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418)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418화
별들의 전쟁 (9)
예로부터 인간은 그림자 속에 영혼이 깃들어 있다고 믿었다.
밤길을 걸을 때 달빛 아래 드리워진 자신의 모습.
검고, 거대한.
발아래부터 가지처럼 뻗어 나간 어딘가 음울하게 느껴지는 형체.
그곳에 자신의 영혼의 일부가 깃들어 있다 믿는 것은 비단 주술이나 신앙적인 믿음이 없다고 하더라도 누구나 한 번쯤 해볼 법한 생각이리라.
그런 그림자를 ‘검’으로 벤다.
일반적인 상황이었다면 아무런 의미조차 갖지 않는, 그저 맨땅을 검으로 베는 정도의 의미 없는 행위에 그쳤겠지만.
그 행위가 ‘성역’ 안에서 이뤄졌다면 얘기가 달랐다.
“커헉!! 컥!”
오진은 가슴을 움켜쥔 채 한쪽 무릎을 꿇었다.
살점이 칼에 베였을 때와는 전혀 다른, 생전 처음 느껴보는 기이한 감각.
영혼의 일부가 검에 도려내지는 감각은 그의 상상을 아득히 초월했다.
마치 길을 걷는 도중 딛고 있던 땅이 순식간에 사라진 것처럼.
* * *
‘오진’이라는 존재를 이루고 있는 무언가가 사라진 듯한 기분이었다.
“쿨럭! 쿨럭!”
오진은 가슴을 부여잡은 채 구역질을 하듯 몸을 숙였다.
[나, 나의 아이야!]베가가 다급히 오진에게 다가갔지만.
[이, 이건….]오진의 몸이 유령처럼 반투명해지며 점차 희미해지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이미 늦었습니다.”
뫼비우스는 베가를 돌아보며 나지막이 말을 이었다.
“그림자란 영혼의 일부를 이루는 개념. 그 개념을 베었으니 그림자의 주인인 오진 씨도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겠지요.”
[네 이놈…!]베가의 금색 눈동자가 뫼비우스를 향했다.
[네 뜻대로 되도록 놔두지 않을 것이니라!]“흐음. ‘소멸’을 각오하고 베가 님의 성역이라도 전개하실 생각이십니까?”
[그건….]“하하하! 물론 그러실 리 없겠죠. ‘소멸’을 대가로 지불하기엔 인간이란 너무 하찮은 존재 아닙니까?”
[…….]베가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녀는 가소롭다는 듯 팔짱을 낀 채 뫼비우스를 응시했다.
[뭔가 착각하고 있는 게 있구나.]“착각이요?”
[본녀가 이곳에서 성역을 펼칠 뜻이 없는 이유는 굳이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기 때문이니라.]“…그게 무슨 소리십니까?”
지금 이 순간에도 ‘오진’이라는 존재 자체가 사라져가고 있는 와중에 그렇게까지 할 필요가 없다니?
[본녀의 아이를 얕잡아보지 말거라.]베가의 시선이 가슴을 움켜쥔 채 몸을 웅크리고 있는 오진을 향했다.
유령처럼 반투명해지고 있던 그의 몸 주변에 은은한 은색 빛무리가 떠올랐다.
[본녀의 아이야말로 정해진 운명을 뒤바꿀 ‘역천의 별’이니.]파직, 파지지직!
은색 빛무리에 섞여 푸른 스파크가 튀어 올랐다.
몸을 웅크린 채 신음을 흘리고 있던 오진이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어딜 감히 하찮은 성좌 따위가 역천의 별 앞에서 멋대로 ‘끝’을 논하느냐?]쿠르르르릉!
벼락이 내려치며 뫼비우스의 성역이 뒤흔들렸다.
그림자 안개가 갈라지며 찬란한 은빛이 폭발하듯 타올랐다.
“이건….”
뫼비우스는 믿기 어렵다는 듯 뒷걸음질 쳤다.
그가 전개한 성역, ‘암월’을 뚫고 은빛 빛무리가 주변 영역을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말도 안 돼.’
오진이 성역을 다룰 수 있다는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성역을 사용할 수 있는 것과 전개할 수 있는 건 엄연히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성역이란 본디 성흔의 근원을 구현한 고유의 영역.
그것을 성좌가 아닌 일개 각성자가 전개할 수 있다는 건 어불성설이었다.
“하아.”
나지막한 숨을 토해낸다.
찬란하게 반짝이는 은빛 입자 사이로 푸른 스파크가 튀어 오른다.
등골을 타고 흐르는 아찔한 전능감.
마치 ‘개천’을 사용했을 때와 비슷한 감각에 심장이 쿵쿵 맥동했다.
“그러고 보니 베가, 이 성역도 이름이 따로 있어?”
안셀라두스의 성역은 ‘용궁’, 뫼비우스의 성역은 ‘암월’이라는 뭔가 있어 보이는 이름이 있었으니 베가의 성역에도 따로 이름이 있지 않을까.
