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400)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400화
막간 – 운명은 급류와 같이 (3)
“…다 언니 때문이야.”
“그러게, 누가 그렇게 욕심을 내래?”
하은에 의해 방에서 쫓겨난 두 자매는 서로를 사납게 노려봤다.
그것도 잠시.
흥분했을 때는 미처 느끼지 못했던 깊은 자괴감이 물 밀리듯 밀려왔다.
“하아… 이게 뭐 하는 짓인지.”
“웬일로 같은 생각이네.”
나이 먹을 만큼 먹은 성인이 케이크를 두고 다투는 6살짜리 마냥 투닥거렸으니 자괴감이 밀려올 만도 했다.
‘언니랑만 있으면 이렇다니깐.’
이사벨라는 입술을 잘근 깨물며 카시아를 돌아봤다.
어째서일까.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게 넘길 일도 카시아만 연관되면 머리에 열이 뻗쳐 올라 참을 수가 없었다.
어렸을 적 정원에서 철없이 뛰어놀던 시절로 되돌아간 듯한 느낌이랄까.
오진 앞에서 못 볼 꼴을 보여줬다는 생각에 수치심이 머리끝까지 차올랐다.
‘회귀라도 하고 싶은 기분이야.’
몇 년, 몇십 년을 돌릴 필요도 없다.
한 2~3시간 정도만이라도 시간을 돌릴 수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아.”
뒤늦게 후회해 봤자 이미 오진 앞에서 온갖 추태를 보인 후였다.
깊은 한숨과 함께 어깨가 축 늘어졌다.
카시아는 피식 실소를 흘리며 이사벨라에게 다가갔다.
“오진 님이 집에 있으신 동안은 잠깐 휴전하지 않을래?”
“…휴전?”
데친 시금치처럼 축 늘어져 있던 이사벨라의 어깨가 조금 올라왔다.
그녀는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눈초리로 카시아를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언니 쪽에서 일방적으로 시비를 걸어놓고 인제 와서 싸우지 말자고 하는 거야?”
“내가 언제 시비를 걸었다고 그러니?”
“아까 전부터…!”
“네가 오진 씨와의 시간을 바랐듯, 나도 그분과의 시간을 바랐을 뿐이야.”
이사벨라의 눈이 가늘어졌다.
“전에 오진 씨의 연인이 될 생각은 없다고 하지 않았어?”
“으음. 그러긴 했지만.”
카시아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머리를 쓸어넘겼다.
“…너랑 달리 지난 3개월간 한 번도 못 뵌 건 맞지 않니?”
“…….”
그녀의 말마따나, 종종 오진이 수련하고 있는 트레이닝 시설에 찾아간 이사벨라와 하은, 베가와 달리 카시아는 세계 곳곳을 돌아다니며 검은 별의 성좌들을 쫓는 것에만 집중했다.
아쉽게도 성과는 딱히 없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녀의 노력을 폄하할 수는 없었다.
“하아. 알았어. 오진 씨가 집에 있는 동안만큼은 서로 방해하지 말자.”
이사벨라는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연인이 될 생각은 없다고 말하지만, 카시아가 오진에게 품고 있는 감정이 뭔지 모를 정도로 그녀는 눈치 없지 않았다.
오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마음 자체는 자신과 전혀 다르지 않은 것이다.
‘그러니까 하은 언니도 카시아를 용서해준 거고.’
하은이 자신을 연인으로 인정해 줬을 때인가.
오진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사람이 주변에 많을수록 그가 더 안전해지기에 자신을 받아들여 주겠다는 말을 한 적이 있었다.
그리고 지금 카시아만큼 오진에게 헌신적이며 실력까지 갖춘 아군은 온 지구를 다 뒤져도 찾을 수 없을 것이다.
‘참아야지. 오진 씨를 위해서라면.’
카시아와 오진이 달라붙어 있는 모습을 볼 때마다 머리에 열이 뻗쳐 오르긴 했지만.
