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397)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397화
역천의 별 (10)
“그게… 무슨 말씀이에요?”
카시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천마.
지난 10년간 그녀를 꼭두각시로 부렸던 존재를 떠올리자 등골을 타고 오싹한 전율이 퍼졌다.
“서, 설마 이 주변에 지금 천마가 있다는 말씀인가요?”
“아니, 카시아 네 성흔 안에서 느껴진다고.”
주변에서 천마의 기운이 느껴졌다면 오진이 알아차리기에 앞서 베가가 먼저 눈치챘을 것이다.
“…제 성흔이요?”
“응.”
뱀주인자리의 성흔 안에서 왜 갑자기 천마의 기운이 느껴지는지는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애초에 검은 별의 성좌의 성흔에는 흑천의 힘이 깃들어 있으니까.’
그녀에게 성흔을 준 성좌부터가 천마의 힘을 받아들였는데 그녀가 지닌 성흔에서 천마의 기운이 느껴지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당연하리라.
‘그래서 지난 10년간 천마의 꼭두각시가 된 채 살아왔던 거고.’
오진은 ‘천마’라는 단어를 듣자마자 불안한 표정으로 자신의 옷깃을 살며시 움켜쥐는 카시아를 바라보며 씁쓸한 미소를 지었다.
“제 성흔 안에서 천마의 기운이 느껴진다는 게 무슨 말씀이시죠?”
“그렇게 겁먹을 필요 없어. 카시아 너도 검은 별의 성좌의 성흔에 천마의 힘이 깃들어 있다는 건 알고 있잖아?”
무려 10여 년을 천마의 꼭두각시가 된 채 살아왔으니 누구보다 더 잘 알겠지.
“아, 예. 그건 알고 있는데요….”
갑자기 그걸 왜 물어보냐는 듯한 눈빛으로 고개를 갸웃거리는 카시아.
뱀주인자리의 성흔에 천마의 힘 일부가 깃들어 있다는 건 오진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 아니던가?
오진은 의문을 담은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카시아의 성흔을 조심스럽게 매만지며 입을 열었다.
“이제까지는 천마의 기운을 느끼지 못했거든.”
“예?”
“천마의 힘이 깃들어 있다고 해도 극히 일부에 불과하잖아?”
계보로 따지면 천마 -> 성좌 -> 성흔을 걸쳐 힘이 전달되다 보니 카시아와 이사벨라와 같은 각성자에게 깃들게 된 흑천의 힘은 극히 일부에 불과했다.
물론 그 정도만으로도 흑천의 ‘지배’는 통하게 되는 모양이지만.
어쨌든 이제까지 오진이 감지할 수 있는 수준의 힘까지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젠 느껴져.’
알 수 있었다.
느낄 수 있었다.
그녀의 가슴에 새겨진 뱀주인자리의 성흔 안에 깃들어 있는 흑천의 기운이.
‘없었던 게 갑자기 생긴 게 아니야.’
아마 처음 뫼비우스가 그녀에게 성흔을 내려준 순간부터 줄곧 깃들어 있었겠지.
다만.
이제까지는 그걸 느낄 수 있을 정도의 수준이 되지 못했던 것뿐.
즉, 바꿔 말하면.
“이제까지 느끼지 못한 기운이 지금 느껴지신다는 말씀은 그럼….”
“그래. 이제야 그나마 비슷한 수준이 됐다는 거지.”
지금 자신은 ‘천마’의 경지의 발끝까지는 따라잡았다는 뜻이리라.
‘발끝까지 따라잡았다는 게 솔직히 좋아해야 할 일인지는 잘 모르겠지만.’
닿지도 않을 까마득한 절벽 위를 하염없이 올려다보는 것보다는 벼랑 끝에 대롱대롱 손을 짚은 채 매달려라도 있다는 사실은 꽤나 고무적인 일이었다.
“대, 대단하세요. 오진 님!”
카시아는 에메랄드빛 눈동자를 초롱초롱 반짝이며 감탄 어린 목소리로 외쳤다.
천마가 이룩한 경이로운 경지에 대해 여기 있는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로서는 순수한 경외심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호들갑 떨 것까진 없어.”
흥분에 찬 카시아의 목소리에 오진은 민망하다는 듯 헛기침을 내뱉었다.
아니 뭐 진짜 천마랑 동급이 된 것도 아니고 겨우 바짓가랑이를 붙잡은 수준에 올라선 건데 이렇게 대단하다는 말을 듣기도 좀 그랬다.
