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422)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422화
별들의 전쟁 (13)
찬란한 빛무리가 검은 먹구름에 뒤덮인 하늘을 갈랐다.
만개한 꽃잎처럼 활짝 펼쳐진 성역과 성역들이 겹치며 별빛의 화원을 만들어냈다.
“어째서….”
뫼비우스는 찬란히 피어오르는 별빛을 바라보며 낯가죽을 쓸어내렸다.
왜, 라는 의문이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너희들은… 그런 존재가 아니잖아.”
머릿속에 깊게 새겨진, 흰색 셔츠에 튄 얼룩과도 같은 그 날의 기억을 떠올린다.
쓰러진 채 죽어가는 소녀.
별빛처럼 밝게 빛나던 눈동자는 탁한 회색으로 물들었고, 가지처럼 가늘었던 팔다리는 기이한 방향으로 꺾여 있었다.
아무도 그 소녀를 위해 나서주는 이는 없었다.
그렇게 애원하고.
그토록 갈망하고.
목이 터지라 울부짖었지만.
“그때는 아무도… 나서주지 않았잖아.”
죄인처럼 고개를 숙인 채.
죽어가는 아이들에게서 몸을 돌렸으면서.
인제 와서 아이들을 지키겠다고 나선다고?
“안 되는 거잖아….”
불합리하다.
부조리하다.
불평등하다.
“너희들이 이렇게 나오면 그 아이는 뭐가 되는데!”
절규하듯 외친다.
[이브라고 했던가? 과거 별들의 전쟁에서 죽은 네 아이 이름.]데네브가 뫼비우스를 향해 걸어오며 물었다.
“함부로 그 아이 이름을 입에 담지 마.”
[…네 아이에 대해서는 미안하게 생각하고 있어.]그 자리에 데네브가 있던 건 아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무런 책임도 없는 건 아니었다.
그날 침묵에 대한 업보는 모든 성좌가 나눠 짊어져야만 하는 일이었으니까.
“미안…? 미안하다고?”
하.
뫼비우스는 얼굴을 손으로 덮은 채 낄낄 어깨를 들썩였다.
앞서 베가에게도 ‘미안하다’는 말을 들었지만, 그때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그건 그냥 그녀가 특별하다고 생각했으면 됐으니까.
과거 자신이 겪었던 것과 같이, 그녀 또한 똑같은 절망을 맛보길 기대하면 됐으니까.
하지만.
이건 얘기가 다르지 않은가.
“사과하지 마.”
참회하지 마.
회개하지 마.
후회하지 마.
“너희는 그냥… 그때와 같은 쓰레기로 남아 있으면 돼.”
창조신의 규율 앞에 자신의 아이조차 등져버리는.
그런 개자식들로 남아 있으면 돼.
아니, 남아 있어야 해.
그래야만 내가 너흴━
[그건 힘들 것 같네.]데네브가 나지막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네 눈에는 똑같을지 몰라도, 지금과 그때는 달라.]“뭐가 다르단 거지?”
[우리가.]데네브가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얹으며 주변을 둘러봤다.
쓰러진 각성자들을 소중히 품에 안은 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키고 있는 성좌들의 모습이 보였다.
[우리가, 달라졌어.]인간과의 만남이 아직 낯설었을 무렵.
성좌들이 인간을 지켜 주려 했던 이유는 어디까지나 성좌로서의 의무 때문이었다.
단순한 의무였기에, 정해진 규율을 넘으면서까지 지키려 하지는 않았다.
그래. 조금 더 직접적으로 말하면.
당시 자신의 아이를 그 정도로 ‘소중하다’고 생각하는 성좌는 많지 않았다.
[하지만 이제는 달라졌지.]그들과 만나며, 가까워지며, 다투고 화해하며.
인간을 지키는 것은 단순한 의무를 넘어서게 되버린 것이다.
“…아니.”
뫼비우스는 사납게 빛나는 눈동자로 성좌들을 응시했다.
“너희들은 변하지 않았어. 그때도, 지금도.”
쿠르르르륵!
흑천의 구름이 사납게 요동쳤다.
“내가 직접 증명해 주마.”
너희들이 하나도 바뀌지 않았다는 걸.
콰앙!
굉음과 함께 도시 전체가 뒤흔들렸다.
사납게 요동치는 검은 먹구름이 성좌들이 펼친 성역을 거칠게 후려쳤다.
[온다!]데네브의 외침과 함께 성좌와 검은 별의 성좌의 격돌이 시작됐다.
찬란하게 빛나는 성역과 그를 탐욕스럽게 물어뜯는 검은 먹구름.
