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433)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433화
거짓말 (6)
밤하늘을 옮겨 담은 듯한 검은 형체.
유명 추리 만화에 나오는 범인처럼 검은 인간의 형상이 된 천마는 오진을 향해 느긋이 발걸음을 옮겼다.
쿠륵, 쿠륵.
발걸음을 옮길 때마다 전신을 뒤덮고 있는 검은 먹구름이 일렁이며 음산한 소리를 흘렸다.
“이런 미친….”
검은 먹구름 사이로 기괴하게 맥동하는 심장과 섬뜩하게 타오르는 푸른 귀화.
더 이상 ‘인간’이라 부를 수도 없을 정도로 흑천에 잠식된 천마의 모습을 바라보며 오진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지금 ‘개천’을 사용한 오진의 몸에서 흑천이 차지하는 비율은 대략 30% 정도.
여기서 최대한 힘을 끌어올리면 절반 정도까지 흑천의 비율을 높일 수는 있겠지만.
‘그 이상은 안 돼.’
흑천의 비율이 절반을 넘어간 적은 한 번도 없지만.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여길 넘어가면 ‘끝’이라고.
다시는 돌아올 수 없으리라고.
“너… 네가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는 거냐?”
“무슨 짓을 했는지 알고 있냐고?”
흑천으로 변한 천마가 낄낄 웃음을 터트렸다.
검은 먹구름이 일렁이며 나타난 새하얀 치아가 한층 기괴함을 더했다.
“그럼, 잘 알고 있지.”
용자리 성흔이 새겨진 심장 위에 손을 얹은 채 나지막이 말을 잇는다.
“다시 돌아갈 수 없다고 해도 괜찮아. 모든 걸 잃어버린다고 해도, 나 자신이 누군지조차 기억나지 않는다고 해도 상관없어.”
단 하나의 기억.
그 무엇보다 중요한 기억 하나만 간직할 수 있다면.
“다른 건 필요 없어.”
쿠르르르륵.
검은 먹구름이 요동친다.
안개처럼 깔린 흑천의 구름이 굶주린 개미 떼처럼 오진을 향해 모여든다.
“크읏…!”
다급히 흑천의 힘을 끌어올리며 몰려드는 흑천의 구름을 막았다.
오진의 몸에서 뿜어져 나온 검은 먹구름이 천마의 흑천과 부딪혔다.
쿠르르륵, 쿠륵!
사납게 뒤엉키는 흑천.
상대적으로 ‘격’이 높은 오진의 흑천은 사나운 기세로 천마의 흑천을 밀어냈지만.
그것도 잠시.
“소용없어.”
“빌어… 먹을!”
오진을 둘러싼 검은 뇌전이 스파크가 되어 흩어졌다.
검은 먹구름의 해일이 오진을 향해 밀려 들어왔다.
다급히 뒤로 발을 박차며 거리를 벌렸지만, 천마의 말마따나 소용없는 짓이었다.
“커헉!”
먹구름 사이로 솟구쳐 오른 검은 불꽃이 전신을 뒤덮었다.
끔찍한 격통과 함께 신체 일부가 검은 연기가 되어 흩어졌다.
‘잡아 먹히고 있어.’
상대적으로 ‘격’이 높다고 한 자신의 흑천이 천마의 흑천에 밀리고 있었다.
“오진아!”
하은의 다급한 외침과 함께 흐트러지는 정신이 일순 되돌아왔다.
“후우.”
천천히 숨을 들이쉬며 왼쪽 가슴 위에 손을 얹었다.
‘침착해.’
천마 본인의 입으로 말하지 않았던가.
둘 중 격이 높은 흑천을 지닌 건 자신이라고.
비록 그가 자신의 존재 자체를 흑천에 바치면서 힘을 끌어올렸지만.
‘잊지 마. 천마한테는 없는 걸 난 가지고 있어.’
스스로에게 되뇌며 거문고자리 성흔의 힘을 끌어올렸다.
우우우웅!
검은 먹구름 사이로 찬란한 은빛이 새어 나왔다.
천마는 지니지 못한 힘.
흑천을 제어할 수 있는 유일무이한 성흔.
“성역 전개, ‘은하(銀河)’.”
찬란한 은빛 물결이 차오른다.
대지를 뒤덮고 있던 검은 불꽃이 은빛 물결에 휩쓸려 빠르게 식어간다.
“하하, 그래. 그러고 보니 넌 베가의 성역까지 쓸 수 있었지.”
