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413)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413화
별들의 전쟁 (4)
-이제 작전대로, 죽어주시면 됩니다.
군사 독재 정권의 냉혹한 지휘관과 같은 명령에 가장 먼저 반응한 것은 ‘흑사자’라는 별명으로 더 유명한 이우혁이었다.
“커헉! 크으윽!”
갑작스럽게 가슴을 틀어쥔 채 고통을 호소하는 이우혁.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마수 한 마리가 달려들어 낫과 같이 생긴 날카로운 손톱을 휘둘렀다.
촤악!
가슴이 베이며 핏물이 솟구쳤다.
과연 이게 사람 몸에서 나올 수 있는 양인가 싶을 정도로 엄청난 양의 핏물이 바닥을 적혔다.
“크르르륵! 크륵!”
피를 쏟아내는 이우혁을 바라보며 승리의 괴성을 내지르는 마수.
이우혁의 몸을 손톱으로 갈랐을 때 느껴진 생생한 감각와 쏟아지는 핏물의 양을 생각했을 때 이견이 없는 치명상이었다.
상처를 입은 이우혁이 당장이라도 쓰러질 것처럼 휘청였다.
-좋아요. 위장용 핏물이랑 상처는 들키지 않은 것 같으니 그대로 쓰러져주시면 됩니다.
머릿속에 오진의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크윽… 제기랄.”
작전대로 완벽하게 적의 눈을 속이기 위해서는 조금 더 혼신의 연기를 펼칠 필요가 있었다.
“이 전투가 끝나면… 그녀에게 프로포즈를 하려고 했는데.”
-우혁 씨?
“해치운 게 아니었다니….”
-저기요? 그만 쓰러져 주실래요?
“뒤는… 너희들에게 맡길게.”
-입 다물고 빨리 쓰러지라고 좀 제발.
마수 상대로 뭐 하는 짓이야.
“크윽! 컥!”
이우혁은 가슴을 움켜쥔 채 풀썩 바닥에 쓰러졌다.
너무 과장된 동작이라 연기라는 게 들키지는 않을까 걱정됐지만.
“크르륵!”
다행히 지능이 높은 마수는 아니었는지 이우혁이 쓰러지는 것을 확인하고는 급히 몸을 돌렸다.
“크흠! 이거 더는 못 버티겠구만!”
“꺄아아아아. 나 죽는 다아아아아.”
-아니 뭐 초등학교 학예회합니까?
어색하다 못해 처참할 정도인 연기력을 보니 절로 두통이 밀려왔다.
‘후우. 그래, 이 정도는 예상했으니까.’
애초에 연기라고는 생전 해본 적도 없는 초보자들이 제대로 연기를 할 수 있을 거라 기대조차 하지 않았다.
-다들 말하지 말고 입만 뻐끔거려 주세요.
오진은 염소자리의 성흔을 이용해 가짜 비명을 만들어냈다.
어색하기 짝이 없었던 비명이 혼을 쥐어짜내는 듯한 처절한 절규로 바뀌었다.
“크흑!”
“커허어어억!”
비명을 내지르며 하나둘 쓰러지기 시작하는 각성자들.
그들의 상처에서 솟구쳐 오른 비릿한 핏물은 예민한 감각을 지닌 마수들도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진짜와 흡사했다.
‘이사벨라가 직접 만든 거니까.’
거머리자리 성흔을 지닌 그녀에겐 진짜와 흡사한 피를 만들어내는 것 정도는 일도 아니었다.
동물 피로 만들어낸 가짜하고는 혈향부터 다른 핏물에 마수들이 하나둘 승리에 찬 괴성을 내질렀다.
원래라면 여기서 시체들을 뜯어먹으며 승자의 권리를 누려야 했을 타이밍이지만.
-쿠르르르릉!
도시 곳곳에서 굉음이 울려 퍼지며 먼지구름이 솟구쳤다.
특임대가 미끼 역할을 하는 사이, 알리나가 이끄는 본 부대가 성공적으로 로마에 진입한 것이다.
“크르륵. 적… 습격.”
“칩입자… 또, 왔다.”
수면 내시경을 받고 막 깨어난 것처럼 어눌한 말투로 중얼거리던 마수들이 굉음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고갤 돌렸다.
“침입자는… 죽인다.”
마수 무리가 굉음이 들려오는 방향으로 우르르 빠져나갔다.
