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411)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411화
별들의 전쟁 (2)
회색으로 가득 찬 도시.
흩날리는 재와 먼지와 연기 속에서 한 사내가 우뚝 서 있었다.
깊은 생각에 잠긴 표정으로 먹구름 진 하늘을 올려다보는 사내.
거뭇한 재에 뒤덮인 도시 속에서 사내는 이질적으로 새하얗게 빛나고 있었다.
“슬슬 준비가 끝났을까요?”
누구에 하는 물음일까.
검은 먹구름에 뒤덮인 하늘을 올려다보던 하얀 사내는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오랜 기다림이었다.
시간이 흐르면 과거의 상처가 아물게 된다는 말은 대체 누가 한 헛소리일까.
그의 운명이 송두리째 뒤바뀌게 된 그날 이후.
단 하루도 그날의 악몽을 잊은 적 없었다.
낙인처럼 뇌리에 새겨진 기억은 곪아갔고, 썩어 문드러져 진액을 흘렸다.
“하아.”
낮은 숨을 토해내며 사내는 품속에서 목걸이를 하나 꺼냈다.
* * *
조악한 사과 모형의 목걸이.
목줄은 단단한 금속 대신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져 있었고, 사과 모형에 칠해진 붉은 염료는 빛이 바래 부분부분 떨어져 있었다.
어린아이 소꿉놀이 세트에 끼워져 있을 법한 조잡한 목걸이를 손에 쥐며 사내는 옅은 미소를 지었다.
“조금만 더 기다려 주세요, 이브.”
기나긴 기다림의 마침표를 찍을 날이 머지않았다.
“이제 곧… 전쟁이 다시 시작될 테니까요.”
두 번째이자.
마지막이 될 별들의 전쟁이.
결전의 날이 밝았다.
이른 새벽에 일어나 정비를 마친 연합군들이 도열해 있었다.
단상에 선 알리나 블라디미르가 도열한 연합군들을 내려다보며 입을 열었다.
“로마는 총 일곱 개의 루트로 나뉘어 진입하게 된다.”
적이 미리 대비하고 있는 게 분명한 이상.
진입 경로를 하나로 한정해 로마에 진입하는 건 너무 리스크가 컸다.
“각각 해상에서 둘, 육지에서 둘. 공중에서 둘… 그리고 마지막으로, 로마에 있는 ‘성소의 입구’를 통해 한 부대가 진입하게 된다.”
이어지는 알리나의 말에 술렁임이 커졌다.
육해공은 그렇다 치고 성소의 입구를 통해 로마에 진입하다니?
“…자, 자살행위 아니야 그거?”
“성소 입구라면 무조건 적들이 진을 치고 있을 거잖아.”
‘별이 버린 땅’을 제외한 여느 나라가 그렇듯 이탈리아에도 성소로 통하는 입구가 몇 개 존재했다.
이번 작전의 목적지인 로마에도 큼지막한 성소의 입구가 존재하긴 했지만.
문제는 그 성소의 입구가 적진 한복판에 떡하니 자리 잡고 있다는 것.
뫼비우스가 머저리가 아닌 이상 성소에서 로마까지 직통 핫라인으로 뚫려 있는 입구를 가만히 내버려 뒀을 리가 없었다.
“조용.”
소란스러운 분위기가 알리나의 짧은 말 한마디에 찬물을 끼얹은 듯 조용해졌다.
“성소 입구로 진입하는 부대의 역할은 내부에서 혼란을 일으켜 다른 부대의 진입을 도와주는 임무를 맡을 거다.”
즉, 성소 입구로 진입하는 부대는 미끼 역할이라는 뜻.
도열해 있는 연합군 각성자들 사이에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서로의 눈치를 보며 마른침을 삼키는 각성자들.
이번 전쟁이 목숨을 걸어야 할 정도로 위험천만한 장소라는 건 여기 모인 모두가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적진 한복판에서 미끼 역할을 맡고 싶지는 않았다.
전장에서 장렬히 싸우다가 목숨을 잃는 것과 미끼 역할이 된 채 개죽음을 당하는 건 달랐으니까.
“그리 동요할 필요 없다.”
연합군을 쓱 둘러보며 알리나가 말을 이었다.