천마는 낄낄 웃음을 터트리며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개천을 사용하는 도중에 성역까지 전개하다니, 역시 너야. 아니, 이 경우는 ‘나’라고 해야 하나?”
“나는 너랑 다르다고 했을 텐데.”
“아아, 하긴. 애초에 나한테는 베가의 성흔… 음? 베가의 성흔 이름이 뭐였더라?”
고개를 갸웃거리는 천마.
잠시 생각을 이어가던 그는 이내 어깨를 으쓱이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뭐, 어쨌든. 그 성흔은 없으니까.”
“너….”
“하지만 말이야. 내가 말했지?”
검은 먹구름 사이로 섬뜩한 푸른 귀화가 타올랐다.
“소용없다고.”
천마는 산책을 나가듯 느긋하게 한 걸음 내디뎠다.
검은 먹구름으로 이뤄진 몸이 안개처럼 흩어졌다가 오진이 펼친 성역 앞에 다시 뭉쳤다.
찬란히 빛나는 은빛 물결 앞으로 다가온 천마가 천천히 팔을 들어 올렸다.
그리고.
콰드드드드드득!
‘은하’를 두 손으로 잡아 찢어발겼다.
“이런 미친…!”
성역을 맨손으로 잡아 찢는다고?
‘말도 안 돼.’
물론 오진 자신도 이제껏 성역을 흑천의 힘으로 뚫어버린 경험은 있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힘을 한 점에 집중해 일시적으로 성역을 꿰뚫은 것뿐.
비유하자면 단단한 철판을 송곳처럼 뾰족한 무언가로 힘을 줘서 뚫어버린 것에 가까웠다.
철판을 송곳으로 뚫었다는 것만 해도 충분히 말이 되지 않는 일인데.
그걸 ‘뚫는’게 아니라 두 손으로 잡아 ‘찢는’거라면 말이 되지 않는 수준을 넘어선 일이었다.
“왜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짓고 있어?”
천마는 경악하는 오진을 바라보며 방긋 웃었다.
“너도 알고 있었잖아? 성역으로는 흑천을 막을 수 없다는 걸.”
“…….”
“아아, 혹시 베가의 성역이라면 좀 다를 줄 알았어?”
천마는 입꼬리를 비틀어 올리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그깟 성역 따위로 흑천을 막을 수 있었다면 성좌들이 왜 그렇게 겁에 질렸겠어?”
타오르는 푸른 귀화.
검은 먹구름으로 이뤄진 팔이 오진을 향해 천천히 다가왔다.
“제길…!”
오진은 흑천의 힘을 한계까지 끌어올리며 검은 뇌전을 쏟아냈다.
사납게 타오르는 검은 뇌전이 천마를 향해 내리꽂혔다.
“아니, 그걸로는 부족해.”
내리꽂힌 검은 뇌전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아니.
사라졌다기보다는 ‘먹혔’다는 표현이 더 어울릴 것이다.
“크읏!”
거문고자리 성흔의 힘만으로는 부족하다면.
‘전갈자리 성흔.’
왼쪽 가슴에 새겨진 거문고자리 성흔 옆에 또 하나의 성흔이 빛을 뿜었다.
‘사냥개자리 성흔, 올빼미자리 성흔, 물병자리 성흔.’
흑천을 개화한 이후 먹어 치워왔던 성흔들이 하나하나 검은 먹구름 속에서 떠올랐다.
‘해마자리의 성흔, 두꺼비자리의 성흔, 천칭자리의 성흔, 염소자리의 성흔.’
평소에 자주 사용하던 성흔부터 내가 저런 성흔을 가지고 있었나 의문이 들 정도로 사용하지 않았던 성흔까지.
빈 그릇에 붙은 밥알까지 싹싹 긁어모으는 느낌으로 이제껏 먹어 치웠던 성흔의 힘을 동시에 사용했다.
“그럼 어디 한 번 이것도 다 처먹어 봐 이 새끼야!”
밤하늘을 밝히는 별빛처럼.
검은 먹구름 속에 떠오른 성흔들이 일제히 빛을 발했다.
오진의 몸에서 다시 한번 찬란한 은빛이 뿜어져 나왔다.
은빛이라고 해서 방금 전 사용했던 ‘은하’를 또 한 번 전개하는 게 아니었다.
“성역 전개!”
하나가 아닌, 이제까지 흡수해온 성흔들의 성역을 일제히 전개했다.