의문이 담긴 눈으로 베가를 바라보니 베가가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다.
[거문고자리 성흔의 성역의 이름은 ‘은하(銀河)’이니라.]“이야, 마음에 드네.”
‘은하’라.
북극성의 성좌가 펼치는 성역의 이름에 딱 걸맞은 이름이지 않은가.
“자, 그럼 2차전을 시작해 볼까?”
오진은 은빛 빛무리에 휩싸인 창을 뫼비우스에게 겨눴다.
은색 입자가 사방으로 뻗어 나가며 주변을 뒤덮고 있는 그림자 안개를 불태웠다.
성역은 그 성흔이 지닌 근원을 현실에 구현화한다.
추상적으로 남아 있는 이미지나, 개념 따위에 실제 물리력을 부여한다는 것.
뫼비우스가 그림자에 ‘혼’이라는 추상적인 개념을 담아냈듯.
‘은하’를 전개한 오진도 성흔에 담겨 있는 추상적인 개념에 실질적인 물리력을 부여할 수 있었다.
“하아.”
거문고자리 성흔에 담을 수 있는 개념은 두 가지.
‘하나는 이 은색 입자들.’
은이라는 물질에는 예로부터 많은 이미지가 얽혀 있었지만.
그중 가장 명확하고 직관적인 이미지는 바로 ‘정화’였다.
부정한 것을 멸하는 힘.
악을 불태우고 마를 내쫓는 파마(破魔)의 기운이 은빛 빛무리에 깃들었다.
“크윽!”
치이이이익!
안개처럼 주변을 뒤덮은 그림자가 타들어 가며 끔찍한 격통이 뫼비우스를 뒤흔들었다.
영혼 자체가 도려내지는 듯한, 아니 불살라지는 듯한 고통.
오진이 전개한 성역에서 뿜어져 나온 은빛 입자들이 ‘암월’의 영역을 침범하며 뫼비우스의 성역을 불살랐다.
“이 정도로…!”
뫼비우스라고 가만히 당하고 있지는 않았다.
성흔의 힘을 한층 끌어올리며 어떻게든 은빛 입자가 성역을 침범하는 걸 막아냈다.
쿠르르릉!
두 성역이 충돌하며 도시 전체를 뒤흔드는 듯한 충격이 사방을 휩쓸었다.
수십, 수백 채에 달하는 건물들이 우르르 무너져 내리며 아찔한 굉음을 만들어냈다.
마치 운석이라도 충돌한 것 같은 어마어마한 충격.
그 아찔한 힘의 격류 사이에서 그림자와 은빛 입자는 팽팽한 줄다리기를 이어갔다.
“허억, 허억!”
영원히 이어질 것 같았던 줄다리기의 승기는 점차 뫼비우스 쪽으로 기울었다.
그림자 안개는 사방에 퍼진 은빛 입자들을 흡수하며 오진의 성역을 착실히 줄여갔다.
이대로 조금만 더 시간이 지나면 완전히 그의 성역을 무너뜨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머리를 스쳤을 때.
파지지지직!
은빛 입자 사이로 푸른 뇌전이 타올랐다.
“크윽…!”
눈을 찌푸리며 뒷걸음질 치는 뫼비우스.
[지금이니라!]베가의 축복이 오진에게 깃들었다.
거대한 은빛 해일이 주변 대지에 범람했다.
오진은 창을 움켜쥔 채 거칠게 발을 굴렀다.
허공에 만들어진 뇌흔의 발판을 밟으며 공중으로 솟구쳐 올랐다.
움켜쥔 창을 한계까지 뒤로 당기며 두 번째 ‘개념’을 창에 담았다.
‘은빛에 정화의 개념이 깃들어 있다면.’
그가 성역에 담은 두 번째 개념.
창을 휘감으며 타오르는 푸른 뇌전, 하늘을 꿰뚫는 ‘벼락’에 담긴 이미지.
‘심판.’
추상적인 이미지에 불과한 심판이라는 개념이 성역과 섞이며 현실에 구현된다.
악을 징벌하는 신의 권능.
하늘에서 내리친 벼락이 창에 깃들었다.
“내리쳐라!”
포효하듯 외친 영창과 함께 한 줄기 벼락이 천공을 꿰뚫으며 뫼비우스에게 작렬했다.
콰자자자자자작!
순간 시야가 멀어버릴 듯 강렬한 빛무리가 사방을 가득 채웠다.
“커헉! 컵! 아아아아아아!”
정수리부터 내리치는 벼락.
암월의 영역이 찢어발겨지며 푸른 뇌전이 뫼비우스의 몸을 강타했다.
“허억, 허억!”
신의 징벌과도 같은 벼락이 지나간 후에.
오진은 거친 숨을 헐떡이며 전개했던 성역을 다시 불러들였다.
