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426)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426화
막간–도주 (3)
“흐음. 이건 나도 예상 못 한 전개인데?”
천마는 피식 실소를 흘리며 리아크를 따라 나타난 수인족과 용인족의 부대를 돌아봤다.
어째 모습이 안 보인다 했더니 설마 마경에서 직접 지원군을 데려올 줄이야.
그로서도 전혀 예상치 못한 일이었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그래서, 용인족과 수인족들로 나를 막아보시겠다?”
굳이 ‘예상할 필요’조차 없던 일이었다.
“근데 그게 가능할 거라 생각해?”
용인족과 수인족이라면 그가 적당히 쓰다 버릴 용도로 만들어냈던 ‘마인족’에게조차 무력하게 당했던 나약한 존재들 아니던가.
용인족과 수인족의 전사들 따위로 자신의 앞길을 막는다는 건 스티로폼으로 만들어진 방지턱으로 덤프트럭을 막겠다고 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건방진 건 애송이나 너나 마찬가지구나.”
흥.
리아크는 같잖다는 듯 콧김을 내뿜으며 늑대 인간의 형태로 몸을 바꿨다.
터질 듯한 근육이 갑주처럼 전신을 뒤덮었다.
“마경이라는 척박한 땅에서 수백 년을 살아온 위대한 전사들의 저력을 무시하지 마라.”
크르르릉.
사나운 울음을 흘리며 뚜벅뚜벅 앞으로 걸어갔다.
그렇게 오진의 곁을 막 지나쳤을 때.
“오래는 못 버티니 빨리 성소로 도망쳐라.”
속삭이는 듯 작은 목소리가 오진의 귓가에 들려왔다.
“…리아크.”
천마의 앞에서는 전사들의 저력을 무시하지 말라고 자신감을 떵떵 뽐냈지만.
리아크 또한 용인족, 수인족 전사들의 힘만으로 천마를 상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터무니없는 일인지 잘 알고 있던 것이다.
“하지만….”
여기서 자신이 성소로 도망친다면 용인족과 수인족이 어떤 최후를 맞이하게 될지는 뻔했다.
“흥. 언제부터 남을 그리 생각했다고 그런 표정을 짓는 거냐?”
리아크가 가소롭다는 듯 피식 입꼬리를 올렸다.
“괜히 거슬리게 알짱거리지 말고 꺼져라.”
“…리아크.”
“그딴 눈으로 보지 마라, 기분 나쁘니까.”
“이 개자식이 끝까지….”
“개가 아니라 늑대다.”
리아크가 씨익 웃으며 오진의 등을 짝 소리나게 후려쳤다.
“가라, 애송이.”
그 말을 마지막으로.
리아크는 사나운 포효를 내지르며 한 줄기 은빛 벼락이 되어 천마를 향해 쏘아졌다.
“우아아아아아!”
“가자! 전사들아! 수인족의 저력을 보여줄 때다!”
“용신님과 무녀님의 가호가 우리 용인족을 지킬 것이다!”
천지를 뒤흔드는 듯한 함성과 함께 수인족과 용인족의 군대가 천마를 향해 달려들었다.
쿠르르르릉!
거친 굉음이 도시 전체에 울려 퍼졌다.
“오진 씨.”
“…….”
“가셔야 해요.”
망설이는 오진의 손을 이사벨라가 잡아끌었다.
“천마를 쓰러트릴 수 있는 사람은 오진 씨 말고는 없어요.”
알고 있다.
지금은 다른 사람을 희생해서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아야 한다는 걸.
‘역천의 별’ 말고는 정해진 운명을 바꿀 수 있는 존재는 없다는 걸.
하지만.
모두 다 알고 있지만.
“빌어먹을.”
오진은 입술을 짓씹으며 몸을 돌렸다.
“이쪽이에요 오진 님!”
그렇게 카시아와 오진, 이사벨라, 하은은 성소 입구를 향해 달렸다.
거리를 뒤덮은 마수 무리도 없고, 천마도 용인족과 수인족의 전사들이 붙잡아두고 있으니 성소 입구까지는 별문제 없이 도착할 수 있을 거라 생각했건만.
쿠르르르르륵!
건물 잔해에서 솟구쳐 오른 검은 먹구름이 오진을 노렸다.
“오진 씨!”
이사벨라가 다급히 외치며 손을 뻗었다.
