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434)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434화
거짓말 (7)
알고 있었다.
어차피 정면으로 싸워 천마를 이길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아무리 자신이 천마에 비해 높은 ‘격’을 지닌 흑천을 지녔다고 한들.
수십, 수백… 어쩌면 그 이상의 세월을 흑천과 함께해온 천마의 노련함을 넘어서는 건 불가능했다.
‘아무리 내가 뛰어난 재능이 있다고 한들.’
아무리 필사적으로 노력했다고 한들.
아무리 처절하게 발버둥 쳤다고 한들.
‘내가 걸어왔던 길은.’
너 또한 걸어왔을 테니까.
‘그러니까.’
이길 수 없다.
이길 수 있을 리가 없다.
‘정면 승부’로는.
‘놈과의 싸움에 이기기 위해서는, 놈이 걸어오지 않은 길을 가야 해.’
전생의 ‘오진’이라면 절대로 걷지 않았을 길을.
자신이 걸어가는 방법 외에는 천마와의 싸움에서 승리할 수 없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 * *
이 빌어먹을 연극을 조금 더 이어가야만 하겠지.
“그만해.”
흑천에 묶인 카시아와 이사벨라, 리아크를 향해 다가가는 천마의 앞을 하은이 가로막았다.
그녀는 검은 먹구름의 형체로 변한 천마를 슬픈 눈으로 바라보며 지그시 입술을 깨물었다.
“이제… 그만해, 제발.”
떨리는 목소리로 애원하는 하은.
천마는 그런 하은을 지그시 바라보며 나지막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비켜, 누나.”
“제발 그만두라고! 이 정도 했으면 충분하잖아!”
“…충분하다고?”
천마의 입에서 실소가 흘러나왔다.
“뭐가 충분하다는 건데?”
“오진이랑 싸워 이겼잖아! 애가 죽기 직전까지 마음껏 짓밟았잖아!”
바닥에 쓰러진 채 가쁜 숨을 내쉬고 있는 오진.
천마의 흑천에 잠식당한 그의 상태는 한눈에 보더라도 위태로워 보였다.
더 이상 싸움을 이어갈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이미 승패가 명백히 갈린 상황에서 뭘 더 하겠다는 건가?
“저기 먹구름에 묶인 각성자들을 죽여야만 끝나는 게 아니잖아!”
“아니.”
천마는 단호히 고개를 저었다.
“놈에게 소중한 게 남아있는 이상, 결코 누나를 지킬 수 없을 거야.”
흑천을 소멸시키는 데 실패한 이상.
곧 자신은 흑천에 완전히 잠식되어 폭주하게 될 것이다.
그때 폭주하는 흑천에서 하은을 구하기 위해서는 오진의 ‘소중한 것’들을 모조리 앗아갈 필요가 있었다.
“그래야만 누날 지킬 수 있어.”
“그딴 것 없이도 오진이는 이제까지 날 지켜줬어! 그것도 몇 번이나!”
사납게 외쳤다.
“벨라도, 리아크도, 카시아도… 그리고 다른 각성자들도… 모두 지켜가면서 싸워왔다고.”
오진은 입버릇처럼 자기는 남의 등을 처먹을 줄만 아는 사기꾼이라 말하지만.
그녀는 알고 있었다.
오진이 꼭 남을 이용하기 위해서만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라는 걸.
“너… 백무강 아저씨 일은 알아? 그때 오진이가 어떻게 했는지는?”
“몰라.”
“하, 네 부하가 한 일인데도 모른다고?”
“…내 부하?”
천마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눈을 찌푸렸다.
“나한테 부하가 있었어?”
“…….”
하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백무강의 ‘보물’을 훔쳐 갔던 마인족 간부, 데이모스를 자신의 부하라고 인정하지 않는다는 말투는 아니었다.
마치 정말 자신에게 부하라는 존재가 있는지 모르겠다는 말투.
그래.
“다… 잊은 거구나.”
데이모스에 대한 일만이 아니다.
이제까지 ‘천마’라는 존재를 추앙하며 따르던 마인족들… 그리고 검은 별의 성좌들에 대한 존재 자체를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다.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었나 보지.”
