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428)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428화
거짓말 (1)
3만 명이 넘는 각성자들이 모인 제 2차 별들의 전쟁.
인류의 영웅이라 일컬어지는 칠성과 수십에 달하는 성좌들까지 참여한 장엄한 전쟁은 천마의 등장으로 인해 처참한 패배로 끝을 맺었다.
도시 전체를 뒤덮은 ‘흑천의 구름’에 집어 삼켜진 각성자의 숫자만 대략 2만 명.
심지어 그조차도 집계된 피해자만 추렸을 때 그 정도지 실제 피해자의 숫자는 그 이상으로 추측되고 있었다.
인류의 영웅이라 불리던 칠성도 후방 부대에 있었던 옥형성 비앙카 베넷과 요광성 에드워드 월튼, 그리고 가까스로 탈출에 성공한 파군성 권오진을 제외하고는 모두 흑천의 구름에 잡아 먹혔다.
각성자들의 희생만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뫼비우스를 비롯한 검은 별의 성좌들을 막기 위해 율법을 어기고 성역을 전개한 성좌들 또한 그 대가를 치러야 했다.
율법의 제약이 과거에 비해 약해졌기에 ‘소멸’까지 간 성좌의 숫자는 극히 적었지만, 성흔의 격이 낮은 성좌들 대부분이 빛의 사슬에 묶인 채 의식을 잃고 신전 안에 봉인됐다.
황도 12궁 이상의 강력한 성흔을 지닌 성좌들 또한 영구적인 성흔의 손실은 물론 최소 1년 이상은 의체 상태로도 지구에 현신하지 못하는 상태가 되었다.
각성자와 성좌들의 공백.
지구를 하나의 육체로 비유하면 각성자들의 존재는 외부로부터 들어오는 바이러스에 맞서 싸우는 백혈구였다.
균열을 넘어오는 마수들을 사냥해줄 각성자의 숫자가 극단적으로 적어지니 전 세계적인 혼란이 시작됐다.
평화롭던 도시 곳곳이 불타올랐고, 각종 범죄율이 폭등했다.
이런 상황에서 공백을 메워줄 새로운 각성자들이라도 많이 탄생하면 모를까, 성좌들이 대부분 봉인된 상태였기 때문에 빈자리를 채워줄 각성자도 나타나지 않았다.
그렇게 온 세계의 혼란과 절망이 가득 퍼지고 있을 때.
오진은 집 안 바닥에 앉아 지그시 눈을 감은 채 벽에 등을 기대고 있었다.
“…….”
오랫동안 씻지 않아 땀과 기름으로 떡진 머리칼.
눈가에 내려앉은 짙은 다크써클과 홀쭉하게 들어간 뺨.
누가 그를 멸망의 운명에서 세계를 구원할 ‘역천의 별’이라 생각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초췌한 몰골이었다.
끼익.
조심스럽게 문이 열리며 방문 사이로 새어든 빛이 방안에 드리워진 어둠을 갈랐다.
“…오지나.”
왼쪽 눈가에 안대를 찬 여인, 하은은 방바닥에 주저앉아 있는 오진을 내려다보며 씁쓸한 표정을 지었다.
로마에서 가까스로 살아 돌아온 이후, 오진은 완전 폐인이 된 듯한 상태로 방안에서 한 걸음도 나오지 않고 있었다.
오진이 하는 일이라고는 방 안에서 스마트폰을 향해 무언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리는 것뿐.
그밖에는 아무것도 하지 않은 채 가만히 방 안에 은둔하고 있었다.
“소고기 죽 사 가지고 왔어.”
“…….”
대답 없는 오진.
하은은 수저에 뜬 죽을 그의 입에 가져다 대며 입술을 짓씹었다.
“배달로 시킨 거니까 맛 걱정은 말고.”
“…….”
“오지나.”
“…….”
“한 숟가락이라도 먹어.”
“…….”
“뭐라도 좀 먹으라고 제발! 언제까지 이렇게 있을 건데?!”
“…….”
“벌써 집에 돌아온 지도 한 달이 넘었잖아! 계속 이렇게 폐인처럼….”
“…어야 했어.”
“뭐?”
“개천을 썼었어야 했어.”
기회는 있었다.
처음 천마가 나타났을 때도, 리아크가 용인족과 수인족의 전사들을 데려왔을 때도, 카시아가 균열을 열기 위해 시간을 벌어달라 했을 때도.
‘개천’이라는 마지막 카드를 쓰지 못한 채 끝났다.
아니, 쓰지 못한 것이 아니다.
쓰지 ‘않은’ 것이다.
“…무서웠으니까.”
모든 기억을 잃는 것이.
소중했던 추억과 기억이 깡그리 사라지는 것이.