“아뇨! 그게 얼마나 대단한 일인데요!”
“하지 말라니깐.”
고개를 저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어쨌든, 시험해 보고 싶은 게 하나 생겼어.”
“시험해 보고 싶으신 거라뇨?”
“잠깐만 가만히 있어 봐.”
오진은 카시아의 성흔에 손을 댄 채로 천천히 흑천의 힘을 끌어올렸다.
쿠르르륵.
손끝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먹구름이 뱀주인자리의 성흔 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읏…!”
카시아의 몸이 움찔 떨렸다.
오진은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정신을 집중했다.
‘느껴져.’
밤하늘에 떠오른 별자리.
찬란하게 빛나는 별빛 안에 몸을 숨긴 검은 먹구름이 보였다.
오진은 뱀주인자리 성흔 안에 숨겨진 천마의 흑천을 향해 천천히 기운을 뻗었다.
성흔 안에 기생충처럼 자리를 잡고 있던 검은 먹구름을 붙잡아 강제로 잡아당겼다.
“아흑! 으, 아으…!”
카시아의 몸이 펄떡 튀어 오르며 발작을 일으키듯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이제껏 그녀의 성흔에 뿌리내리고 있던 흑천의 기운이 뿌리째 뽑혀 나가는 감각은 마치 영혼의 일부가 도려내지는 듯한 고통이 되어 그녀를 뒤흔들었다.
“조금만 참아.”
“하읏… 예, 오, 오진 님.”
머리가 새하얗게 타들어 가는 고통 속 들려오는 따스한 목소리에 카시아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오진은 뱀주인자리의 성흔 안에 자리 잡은 천마의 기운을 조심스럽게 제거했다.
하지만.
‘마력이 너무 불안정해.’
흑천의 기운이 사라지자 성흔의 마력이 거칠게 요동치며 그녀의 전신을 헤집기 시작했다.
마치 갑작스럽게 디디고 있던 땅이 훅 꺼져버려 발버둥을 치는 듯한 모습이랄까.
‘이미 천마의 기운도 성흔의 일부가 되어버렸던 거야.’
그렇다면 단순한 ‘제거’만으로는 카시아의 성흔을 원 상태로 돌려놓는 것은 불가했다.
악성 종양이라고 해도 신체의 일부인 이상 강제로 도려내게 되면 피를 보게 되는 법이었으니까.
‘그렇다면.’
오진은 자신의 기운을 흘려 넣어 천마의 흑천이 떨어져 나간 자리를 메꿨다.
“하아, 하아!”
거칠게 요동치던 마력이 진정되며 카시아의 숨소리가 안정됐다.
“후우. 끝났어.”
오진은 이마에 맺힌 식은땀을 닦아내며 카시아에게서 떨어졌다.
“이제 다시는 놈한테 ‘지배’를 받는 일은 없을 거야.”
마경에서 천마가 모습을 드러냈을 당시 카시아와 이사벨라는 그가 지닌 ‘흑천’의 영향으로 고통을 호소하며 쓰러진 적이 있었다.
하지만.
성흔에 깃든 천마의 기운을 완벽하게 도려낸 후 자신의 것으로 대체한 이상 더 이상 그의 ‘지배’에 영향을 받을 일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천마가 지닌 흑천이 완전히 소멸한다고 해도 카시아와 이사벨라가 따라 죽게 되는 일도 없을 터.
그녀를 옭아매고 있던 모든 족쇄가 이로써 완전히 사라지게 된 것이다.
‘물론 그 족쇄가 나로 바뀌긴 했지만.’
어차피 자신이 ‘지배’ 특성을 사용하지 않는 이상 없는 것과 마찬가지인 족쇄였다.
“…아.”
카시아의 녹색 눈동자가 동그랗게 뜨였다.
그녀는 성흔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제 안에서 천마의 기운이 완전히 사라졌다는 말씀이신가요?”
“맞아.”
“…….”
등골을 타고 짜르르 퍼지는 전율.
카시아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히기 시작했다.
“뭐, 뭐야? 왜 그래?”
“…흐윽.”
당황하는 오진을 보며 카시아는 참았던 울음을 터트릴 수밖에 없었다.
그는 알고 있을까.
아무렇지도 않다는 한 그의 행동이 그녀에게 있어 얼마나 큰 의미를 갖고 있는지.
“항상… 항상 불안했단 말이에요.”