숫자는 성좌들 쪽이 훨씬 더 많았지만, 율법의 제약을 받고 있는 그들은 성역을 전개하는 것만으로 끔찍한 격통을 느끼며 하나둘 쓰러지고 있었다.
[시간이 끌리면 이쪽이 불리해!] [알고 있느니라!]데네브와 베가가 하늘 높이 날아올랐다.
세찬 눈보라와 은빛 물결이 뒤섞여 검은 별의 성좌들을 몰아붙였다.
[언니! 그쪽으로 고양이가 가고 있어!]스피카의 외침에 고개를 돌리니 고양이자리의 성좌, 펠리스가 허공을 밟으며 달려오는 게 보였다.
베가의 눈이 가늘어졌다.
문뜩 마경에서 펠리스와 마주쳤을 때의 기억이 머리를 스쳤다.
[흐음. 그러고 보니 본녀의 아이를 탐했었지.]물론 뫼비우스에게 의식을 지배당하고 있는 터라 그때 건방지기 짝이 없었던 고양이의 모습은 남아 있지 않았지만.
오진을 자신의 ‘집사’라 부르며 데려가려고 했던 기억은 아직도 선명하게 머릿속에 새겨져 있었다.
[그대가 본녀의 아이에게 크나큰 무례를 범했다고는 하나, 어찌 북극성의 성좌로서 그런 사사로운 일 하나하나에 한을 품을 수 있겠느냐.]베가는 자애로운 미소를 입가에 머금은 채 말을 이었다.
[감히 본녀의 아이를 탐한 그대의 무례를 용서하고 그대를 속박하고 있는 뱀에게서 풀려나게 해주겠느니라.] [뭐야? 뫼비우스의 지배를 없앨 수 있는 방법이 있었어?]데네브가 깜짝 놀란 표정으로 베가를 돌아봤다.
[물론이니라.] [그런 방법이 있었다면 왜 미리 사용하지 않았던 거야?] [과정 자체가 좀 까다롭기에 사용하지 못했느니라.] [끄응. 그래서 방법이 뭔데?]검은 별의 성좌들을 뫼비우스의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게 만든다면 그들 사이에 내분이 일어나게 될 가능성이 컸다.
누구라도 꼭두각시가 된 채 조종당하는 경험을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간단하니라.]냥냥거리며 달려드는 펠리스를 바라보며 베가는 방긋, 미소를 지었다.
[성흔의 흔적조차 남기지 않고 소멸시키면 지배에서 벗어날 수 있지 않겠느냐?] […아니 그게 방법이야?]데네브는 머리가 아프다는 듯 이마를 짚었다.
“냐아아아앙!”
은빛 물결에 휩싸인 펠리스가 비명을 내지르며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콰자자자작!
하늘에서 내리꽂힌 거대한 푸른 벼락이 쓰러진 펠리스를 관통했다.
[천벌이니라!]베가는 푸른 벼락에 타오르는 펠리스를 내려다보며 불끈 주먹을 쥐었다.
하아.
데네브는 깊은 한숨을 내쉬며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뭐… 그런 의미에선 나도 손봐주고 싶은 놈이 하나 있긴 한데.]데네브의 시선이 향한 건 갑각질로 이뤄진 흉측한 다리를 지닌 성좌.
‘성좌’라고 부르기보단 마수라고 부르는 것이 더 적절할 정도로 혐오스러운 외형을 지닌 성좌였다.
[네가 알렌의 팔을 그렇게 만들었지?]데네브는 사납게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파리자리의 성좌, 무스를 향해 두 팔을 뻗었다.
사납게 몰아치는 눈보라가 무스의 전신을 난도질했다.
“아, 아으.”
전신을 난도질하는 눈보라 속에 갇힌 무스의 입술 사이로 망가진 기계와 같은 신음이 흘러나왔다.
파리자리 성흔은 ‘질병’을 다루는 성흔.
원래라면 숨만 쉬어도 폐부가 썩어들어가는 질병을 사방에 퍼트릴 수 있는 강력한 성흔이었지만.
[나랑은 상성이 좀 안 맞지? 안 그래?]영혼조차 얼어붙을 듯한 ‘설원’의 추위 속에선 수십, 수백만을 학살할 수 있는 역병조차도 그 힘을 잃었다.
“추, 워….”
생존 본능마저 사라진 건 아닌지 무스가 다급히 도움을 구하기 위해 주변을 둘러봤지만.
다른 쪽도 상황이 비슷한 건 마찬가지였다.
[으랏차아아아앗!]쿠구구구궁!
거대한 힘의 파동이 도시를 쑥대밭으로 만들며 휩쓸고 지나갔다.