오진을 위해서라도 감정을 다스릴 필요가 있었다.
하은이 그러했던 것처럼.
“후훗, 우리 벨라는 말이 잘 통해서 좋네.”
“언제는 욕심쟁이라며 싫다고 하지 않았어?”
“욕심쟁이인 것과 말이 잘 통하는 건 다르지 않니?”
“그건 그렇지만….”
“그리고.”
카시아가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이사벨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키 차이가 있기 때문에 썩 좋은 그림은 아니었지만.
“욕심쟁이인 벨라라도 딱히 싫은 건 아니란다?”
머리 닿은 카시아의 손길에는 분명 따스한 온기가 스며들어 있었다.
“…흥.”
이사벨라는 코웃음을 치면서도 카시아가 머리를 쓰다듬기 편하도록 살짝 몸을 숙였다.
머리를 쓰다듬던 카시아가 꺄르르 웃음을 터트렸다.
서로 매일 같이 티격태격 다투면서도 마음속 한편에선 서로를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 것.
콜그란데라는 이름에 가려져 있던 둘의 관계는 여느 자매의 모습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언니 요리할 줄 알아?”
“갑자기 요리는 왜?”
“점심 준비할 겸같이 장이나 보러 가려고.”
“흐음. 근데 방금 아침 식사하시지 않았니?”
“피로 회복에 좋은 요리를 해드리고 싶어서.”
생각하고 있는 건 삼계탕.
진한 육수에 몸에 좋은 약재와 닭을 통째로 넣고 팔팔 끓여 만드는 전통 한식이었다.
“삼계탕을 만들려면 시간이 좀 오래 걸려서 미리미리 준비해야 해.”
“…진짜 주부가 다 됐구나.”
“어쨌든, 같이 갈 거야 말 거야?”
“오랜만에 벨라랑 외출이라니 벌써 두근거리네~”
카시아는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이사벨라를 따라 밖으로 나갔다.
달칵.
현관이 닫히는 소리와 함께.
“…갔나?”
방문이 열리며 하은이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옆에 서 있는 오진이 고개를 끄덕였다.
“나간 거 같네.”
“거봐, 내가 그랬지? 쟤들 맨날 티격태격하다가도 막상 서로 잘 지낸다니깐?”
“…원래 자매는 다 저런 건가?”
30분 전만 해도 서로 머리끄덩이를 붙잡으며 싸웠던 게 맞나 싶을 정도로 밖으로 훈훈한 분위기였다.
“그야 난 모르지.”
“뭐, 어쨌든 이제 좀 살겠네.”
오진은 기지개를 켜며 거실로 나와 소파에 앉았다.
TV를 켜서 뉴스 채널을 틀었다.
카시아의 말대로, 뉴스에선 최근 마수들의 출몰이 급격히 줄어들었다는 소식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야야. 뭔 아침 댓바람부터 뉴스야? 빨리 안 꺼?”
하은이 옆자리에 앉으며 TV를 껐다.
“아, 왜. 세상 어떻게 돌아가고 있는 좀 보겠다는데.”
“주식 물린 아저씨냐? 너 없는 동안 아무 일도 없었어 인마.”
피식 웃으며 오진의 머리를 헝클였다.
“몸은 좀 어때?”
“아직 머리가 좀 띵하긴 하네.”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될 때까지 수련하래?”
“그건… 뭐.”
솔직히 할 말이 없었다.
성장이 아무리 급했다고 해도 몸을 망칠 정도로 수련을 이어간 건 명백한 그의 실책이었으니까.
“베가랑 리아크도 조금 있다가 온다더라고.”
“…벨라한테 연락해서 재료를 좀 많이 사 오라 해야겠네.”
베가는 몰라도 리아크는 덩치에 걸맞은 대식가였다.
“끙차, 그래도 오랜만에 우리 오지니 얼굴 보니 좋네.”
하은이 자연스럽게 오진의 허벅지 위에 늘씬한 두 다리를 올리며 소파에 드러누웠다.
