니.]오진과 깊은 유대가 있는 베가와 미래를 볼 수 있는 폴라리스는 그가 흑천의 주인이라는 사실에도 큰 적의를 표하지 않았지만.
‘다른 성좌들은 다르겠지.’
자신이 천마와 같은 흑천의 주인이라는 사실은 반드시 숨겨야 했다.
“그럼 좀 이르긴 하지만 저녁 식사 준비 시작할까요?”
성소에서 많은 것을 얻은 것과는 별개로 시간 자체는 그리 오래 흐르지 않았다.
“아니, 그 전에 난 할 게 따로 좀 있어서.”
“무슨 일이신데요?”
오진은 왼쪽 가슴 위에 새겨진 열한 번째 성흔을 쓰다듬으며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
일부 힘이 제약됐다 해도 열두 번째 개화를 마친 흑천.
11성에 올라선 거문고자리 성흔.
거기에 새롭게 얻은 특성 ‘미래시’까지.
“얻은 게 있으면 써보기는 해야지.”
오진은 다소 들뜬 표정으로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