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405)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405화
소집령 (5)
“…지금 그게 무슨 말입니까?”
서릿발이 몰아치듯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
알렌은 싸늘한 눈빛으로 알리나 블라디미르를 노려보며 말을 이었다.
“지금 뫼비우스에게 붙잡혀 있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은지는 알리나 님도 잘 알고 계실 텐데요.”
아직 올리비아가 틀어준 영상에는 나오지 않은 내용이었지만.
여기에 모인 이들 모두, 아니 전 세계 사람들이 뫼비우스에게 붙잡혀 있는 사람들의 모습을 생생한 라이브로 지켜봤으리라.
“그들 대부분은 성흔조차 부여받지 못한 일반인들입니다.”
그것뿐일까.
영상 속 붙잡힌 인질 중에는 채 10살조차 넘지 않아 보이는 어린아이까지 있었다.
끔찍한 절규와 통곡으로 가득 차 있는 그 충격적인 영상을 봤음에도 어떻게 ‘어떠한 개입도 하지 않는다는’ 말이 나올 수 있단 말인가?
“혹시 영상을 보지 못하시기라도 한 겁니까?”
“아뇨. 당연히 봤습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그런…!”
“영상을 봤기 때문에, 이런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알리나는 덤덤한 표정으로 말을 이었다.
“뫼비우스는 인질을 붙잡은 채 그들을 구하고 싶으면 로마로 오라 말했죠. 이건 어딜 어떻게 보더라도 적의 함정이지 않습니까?”
“그건….”
“함정이라는 것이 명확한 전장에 저희 소중한 부대원들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타협 따위는 불가하다는 듯 단호한 눈빛으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붙잡힌 인질들의 목숨이 소중한 만큼, 제게도 저희 부대원들의 목숨이 소중합니다. 그들에게 헛된 죽음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헛된 죽음이라니…! 사람을 구하는 일이 헛된 일입니까?”
“인륜과 도의 앞에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다고 말하고 싶은 겁니다.”
인륜과 도의 앞에 희생을 강요할 수는 없다.
알리나의 주장도 일리가 있는 말이었다.
도시 하나를 눈 깜짝할 사이에 궤멸시킨 존재가 전 세계를 상대로 당당히 도발을 걸었는데 순순히 그 도발을 받아들이는 것은 어찌 생각하면 무모하기 그지없는 일이었다.
“…만약 러시아나 중국 내부에서 일어난 일이라도 그런 말씀을 하실 수 있겠습니까?”
알렌은 날카로운 눈빛으로 알리나를 쏘아보며 물었다.
알리나는 표정의 변화 하나 없이 무뚝뚝한 태도로 고개를 가로저었다.
“동맹 내에서 일어난 일이라면 마땅히 군을 파견하는 게 맞겠죠.”
“즉,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사건이니 동맹은 관여하지 않겠다는 겁니까?”
“반대로 관여해야 할 이유가 있습니까? 이건 어디까지나 유럽 연합 내에서 해결해야 할 문제입니다.”
“하.”
알렌은 경멸 어린 눈으로 알리나를 노려봤다.
마수와 검은 별의 성좌라는 명확한 인류의 ‘적’이 나타났음에도.
인간은 국가라는 틀에 서로를 가둔 채 ‘남의 일’로 치부해 버린다.
과거에도 그러했듯.
공리는 언제나 개인의 욕망 아래 무릎을 꿇는다.
[한심하네.]회의실 안에 나지막이 울려 퍼지는 목소리.
어딘가 앳된 느낌을 지울 수 없는 소년의 목소리가 각성자들의 머릿속에 직접 울려 퍼졌다.
원형 테이블이 놓인 회의장 외곽.
신전을 지탱하는 기둥 뒤에서 한 소년이 걸어 나왔다.
그 가치를 감히 짐작할 수 없는 보물들을 마치 옷처럼 전신에 두른 소년.
백조자리의 성좌, 데네브가 싸늘한 시선으로 알리나를 노려봤다.
[내가 너희 인간들에게 성흔을 준 이유가 뭐라고 생각해?]데네브는 원탁에 앉아 있는 각성자들을 쓱 훑어보며 말을 이었다.
[율법의 제약에 묶여 자유롭게 움직일 수 없는 우리를 대신해 인류를 구원하고 세계를 수호하라고 성흔을 내려준 거야.]그런데.
[지금 대체 여기 모여 다른 나랏일이니 우리는 관여하지 않겠다는 말이나 하고 있을 때야? 응?]성좌의 감정에 이끌려 성흔의 마력이 회의장 내부에 퍼졌다.
봄바람처럼 온화한 온기로 가득 차 있던 회의장 내부에 서릿바람이 몰아쳤다.
핑크빛 벽이 얼어붙고 바닥에 하얀 서리가 내려앉았다.
