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410)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410화
별들의 전쟁 (1)
그렇게 만장일치로 결정된 이탈리아 파견.
인류의 영웅들이 간악한 성좌에게 붙잡힌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힘을 합쳤다는 소식은 순식간에 전 세계로 퍼졌다.
누군가는 그들을 경외했고, 누군가는 그들을 조롱했으며.
또 누군가는 칠성을 따라 검을 쥐었고, 누군가는 겁에 질려 몸을 숨겼다.
이탈리아를 기점으로 시작된 혼란의 물결이 전 세계를 뒤덮었다.
‘뭐, 당연하다면 당연한 반응이지.’
이미 인류는 한 번 이와 같은 끔찍한 대전쟁을 겪은 경험이 있었으니까.
북극에 ‘최초의 균열’이 열린 후 4년.
속수무책으로 밀리던 인류의 전선이 각성자들의 존재로 인해 점차 마수들을 몰아내기 시작했을 때.
지금은 ‘네임드’라고 불리는 뛰어난 지성을 지닌 마수들이 세계 각지에서 움직이기 시작하며 군단을 이뤄 인류를 습격했다.
각성자들은 서로 힘을 모아 필사적으로 마수 군단과 대적했고 그들을 상대로 승리를 쟁취할 수 있었다.
그 치열했던 전투에 붙여진 이름은 ‘별들의 전쟁’.
* * *
각성자뿐만 아니라 성좌들도 일부 참여했던 세계적인 규모의 전쟁이었다.
‘그리고 그때… 누나도 천주룡에게 눈과 다리를 잃었지.’
이름 있는 마수들을 몰아내며 전쟁 자체는 승리했지만.
그로 인해 소중한 것을 잃은 이들은 헤아릴 수도 없이 많았다.
넘쳐나는 절망과 비극.
전쟁이 끝난 후에도 사람들은 끔찍한 후유증을 견뎌야 했다.
그런 혼란을 조금이라도 진정시키기 위해 만들어진 것이 ‘칠성’.
별들의 전쟁 당시 뛰어난 활약을 보인 각성자들이 모여 만들어진 칠성은 혼란에 빠져 있던 인류의 등불이 되어줬다.
그렇게 6년이란 시간이 흐른 지금.
칠성들의 주도하에 두 번째 별들의 전쟁이 시작되려 하고 있었다.
그것도 전과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강력한 적.
‘성좌’를 상대로 한 전쟁이.
회의가 끝난 지 일주일.
원래라면 종교 시설처럼 정숙하고 신성한 기운에 가득 차 있어야 할 성소가 시장통처럼 북적이고 있었다.
소란의 원인은 1만에 달하는 러중 동맹군의 군대와 막대한 포상을 노리고 참전한 미국 길드의 각성자들, 그리고 세계 각지에서 전쟁에 참여하기 위해 모여든 각성자들이었다.
은하수로 이뤄져 있던 아름다운 길은 전쟁을 위한 물자로 발 디딜 틈 없이 빼곡히 찼고, 성좌들이 머무는 신전은 각성자들의 임시 막사가 되었다.
오진 일행은 성소의 가장 높은 곳, 베가의 신전이 위치한 장소에서 전쟁을 위해 모여든 각성자들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와… 이게 대체 몇 명이 모인 거야?”
하은은 탄성을 흘리며 성소 아래 모인 각성자들을 내려다봤다.
이 정도로 인파가 모인 것을 처음 보는 건 아니지만.
여기 모인 사람 한 명, 한 명이 모두 성흔을 부여받은 ‘각성자’라는 걸 생각하면 절로 탄성이 흘러나올 수밖에 없는 광경이었다.
“러중 동맹군, 미국의 길드, 전쟁 소식을 듣고 세계 각지에 찾아온 각성자들을 다 합쳐서 정확히 오늘까지 3만 2,782명의 각성자가 모였어요.”
카시아가 서류를 팔랑팔랑 넘기며 답했다.
“와, 미친. 3만 명이나 모였다고?”
“집합 장소가 성소인 게 주요했어요. 세계 어디에 있건 성소로 통하는 문은 있으니까요.”
원래라면 단 일주일 만에 이 정도로 많은 각성자가 모이는 건 불가능했겠지만, 성좌들의 허가를 받아 성소를 집합 장소로 잡아둔 덕분에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빠르게 전쟁 준비를 마칠 수 있었다.
“본격적인 작전은 내일이니 하은 씨도 이 기회에 푹 쉬어두세요. 내일부터는 정신없을 테니까요.”
