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401)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401화
소집령 (1)
차갑게 얼어붙은 공기.
방금 전까지 따사로운 행복감에 가득 차 있었기 때문일까.
얼음물이 들이 부어진 듯 싸늘한 분위기가 살을 에일 듯했다.
“뭐야… 이게?”
멍하니 티비를 바라보던 하은이 믿을 수 없다는 듯 입을 열었다.
“여, 영화 채널 잘 못 튼 거 아니지?”
너무 갑작스러운 상황에 영화 타령을 하고 말았지만, 티비에서 흘러나오는 영상이 영화가 아니라는 것 정도는 그녀 또한 잘 알고 있었다.
화마에 휩싸인 도시.
영상 너머로 들려오는 끔찍한 비명과 절규.
그곳에는 인위적인 영상으로는 만들어낼 수 없는 생생한 절망이 있었다.
“…아.”
이사벨라는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휘청이는 그녀의 몸을 카시아가 부축했다.
“왜… 어, 어째서?”
“진정하렴.”
이탈리아는 이사벨라가 나고 자란 고향이니만큼 충격이 더 클 수밖에 없었다.
오진은 잘근 입술을 깨물며 영상 속 흘러나오는 불타는 로마의 풍경을 눈에 담았다.
이신혁의 기억을 통해 본 광경과 몇 가지 다른 점이 있었다.
‘흡혈귀가 아니야.’
이신혁의 기억 속 로마는 ‘피의 마녀’가 이끄는 흡혈귀 군단에 의해 멸망했지만, 지금 로마는 흡혈귀 대신에 서로 다른 종족의 마수 무리에 의해 습격당하고 있었다.
‘서로 다른 종족의 마수라.’
마수라고 해서 ‘종’의 차이가 없는 건 아니다.
동물에도 사자, 토끼, 호랑이처럼 무수한 종이 나뉘어 있듯 ‘마수’라는 카테고리 안에서도 수십, 수백에 달하는 종이 나뉘어 있었다.
사자와 토끼가 사이좋게 함께 있지 않듯, 그들 또한 본능적으로 서로 다른 종을 배척한다.
‘하지만.’
영상에서 보이는 마수 무리는 서로 다른 종인데도 불과하고 마치 훈련받은 군대처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서로 다른 종의 마수를 꼭두각시처럼 부릴 수 있는 존재.
오진이 알고 있는 한 그런 일을 할 수 있는 건 둘뿐이었다.
“…카시아.”
오진은 자신이 알고 있는 ‘둘’ 중 한 명에게 고개를 돌렸다.
이사벨라를 부축하며 무거운 표정으로 티비를 바라보고 있던 카시아가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뫼비우스의 짓이 맞을 거예요.”
“…….”
흐, 오진은 사납게 입술을 말아 올리며 이마를 짚었다.
자조 섞인 웃음이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뭐가 바꿀 수 있다는 거냐.’
오만하고, 교만했다.
안일하고, 안락했다.
지난 3개월간 육체는 폭발적인 성장을 했지만, 정신은 평화로운 일상에 녹슬고 무뎌져 버렸다.
깊게 침잠한 눈빛이 타오르는 불꽃을 응시했다.
-현 상황에 대해서 칠성 의회는….
치직, 치지지직.
순간, 화면에 노이즈가 생기며 영상이 일그러졌다.
고장 난 라디오처럼 아나운서의 말이 끊어지며 화면이 검은 빛으로 점멸했다.
“통신이 끊긴 건가?”
하은이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리고 있을 때.
스륵, 스르르륵.
스피커를 통해 뱀이 바닥을 기어 다니는 듯한 섬뜩한 소리가 들려왔다.
검게 점멸했던 화면이 다시 빛을 찾으며 한 사내의 모습이 비쳤다.
설원처럼 새하얀 사내.
옅은 미소를 머금은 얼굴은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녹아내릴 것처럼 온화해 보였지만, 독을 머금은 듯 녹색으로 빛나는 두 눈동자에는 섬뜩한 광기가 번들거리고 있었다.
-아아, 잘 들리시나요?
방송이 어색하다는 듯 멋쩍게 웃은 사내는 예의 바른 동작으로 허리를 숙였다.
-저는 뱀주인자리의 성좌, 뫼비우스라고 합니다.
치기 어린 소년의 순박함까지 느껴지는 미소.
듣는 것만으로 입가가 풀어지는 봄바람 같은 목소리 너머로 들려오는 건.
-아아아악! 으아! 꺄아아아아!
