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438)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438화
거짓말 (11)
카시아의 그림자를 통해 오진을 베가의 신전으로 옮긴 일행은 차근차근 오진의 상태를 살폈다.
“그러니까… 제 이름이 오진이라고요?”
오진은 기억을 떠올리려는 듯 살며시 미간을 좁히며 침음을 삼켰다.
생각을 이어가던 오진이 이내 고개를 가로저었다.
“죄송해요. 기억나지 않아요.”
“…이름도 기억 안 나는 거야?”
“예.”
2년 만에 돌아온 오진은 아무것도 기억하지 못했다.
마치 새하얀 백지가 돼버린 것처럼.
그녀들에 대한 것도.
자기 자신에 대한 것도.
“여러분들이 누군지… 제가 누군지. 하나도 모르겠어요.”
“…….”
무거운 침묵이 장막처럼 드리워졌다.
이사벨라는 비틀거리는 걸음으로 오진에게 다가갔다.
“오, 오진 씨. 저… 이사벨라예요. 이사벨라.”
“아… 예.”
처음 만나는 사람을 보듯 듯한 낯선 눈빛.
이사벨라는 믿을 수 없다는 듯 뒷걸음질 쳤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 못 하시는 건가요?”
“죄송합니다.”
“…….”
하은은 떨리는 손으로 오진의 어깨를 잡았다.
“오지니 너 지금 또 거짓말하는 거지? 응?”
그래.
상대는 오진이 아니던가.
이 모든 것이 그녀들을 놀려주기 위한 거짓말일 수도 있었다.
아니.
거짓말이어야만 한다.
“또…? 제가 전에도 거짓말을 했던 적이 있었나요?”
“하, 하하. 왜 그래 오지나. 이런 거 하나도 재미없어. 너 또 이러다가 나중에 ‘거짓말이야’라고 말할 셈이지?”
“죄송해요. 무슨 말씀을 하시는지 잘 모르겠어요.”
“…….”
고개를 젓는 오진을 보며 하은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알고 있었다.
각오하고 있었다.
오진이 돌아온다고 해도, 그녀들이 기억하는 ‘오진’의 모습으로는 돌아오지 않을 거라고.
하지만.
아무리 그렇다고 해도.
“이건… 너무하잖아.”
자기 자신이 ‘오진’이라는 것까지 잊어버릴 거라고는 미처 예상하지 못했다.
아니, 예상하지 못한 게 아니다.
꿩이 머리만 풀에 감추듯. 다가올 비극으로부터 애써 눈을 돌린 것이다.
오진이면 괜찮을 것이다, 라는 헛된 희망을 가슴에 품은 채.
“어떻게… 어떻게 이럴 수 있어.”
[진정하거라.]베가가 흐느껴 우는 하은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2년 동안 흑천 속에 있다가 이제 막 밖으로 나온 거지 않으냐. 진정하고 안정을 취하다 보면 금방 기억이 돌아올 것이니라.]“…응. 그래, 그렇지. 그럴 거야, 분명.”
그래.
베가의 말마따나 이제 막 돌아온 참이지 않은가.
아직 모든 기억을 잃었다고 섣부르게 단정할 수 없었다.
“그래요. 오진 님이라면 분명 기억을 떠올리실 거예요. 일단 이렇게 살아 돌아오신 것만으로 다행이잖아요?”
다행이라.
과연 자기 자신이 누군지도 잊어버린 걸 ‘다행’이라 부를 수 있을까?
마음을 잠식하는 불안을 억누르며 하은이 힘겹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다행… 이지.”
“…….”
신전 안에 음울한 공기가 흘렀다.
베가가 깊은 한숨을 내쉬며 입을 열었다.
[일단 아리스를 불러뒀으니 조금만 기다리거라.]“아리스면… 그 양자리의 성좌님 말씀이신가요?”
[그러느니라.]“오진 씨의 몸 상태를 체크하려면 물병자리의 성좌님이 낫지 않나요?”
[딱히 ‘치료’가 목적인 게 아니지 않으냐.]오진의 몸에는 어떤 외상도, 내상도 없었다.
정신을 안정시키고 편한 휴식을 취하게 만들기 위해서는 양자리의 성흔이 제격이었다.
[저 왔어요, 베가 님.]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신전 안으로 금발의 여신이 걸어들어왔다.