“엉. 있다가 담탐 좀 때리고 들어갈게. 그나저나 쳐들어가는 건 로마에 있는 게이트를 통해서 쳐들어가는 거야? 어디로 가는지 전해 들은 게 없는데.”
“진입 경로가 사전에 파악당하는 걸 막기 위해서 내일 작전이 시작되기 직전까지는 기밀에 붙여둘 거예요.”
“오오. 급조한 부대치고는 되게 체계적이네?”
“알리나 씨의 공이 컸어요. 내일 있을 작전도 대부분 그녀의 머릿속에서 나온 거고요.”
“하긴, 동맹군의 총사령관 자리가 엿 바꿔 얻은 자리는 아닐 테니까.”
하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끄응 기지개를 켰다.
물어볼 건 다 끝났다는 듯 연초를 피기 위해 구석진 자리로 이동하는 하은.
그사이 오진이 카시아에게 다가갔다.
“고마워.”
“으응? 갑자기 고맙다니요?”
“나 대신 전쟁에 필요한 정보들을 모아줬잖아.”
카시아는 지난 일주일 동안 탁월한 정보 수집 능력을 살려 오진의 눈과 귀를 대신해줬다.
만약 그녀가 없었다면 이렇게 전쟁 준비가 물 흐르듯 매끄럽게 진행되지도 못했으리라.
“어머, 노예가 주인님을 위해 온몸을 바쳐 일하는 건 당연한 일인걸요?”
오진의 칭찬이 퍽 기분 좋았는지 어디서 구해왔는지 모를 동글동글한 안경을 쓱 쓸어올리는 카시아.
“안경은 또 어디서 구한 거야?”
“잠깐 성소 밖으로 나가서 사 왔어요. 어때요, 좀 어울리나요?”
카시아는 그렇게 말하며 똘망똘망한 눈으로 오진을 돌아봤다.
원체 본판이 좋다 보니 얼굴의 반을 가릴 정도로 큰 안경을 써도 전혀 그 미색이 빛바래지 않았다.
다만, 가녀린 체형과 달리 색기 어린 외모를 지니고 있던 카시아가 어딘가 귀여운 소녀처럼 보인다는 게 차이점이라면 차이점이랄까.
물론 어느 쪽이건 숨이 막힐 정도로 아름다운 건 마찬가지였다.
“응, 잘 어울려.”
“후훗, 그렇죠?”
카시아는 입꼬리를 씰룩이며 슬금슬금 오진 쪽으로 다가왔다.
양팔을 가지런히 모은 채 오진을 향해 살며시 머리를 기울이는 카시아.
만약 그녀에게 꼬리가 있었다면 지금쯤 맹렬히 양옆으로 흔들리고 있지 않았을까.
쓰윽, 쓰윽.
이제는 어느 정도 익숙해진 ‘포상’의 요구에 오진은 군말 없이 손을 뻗어 카시아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황금을 녹여 뽑아낸 듯한 부드러운 백금발이 손가락 사이를 간지럽혔다.
“에헤헤.”
카시아가 헤벌쭉한 표정으로 미소를 짓고 있으니.
“흥, 아주 애완동물이 따로 없네. 아주 꼬리까지 있으면 열심히 흔들었겠어?”
이사벨라는 언니의 그런 모습이 영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가늘게 눈을 뜨며 혀를 찼다.
카시아는 히죽 입가에 미소를 지은 채 이사벨라를 돌아봤다.
“어머, 일주일 내내 아무것도 하지 않고 꾸물거리는 쓸모없는 거머리보다는 충성스럽고 사랑스러운 강아지가 되는 게 낫지 않겠니?”
“뭐, 뭐라고?”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니?”
“읏….”
‘쓸모없는 거머리’라는 말이 날카로운 송곳이 되어 이사벨라를 꿰뚫었다.
실제 지난 일주일 동안 그녀가 전쟁 준비에 도움을 줄 수 있던 일은 거의 없었으니까.
원래라면 지금 카시아가 맡고 있는 정보 수집 역할을 그녀가 맡아야겠지만, 그녀가 지닌 정보력의 원천은 콜그란데 가문이었다.
그 콜그란데 가문의 뿌리라고 할 수 있는 이탈리아가 뫼비우스의 손에 박살 난 이상 소실된 가문의 힘이 회복하기까지는 시간이 필요했다.