전신이 붉은 근육으로 뒤덮인 거한, 황소자리의 성좌 알데바란이 거친 기합을 터트리며 두꺼비자리의 성좌 부테닌을 주먹으로 후려쳤다.
비대하게 부풀어 오른 근육 사이로 새하얀 김이 뿜어져 나오며 부테닌의 몸이 거칠게 튕겨 나갔다.
[이것밖에 안 되는 거냐, 부테닌!]알데바란은 호탕한 웃음을 터트리며 쓰러진 부테닌의 다리를 잡아 투포환처럼 집어던졌다.
쿠궁! 쿵! 쿠르르릉!
건물 수십 채를 뚫고 날아간 부테닌의 몸이 바닥을 굴렀다.
[너무 날뛰지 마라, 알데바란. 그렇게 성역을 전개하면 오래 못 버틴다.]사자자리의 성좌, 레굴루스가 나지막이 경고했다.
[흥! 기껏 아이들 앞에서 싸울 수 있게 됐는데 겁쟁이처럼 힘을 아낄… 크으윽! 커헉!] […내가 말하지 않았나.]무리하게 성역을 전개한 탓에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알데바란을 한심스럽게 바라보며 혀를 차는 레굴루스.
침착하게 전장을 살피던 그의 시야에 뜻밖의 존재가 들어왔다.
[…우혁아?]그의 성흔을 이어받은 아이가 비틀비틀 몸을 일으키고 있었다.
이미 앞선 전투로 넝마가 된 몸으로도 검을 굳게 움켜쥔 채 전장으로 향하는 검은 사자 한 마리.
[쉬고 있으라 말했을 텐데!]“…이 상황에서 어떻게 쉬고 있을 수 있겠습니까?”
이우혁은 검은 별의 성좌들을 향해 검을 겨눴다.
“한 번이라도 더 검을 휘두를 수 있다면… 저희도 싸우겠습니다.”
[저희…?]레굴루스가 당황한 표정으로 고개를 돌렸다.
저 멀리 전장에서 리타이어 했던 각성자들이 하나둘 돌아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끄응, 그래도 좀 누워 있으니 한결 낫구만 그래!”
“중상자들은 오지 못하도록 막았으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비록 몸 상태가 성치 않은 각성자들이 대부분이었지만.
안 그래도 일분일초라도 빨리 전투를 끝마쳐야 하는 성좌들의 입장에선 각성자들의 가세가 반가울 수밖에 없었다.
“…제길.”
뫼비우스는 점차 기우는 승기를 바라보며 초조한 표정으로 입술을 짓씹었다.
성좌들에 이어 각성자들까지 가세하자 아무리 흑천의 힘을 받은 검은 별의 성좌들이라고 해도 밀릴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이대로 시간만 끌 수 있다면.’
율법의 제약을 버터지 못한 성좌들이 알아서 쓰러져 줄 텐데.
문제는 그 시간을 끄는 것 자체가 점점 불가능해지고 있었다.
“어떻게… 어떻게 해야.”
손톱을 물어뜯으며 생각을 쥐어짜내고 있을 때.
“그만 하세요, 뫼비우스 님.”
검은 그림자 속에서 백금발을 지닌 여인이 빠져나왔다.
소녀와 같은 가녀린 체형임에도 어딘가 요염함과 성숙함이 느껴지는 여인.
그의 성흔을 이어받은 또 다른 아이였다.
“…카시아.”
“인제 충분하잖아요.”
카시아는 슬픈 눈으로 말을 이었다.
“이브 씨도 그러길 바랄 거예요.”
“…….”
뫼비우스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그 이름을… 함부로 입에 담지 말라 했을 텐데요?”
“뫼비우스 님.”
“충분하다고요? 뭐가 충분하다는 겁니까?”
토해내듯 외친다.
“성좌들이 아이를 위해 희생하는 모습을 봤으니까? 지긋지긋한 율법을 깨고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을 봤으니까? 성좌와 아이들이 서로 힘을 합쳐 싸우는 훈훈한 광경을 봤으니까?”
그러니까.
이제.
만족하라고?
“나는!”
절규하듯 울부짖는다.
“모든 걸 잃었는데!”
아직도, 지금도.
여전히, 변함없이.
“내 사랑하는 아이도, 돌아갈 고향도, 수년을 참아온 복수조차! 단 하나도 남지 않게 됐는데!”
모두 다.
하나도 남김없이.
사라졌는데.
“대체 뭐가… 충분하다는 겁니까.”
뱀의 뺨을 타고 투명한 눈물이 흘러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