철통처럼 성소 입구를 지키고 있었던 마수 무리가 눈 깜짝할 사이에 사라졌다.
성소 입구 앞에 남은 거라고는 미끼 역할을 마치고 장렬히 희생한 각성자들의 시체뿐.
아니.
정확히는.
“이제 일어나셔도 됩니다.”
죽은 척 연기하고 있던 각성자들이었다.
“후아!”
“이제 된 건가 동생?”
“아이 씨, 이거 피 뭐야? 진짜 사람 피 쓴 거야?”
하나둘 몸을 일으킨 각성자들이 온몸에 끈적하게 달라붙은 핏물을 털어내며 한 마디씩 내뱉었다.
“그나저나 이런 작전이 진짜 먹혀들 줄은 몰랐네.”
샤오란은 어처구니없다는 듯 헛웃음을 삼키며 마수 무리가 빠져나간 자리를 둘러봤다.
솔직히 마수 앞에서 죽은 척을 하라는 지시를 들었을 때는 저 자식이 회귀를 했다더니 지능까지 회귀한 모양이구나 싶었는데,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이중 미끼’ 작전은 성공적이었다.
“지능이 퇴화한 상태니까요.”
“퇴화했다니?”
“뱀의 ‘지배’를 당하면 어느 정도 지능이 있는 마수들도 유아 수준으로 지능이 퇴화하게 됩니다. 최면 걸린 사람처럼요.”
“…그건 대체 어떻게 알고 있는 거야?”
그야 실제 마수 무리를 조종했던 경험자가 옆에 붙어 있으니까 알게 됐지만.
“제가 ‘회귀자’라 말씀드리지 않았습니까?”
“아….”
그제야 샤오란이 나지막한 탄성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입구 안에서 대기 중이던 알렌과 백무강, 리베카를 비롯한 ‘진짜 전력’들이 하나둘 입구 밖으로 빠져나왔다.
“…진짜 성공했군요.”
“예.”
알렌은 텅 빈 입구 앞을 바라보며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끔벅였다.
특임대가 처음 만들어졌을 당시, 그들에게 주어진 임무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본대가 쉽게 로마로 진입할 수 있도록 미끼 역할을 해주는 것.
그리고 남은 하나는.
“이제 ‘뱀’을 잡으러 가죠.”
이번 사건의 주도자라고 할 수 있는 검은 별의 성좌, 뫼비우스를 죽이는 것.
그를 위해서는 마수 군단의 주의를 본대 쪽으로 돌릴 필요가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되면 첫 번째 목표인 미끼 역할을 하는 게 불가능하지.’
은밀하게 진입해 적군 수장의 목을 따는 암살 임무와 최대한 요란을 떨며 적의 이목을 집중시켜야 하는 미끼 임무는 물과 기름처럼 서로 섞일 수 없었으니까.
물론 본대 쪽의 희생을 감수하고 미끼 역할을 떠넘길 수도 있었으나.
‘그러면 성소 입구가 이렇게 텅 빌 일도 없었겠지.’
성소 입구를 지키던 마수들이 자리를 뜬 이유는 어디까지 입구에서 나온 각성자들이 모두 죽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게 아니었다면 아무리 지능이 낮아졌다고 해도 성소의 입구를 지키던 모든 병력이 다 빠져나갔을 리는 없으리라.
‘아니, 인제 와서 생각하면 그것도 아닌가.’
카시아에게 전해 듣기는 했지만, ‘뱀’의 지배를 받은 마수들의 지능은 상상했던 것 이상으로 낮았다.
컴퓨터 AI와 대전 게임을 하는 느낌이랄까.
미리 지시해둔 행동 외에 다른 행동을 할 생각 자체를 못 하는 느낌이었다.
“제가 이렇게 복잡한 방법을 쓰실 필요 없다고 했죠?”
입구에서 나온 카시아가 바닥에 널브러진 마수의 시체를 툭툭 발로 건드리며 오진에게만 들리도록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뱀주인자리 성흔으로 정신을 지배한 마수에게 내릴 수 있는 명령은 극히 제한적이에요. 아마 이 마수들도 ‘침입자를 죽여라’ 정도의 명령만 수행하고 있을 거예요.”
“그래 보이네.”
뭐, 어쨌든.
다다익선이라고 부족한 것보다는 넘치는 게 나은 법이다.
‘지금까지는 어떻게 잘 풀렸어.’
