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406)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406화
소집령 (6)
“하.”
나지막한 탄식이 침묵이 내려앉은 회의장을 깨웠다.
강철처럼 강인한 인상을 지닌 여인, 알리나 블라디미르는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실소를 내뱉었다.
어찌 웃지 않을 수 있겠는가.
눈앞에서 자신을 ‘회귀자’라 자칭하는 미친놈을 만나게 됐는데.
“마경에 다녀오면서 머리라도 다치신 겁니까?”
같은 칠성 사이에 무례하다면 무례할 수 있는 말이지만.
알리나는 지금 진심으로 오진이 걱정된다는 듯 심각한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파군성’의 칭호를 지닌 그의 정신에 이상이 생겼다는 얘기는 그와 같은 칠성에 속해 있는 알리나로서도 넘겨들을 수 없는 문제였으니까.
“아뇨, 전 아주 멀쩡합니다.”
“그렇다고 하기엔 방금 하신 말씀이….”
“믿기 힘든 얘기라는 건 알고 있습니다.”
갑자기 예언자라도 된 것인 양 미래에 벌어질 일들을 나열하며 자신을 미래에서 온 ‘회귀자’라 칭하는데 누가 넙죽 그 말을 믿겠는가.
알리나만 아니라 다른 칠성들의 반응도 비슷했다.
지금 제대로 들은 게 맞는지 귀를 의심하는 듯한 표정.
그중 그나마 백무강만이 ‘와아! 대단해에!’라며 순수한 감탄을 보내고 있을 뿐이었다.
‘뭐, 당연한 반응이지.’
만약 자신이 같은 상황에 놓이게 됐더라도 비슷한 반응을 보이지 않았을까.
그럼에도 이 자리에서 뜬금없이 자신을 ‘회귀자’라고 칭한 이유는 하나.
그 정신 나간 소리를 실제 믿고 있는 존재들이 이 회의장 안에 함께 있기 때문이다.
그것도 어디서 굴러먹다 왔는지 알 수 없는 어중이떠중이들이 아니라.
무려 ‘성좌’라 불리는 초월적인 존재들이.
“제 말이 사실이라는 건 성좌님들이 가장 잘 알고 계실 겁니다.”
“…성좌?”
오진의 시선이 원탁에서 조금 떨어진 자리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성좌들에게 향했다.
“그렇죠?”
움찔.
베가의 어깨가 떨렸다.
그녀는 고장 난 기계처럼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그, 그렇느니라! 보, 본녀의 아이는 그… 회, 회귀자….] [뭘 그렇게 당황하고 있어? 파군성이 ‘역천의 별’이라는 건 이미 알고 있던 얘기였잖아?]당황해서 제대로 말을 잇지도 못하고 있는 베가에게 데네브가 핀잔을 줬다.
[그, 그렇지! 물론 본녀도 알고 있던 사실이니라! 그러니까, 어… 본녀의 아이는….] [하아.]갑자기 자신의 아이가 회귀자라는 사실이 만천하에 공표돼서일까.
혼란에 빠져 있는 베가를 뒤로 하고 데네브가 앞으로 나섰다.
[방금 파군성이 한 말은 모두 사실이야.]“…오진 씨가 회귀자라는 얘기 말씀입니까?”
데네브는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이며 오진 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아이가 바로 ‘역천의 별’이거든.]“역천의 별…?”
알리나는 처음 듣는 단어라는 듯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갸웃거렸지만.
“자, 잠시만요. 오진 씨가 역천의 별이었단 말입니까? 그… 폴라리스 님의 예언에 나온다는?”
알렌은 ‘역천의 별’에 대해 들은 바가 있는지 당황한 표정으로 데네브를 바라봤다.
데네브가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이자 알렌의 입이 쩍 벌어졌다.
무뚝뚝하고 냉철하기로 유명한 무곡성 알렌 오스칼이 보여주는 다채로운 표정 변화에 칠성 사이에서도 동요가 퍼졌다.
“역천의 별이 대체 뭐야?”
리베카는 팔짱을 낀 자세 그대로 눈을 살며시 찌푸리며 알렌에게 고개를 돌렸다.
알렌은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입을 열었다.
“폴라리스 님의 예언에 따르면… 이미 이 세계는 한 번 멸망을 겪었다고 합니다.”
역천의 별에 대한 설명이 이어졌다.
이미 한번 세계는 멸망했고, 시간을 거슬러 온 역천의 별이 멸망으로 치닫는 운명을 바꿀 수 있다는 폴라리스의 예언.
무슨 사이비 종교 서적에서나 나올 법한 이야기에 칠성들의 표정이 점차 일그러졌다.
“지금 그 말을 믿으라고?”
리베카가 어처구니없다는 듯 실소를 흘리며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듯 고개를 저었지만.