절규와 고통으로 가득 찬 비명들.
불길에 휩싸인 도시를 배경으로 서 있는 뫼비우스의 모습은 묘한 기괴함을 만들어냈다.
-허억, 허억!
그때, 한 사내가 숨을 헐떡이며 불길 속에서 빠져나왔다.
양손에 검을 움켜쥔 그는 뫼비우스를 발견하고는 두 눈을 부릅떴다.
-너… 너 이 개자식…!
사내의 왼쪽 가슴에 새겨진 성흔이 빛을 뿜었다.
양손에 쥐어진 쌍검에 푸른 검기가 타올랐다.
“비토리오 칼바니…?”
영상을 바라보던 이사벨라의 입에서 사내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아는 사람이야?”
“이탈리아 내에선 꽤 유명한 게자리의 각성자예요.”
게자리라면 황도 12궁 안에 속해 있는 강력한 별자리였다.
게자리 성흔의 특징이라면 공간 자체를 절단한다는 말이 있을 정도로 강력한 절삭력을 무기에 부여하는 것,
비토리오의 양손에 쥐어진 쌍검이 섬뜩하게 빛났다.
-이런, 다 죽인 줄 알았는데 아직 살아남은 각성자가 있었네요.
뫼비우스가 비토리오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비토리오의 표정이 와락 일그러졌다.
그는 양손에 쥔 쌍검을 엑스자로 교차하며 외쳤다.
-게자리의 성좌, 타르프시여! 부디 저 사악한 마귀를 단죄할 힘을 내려주소서!
우우우웅!
비토리오의 성흔이 사납게 타오르며 쌍검에 맺힌 푸른 검기가 솟구치듯 길게 자라났다.
-하하하, 소용없어요.
뫼비우스는 나지막한 웃음을 터트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무리 애원해도, 아무리 갈망해도, 아무리 간절해도.
낮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성좌는 인간을 구원하지 않습니다, 절대로.
사막처럼 메마른 목소리가 울려 퍼졌다.
-닥쳐!
비토리오는 거친 욕지기를 내뱉으며 뫼비우스를 향해 돌진했다.
솟구친 푸른 검기가 엑스자로 교차하며 공간을 갈랐다.
카메라에 담기지 않을 정도로 빠른 검격이 뫼비우스의 몸을 갈랐다.
그리고.
-커헉! 컥!
영상을 스킵하기라도 한 것처럼 갑작스럽게 이동한 뫼비우스가 비토리오의 목을 틀어쥐었다.
뫼비우스는 온화한 미소를 지으며 비토리오의 왼쪽 가슴을 향해 손을 뻗었다.
콰득.
성흔이 새겨진 가슴을 파고 들어간 손이 펄떡이며 뛰고 있는 심장을 끄집어냈다.
-지금 타르프의 목소리가 들리나요?
-커헉, 컥, 크헙!
-하하. 봐봐요, 제 말이 맞죠?
어깨를 으쓱인 뫼비우스가 손바닥 위에서 펄떡거리는 심장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심장이 터지며 흘러나온 붉은 핏물이 설원처럼 새하얀 머리칼을 적셨다.
핏물에 젖은 뫼비우스는 카메라가 있는 방향으로 느긋이 걸어왔다.
-뭐, 일단 이걸로 이 도시에 있던 각성자는 다 죽었네요.
카메라를 손에 든 뫼비우스가 싱긋 상쾌한 미소를 머금었다.
-그래도 걱정하지 마세요. 아직 살아 있는 사람은 많이 남아 있답니다?
딱.
그가 손을 튕기자 넓게 펼쳐진 그림자 속에서 새하얀 뱀들이 기어 나왔다.
수천, 수만에 달하는 뱀들에게 묶인 사람들의 모습이 보였다.
주름진 피부를 지닌 노인부터 10살도 채 넘지 않아 보이는 어린아이까지.
셀 수 없는 사람들이 기절한 채 뱀들에게 묶여 있었다.
-으음. 뭔가 이 대사는 싸구려 악역 같아서 하고 싶지는 않지만.
뫼비우스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이 사람들을 구하고 싶으면 이탈리아로 오세요.
무대의 막을 알리는 사회자처럼 공손하게 가슴 위에 손을 얹고 허리를 숙였다.
섬뜩하게 빛나는 녹색 눈동자가 정면을 응시했다.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별의 축복’을 받은 이들이여.
치직, 치지지직!
다시 한번 노이즈가 끼며 영상이 바뀌었다.