“성소 입구로 진입하는 부대에는 파군성을 비롯한 무곡성, 천권성, 녹존성, 그리고 소수 고위 각성자로 이뤄진 특수 부대다. 일반 병사들은 편성되지 않았으니 걱정하지 말도록.”
이어지는 알리나의 말에 여기저기서 안도에 찬 한숨이 흘러나왔다.
숨통을 조이는 긴장 풀린 후에 떠오른 것은 의문이었다.
칠성 중 무려 네 명을 미끼 역할로 투입할 만한 가치가 과연 있는가?
물론 칠성을 제외하고도 연합군의 전력은 상당하지만, 그래도 가장 핵심이 되는 건 역시 인류의 영웅이라 칭송받는 ‘칠성’이었다.
그런 칠성 중 넷이나 미끼 역할로 투입한다는 것은 명백한 과투자였다.
“다른 질문 있나?”
“없습니다!”
물론 그런 의문을 실제 입 밖으로 내뱉는 각성자는 없었다.
수업이 끝나기 직전 학생들에게 질문 있냐고 물어볼 때 실제 손을 드는 사람은 극소수인 것처럼, 대중에 섞인 개인은 눈에 띄고 싶지 않은 본능이 생기게 마련이니까.
“그럼 작전을 시작하기 전에, 제군들에게 한마디 하겠다.”
수많은 국적과 인종이 모여 있는 연합군을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 별들의 전쟁을 모르는 사람이 있나?”
“…….”
“그래, 그 참혹했던 전쟁을 잊은 사람은 없겠지.”
알리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이었다.
“그날. 인류는 스스로를 지키기 위해 무기를 쥐었고, 승리했다.”
비록 수많은 상처를 남겼지만.
헤아릴 수 없는 절망과 비극이 있었지만.
결국.
마수를 몰아내고 승리한 건 인간이었다.
“누군가는 군에 소속되었기 때문에, 누군가는 막대한 포상금을 타기 위해, 또 누군가는 정의를 관철하고 붙잡힌 사람들을 구하기 위해 이 자리에 서 있을 것이다.”
무덤덤한 말투 속에 담긴 강렬한 카리스마가 좌중의 분위기를 압도했다.
“이유는 각자 다를지라도, 그대들이 도망치지 않고 이 자리에 서 있다는 사실만큼은 누구도 부정할 수 없다.”
그것만으로.
“나는 그대들을 ‘영웅’이라 칭하기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한다.”
누가 말에는 힘이 담겨 있다고 했던가.
카리스마 넘치는 알리나의 연설에 도열해 있던 각성자들의 가슴에 뜨거운 불씨가 피워 오르기 시작했다.
영웅심이라는.
어찌 생각하면 가장 타오르기 힘든 불씨가.
“잠시 주변을 돌아봐라.”
각성자들은 서로에게 시선을 향했다.
“이곳에 모인 인원은 총 3만 2,782명이다. 그대들은 살면서 이렇게 많은 각성자가 모인 것을 본 적 있나?”
“…….”
“그래, 본 적 없겠지. 나도 이 정도 인원이 모일 거라고는 상상도 못 했으니.”
알리나는 팔을 들어 올렸다.
“일주일.”
하늘을 가리키듯 검지를 펼쳤다.
“전쟁이 결정되고 단 일주일이 흘렀다.”
전쟁을 준비하기엔 턱없이 부족한 시간이다.
“그럼에도 이렇게 많은 인원이 모일 수 있던 이유가 뭐라고 생각하나? 동맹군이 움직였기 때문에? 막대한 포상금이 걸렸기 때문에? 집결 장소가 성소여서?”
“…….”
“아니.”
나지막이 고개를 저으며 힘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이렇게 많은 이들이 이 자리에 모일 수 있던 건, 그대들 하나하나가 모두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이기 때문이다.”
사실 궤변에 가까운 말이었다.
이 중 대부분은 군에 소속되어서 어쩔 수 없이 참전했거나 복권 당첨이나 다름없는 막대한 포상금을 노리고 전쟁에 참여한 각성자였으니까.
그녀가 말한 것처럼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는 영웅’은 극소수에 불과했다.
하지만.
“…….”
“…….”
가슴 속에 지펴진 영웅심이라는 불씨는 군중심리라는 연료를 빨아들이며 더욱 맹렬하게 타올랐다.
거칠어진 호흡과 미친 듯이 뿜어져 나오는 아드레날린.