다중 성역.
그 어떤 성좌도 시도할 수 없었던 미지의 영역.
찬란히 빛나는 별빛들이 검은 먹구름을 가르며 천마의 심장을 향해 쏘아졌다.
그리고.
“억지 부리려고 하지 마.”
수십 겹에 달하는 성역이.
천마의 손짓 한 번에 모조리 부서져 흩어졌다.
“…뭐?”
오진의 두 눈이 부릅뜨였다.
“다… 부서졌다고?”
흑천에게 성역을 무너트릴 수 있는 힘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아무리 그래도 수십 겹에 달하는 성역을 일격에 부숴버리다니?
그것도 일반적인 성역이 아닌, 오진이 지닌 흑천의 힘이 깃들어 있는 성역이었다.
“이건… 말도 안….”
오진은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뒷걸음질 쳤다.
뒷걸음질 치는 오진의 목을 천마가 움켜쥐었다.
“내가 부족하다고 했잖아?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가 안 돼?”
“커헉!”
오진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왜, 이제까지 먹어 치워온 성흔의 힘을 합치면 날 이겨볼 수 있을지 알았어? 네가 쌓아왔던 모든 걸 퍼부으면 날 넘어설 수 있을지 알았어?”
우드득.
섬뜩한 파골음과 함께 오진의 목이 기형적인 방향으로 꺾이기 시작했다.
“착각하지 마.”
섬뜩하게 타오르는 푸른 귀화가 오진을 응시했다.
“네가 한 걸 내가 안 해봤을 줄 알았어? 너는 할 수 있었던 걸 나는 못 했을 줄 알았어?”
네가 걸어온 길을.
나는 걸어오지 않았을 것 같아?
“처음 만났을 때부터 말했잖아. ‘포기’하는 것밖에 방법이 없었다고. 나라고 포기하고 싶어서 포기하는 줄 알아?”
아무리 발악하고, 발버둥 쳐봐도.
“기적을 바라지마. 구원을 바라지마.”
그때도, 지금도.
이 빌어먹을 연극은 단 한 번의 반전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궁지에 몰린 주인공이 각성해서 마왕을 무너트리는 편리하기 짝이 없는 스토리는 이 세상엔 없어.”
목을 틀어쥔 손이 오진의 목덜미를 파고들었다.
살점을 찢고, 목뼈를 으깨며 천마의 흑천이 오진의 몸속으로 직접 흘러 들어갔다.
“커헉! 컥! 크흑!”
오진은 새하얗게 눈을 뒤집어 깐 채 두 다리를 허우적거렸다.
“하아. 정말… 같은 ‘나’라고 생각하기 싫은 꼴사나운 모습이네.”
천마는 짜증 섞인 눈빛으로 오진을 바라봤다.
마음 같아서는 당장에라도 오진이 지닌 흑천을 통째로 집어삼켜 그의 존재 자체를 ‘소멸’시키고 싶었지만.
‘그럴 순 없지.’
오진에게는 자신을 대신해 하은을 지켜야 한다는 역할이 있었다.
‘나는… 얼마 버티지 못할 테니까.’
하은의 곁에 끝까지 남을 수 있는 건 자신이 아닌 지금의 ‘오진’이었다.
“이제 소중한 게 많아지면 누나를 지킬 수 없다는 말이 무슨 뜻인지 잘 알아들었지?”
흑천은 그 소유주로 하여금 계속해서 무언가를 ‘포기’하도록 강요한다.
굶주린 짐승에게 제 살점을 잘라 배를 채워줘야지만 가장 중요한 것을 잃지 않을 수 있다는 의미.
지금처럼 그 무엇하나 포기하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으로는 정작 가장 소중한 것을 지킬 수 없다.
“나, 는….”
“굳이 대답할 필요 없어. 어차피 네 ‘소중한 것’들이 모두 사라진다면 해결될 문제니까.”
그가 스스로 포기할 수 없다면.
자신이 억지로 포기할 수밖에 만들 뿐이었다.
천마는 쯧쯧 혀를 차며 오진을 바닥에 내팽개쳤다.
“거기서 잘 보고 있으라고. 네 소중한 것들이 모두 사라지는 모습을.”
쿠르르륵.
검은 먹구름에 붙잡힌 각성자들을 향해 천마는 천천히 발걸음을 옮겼다.
바닥에 내팽개쳐진 오진은 그런 천마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됐다.’
씨익 입꼬리를 올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