-아, 아! 가, 갑작스러운 통신 장애로 인해 다른 영상이 송출된 점, 사, 사죄드립니다!
당황한 표정으로 연신 머리를 조아리고 있는 아나운서의 모습이 보였다.
“…….”
“…….”
거실 안에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저 영상… 전국으로 송출된 거지?”
“그렇겠지.”
오진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이마를 짚었다.
불길에 휩싸인 도시의 모습이 낙인처럼 머리에 새겨져 지워지지 않았다.
‘이 타이밍에 선전포고를 할 줄이야.’
이탈리아가 대규모 침공을 받았다는 뉴스가 속보로 전해지지 않은 나라는 없을 테니 말 그대로 전 세계의 각성자들을 상대로 전쟁을 선포한 셈이다.
이렇게 대놓고 인질을 붙잡은 채 이탈리아로 오라고 했을 정도면.
‘이미 준비는 다 끝났다는 거지.’
으득.
움켜쥔 주먹이 파르르 떨렸다.
“아, 안 돼… 이, 이건….”
이사벨라는 새파랗게 질린 표정으로 비틀비틀 티비를 향해 걸어갔다.
화면 앞에 풀썩 주저앉은 이사벨라가 고개를 떨군 채 어깨를 떨었다.
“운명은… 바뀐 게 아니었던 건가요?”
“…….”
“제가 피의 마녀가 되지 않으면… 그러면… 괜찮은 거 아니었나요?”
괜찮을 거라 생각했다.
운명을 바꿨다고 자신했다.
하지만.
결국 바뀐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미안.”
오진은 주저앉은 이사벨라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저 허여멀건 새끼가 뫼비우스라 이거지?”
하은이 사납게 이를 드러내며 몸을 돌렸다.
“가자, 이탈리아로.”
“가긴 어딜 가요?”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 있잖아.”
“정확하게 말하면 ‘죽이지 않은’ 사람들이 있는 거죠.”
카시아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건 함정이에요. 각성자들을 이탈리아로 불러들이기 위한.”
지금 이탈리아로 향한다는 건 말 그대로 불구덩이 속으로 뛰어드는 것과 같은 짓이었다.
“그래서 저 사람들을 그냥 두자고?”
“이런 말씀 드려서 죄송하지만, 붙잡힌 사람들은 사실상 죽은 거나 마찬가지예요.”
“그게 무슨…!”
“냉정하게 생각해 봐요. 만약 저희가 지금 바로 이탈리아로 달려간다고 해도 저 사람들이 살 수 있을 것 같아요?”
“…….”
“뫼비우스에게 저 인질들은 어디까지나 각성자들을 불러들이기 위한 수단이에요. 쓸모를 다하면… 버려지겠죠.”
카시아는 씁쓸한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이미 구하기는 늦은 거라고요.”
“…그건.”
하은은 입술을 짓씹은 채 고개를 떨궜다.
그녀 또한 알고 있었다.
지금 뫼비우스가 대놓고 함정을 파놓고 그들을 기다리고 있다는 건.
하지만.
“그렇다고… 아무것도 하지 말라는 거야?”
의식을 잃은 채 묶여 있는 사람들을 보고도 가만히 있으라는 말인가.
“…필요하다면 그래야죠.”
카시아는 하은의 시선을 피하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나의 아이야.]주변의 시선이 오진에게 집중됐다.
오진은 이사벨라의 어깨에 손을 얹은 채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하고 싶어?”
“…예?”
“벨라 너는 어떻게 하고 싶냐고.”
“…….”
이사벨라의 입술이 굳게 닫혔다.
그녀 또한 뫼비우스의 선언이 함정이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이탈리아로 간다고 해도, 붙잡힌 사람들이 살아날 수 있는 가능성은 희박하겠지.
“상황을 지켜보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굳게 닫힌 입술 사이로 억눌린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붙잡힌 사람들은 안타깝지만… 뫼비우스의 뜻대로 움직이는 건 너무 위험….”
“그걸 물은 게 아니잖아.”
오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 상황이 어떤지를 물어본 것이 아니었다.
“네가, 어떻게 하고 싶냐고.”
“…….”
다시 막히는 말문.
오진의 옷깃을 잡은 이사벨라의 손이 가늘게 떨렸다.
“구하고 싶어요.”
설사 가능성이 희박하다는 걸 알아도.
“희망이 있다면… 구해주고 싶어요.”
“그래.”
오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이사벨라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구해줄게.”
그게 이사벨라의 바람이라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