그녀의 손바닥이 갈라지며 뿜어져 나온 붉은 핏물이 오진을 향해 쏘아지는 검은 먹구름을 후려쳤다.
쿠르르륵.
핏물에 얻어맞은 검은 먹구름이 안개처럼 흩어졌다.
“이건….”
“흑천의 구름이야.”
“천마는 지금 리아크 씨가 붙잡아두고 있는 거 아니었나요?”
“리아크와 싸우면서 동시에 흑천의 구름을 퍼트리고 있는 거지.”
오진 일행이 성소 방향으로 도망치고 있는 건 천마도 알고 있을 테니 그쪽으로 가는 길 자체를 흑천의 구름으로 뒤덮어 버리려는 것이다.
‘제길.’
흑천의 구름이 노리는 건 비단 오진 일행만이 아니었다.
“아악! 이, 이건 또 뭐야?!”
“사, 살려줘!!”
흑천의 구름은 마수 무리와 싸우고 있던 각성자들까지 막무가내로 습격해 집어삼키고 있었다.
“동요하지 말고 씨워라! 진형이 무너져서는 안 된다!”
저 멀리서 알리나가 각성자들에게 지시를 내리는 모습이 보였다.
도망치는 오진 일행을 발견한 알리나가 은발을 휘날리며 다가왔다.
“뫼비우스를 처치하는 데 실패하신 겁니까?”
“아뇨, 그건 성공했습니다.”
“그럼 대체 이건….”
“설명할 시간이 없습니다. 알리나 씨도 군대를 이끌고 성소로 후퇴해 주세요.”
“읏… 알겠습니다.”
천마가 뿜어낸 흑천의 구름은 물웅덩이에 검은 잉크를 뿌린 것처럼 순식간에 로마 전체에 퍼지기 시작했다.
“진형을 유지한 채 천천히 퇴각한다!”
알리나의 외침에 각성자들이 성소 입구가 있는 방향으로 몸을 돌렸다.
하지만.
쿠르르르르르륵!
“으아아아아악!”
“이걸 뭐 어떻게 막으라는 거야?!”
“자, 잡아먹힌다!”
뫼비우스가 뿜어냈던 흑천의 구름과는 그 양부터가 차원이 달랐다.
수백, 수천 미터에 걸쳐 펼쳐진 흑천의 구름이 해일처럼 각성자들을 집어삼켰다.
“크읏!”
오진이 필사적으로 뇌전을 내뿜으며 흑천의 구름을 몰아내려고 했지만.
제대로 몸을 가누기도 어려울 정도로 지친 상태에서 해일처럼 쏟아지는 흑천의 구름을 막는 건 불가능했다.
“하아, 하아!”
움켜쥔 창이 천근처럼 무거웠다.
늪에 빠진 듯 발걸음이 느려지고, 이미 너덜너덜해진 마력 회로가 비명을 지르며 고통을 호소했다.
왼쪽 가슴에 새겨진 성흔에서 칼로 후벼 파는 듯한 통증이 느껴졌다.
‘더 이상은….’
성소의 입구는커녕 이 자리에서 한 걸음조차 떼기 어려웠다.
그렇게 가쁜 숨을 내쉬며 필사적으로 밀려드는 흑천의 구름을 베어내고 있을 때.
“오지나. 잠깐 가만히 있어봐.”
하은이 오진에게 다가왔다.
바짝 몸을 붙이며 오진을 끌어안자 사납게 달려들던 흑천의 구름이 일순 움직임을 멈췄다.
하은은 눈을 빛내며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어떻게 된 거야?”
“아까부터 나한테는 안 다가오더라고.”
흑천의 구름이 하은에게만 그 사나운 이빨을 드러내지 않는 이유.
그 이유를 예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다른 사람은 몰라도, 누나한테만큼은 손을 댈 리가 없으니까.’
서로 다른 운명을 걸어왔다고 해도.
천마와 오진의 시작점은 같았다.
낡고 허름한 보육원 옥상.
보잘것없는 비밀기지에 그녀가 발을 디뎠을 때.
그의 삶은 시작됐으니까.
‘비록 누나는 처음 옥상에서 만났을 때의 기억을 까맣게 잊어버렸다고 해도.’
천마가 그 기억을 잊었을 리는 없었다.