너무나 두려웠기 때문에 마지막 한 걸음을 내딛지 못했다.
“그건… 어쩔 수 없었잖아.”
“어쩔 수 없지 않았어.”
“아니, 어쩔 수 없었어. 네가 그 기술을 쓴다고 해도 무조건 천마를 이길 수 있는 건 아니잖아?”
“적어도 지금처럼 모두가 흑천의 구름에 잡아먹히지는 않았겠지.”
까득.
오진은 그때의 기억을 떠올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하은은 깊은 한숨을 내쉬며 힘없이 고개 숙인 오진을 내려다봤다.
“그래서… 이렇게 아무것도 안 하고 방구석에 찌그러져서 후회만 하고 있을 거야?”
“아니.”
“아니라고? 그럼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건 뭔데?”
하은이 오진의 멱살을 거칠게 틀어쥐었다.
“하루종일 방구석에 처박혀 밥도 안 먹고, 씻지도 않고, 밖에 나가지도 않고! 스마트폰에 대고 이상한 혼잣말이나 중얼거리고! 대체 지금 네가 하고 있는 게 뭐가 있는데 아니라고 하는 거야?!”
벼락같은 호성에 오진은 숙였던 머리를 천천히 들어 올렸다.
흠칫.
고개를 들어 올린 오진의 얼굴을 본 하은 몸이 떨렸다.
공허함만이 가득한 줄 알았던 그의 두 눈동자에 섬뜩한 푸른 귀화가 타오르고 있었다.
“거짓말을 하고 있었어.”
“뭐?”
“이건 나만 쓸 수 있는 거니까.”
거짓말을 하고 있었다니?
대체 그게 무슨 뚱딴지같은 말이란 말인가?
“후회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하거든.”
“…그게 대체 무슨 말이야?”
“일종의 보험이라고 생각하면 돼.”
“……?”
어딘가 정신이 이상해진 건 아닌지 의심이 될 정도로 두서없는 말.
하지만 정신이 이상해졌다고 하기엔 푸른 귀화가 번들거리는 오진의 눈동자는 또렷하게 그녀를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이 모든 것이 ‘의도했다’고 말하고 싶은 것처럼.
“뭐, 그래도 한 달을 갈아 넣은 덕분에 늦지 않게 끝낼 수 있었어.”
“뭘 늦지 않게 끝냈다는….”
“소고기 죽이라고 했지?”
오진은 하은이 바닥에 있는 죽그릇을 들어 허겁지겁 먹었다.
“쩝쩝, 쿨럭!”
한 달 동안 아무것도 먹지 않았던 탓일까.
갑자기 배 안으로 들어온 음식물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기침이 터져 나왔다.
“천천히 먹어 인마.”
하은이 수건을 들어 오진의 입가를 닦아줬다.
숟가락으로 죽을 떠서 조심스럽게 오진의 입 안에 넣어줬다.
우물우물.
오진은 얌전히 그녀가 떠주는 죽을 받아먹었다.
“그래서… 그냥 모든 걸 다 포기하고 방 안에 처박혀 있던 건 아니었단 말이지?”
“포기하긴 뭘 포기해.”
비참하게 후회를 곱씹고 있기엔 손안에 움켜쥔 것이 너무 많았다.
“전에 말했잖아, 하나도 포기하지 않겠다고.”
내 손 안에 움켜쥔 모든 것을.
하나도 잃지 않은 채 지켜내 보이겠노라고.
그렇게 맹세했다.
“하아. 그래, 이제야 좀 너답네.”
오진이 대체 무슨 생각으로 한 달 넘도록 방안에 처박혀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도 그녀가 걱정했던 것과 달리 실의에 빠진 채 폐인이 된 건 아니었다.
“그래서 이제 어떻게 하려고?”
“구해야지.”
“구한다니… 벨라랑 카시아 말하는 거야?”
“리아크도 같이.”
“…….”
하은은 굳게 입을 다문 채 오진의 시선을 피했다.
그녀와 오진만 해도 카시아가 만들어준 균열 덕분에 가까스로 살아남을 수 있었다.
그에 비해 도시에 남겨진 다른 사람은….
“이미 늦었….”
“아니.”
오진은 단호하게 고개를 저었다.
“죽이지 않았을 거야.”
확신에 가득 찬 목소리.
“…어떻게 네가 그걸 알아?”
“놈은 목적은 ‘나’를 놈과 똑같이 만드는 거니까.”
천마와 같이.
하은 말고는 아무것도 지킬 존재 없는 인간으로 만드는 것이 그의 목표라면.
“다들 살아있을 거야.”
“…그 반대 아니야?”
“전생에 천마는 누나를 그냥 잃은 게 아니야.”