자신의 안에 천마의 기운이 남아있다는 사실이.
천마가 원한다면 언제나 그녀를 다시 꼭두각시로 만들어 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이.
그리고 무엇보다.
“만약 제 손으로 오진 님을 또 다치게 하진 않을까… 계속 걱정했다고요.”
“…….”
그런 걸 걱정하고 있었던 건가.
오진은 쓴웃음을 지으며 훌쩍이는 카시아의 등을 토닥였다.
‘평소 여유로는 모습이랑 다르게 꽤 마음이 여리단 말이지.’
카시아나 이사벨라나 둘 다 자매 아니랄까봐 이런 부분에서도 비슷한 모습을 보였다.
“괜찮아. 이젠 그럴 걱정 없어.”
“훌쩍… 고마워요.”
카시아가 오진의 가슴에 머리를 기대며 배시시 미소 지었다.
그렇게 훌쩍이는 카시아를 한창 달래주고 있었을 때.
“언제까지 오진 씨한테 달라붙어 있을 거야?”
이사벨라가 다가와 카시아의 어깨를 잡아당겼다.
카시아가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가늘게 눈을 뜨며 이사벨라를 흘겨봤다.
“한참 분위기 좋았는데 왜 방해하는 거니?”
“흥. 그럼 불륜의 현장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겠어?”
“어머, 누가 들으면 이미 결혼이라도 한 줄 알겠어?”
또다시 으르렁거리기 시작하는 두 자매.
오진은 한숨을 내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그만 좀 싸워 둘 다.”
“왜, 재밌는데?”
하은이 와그작와그작 팝콘을 씹어먹으며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지금 누나가 재밌어할 때야?”
사실 누구보다 이 상황이 불편한 건 하은이어야 하지 않는가.
“누구 씨 때문에 이쪽으로는 멘탈이 좀 단련됐거든.”
“…크흠.”
반론할 말이 사라진 오진은 괜한 헛기침을 내뱉으며 고개를 저었다.
그런 그를 향해 이사벨라가 다가왔다.
“오진 씨, 그럼 제 성흔 안에 깃든 천마의 기운도 지워주실 수 있는 거죠?”
“물론이지.”
둘이 지닌 성흔의 종류가 다르긴 하지만 천마의 힘이 깃들어 있는 건 같으니 자신의 흑천으로 대체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그럼 부탁드릴 수 있을까요?”
싱긋 미소 지은 이사벨라가 오진의 손을 잡아끌어 왼쪽 가슴 위에 올렸다.
물컹.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압도적인 존재감.
순간 거대한 산맥이 눈앞을 가로막는 듯한 환영이 머리를 스쳤다.
“…….”
“어머, 왜 그러세요?”
이사벨라가 꺄르르 웃음을 터트리며 장난기 어린 눈빛을 보냈다.
뒤에서 이를 지켜보던 카시아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어째 제 걸 만지셨을 때랑은 반응이 좀 많이 다르시네요?”
“그건 당연한 거 아니야 언니?”
승자의 미소를 지으며 한껏 어깨가 높이 올라간 이사벨라.
카시아는 신경질적으로 손톱을 으득으득 물어뜯으며 사나운 눈빛으로 이사벨라를 노려봤다.
“슬슬 집중해야 하니까 그만해.”
오진은 손바닥을 타고 전해지는 감각을 최대한 무시하며 흑천의 기운을 끌어올렸다.
카시아 때와 마찬가지로 이사벨라의 성흔 안에 깃들어 있는 천마의 기운을 뿌리 뽑은 후 자신의 것으로 대체했다.
“…아.”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나지막한 탄성.
이사벨라는 왼쪽 가슴에 새겨진 성흔을 매만지며 환한 미소를 지어 보였다.
“제 안에… 오진 씨가 들어온 기분이에요.”
“흑천 말하는 거 맞지?”
“뭔가 따듯하고… 포근해요.”
“아니.”
저기요 아가씨.
나한테 왜 그래요.
오진이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고 있을 때.
“으읏…! 아윽!”
이사벨라의 표정이 일그러지며 핏빛 마력이 사납게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안개처럼 넓게 펼쳐지는 마력.
이사벨라는 왼쪽 가슴을 부여잡은 채 고통스러운 신음을 내뱉었다.
“…이건.”
각성자라면 모를 수 없는 광경.
얼마 전 오진도 겪은 적 있던 ‘성흔의 격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