문제는 이 다음.
‘뫼비우스’를 처치하고 그에게 붙잡힌 사람들을 구해야 했다.
“슬슬 이동하죠.”
“뫼비우스의 위치는 알고 계십니까?”
“이제부터 찾아봐야죠.”
물론 무식하게 도시 곳곳을 들쑤시며 찾을 생각은 없었다.
“부탁해, 베가.”
[알겠느니라!]의체 상태로 현신한 베가가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우리도 힘을 보태겠네.] [뫼비우스를 찾는 건 우리한테 맡기라고!]베가 외에도 레굴루스, 스피카, 알데바란, 아리스 등 의체 상태로 현신한 성좌들이 일제히 공중으로 날아올랐다.
밤하늘의 별이 떠오르듯 성좌들의 몸에서 희미한 빛의 파동이 퍼져나갔다.
베가 혼자였다면 뫼비우스의 기척을 찾아내느라 애를 먹었겠지만 이곳에 모인 성좌들의 숫자만 수십.
의체 상태로 현신할 수 있는 성좌들은 일단 모두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성좌들이 힘을 합치자 ‘율법의 제약’을 받지 않는 선에서 뫼비우스의 기척을 감지해내는 건 금방이었다.
[저쪽이니라.]오진의 어깨 위로 내려와 앉은 베가가 손으로 방향을 가리켰다.
“출발하죠.”
특임대는 빠른 속도로 베가가 가리킨 방향으로 이동했다.
본대가 어그로를 잘 끌어주고 있는 덕분인지 가는 길에 다른 마수 무리를 마주치는 일은 없었다.
그렇게 도착한 장소는 어느 이름 모를 광장.
“사, 살려주세요!”
“여, 여기예요! 여기!”
“흐아아아앙!”
광장 중앙에는 10살도 채 되지 않아 보이는 어린아이들이 묶여 있었다.
“읏…!”
붙잡힌 아이들을 본 이사벨라가 입술을 짓씹으며 다가가려고 했지만.
“잠시만 기다려봐.”
저렇게 보란 듯이 넓은 광장 중앙에 아이들을 모아둔 것을 보니 함정일 가능성이 컸다.
사냥개자리의 성흔을 활성화해 주변을 살피고 있자니, 무너진 건물 잔해 사이로 새하얀 뱀 한 마리가 유연하게 기어 나왔다.
뱀은 곧 사람으로 모습을 바꾸더니 광장 중앙에 있는 분수대에 여유롭게 걸터앉았다.
“하하. 설마 본대가 미끼였을 줄은 몰랐네요.”
“…뫼비우스.”
몰랐다는 것치고는 꽤나 여유로워 보이는 모습이었다.
“와주실 거라 믿고 있었습니다. ‘역천의 별’이여.”
자리에서 일어난 뫼비우스가 가슴에 손을 얹고 정중하게 허리를 숙였다.
“네가 그 뱀주인자리의 성좌인가?”
알렌이 허리춤에서 검을 뽑아 들며 앞으로 나섰다.
백조자리의 성흔이 빛을 뿜으며 하얀 서리와 함께 날카로운 살기가 퍼졌다.
“당장 아이들을 풀어줘라. 그렇지 않으면….”
“예, 그러죠.”
“…뭐?”
알렌이 말을 마칠 새도 없이, 뫼비우스는 아이들을 묶고 있던 ‘뱀’을 풀어냈다.
“어…?”
“가, 가도 되는 건가요?”
풀려난 아이들도 지금 상황이 믿어지지 않는다는 듯 고개를 두리번거렸다.
뫼비우스는 아이들을 바라보며 방긋 미소 지었다.
“어서 가보렴.”
“으….”
망설이는 것도 잠시.
광장에 붙잡혀 있던 아이들은 눈을 글썽인 채 오진 일행을 향해 우다다 달려오기 시작했다.
붙잡혀 있던 아이들의 숫자만 수백.
방학이 끝난 초등학교 정문처럼 한 번에 달려오기 시작한 아이들 때문에 고요했던 광장 안이 순식간에 혼란에 휩싸였다.
“위험해!”
“놈의 함정일 겁니다! 다들 아이들한테서 떨어지세요!”
이렇게 쉽게 아이들을 풀어주는 것이 말이 되지 않는다고 판단한 몇몇 각성자들이 다가오는 아이들을 향해 무기를 겨눴다.