“그냥 잃은 게 아니라니?”
“누나를 지키기 위해 애원하고, 포기하고, 발버둥 친 끝에 잃게 된 거지.”
“…….”
짧은 문장 너머로 느껴지는 아득한 절망이 하은의 가슴을 무겁게 짓눌렀다.
“그러니까… 놈도 내게 똑같은 짓을 하려고 할 거야.”
“네가 어떻게든 다른 사람을 지키기 위해 발버둥치는 모습을 보다가 죽일 거라고?”
“그래.”
‘너’를 ‘나’로 만들 수 있는 방법은 그것뿐이었으니까.
“만약 그럴 생각이 없었다면 리아크를 살려주는 짓도 하지 않겠지.”
“…대체 왜 그런 짓을 하는 거야?”
하은이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주먹을 움켜쥐었다.
“천마 그 자식의 목적은 내가 행복하길 바라는 거라며! 그렇다면 대체 왜 너한테 그런 짓을 하는 건데!”
“내가 자신과 다르면 아무런 의미 없으니까.”
그가 바라는 건 어디까지나 자신과 같은 ‘오진’이 하은을 곁에서 지키는 것이다.
하지만 두 사람의 운명이 바뀌며 지금의 오진과 천마는 너무나도 달라졌다.
그렇기에.
‘바꾸려고 하겠지.’
나를.
너처럼.
“놈의 행동을 논리적으로 이해하려고 할 필요 없어. 놈은 이미 흑천에 반쯤 정신이 잡아먹힌 상태니까.”
“…하지만.”
“걱정하지 마. 말했잖아?”
오진은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옅은 미소를 지었다.
“후회하는 건 한 번으로 족하다고.”
그 말이 대체 무슨 의미일까.
하은이 생각을 미처 생각을 이어가기도 전에 오진이 비틀비틀 몸을 일으켰다.
“어, 어디가?”
“좀 씻어야지. 곧 놈을 만날 텐데 이런 몰골로 나갈 순 없잖아?”
쏴아아아아.
옷을 벗고 샤워실 안으로 들어간 오진은 물줄기를 최대한으로 틀었다.
쏟아지는 물들이 그의 피부로 흡수되며 초췌해졌던 몸이 점차 원래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어으, 냄새.”
한 달 넘도록 씻지 않을 탓에 몸에서 꼬린내가 진동했다.
물을 펑펑 써가며 회복을 끝마친 오진은 몸 구석구석 닦으며 샤워를 마쳤다.
새 옷으로 갈아입은 오진은 수건을 목에 두른 채 밖으로 나왔다.
밖에서는 하은이 그를 기다리고 있었다.
“천마가 어딨는지는 알고 있어?”
“모르지.”
“…그럼 어떻게 만나러 간다는 거야?”
“굳이 만나러 갈 필요 없어.”
그쪽에서 먼저 찾아올 테니까.
“그걸 어떻게 알….”
“누나, 오늘이 며칠인지 알아?”
“엉? 잠시만.”
주머니에서 스마트폰을 꺼낸 하은이 화면을 켰다.
“11월 5일인데?”
“그럼 하루 남았네.”
“하루? 뭐가 하루 남았는데?”
“놈이랑 내 운명이 바뀐 날.”
11월 6일.
이신혁과 함께 게이트에 들어간 날이었다.
“…설마 너 지난 한 달 동안 이날을 기다리고 있던 거야?”
“내가 먼저 놈을 찾을 방법은 없었으니까.”
오진이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였을 때.
띵동.
초인종이 울렸다.
“배달이요~”
“배달?”
하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현관으로 나갔다.
“죽 배달 왔습니다. 요 앞에서 사고가 좀 있어서 늦었습니다.”
“엥? 이미 아까 받았는데요?”
“예?”
배달원이 무슨 소릴 하냐는 듯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 아닌데, 여기 맞는데?”
영수증을 확인한 배달원이 봉투에 든 죽을 내밀었다.
“착각하셔서 주문 두 번 들어가신 것 같네요. 일단 받으세요.”
죽을 건네준 배달원이 문을 닫고 나갔다.
“이상하다… 분명 결제는 한 번만 됐는데?”
하은이 봉투를 받아든 채 눈을 찌푸리고 있을 때.
“누나, 아까 받은 죽 봉투 있어?”
“어? 응. 저기 있는데.”
오진은 테이블 위에 놓인 빈 봉투를 뒤적였다.
전단지 사이에 끼어 있는 종이 한 장.
흰색 종이 위에는 익숙한 필체로 한 문장이 쓰여 있었다.
『너와 내 운명이 갈라진 장소에서 기다리고 있을게』
종이에 적힌 익숙한 필체는 바로 자신의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