이사벨라가 같이 살기 전, 아니 그 후로도 자주 하던 자세였다.
“어우, 역시 이 감촉이야! 적당히 따따시한 게 다리 올려두기 최고라니깐.”
“저 그래도 나름 환자인데요.”
“과로로 쓰러진 멍청한 놈이 뭔 환자여.”
“너무해.”
그래도 나름 열심히 해보겠다고 그런 건데.
“그래서 과로로 쓰러질 만큼의 성과는 좀 있었어?”
“응.”
성역 전개의 범위도 수십 미터로 늘었고 급격하게 강해진 흑천과 거문고자리의 성흔을 다루는 것 또한 많이 익숙해졌다.
“다행이네.”
하은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오진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린 그녀는 상냥한 손길로 머리를 쓰다듬었다.
“우리 오지니 장하다, 장해~”
“누가 보면 누나 자식인 줄 알겠다?”
“뭐, 어렸을 때부터 내가 끼고 키웠으니 비슷하다고 볼 수 있지.”
뭐야.
우리 근친이었어?
[보, 본녀를 두고 어미를 자처하지 말 거라!]그때.
오진의 펜던트가 빛을 뿜으며 손바닥만 한 크기의 여신님이 허공에 나타났다.
그녀는 하은의 손을 쳐내며 오진의 머리 위에 안착했다.
흐음!
오진의 머리 위에 올라탄 채 거만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오진의 어미는 본녀 이외에는 없느니라!]“나 엄마 없는데.”
뭔가 입 밖으로 내뱉고 나니 터무니없는 패드립 같이 느껴지지만.
실제 어머니라는 존재의 얼굴도 모른 채 자라왔던 건 사실이다.
뭐, 그 부분에 대해서는 회한이나 갈증을 느끼는 건 아니다.
덕분에 부모라는 존재보다도 소중한 사람을 만날 수 있게 됐으니까.
[어허. 옛말에 부모의 사랑을 모르고 자란 아이는 엇나가기 쉽다 했느니라.]“…그래서 대신 그 역할을 해주겠다고?”
[후훗. 물론이니라!]근데 어머니의 역할을 대신해주는 것 치고는 그… 아니다.
한마디 하려던 오진은 이내 피식 웃으며 고개를 저었다.
베가의 마음 씀씀이에 굳이 토를 달 필요는 없으리라.
“…일어나자마자 염병을 떨고 있구나.”
베가의 뒤를 따라 나타난 리아크가 한심하다는 듯 혀를 찼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냐?”
“흥. 저 도마뱀 여자가 매일 같이 찾아와서 잘 못 지내고 있다.”
리아크는 오진의 옆자리에 앉은 하은을 힐끔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전사라는 놈이 고작 제 몸 관리조차 실패해서 쓰러지다니, 한심하기 짝이 없구나 애송이.”
“왜, 걱정했어?”
“걱정은 누가 걱정했다는 거냐!”
리아크가 사납게 으르렁거리며 눈을 찌푸렸다.
하은의 입꼬리가 히죽 올라갔다.
“말은 저렇게 해도 똥강아지가 너 엄청 걱정했다?”
“무, 무슨 헛소리를 하는 거냐!”
“성흔이 손상됐을 수도 있다면서 성소로 데려와야 했었잖아?”
“그, 그건!”
리아크가 당황한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물론, 그의 우려와 달리 성흔의 손상이 없다는 건 오진이 기절한 사이 베가가 이미 확인했다.
“새끼. 걱정했으면 걱정했다고 하지.”
“다, 닥쳐라! 애초에 네놈이 제 몸조차 관리하지 못하는 애송이라서 생긴 일이지 않은가!”
괜히 성난 목소리로 외치는 리아크를 보며 오진은 웃음을 터트렸다.
“어머, 오진 씨 벌써 일어나셨어요?”
“벨라랑 같이 장 보고 왔어요~”
잠시 잡담을 나누고 있자니 이사벨라와 카시아가 큼지막한 봉투를 손에 들고 돌아왔다.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금방 만들어드릴게요.”