[믿기 어려운 마음도 이해하지만, 방금 알렌이 들려준 말은 모두 거짓 하나 없는 사실이야.]이어지는 데네브의 긍정에 꿀 먹은 벙어리가 될 수밖에 없었다.
성좌가 직접 나서 사실이라고 하는데 그 면전에 대고 헛소리하지 말라고 말할 수는 없지 않은가.
“하아.”
알리나가 싶은 한숨을 토해내며 머리가 지끈거린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그래서, 당신이 멸망한 미래에서 돌아온 회귀자라 이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오진은 덤덤히 고개를 끄덕였다.
알리나의 날카로운 눈빛이 그를 꿰뚫어 보듯 위아래로 훑었다.
그녀는 러중 동맹군의 총사령관으로 살아오며 셀 수 없는 사람들을 만나고, 거느려왔다.
그렇기에.
사람을 보는 안목 하나만큼은 자신 있다 자부하고 있었건만.
‘모르겠어.’
검은 먹구름에 뒤덮인 밤하늘을 올려다보는 느낌이랄까.
오랫동안 갈고 닦은 안목으로도 그의 진위를 확인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의 정체가 미래에서 온 회귀자라는 터무니없는 말을 순순히 믿을 수는 없는 노릇.
“그렇다면 왜 지금까지 사실을 밝히지 않으셨던 겁니까?”
알리나는 가늘게 눈을 뜨며 추궁하듯 물었다.
“오진 씨가 정말 회귀자라면 이번 이탈리아 사태도 미리 알고 있었다는 말씀 아닙니까?”
그렇다면 왜.
알고 있으면서도 그 재앙을 막지 못했단 말인가?
“…….”
정곡을 찌르는 질문에 오진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지그시 눈을 감은 채 침묵을 유지하던 그가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예, 알고 있었죠.”
“그렇다면 왜 미리 경고하지 않았던 거죠?”
“경고했다면 믿으셨겠습니까?”
인구 수백만의 도시가 검은 별의 성좌와 마수 군단에게 습격받아 하루아침에 멸망한다는 말을.
과연 그들은 진지하게 받아들여 줬을까?
“하, 그래서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멸망을 지켜보고 계셨다는 겁니까?”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라.”
입술을 비틀고 새어 나오는 차가운 조소.
“아무것도 하지 않은 건 당신들 아닙니까?”
“…뭐라고요?”
알리나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오진은 덤덤한 표정으로 입을 열었다.
“처음 흑성회가 세상에 나타났을 때. 그들의 집행관을 죽인 사람이 누군지 아십니까?”
“그건….”
“제가 죽였죠.”
올빼미들의 왕, 천도윤을 죽인 건 다름 아닌 오진이었다.
“그 뒤에 나타난 해마의 왕은 또 누가 죽였습니까?”
“그건 그 일본인 각성자가 죽인 거 아냐?”
가만히 회의를 듣고 있던 비앙카 베넷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물었다.
“…아니.”
대답이 나온 것은 오진이 아닌 알리나 쪽.
세간에는 쿠로우시의 수장, 사카키 료가 해마의 왕을 죽인 거로 되어 있었지만 동맹군 휘하의 정보조직을 통해 들은 보고에 의하면 실제 해마의 왕을 죽인 각성자는 다른 사람이었다.
해마의 왕을 죽인 각성자는 바로….
“…오진 씨가 죽이셨죠.”
“예, 제가 죽였습니다.”
오진은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럼 그다음. 두꺼비의 왕을 죽인 건 누구죠?”
“…수호성.”
알리나의 입술 사이로 이제는 공중분해 된 조직의 이름이 흘러나왔다.
탐랑성이 직접 만든 조직이라고 했던가.
물론 결정 직후 첫 작전에서 희생자가 발생하고 탐랑성이 마경에서 죽게 되면서 바로 사라진 조직이었지만.
그들이 두꺼비의 왕을 죽였다는 건 사실이었다.
그리고 그 수호성의 가장 핵심 인물은.
“저였죠.”
“…….”
알리나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최근에는 검은 별의 성좌들까지 나타나기 시작했죠.”
“안셀라두스에 대한 거라면 알고 있습니다.”
“그럼 누가 그를 죽였는지도 알고 계시겠네요.”
“…….”
드륵.
오진은 자리에서 일어나며 원탁에 둘러앉은 칠성들을 하나하나 돌아봤다.
“흑성회의 집행관 셋을 죽이고 천마의 부활을 막기 위해 마경에 다녀왔으며, 검은 별의 성좌까지 죽였습니다.”
이곳에 앉아 있는 이들 중 오진이 이룩한 무수한 업적의 발끝조차 따라올 수 있는 이들은 없었다.
“그렇다면 이제 제가 물을 차례로군요.”
타오르듯 이글거리는 시선이 알리나를 향했다.
“당신들은 그동안 대체 뭘 했던 겁니까?”
“…….”
알리나의 입술의 굳게 다물어졌다.