내쉬는 숨결조차 얼어붙을 것 같은 극한의 냉기가 각성자들을 압박했다.
“커흑….”
데네브에게서 흘러나오는 압도적인 존재감에 올리비아가 고통스럽다는 듯 목을 틀어쥐었다.
데네브는 고통을 호소하는 올리비아에게 눈길조차 주지 않은 채, 알리나를 향해 한 걸음 내디뎠다.
[지금 서로 편이나 가르고 있을 때냐고!]분노한 성좌의 일갈과 함께 하얀 서리의 파도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려고 했을 때.
[그만하거라.]서리를 막아서는 은빛의 기운.
베가가 내뿜는 기운이 회의장 안에 휘몰아치던 서릿바람을 가라앉혔다.
데네브가 사납게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베가를 노려봤다.
[왜 막는 거야!] [우리의 역할은 아이들이 스스로 길을 찾을 수 있도록 가만히 지켜봐 주는 게 아니더냐.] [지금 그럴 때가…!] [아니면. 아이들의 의지를 무시한 채 강제로 따르게라도 할 셈이냐?]베가는 깊게 가라앉은 눈빛으로 데네브를 응시했다.
데네브의 몸이 움찔 떨렸다.
[무릇 성좌란 부모처럼 아이들을 보듬어주고 올바른 길로 나아가도록 방향을 제시해 주는 지도자이지 아이들의 머리채를 붙잡고 억지로 따르도록 강요하는 지배자가 아니리라.] [그, 그건 알고 있지만….] [그렇다면 조금 더 아이들을 믿고 가만히 지켜보거라.] […….]데네브는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나도 베가 님의 말씀에 동의한다.] [으하핫! 걱정하지 않아도 우리 아이들이라면 현명한 답을 찾을 것이다!]사자자리의 성좌 레굴루스도, 황소자리의 성좌 알데베란도.
[여기는 성좌가 나설 자리는 아니라 생각해요.] [응응! 내 신전을 빌려주면서 한 약속도 회의에는 직접 참여하지 않겠다는 거였으니까!]양자리의 성좌 아리스, 처녀자리의 성좌 스피카 또한 옆에서 한마디씩 보탰다.
[끄응. 알았어.]데네브는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며 뒤로 물러났다.
“…그럼, 마저 회의를 진행해도 될까요?”
목을 움켜쥐며 고통을 호소했던 올리비아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성좌들을 돌아봤다.
성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알리나와 알렌을 향해 눈짓을 보냈다.
알리나가 짧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저희라고 해서 뫼비우스에게 붙잡힌 사람들이 걱정되지 않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적의 함정이 명백한 전장으로 제 부하들을 보낼 수는 없습니다.”
“나도 그녀와 같은 생각이네.”
옆에 앉아 있던 중후한 인상의 금발 사내가 손을 들어 올렸다.
요광성 에드워드 월튼.
궁수자리의 각성자이자, 세계 재벌 순위 5위 안에 드는 사업가였다.
“구호물자를 보내주는 것 정도는 가능하겠지만, 용병들을 파견하기는 어려울 것 같네. 아무리 돈을 따라 움직이는 용병이라고 해도 사지에 가라고 하면 누가 가겠는가?”
“에드워드 씨까지….”
알렌은 초조한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전 알렌 씨의 의견에 한 표에요.”
팔짱을 낀 채 회의를 듣고 있던 녹색 머리칼의 여인이 손을 들어 올렸다.
녹존성 리베카 벨.
쌍둥이자리의 성흔을 지닌 각성자이자, 오진을 제외하면 가장 빠르게 9성에 도달한 각성자였다.
“우리가 칠성의 후보를 뽑을 때 가장 강조했던 게 뭐였죠? 힘없는 이들에게 손을 뻗어줄 수 있는 마음 아니었나요?”
‘칠성’이라는 이름은 단순히 강한 힘을 지녔다고 해서 얻을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힘에 걸맞은 책임을 질 수 있는 자.
칠성이 되기 위해 참가한 쟁쟁한 후보자들을 속여가면서까지 시험을 치렀던 것도 그런 책임을 질 수 있는 인재를 찾기 위함이 아니었던가.
“다른 모두가 그들에게 등을 돌리더라도, 칠성의 이름을 짊어진 여러분까지 그러시면 안 되죠.”
리베카는 평소의 장난기 어린 표정과 쾌활한 미소를 싹 지우며 진중한 눈빛으로 알리나와 에드워드를 바라봤다.
“나도! 나도 알렌 도울래!”
천권성 백무강이 순박한 미소를 지으며 번쩍 손을 들어 올렸다.
“흐응, 난 반대야. 저~기 군인 아줌마 말대로 대놓고 함정이라 광고하고 있는데 무턱대고 갔다가 각성자들이 무더기로 죽기라도 한다면? 그러면 그 뒤에는 어쩔 건데?”