“히익!”
“저, 저희 아무것도 안 했어요!”
달려오던 아이들이 흠칫 몸을 떨며 발걸음을 멈췄다.
뫼비우스는 무기를 꺼내든 각성자들을 바라보며 피식 실소를 흘렸다.
“함정 같은 거 아니니까 안심하셔도 됩니다.”
“…….”
함정이 아니라고 해도 그 말을 한 장본인이 아이들을 붙잡아둔 당사자인 이상 어찌 안심할 수 있을까.
각성자들을 아이들에게 겨눈 무기를 거둬들이지 않은 채 서로의 눈치를 살폈다.
“제가 가서 확인할게요.”
침묵을 깨고 나선 것은 쌍둥이자리의 각성자, 녹존성 리베카였다.
리베카가 앞으로 나서며 가볍게 영창을 읊었다.
그녀의 성흔이 녹색 빛을 뿜으며 리베카와 똑같이 생긴 분신들이 만들어졌다.
리베카의 분신들이 멈춰선 아이들 한 명, 한 명에게 다가가 그들을 살폈다.
“…무슨 수를 쓴 것 같지는 않네요.”
아이들을 꼼꼼하게 살핀 리베카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기껏 붙잡은 인질들을 이렇게 순순히 풀어주다니?
인정을 베풀었다고 생각하기엔 애초에 로마에 사는 수십 만의 사람들을 하루아침에 학살한 장본인이 바로 뫼비우스였다.
“흐윽….”
“가, 각성자님들 맞으시죠? 저희 아빠 좀 구해주세요!”
“집에… 집에 가고 싶어요.”
리베카의 분신에 안겨든 아이들이 펑펑 눈물을 쏟아내기 시작했다.
하루아침에 집과 부모를 잃고 일주일 이상 정체 모를 곳에 붙잡혀 있었을 테니 울음을 터트리는 것도 당연하리라.
“괜찮니? 많이 무서웠지? 무슨 나쁜 짓 당하지는 않았고?”
리베카의 분신들이 아이들 하나하나를 끌어안아 주며 자상한 목소리로 물었다.
“아, 아뇨.”
“나쁜 짓은… 안 당했어요.”
“바, 밥도 맛있는 거 먹었어요.”
밥을 굶기거나 학대를 한 건 아닌지 풀려난 아이들의 몸 상태는 지극히 멀쩡해보였다.
“…….”
오진은 가늘게 눈을 뜬 채 뫼비우스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무슨 생각이지?”
“무슨 생각이라뇨?”
“왜 아이들을 풀어준 거야?”
아무리 이유를 생각하려고 해도.
인질을 이렇게 쉽게 풀어줘서 뫼비우스가 가져갈 수 있는 이득은 없었다.
“하하하. 그렇게 심각하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뫼비우스는 온화한 미소를 띤 채 고개를 저었다.
“그야 아이들이잖아요? 순수하고 때 묻지 않은. 그런 아이들을 다치게 할 수는 없죠.”
그의 시선이 오진을 지나, 성좌들을 향했다.
“여러분도 그렇게 생각하시죠?”
[흐음.]베가는 눈을 찌푸리며 팔짱을 꼈다.
물론, 아이들을 풀어줬다고 해서 그가 벌인 짓의 면죄부는 될 수 없었지만.
[최소한의 양심은 그래도 남아 있는 모양이구나.]“양심이라기보단 의무에 가깝죠.”
[…의무?]“세계의 균형을 수호하며 성흔이 싹을 틔울 소중한 토양… 즉, 인간을 지키는 게 성좌의 의무 아닌가요?” [그걸 잘 아는 자가 이런 끔찍한 짓을 벌였단 말이냐?]
베가가 힐난하듯 뫼비우스를 노려봤다.
“하하, 그러게요.”
마치 남 일이라는 듯 웃음을 터트리는 뫼비우스.
“그럼 그런 성좌님들은 의무를 잘 지키고 계시나요?”
[당연한 소릴. 의무를 잊었다면 이 자리에 이토록 많은 성좌들이 현신해 있지도 않았을 것이니라.]“하하. 그렇죠, 그렇죠. 근데….”
성좌들을 응시하는 녹색 눈동자에 세로로 찢어진 동공이 번들거렸다.
“그러면, 그때는 왜 그랬어?”
섬뜩한 살기가 폭발하듯 주변을 잠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