“아까 죽 먹어서 괜찮아.”
“죽은 금방 배가 꺼지잖아요. 이럴 때 일수록 든든하게 먹어야 한다고요.”
이사벨라는 의욕에 찬 표정으로 주방으로 향했다.
“도와줄 거 있니?”
카시아가 못 말리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이사벨라를 따라 주방으로 향했다.
곧이어 부산스러운 소리와 함께 닭 육수를 우리는 냄새가 풍겨왔다.
‘좋네.’
이게 얼마 만에 느껴보는 평온함일까.
오진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소파에 느긋이 몸을 기댔다.
푹신한 가죽의 감촉과 함께 포근한 행복감이 차올랐다.
내가 바꾼 거야.
이사벨라와 카시아가 저렇게 사이좋게 떠들게 된 것도.
리아크가 트라우마를 극복하고 ‘벽’을 넘게 된 것도.
베가가 신전 밖을 벗어나 사랑이라는 감정을 품게 된 것도.
하은이 눈과 다리를 되찾고 행복하게 웃을 수 있게 된 것도.
자신이 정해진 운명을 뒤바꿨기 때문이었다.
‘모두 다 나 혼자만의 힘으로 한 건 아니었지만.’
그가 없었다면 결코 이뤄지지 않았을 변화였다.
‘그러니까.’
할 수 있다.
바꿀 수 있다.
정해진 운명을, 이야기의 끝맺음을.
자신의 손으로, 자신의 힘으로, 자신의 의지로.
새롭게.
여기 있는 모두가 지금처럼 행복하게 웃을 수 있는 결말로.
‘난 역천의 별이니까.’
아직은 천마를 상대하기에 부족하다지만.
지금만 해도 하루하루가 다르게 강해지고 있지 않은가.
이대로 계속해서 성장해 간다면 앞으로의 미래도 충분히 바꿀 수 있을….
“저… 오, 오진 씨.”
주방에 있던 이사벨라가 한 손에 스마트폰을 쥔 채 창백한 표정으로 다가왔다.
“왜 그래?”
“티, 티비. 티비 빨리 켜보세요, 지금!”
다급한 외침에 고개를 갸웃거리며 TV를 켰다.
-긴급 속보 전해드립니다.
딱딱한 표정의 아나운서 뒤로 불길에 휩싸인 도시가 보인다.
-현재 로마가 정체 모를 마수 무리에게 습격당했습니다.
불길에 타오르는 도시를 보며 오진은 어딘가 ‘낯익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런 전조도 없이 나타난 수십 만에 달하는 마수 무리에 의해 현재 로마를 비롯한 이탈리아 전역은 궤멸에 가까운 피해를 입었으며….
어디서 봤더라?
아아, 그래.
이신혁의 기억 속에서 봤던 불길에 휩싸인 로마의 모습.
그때의 모습과 지금 화면 너머로 보이는 도시의 모습이 정확히 일치하고 있었다.
-전문가들은 이번 사건으로 인해 최소 백만 명이 넘는 민간인 피해자가 발생했을 것으로 추측하고 있습니다.
이신혁의 기억과 달리 ‘피의 마녀’는 존재하지 않았지만.
이탈리아는 멸망했다.
수백만에 달하는 사람들이 불길에 타오르고, 날카로운 이빨에 짓이겨진 채.
운명처럼.
운명대로.
결말을 맞이했다.
-그대는 운명이라는 걸 어떻게 생각하지?
문뜩.
폴라리스의 말이 떠올랐다.
“…급류.”
그때는 이해하지 못했지만.
이제는 그 말의 뜻을 알 수 있었다.
운명은 마치 급류와도 같이 아무리 틀어막으려 해도 정해진 방향으로 사납게 흘러간다는 걸.
그리고 아직.
자신은 ‘운명’이란 거대한 급류의 흐름을 바꾸지 못했다는 사실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