옥형성 비앙카 베넷이 어깨를 으쓱이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알렌이 비앙카를 찌릿 노려보며 입을 열었다.
“…비앙카 씨는 같은 영국 출신 아니었나요?”
“헹, 언제는 국가랑은 상관없다며?”
비앙카는 곱슬곱슬한 금발을 손가락을 빙빙 돌리며 관심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평행선처럼 맞물리지 않는 회의를 지그시 바라보며 오진은 눈을 찌푸렸다.
‘3대 3인가.’
여기서 자신이 알렌의 편을 들어준다면 4대 3으로 과반수가 되겠지만, 이게 무슨 반장 선거도 아니고 과반수가 된다고 해도 알리나를 비롯한 반대파를 억지로 전쟁에 끌어들일 수는 없었다.
‘양쪽 다 논리가 없는 건 아냐.’
인륜과 도의를 내세우며 칠성으로서의 책임을 강조하는 알렌.
반대로 위험성과 실리를 내세우며 이성적인 선택을 강조하는 알리나.
둘 다 어느 한쪽을 무작정 ‘틀렸다’라고 말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렇기에 이렇게 서로 짜기라도 한 것처럼 반으로 의견이 나뉜 거고.’
오진은 반으로 나뉘어 서로 언성을 높이기 시작하는 칠성들을 바라보며 가늘게 눈을 떴다.
설마, 하는 생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갔다.
‘놈이 노렸던 게 이거였나?’
칠성을 비롯한 각성자들이 서로 나뉘어 대립하는 것.
인륜과 실리와 도덕과 이기심을 두고 갈등하는 것.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계속해서 그래왔던 것처럼.
서로 갈등하고 대립하고 증오하고 원망하는 것.
“…하.”
오진의 입술 사이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정작 이 사건의 원흉이라 할 수 있는 뫼비우스에 관한 얘기는 각성자들의 입에서 나오지도 않았다.
논리라는 견고한 성벽 뒤에 숨어 서로를 밀어내기 바쁠 뿐.
‘이게 네가 바랐던 모습이라면.’
저 논리라는 벽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부숴 버리는 수밖에.
“이탈리아 습격으로부터 이틀 후, 무곡성을 중심으로 모인 유럽 연합 소속의 각성자들이 로마의 탈환을 위해 전장으로 향하게 됩니다.”
서로 언성을 높이던 칠성들의 시선이 오진에게로 향했다.
“그게 무슨….”
“압도적인 전력 차로 인해 탈환 작전은 실패하게 되고 뫼비우스는 유유히 모습을 감추게 되죠.”
“지금 무슨 말씀을 하시는 겁니까?”
“작전 실패로부터 정확히 36일 후, 모스크바에서 비슷한 일이 벌어집니다.”
무슨 헛소리를 하냐는 표정으로 자신을 바라보는 각성자들을 무시한 채 말을 이었다.
“유럽 연합 소속 각성자들은 그럴 줄 알았다며 비난을 퍼부었고 중국은 러시아와의 동맹을 해제하고 각 도시에 각성자로 이뤄진 군부대를 배치합니다.”
“소설이라도 쓰시는 겁니까?”
알리나 블라디미르가 헛웃음을 흘리며 오진을 노려봤다.
“67일 후에는 일본이, 100일째가 되는 날에는 한국이 습격을 받습니다. 여기서 다시 한번 칠성들이 모여 이제까지의 은원을 풀고 세계 연합을 만들 것을 제안하지만 무산됩니다.”
“…….”
“152일 째에는 미국이, 218일 째에는 영국이 무너지게 되죠. 피해는 걷잡을 수 없이 커지게 되고 뫼비우스는 죽은 각성자들의 시체를 이용해 새로운 군대를 만들어냅니다.”
그리고.
“로마 습격으로부터 정확히 1년 후에. 이 지구에는 더 이상 ‘국가’라 부를 만한 나라들은 존재하지 않게 됩니다.”
그 말을 끝으로 자신이 할 말은 다 했다는 듯 오진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어색한 침묵이 회의장을 가득 채웠다.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침묵을 깬 것은 알리나 블라디미르였다.
오진을 응시하는 푸른빛 동공은 얼음처럼 차갑게 식어 있었다.
“다른 질문에 앞서 이 질문을 가장 먼저 드리지 않을 수가 없군요.”
알리나는 은은한 분노마저 느껴지는 눈빛으로 오진을 노려봤다.
“마치 미래에 벌어질 일을 다 알고 있다는 듯 떠드시는 이유가 뭡니까?”
“알고 있으니까요.”
“예?”
오진은 깊게 숨을 들이쉬며 원탁에 둘러앉은 각성자들을 하나하나 돌아봤다.
후우.
폐부에 들어찬 숨을 토해내며.
“저는 회귀자입니다.”
이제껏 숨겨왔던 ‘진실’을 입에 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