‘너는, 나였으니까.’
오진은 하은을 끌어안은 팔에 힘을 더했다.
흑천의 구름이 습격하지 않는다고 해도 그건 어디까지나 하은뿐.
지금도 사방에서 흑천의 구름에 집어 삼켜진 각성자들의 비명이 끝없이 울려 퍼지고 있었다.
한시라도 빨리 성소로 도망쳐야 했다.
“오지나. 업혀.”
“업히라고? 누나한테?”
“그거 말고 다른 방법 있어?”
“하지만….”
자신이 지켜줘야 할 사람의 등에 업힌 채 도망쳐야 한다는 사실이 못내 망설여졌다.
“고집부리지 말고 빨랑 업혀.”
“…끄응. 알았어.”
안 그래도 촉박한 마당에 괜한 고집을 부려서 발걸음을 늦출 수는 없었다.
“부탁할게.”
“흣차. 어이구 내 새끼. 못 보던 새에 많이도 자랐네.”
오진을 등에 업은 하은이 낄낄 웃음을 터트리며 그의 엉덩이를 팡팡 두드렸다.
“누나.”
“알고 있어 짜샤. 장난 그만 칠 테니까 떨어지지 않게 꽉 붙잡고 있어라?”
오진을 등에 업은 하은이 성소 입구가 있는 쪽을 향해 발을 박찼다.
“거의 다 도착했어요!”
카시아가 그림자를 만들어내 앞을 가로막는 흑천의 구름을 거둬냈고, 이사벨라가 앞을 가로막는 건물 잔해들을 핏빛 낫으로 베어넘겼다.
“언니! 빨리!”
“알았어!”
그렇게 도착한 성소 입구.
재와 연기가 뿌옇게 뒤덮인 도시 속에서 아름다운 푸른색을 유지하고 있는 균열을 향해 오진 일행은 발을 박찼다.
그리고.
콰드드드드드득!
오진 일행이 성소 입구로 들어가기 전.
솟구쳐 오른 검은 먹구름이 성소 입구를 움켜쥐듯 둘러쌌다.
굉음과 함께 무시무시한 충격이 주변을 뒤흔들었다.
“꺄아아아악!”
“미, 미친!”
한 차례 충격이 휩쓸고 지나간 자리에는 구겨진 종이처럼 뒤틀린 성소 입구가 보였다.
“아, 안 돼!”
다급히 성소 입구로 다가간 이사벨라가 입구 안으로 손을 넣었다.
뒤틀린 균열을 통과해 그대로 뒤로 빠져나오는 이사벨라의 팔.
“서, 성소 입구가… 망가졌어요.”
이사벨라는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고갤 돌렸다.
유일한 탈출구라고 할 수 있었던 성소 입구가 사라진 것이다.
“마, 망가졌다고? 그럼 어떻게 해 이제? 로마에 있는 성소 입구는 이거 하나잖아?”
“그건….”
“…….”
일행 사이에 내려앉은 싸늘한 침묵.
하은의 말마따나, 로마 안에 있는 성소 입구는 하나였다.
물론 이탈리아 전체로 놓고 보면 성소로 통하는 입구는 몇 개 더 있었지만, 가장 가까운 입구도 여기로부터 백 킬로미터는 넘는 곳에 위치해 있었다.
즉.
“…빌어먹을.”
퇴로가 완전히 차단됐다는 것.
“도, 도시 밖으로 도망치는 건?”
“힘들 거예요.”
이사벨라가 어두운 얼구롤 고개를 저었다.
이미 성소 입구 주변은 물론, 로마 전체에 흑천의 구름이 퍼져 있었다.
마력이 거의 바닥난 지금으로는 흑천의 구름을 뚫고 도시 밖으로 나갈 방법이 없었다.
“내가 있으면 뚫을 수 있을지도 모르잖아?”
확실히 흑천의 구름에서 안전한 하은이 있으면 어찌 도시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을 지도 모르지만.
“도시 밖으로 도망친다고 해도 금방 천마에게 따라잡히겠죠.”
성소가 아니면 천마가 추적을 포기할 이유가 없었다.
“그, 그럼 이제 어떻게….”
“…제기랄.”
오진과 하은의 얼굴에 짙은 절망이 드리워졌을 때.
“제게 방법이 하나 있어요.”
카시아가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망가진 균열을 응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