그녀로서도 할 말이 없는 건 아니었다.
다른 칠성이라고 해서 그동안 손을 빨며 놀고 있던 건 아니었다.
세계 각지에서 활개 치는 네임드 마수들을 사냥했고, 성흔의 힘을 이용해 끔찍한 범죄를 저지르는 악인들을 처단했다.
하지만.
그걸 감안하더라도 오진이 이룩해 온 업적과 비교하면 초라하기 짝이 없는 일이었다.
“…정보가 부족했습니다.”
여기 모인 이들의 힘이 부족했기에 오진이 할 수 있던 일을 못 해왔던 게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단순한 ‘무력’을 따지자면 여기 모인 각성자들의 힘은 결코 오진에게 뒤떨어지지 않았다.
그들이 이제껏 흑성회의 집행관들을 처단하지 못했던 건 단순히 그들이 어디 숨어 있는지 알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천마에 대한 것도 마찬가지.
그의 존재에 대해서는 성좌들을 통해 알음알음 퍼지긴 했지만, 천마가 마경에서 부활을 준비 중이었다는 건 그들로서 알 방법이 없는 정보였다.
그래.
말 그대로 ‘미래’라도 알고 있지 않은 한….
“아.”
알리나의 입술 사이로 흘러나오는 나지막한 탄성.
오진은 탄성을 흘리는 그녀를 바라보며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정말 이 모든 일이 우연이라고 생각합니까?”
“…….”
확실히.
단순한 ‘우연’으로 치부하기에는 오진이 쌓아온 업적들이 설명되지 않았다.
“하지만… 결국 이탈리아의 습격을 사전에 막지 못하셨지 않습니까?”
그가 쌓아온 업적이 미래에 벌어질 일들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이라면.
왜 이탈리아에서 일어난 재앙은 막지 못했단 말인가?
“알리나 씨는 운명에 대해 어떻게 생각합니까?”
언젠가 작은곰자리의 성좌가 그에게 했던 질문을 떠올린다.
“…운명?”
“예, 운명이요.”
“이미 정해진 미래… 뭐 그런 거 아닙니까?”
“운명의 정의를 물어보는 게 아닙니다. 운명의 성질을 물어보려는 거죠.”
천천히 팔을 들어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손을 움직였다.
“운명이라는 건 올곧게 뻗어 나가는 선이 아닙니다.”
이번에는 위에서 아래로 손을 내리그었다.
“운명이란 사납게 쏟아져 내리는 급류와 같죠.”
“…대체 무슨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쏟아지는 급류에 돌멩이를 한두 개 던진다고 해서 그 흐름이 바뀌겠습니까?”
“운명은 쉽게 바꿀 수 없다, 뭐 이런 말을 하고 싶은 겁니까?”
“정확합니다.”
오진은 씁쓸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막으려고 했죠. 아뇨, 실제 막았다고 생각했습니다.”
오만하게, 거만하게.
운명을 바꿨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습격은 다른 방식으로 이뤄졌습니다.”
“원래 미래에서는 그럼….”
“뫼비우스는 나타나지 않습니다. ‘피의 마녀’라 불리던 각성자가 벌였던 일이죠.”
“그 피의 마녀는 그럼 어떻게 됐습니까?”
“예전에 제 손으로 처리했습니다. 그녀가 ‘피의 마녀’가 되기 전에.”
“…….”
그럼에도 이탈리아는 멸망했다.
그렇다는 건.
“원인을 바꾼다고 해도… 결과가 달라지지 않는다는 말씀입니까?”
“아예 바꿀 수 없다는 건 아닙니다. 그렇다면 제가 지금까지 미래를 바꾸기 위해 발버둥 칠 이유도 없었겠죠.”
쏟아지는 급류에 돌멩이를 던진다고 해도 막을 순 없지만.
바위를 여러 개 쌓아 틀어막는다면 흐름을 바꿀 수 있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믿기 어렵네요.”
눈을 감은 채 생각을 이어가던 알리나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이제껏 그가 쌓아온 업적이 아무리 대단하다고 해도.
오진이 미래에서 시간을 거슬러 온 회귀자라는 건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말이었다.
막말로 말해서 대단한 업적을 세웠다는 게 미래에서 왔다는 증거는 되지 못하지 않은가?
“으음.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알리나 씨는 절 믿으셔야 할 텐데요.”
“그건 또 무슨 말씀입니까?”
“아들이 한 분 있죠?”
“…알폰스 얘기가 갑자기 왜 나오는 거죠?”
알리나의 표정이 사납게 일그러졌다.
“36일… 아니, 작전 실패로부터 36일이니까 지금으로 치면 38일 후겠네요.”
오진은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며 자리에 앉았다.
“그날, 알폰스 블라디미르는 죽게 됩니다.”
콰앙!
거친 폭음과 함께 테이블이 부서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