클럽 음악에 맞춰 단체로 춤을 추는 것처럼 이 자리에 모인 각성자들의 눈빛에 뜨거운 열기가 타올랐다.
‘이 정도면 됐나.’
알리나는 슬슬 끝맺음을 맺을 타이밍이라 생각하며 뜨거운 시선을 보내고 있는 각성자들을 향해 입을 열었다.
“지금부터 향하게 될 곳에는 끔찍한 마수 무리와 사악한 성좌가 기다리고 있다.”
“어쩌면 이곳에 모인 각성자의 절반… 아니, 전원이 죽을 수도 있겠지.”
알리나의 성흔의 밝은 빛무리와 함께 타올랐다.
“하지만.”
그녀가 뒤를 슬쩍 돌아보며 시선을 보내자 단상 뒤에 서 있던 칠성들이 일제히 마력을 뿜어냈다.
우우우우웅!
칠성들이 동시에 내뿜는 성흔의 마력이 순식간에 거대한 빛기둥이 되어 솟구쳐 올랐다.
각성자들을 솟구치는 마력의 기둥을 올려다보며 저도 모르게 쩍 입을 벌렸다.
“그대들의 앞길에 우리가 함께하겠다.”
“싸워도 먼저 싸울 것이요, 죽어도 먼저 죽을 것이다.”
“헤아릴 수 없는 시체가 쌓인다고 해도, 그 시체를 짊어진 채 앞으로 나아가겠다.”
그리고.
“기억하겠다. 이곳에 모인 3만 2,782명의 영웅들을.”
와아아아아아아!
폭발할 듯한 함성이 성소의 신전을 뒤흔들 듯이 울려 퍼졌다.
알리나는 함성이 잠잠해질 때까지 기다리다가 품속에서 주먹 크기의 구슬을 꺼내 들었다.
“그럼 통신용 성유물을 통해 각 부대 별로 투입될 진입 루트를 알려줄 테니 지휘관의 명령을 따라 신속히 이동하도록.”
“충성!”
“예!”
“알겠습니다!”
연합군이라고 해도 군인이 아닌 인원이 절반이 넘어선 지 대답은 제각각으로 튀어나왔다.
하지만 지금 이런 분위기 속에서 재식 따위가 뭐가 중요할까.
각성자들을 눈에서 불을 뿜을 것처럼 뜨거운 눈빛으로 통신용 성유물에서 지시가 떨어지기를 기다렸다.
“후우.”
연설을 마치고 내려온 알리나의 입술 사이로 지친 한숨이 흘러나왔다.
전쟁을 준비하기 전에 사기를 끌어 올리는 연설은 그녀의 특기 중 하나였지만, 상황이 상황이다 보니 베테랑인 그녀라고 해도 긴장하지 않을 수 없었다.
“수고하셨습니다. 연설 잘하시던데요?”
오진이 박수를 치며 그녀에게 다가왔다.
사실 연설 내용만 놓고 보면 그리 특별한 건 없었지만, 알리나 특유의 위압감과 좌중을 압도하는 카리스마 덕분에 기대 이상의 효과를 볼 수 있었다.
“항상 해오던 일인데요, 뭐. 그리고 마음에도 없는 말을 억지로 했던 건 아니에요.”
“하긴, 이유야 어쨌건 여기 모인 사람들은 나름의 각오를 한 사람이니까요.”
“…오진 씨만큼은 아니겠지만요.”
알리나는 걱정스러운 눈빛으로 말을 이었다.
“그나저나 정말 괜찮으시겠어요?”
“미끼 역할 말인가요?”
“예. 계획이 있으신 건 알고 있지만… 너무 리스크가 커요.”
“그만큼 리턴도 크죠.”
알리나가 못 말리겠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부디 몸조심하세요.”
“물론입니다.”
오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그를 따라 ‘미끼 부대’에 소속된 각성자들이 하나둘 모여들었다.
하나 같이 날고 긴다 하는 실력을 지닌 고위 각성자로 이뤄진 특임대.
그들은 오진의 뒤를 따라 로마로 통하는 성소 입구를 향해 나아갔다.
“가죠.”
서로 다른 국적, 인종의 각성자들이 힘을 합쳐 싸웠다는 의미에서 이름 붙여진 ‘별들의 전쟁’.
그 두 번째이자, 마지막이 될 전쟁이 막을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