천마는 태연히 어깨를 으쓱이며 검은 먹구름 사이로 맥동하고 있는 자신의 심장을 툭툭 건드렸다.
“걱정하지 마. 누나에 대한 기억은 다 간직하고 있으니까.”
“…….”
자신에 대한 기억 말고는 모두 잊어버린.
거짓말이라는 가면 아래 감춰진 따스한 마음과 상냥함 마저 도려내진.
살점 대신 솜뭉치로 채워진 인형과도 같은 그의 모습.
“그게… 네가 오진이한테 바라는 모습이야?”
“그래.”
천마는 나지막이 고개를 끄덕이며 하은을 지나쳐 걸어갔다.
“이렇게 해야지만 누나를 구할 수 있다면… 나는 얼마든지 더 포기할 수 있어.”
“멈춰.”
“받아들이기 힘들다는 건 알고 있어. 나와 달리 누나는 남을 잘 속일 줄도 모르는 상냥한 사람이니까.”
“멈추라고.”
“슬퍼할 필요 없어. 아마 저기 있는 ‘나’도 같은 생각일 테니까.”
“내가 멈추라고 했어, 권오진!!!”
우뚝.
천마의 발걸음이 멈췄다.
섬뜩한 푸른 귀화가 타오르고 있던 그의 두 눈동자가 가늘게 떨렸다.
권오진.
하은이 죽고 천마가 되기로 결심했을 때 버렸던 이름.
다시는 그녀의 입에서 불릴 리 없을 거라 생각했던 이름이 들려오자, 심장만 남은 몸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두근, 두근.
심장이 검은 먹구름을 몰아내려는 듯 사납게 맥동했다.
“너도… 너도 같은 ‘오진’이잖아.”
비록 두 사람의 운명은 바뀌게 됐지만.
그 또한 ‘오진’이었음에는 변함이 없었다.
“왜 네가 너를 상대로 소중한 걸 뺏어야 하는 건데? 너도, 나도, 그리고 오진이도! 그 누구도 행복하지 못할 일을 왜 해야 하는 거냐고!”
“…….”
“대답해 봐!”
절규하는 듯한 그녀의 외침에 천마는 지그시 눈을 감았다.
하아.
깊은 한숨이 검은 먹구름으로 변한 입술 사이로 새어 나왔다.
“누난 모를 거야. 그리고 저기 있는 ‘나’도.”
소중한 것을 잃는다는 것이 얼마나 고통스럽고, 괴로운 일인지.
홀로 남겨진다는 것이 얼마나 끔찍한 일인지.
그들은 알 수 없을 것이다.
“곧 내 모든 의식은 흑천에 집어 삼켜질 거야.”
“…….”
“그리고 난 별을 먹어 치우겠다는 욕망만이 남은 괴물이 되겠지.”
그것은 이미 정해진 운명이었다.
막을 수도, 멈출 수도 없는 운명.
“그렇게 되기 전에….”
“자살은 의미 없어. 내가 죽는다고 내 안의 흑천이 소멸하는 건 아니니까.”
“아, 아니. 자살을 하라는 말이 아니라.”
“왜? 아까 전에 말했던 것처럼 저쪽의 ‘나’랑 힘을 합쳐 흑천에 대항할 방법을 찾아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응.”
“소용없어.”
이미 되돌리기에는 너무 늦었다.
개천을 사용했을 때부터… 아니, 훨씬 더 그 이전부터 자신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강을 건너버렸다.
“그때가 되면 ‘나’는 선택해야 할 거야.”
포기하느냐.
포기하지 않느냐.
“가진 게 많을수록… 포기하는 건 어려워지겠지.”
그리고 포기하지 않는다면.
괴물이 된 자신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래서 그 전에 네 손으로 앗아가겠다는 거야? 쉽게 포기할 수 있도록?”
“날 원망해도 좋아. 비난하고 욕해도 좋아.”
천마는 하은을 뒤로 하고 먹구름에 붙잡힌 각성자들을 향해 다가갔다.