풀썩.
숨을 헐떡이던 오진이 바닥에 쓰러졌다.
[나, 나의 아이야!!]베가가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오진에게 다가왔다.
방금 오진이 전개한 성역은 그녀로서도 쉽사리 사용하지 못하는 수준의 완성도였다.
그걸 인간의 몸으로 펼쳤으니 어마어마한 후폭풍이 그의 전신을 난자하고 있을 터.
그나마 오진이 ‘성좌’가 아니라 다행이지, 만약 율법의 제약을 받는 성좌였다면 그대로 성흔이 불타 소멸했으리라.
“크으으….”
[괜찮으냐?!]“아니, 안 괜찮은 거 같은데.”
베가를 안심시켜주기 위해서라도 괜찮다 답해야겠지만.
지금은 그런 허세를 부릴 수도 없을 정도로 몸 상태가 처참했다.
‘이거 나도 율법의 제약을 받고 있는 거 아냐?’
그런 의문이 머리를 스칠 정도로 끔찍한 격통과 탈력감이 몸을 짓눌렀다.
“뫼비우스는?”
[아마 저 상태면… 곧 소멸할 것이니라.]베가의 시선이 바닥에 쓰러진 채 시체처럼 미동조차 하지 않는 뫼비우스 향했다.
뫼비우스의 몸은 모래알처럼 점차 가루가 되어 흩어지고 있었다.
‘심판의 벼락’을 정통으로 맞았으니 아무리 뱀주인자리의 성좌라 할지라도 목숨을 부지하기는 어려우리라.
[일단 성소로 돌아가서 빨리 치료하자꾸나.]베가가 오진의 옷을 잡은 채 낑낑 잡아끌었다.
-뫼, 뫼비우스 님! 지금 밖에 나쁜 마수들이 잔뜩 쳐들어왔데요!
어느 날.
소녀가 살던 마을에 마수 무리가 쳐들어왔다.
-가지… 말라고요?
나는 소녀의 팔을 붙잡으며 가면 안 된다고 애원했다.
-안 돼요. 제가 가지 않으면 많은 사람이 죽을 거예요.
소녀는 단호히 고개를 저으며 말을 이었다.
-뫼비우스 님이 말씀하셨잖아요? 제게 ‘별’을 내려주신 이유는… 그만큼 많은 사람을 지켜주라는 의미라고.
아니야, 라는 말이 목구멍에 맴돌았다.
네게 성흔을 준 이유는 그저 예언을 피하기 위해서라고.
내 한 몸 지키려고 했던 비열한 이기심 때문이라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전 뫼비우스 님의 자랑스러운 아이인걸요!
말할 수 없었다.
별빛처럼 반짝이는 소녀의 눈동자가 증오의 감정으로 가득 찰까 무서워서.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저, 그럼 나가볼게요! 걱정 마세요! 다른 각성자분들도 같이 싸워주신대요!
소녀는 가느다란 팔로 알통을 만들어 보이며 몸을 돌렸다.
나는 떠나가는 소녀의 뒷모습을 가만히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아, 그래.
언제나 그랬듯.
나는.
그저.
지켜볼 수밖에━
“허억!”
메마른 폐부에 숨이 들어찬다.
“아, 으.”
흐릿하게 점멸하는 의식 속.
별빛처럼 반짝이는 소녀의 모습을 따라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어, 어찌…?!]은발의 여신이 경악에 찬 눈으로 이쪽을 바라보는 게 보였다.
“이, 브….”
소녀의 이름을 부른다.
또 한 번.
기억이 머리를 스친다.
-아이의 일은 안타깝게 됐네요. 이름이… 이브라고 했던가요?
검은 머리에 푸른 귀화로 타오르는 눈빛을 지녔던 인간.
그는 자신을 ‘천마’라 소개했다.
-죄송합니다. 별들의 전쟁이 일어날 줄은 알고 있었지만… 여기서 당신의 아이가 죽게 될 거라고는 몰랐습니다.
그는 슬픔에 가득 찬 눈으로 내 어깨 위에 손을 올렸다.
-비록 죽은 아이를 되살릴 방법은 없지만… 한 가지, 제가 도움을 드릴 수 있는 게 있을 것 같네요.
그는 방긋 미소 지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복수. 당신의 아이를 죽도록 내버려 둔 그자들에게 대한 복수를 도와드리죠.
그날.
내 안에 반짝이던 별빛은 검은 하늘에 집어삼켜졌다.
-자, 뫼비우스 님. 만약 당신의 힘으로 도저히 상대할 수 없는 적을 만난다면 이 주문을 한 번 외워보세요.
주문이라.
나는 왼쪽 가슴에 손을 얹은 채.
그가 알려준 ‘주문’을 입에 담았다.
“나를… 지나는, 자.”
그리고.
내 안에 깃들어 있던 검은 하늘이 활짝 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