[무슨 일로 부르신… 어?]오진을 발견한 아리스는 두 눈을 부릅떴다.
[파, 파군성은 천마와의 싸움에서 죽은 거 아니었나요?] [자세한 건 나중에 설명해 주겠느니라. 지금은 이 아이가 안정을 취할 수 있도록 그대가 도와주거라.] [으음. 알았어요.]아리스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오진에게 다가갔다.
오진의 이마에 손을 올리며 나지막이 입을 열었다.
[그대에게 편안한 안식을.]은은한 황금빛이 오진의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갔다.
길가에서 주워온 고양이처럼 불안에 떨고 있던 오진의 표정이 한결 편해졌다.
[그럼 전 이만 가볼게요.] [고맙구나.] [무슨 상황인지 나중에 꼭 설명해주셔야 해요?] [알겠느니라.]아리스가 신전 밖으로 나갔다.
“몸은 좀 어떠신가요, 오진 씨?”
“…나른한 기분이에요.”
“어디 아프거나 그런 건 없어요?”
“예.”
오진은 이사벨라를 돌아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사벨라는 낯선 존칭으로 자신을 부르는 오진의 모습에 애써 미소 지으며 말을 이었다.
“혹시 배는 안 고프신가요?”
“아뇨. 딱히 배는 안 고프네요.”
“그래도 뭐라도 드셔야죠. 잠깐만 기다리세요. 오진 씨가 좋아하시는 제육볶음 만들어드릴게요.”
“제가 제육볶음을 좋아했나요?”
“예?”
“그… 제육볶음이 어떤 음식인지는 알겠는데, 좋아했었는지는 기억이 안 나서요.”
“아… 그, 그러셨죠.”
애써 지은 미소가 균열이 가듯 조금씩 무너지기 시작했다.
“좋아… 하셨어요. 자주 만들어드리기도 했고요.”
“그렇군요.”
“그, 그럼 금방 만들어 올게요!”
이사벨라가 도망치듯 몸을 돌려 신전 지하로 내려갔다.
기본적으로 식사를 할 필요가 없는 성좌인 만큼 원래라면 당연히 신전 내부에 취사를 할 수 있는 장소는 없었지만.
오진이나 하은이 장기간 수련을 위해 신전에 머무는 시간이 길어지면서 베가가 직접 신전 지하에 부엌을 만들어줬다.
이사벨라가 음식을 만들러 간 사이.
카시아가 오진을 향해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오진 님. 잠깐 윗옷을 벗어주실 수 있으시나요?”
“…여기서요?” “예.”
“음… 알겠습니다.”
잠시 고민하던 오진이 티셔츠를 벗었다.
장인이 섬세하게 조각한 듯 탄탄한 근육으로 차 있는 상반신이 드러났다.
카시아는 오진의 왼쪽 가슴에 새겨진 거문고자리 성흔을 손으로 매만졌다.
“11성….”
거문고자리 성흔 옆에는 총 열한 개의 획이 선명하게 새겨져 있었다.
“베가 님.”
[왜 그러느냐?]“전에 거문고자리 성흔에 흑천을 제어할 수 있는 힘이 있다고 하셨죠?”
[그러느니라.]베가 자신도 어떤 원리로 거문고자리 성흔이 흑천을 제어할 수 있는지는 모르지만.
분명 오진이 거문고자리의 힘을 이용해 흑천을 제어하는 모습을 본 적 있었다.
“그럼 거문고자리 성흔을 사용하다 보면 오진 님의 기억도 돌아오지 않을까요?”
[오오!]“그, 그래! 그런 방법이 있었구나!”
베가와 하은의 눈이 별처럼 반짝였다.
거문고자리의 성흔에 흑천을 제어하는 힘이 있다면, 그를 잘 활용하기만 한다면 사라진 오진의 기억도 되찾을 수 있지 않겠는가.
“오지나! 빨리 성흔을 써봐!”
흥분에 찬 하은이 다급히 오진에게 외쳤지만.
“…성흔이요?”
오진은 영문을 알 수 없다는 표정으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떻게 하면 쓸 수 있는 건데요?”
“…….”
설마 성흔을 쓰는 방법까지 잊어버렸단 말인가.
하은은 지그시 입술을 깨물며 베가 쪽으로 시선을 옮겼다.