“누나만 지킬 수 있다면… 다른 건 뭐가 됐든 상관없어.”
천천히 손을 들어 올린 그가 허공을 움켜쥐듯 주먹을 쥐려고 할 때.
“오진아.”
뒤따라 달려온 하은이 천마를 끌어안았다.
“혼자서 많이… 힘들었구나.”
그의 전생의 삶이 어땠는지는 모른다.
그가 얼마나 오래전 과거로 돌아갔는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혼자서… 많이 괴롭고, 외로웠겠구나.”
그가 ‘오진’이라는 이름을 버리고 천마가 되기까지.
얼마나 기나긴 외로움을 견뎌야 했을까.
상상하는 것만으로 구역질이 치밀어 오르는 고통을 견뎌야 했을까.
“…그만하자, 이제.”
다시 한번 천마를 설득한다.
“굳이 저 사람들을 죽이지 않아도, 오진이라면 이겨낼 수 있을 거야.”
흑천이 천마의 의식을 모두 잡아먹고 그를 괴물로 만든다고 해도.
오진이라면 막아낼 수 있을 것이다.
“…누나.”
“네가… 네가 이런 역할을 떠안을 필요는 없잖아.”
그라고 해서 같은 ‘오진’이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고 싶을까.
자기 자신에게 원망과 증오의 대상이 되기를 바랄까.
“다른 방법이 있을 거야 분명.”
천마도, 오진도, 자신도.
모두가 슬퍼하지 않을 방법이 있을 것이다.
“…….”
천마는 자신을 끌어안은 하은의 등을 쓰다듬으며 지그시 눈을 감았다.
그리고.
“푸흡.”
입술 사이로 새어 나오는 웃음.
“푸흡, 푸하하하! 하하하하하하!”
실소에서 폭소가 된 웃음이 쩌렁쩌렁 울려 퍼졌다.
“오, 오진아?”
하은이 당황한 표정으로 천마에게서 떨어졌다.
천마는 멀어지려는 하은의 목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커헉! 컥!”
하은의 입에서 고통에 찬 신음이 흘러나왔다.
천마는 찌어질 듯 입꼬리를 올리며 몸부림치는 하은을 노려봤다.
“뭘 준비했나 했더니, 고작 이런 거였어?”
“크읍… 컥!”
“고작 이런 걸로 날 속일 수 있다고 생각했어?”
쿠웅!
거칠게 발을 구르며 하은의 목을 틀어쥔 손에 힘을 더했다.
“오, 오진아 왜 그….”
“‘오진아’가 아니잖아!!!!!”
울부짖듯 외쳤다.
“누나는 날 그렇게 부르지 않잖아.”
기억한다.
그녀와의 만남을.
그녀와의 추억을.
심장만이 남은 비참한 몰골이 되어서도.
어찌 잊을 수 있을까.
“오진아가 아니라… 오지나잖아?”
자신이 얼굴조차 모르는 부모에게 물려받은 ‘오진’이라는 이름에 콤플렉스가 있다는 걸 안 그녀는 일부러 그의 이름을 뭉개듯 불렀다.
오지나, 라고.
남들이 들으면 고작 그딴 게 무슨 차이냐며 비웃겠지만.
그는 알고 있다.
그 ‘고작’이 자신에게 있어서 얼마나 큰 구원이 됐는지를.
그깟 아무것도 아닌 이름 따위를 신경 쓰던 9살짜리 꼬맹이에게 그녀의 그 작은 배려가 얼마나 큰 희망이 됐는지를.
그 누구도 알아주지 않아도.
제 아무도 공감하지 않아도.
나는 알고 있다.
네가 알고 있는 것처럼.
“왜, 누나의 행세를 하면 내가 속아 넘어갈 줄 알았어? 조금 상냥하게 대해주면 옳다구나 하면서 말을 따를 줄 알았어?”
천마는 까득 이를 갈며 눈앞의 하은… 아니, ‘오진’을 노려봤다.
“착각하지 마, 애송아.”
너도.
나도.
“같은 ‘오진’이야.”
네가 감히 날 속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