하다못해 여러 세력을 이끌었던 경험을 살려 전술과 작전을 짜는 데라도 도움이 됐으면 모를까.
그것도 알리나 블라디미르라는 걸출한 인재가 있는 덕분에 그녀가 나설 자리가 영 마땅치 않았다.
그녀가 콜그란데 가문이라는 거대한 세력을 이끌어본 경험이 있다고 한들, 군대를 이끄는 건 전혀 다른 문제였으니까.
즉.
지금의 그녀는 연합군 내에서 마땅히 할 일도, 맡은 바 임무도 없는 ‘잉여’라는 것.
“지, 지금 나한테 하은 언니 같다고 말하고 싶은 거야?!”
이사벨라가 발끈한 표정으로 외쳤다.
저 구석에서 연초를 태우고 있던 하은이 ‘아니 나는 또 왜’라고 구시렁거리며 우울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호호. 잘 알고 있네. 맞아, 너는 지금 하은 씨 그 자체란다?”
“어, 어떻게 동생한테 그런 심한 말을 할 수 있어?!”
평소에 하는 일이라고는 없이 소파에 누워 뒹굴거리기만 하며, 틈만 나면 오진에게 달라붙어 이거 해달라 저거 해달라 어리광부리기 일쑤인 하은을 자신과 동일선상에 놓다니!
아무리 친언니라고 해도 이건 참을 수 없는 모욕이었다.
“애들아 나 아직 여기 있는데…….”
하은이 쭈굴거리며 손을 들어오려 자신의 존재를 어필했지만 한 번 불이 붙기 시작한 이사벨라와 카시아의 언쟁은 쉽게 끝나지 않았다.
“뭐, 이번 일로 증명된 거 아니겠니? 너는 콜그란데 가문이 없으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걸.”
“성흔의 특성상 할 수 있는 일이 제한되는 건 어쩔 수 없잖아. 아니면 뭐, 흡혈귀들이라도 만들어서 적진에 보내야 했을까?”
“어머머, 변명치고는 좀 추하지 않니? 그냥 순수하게 네 능력이 부족해서 생긴 일인데.”
“그, 그건….”
“얼마 전에는 전술을 짜는 데 도움을 주겠다며 태을성을 찾아갔다가 아무것도 못 하고 그냥 돌아왔다며?”
“그, 그걸 언니가 어떻게?!”
카시아의 말대로 뭐라도 할 게 없나 싶어 알리나를 찾아가 보기까지 했지만 완곡한 거절과 함께 돌아온 적도 있었다.
노선을 바꿔 오진을 찾아갔을 때도 마찬가지.
한참 ‘회귀자’를 연기하며 베가와 함께 이런저런 성좌들을 만나고 다니는 오진에게 그녀가 딱히 도움을 줄 수 있는 부분은 없었다.
“후훗. 그만 인정하지 그러니?”
카시아는 팔짱을 낀 채 승자의 미소를 입가에 띄웠다.
“뭐, 뭘 인정하라는 건데?”
“너는 이번 전쟁 준비에 아무런 도움도 주지 못하고 할 일 없는 백수처럼 신전 안에 죽치고 앉아 시간을 보냈다고.”
“읏… 으으으!”
아니라고 반론을 하고 싶어도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이번 전쟁 준비에서 그녀의 역할이 없었던 건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었으니까.
“심지어 이번 전쟁도 사실 네 어리광을 들어주기 위해 오진 님이 직접 위험을 감수하신 거 아니니? 자신이 회귀자라는 거짓말까지 하셔 가면서.”
“그, 그건.”
“아아~ 우리 벨라는 좋겠네~ 아무것도 하는 일 없이 가만히만 있어도 낭군님이 우쭈쭈 소원도 들어주고.”
“시, 시끄러워!”
눈물까지 글썽인 채 바들바들 몸을 떠는 이사벨라를 바라보며 카시아는 마무리 일격을 날렸다.
“앞으로 내 동생이 아니라 하은 씨 동생이 되는 건 어때? 둘이 비슷한 부분이 더 많은 것 같은데.”
“허, 허업…!”
그 말을 끝으로 격침.
이사벨라는 실의에 가득 찬 표정으로 풀썩 무릎을 꿇었다.
그리고 그 모습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던 하은은.
“나… 여기 있다고….”
무릎 사이에 얼굴을 묻은 채 피다 만 연초로 끝으로 쓱쓱 신전 바닥을 긁고 있었다.
오진이 쭈그려 앉은 하은에게 다가가 그녀의 어깨를 토닥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