베가가 고개를 끄덕이며 오진에게 다가갔다.
[왼쪽 가슴에 새겨진 이게 거문고자리의 성흔이니라.]“아, 그렇군요.”
[눈을 감고 성흔에 정신을 집중하거라.]“예.”
오진은 베가가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았다.
[자, 이제 머릿속으로 푸른 뇌전이 타오르는 걸 상상해 보거라.]“으음.”
미간을 좁히며 정신을 집중하는 오진.
“푸른 뇌전… 푸른 뇌전.”
베가가 알려준 대로 사납게 타오르는 푸른 뇌전을 머릿속에 떠올렸지만.
“…아무 일도 안 일어나는데요?”
그의 가슴에 새겨진 성흔에서는 어떠한 빛도 뿜어져 나오지 않았다.
“아,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그래. 좀만 더 연습하면 쓸 수 있을….”
[…아니, 그런 게 아니니라.]“그런 게 아니라니?”
[…….]베가의 표정이 어둡게 물들었다.
그녀는 오진의 성흔을 조심스럽게 쓰다듬으며 입술을 잘근 깨물었다.
[아예 성흔의 기운 자체가 느껴지지 않느니라.]“그렇다면….”
[이대로는 아무리 연습한다고 해도 성흔을 쓸 수는 없을 것이니라.]“…….”
별처럼 반짝이던 하은의 눈빛이 탁한 먹구름에 뒤덮였다.
“식사 드세요.”
지하로 내려갔던 이사벨라가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냄비를 들고 올라왔다.
오진은 성흔을 사용하기 위해 정신을 집중하는 것을 멈추고 냄비에 담긴 제육볶음을 한 입 먹었다.
“입에 맞으신가요?”
“아, 예. 맛있습니다.”
딱히 배가 고픈 것은 아니었지만, 절묘한 맵기와 달콤함이 조화된 제육볶음은 절로 탄성이 흘러나올 정도로 훌륭한 맛이었다.
“신기하네요.”
“신기하다뇨?”
“그… 이사벨라 씨라고 했던가요? 외국 분이신데도 한국 음식을 만드실 줄 아시는군요.”
“아… 여, 연습했거든요.”
“한식을 좋아하시는군요.”
“……아뇨.”
좋아하는 건 당신이에요.
목구멍까지 차오른 그 말을 억지로 집어삼킨다.
“그러신 것 치고는 맛이 훌륭….”
“그, 그 얘기는 그만하죠!”
더 이상 얘기했다가는 애써 태연한 척 짓고 있는 미소가 무너질 것만 같았다.
“아… 예. 알겠습니다.”
오진은 고개를 끄덕이며 묵묵히 숟가락을 옮겼다.
주변에서 쏟아지는 시선이 불편하다는 듯 허겁지겁 밥그릇을 비운 그는 자리에서 일어나 몸을 돌렸다.
“그… 한숨 자러 가도 될까요? 좀 피곤하네요.”
“으, 응. 지하로 내려가면 침실 있으니까 거기서 자.”
“감사합니다.”
오진은 꾸벅 머리를 숙이며 지하로 내려갔다.
“…….”
[…….]오진이 내려가자 숨 막힐 듯 무거운 침묵이 신전 안을 가득 채웠다.
“…흐윽.”
침묵을 깨며 나지막이 울려 퍼지는 울음소리.
무너지듯 바닥에 주저앉은 이사벨라가 눈물을 흘렸다.
“정말… 정말 다 잊으신 거예요? 모두?”
자신을 바라보던 오진의 낯선 눈빛.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을 바라보는 듯한 그의 눈빛이, 날카로운 비수가 되어 그녀의 가슴을 헤집었다.
“진정해.”
“어떻게! 어떻게 진정할 수 있어?! 오진 씨가 기억을 모두 잃어버리셨는데!”
이사벨라가 날카롭게 카시아를 쏘아보며 외쳤다.
“언니는 괜찮겠지! 오진 씨랑 만난 시간도 제일 짧으니까!”
“그게 무슨 말이야?”
“왜? 내가 틀린 말이라도 했어? 오히려 언니는 좋아하고 있는 거 아냐? 오진 씨의 기억이 사라졌으니 기회가 새로 생긴 거잖아?”
“…지금 네가 뭐라고 지껄이는지 알고 있니?”
카시아의 눈에서 짙은 살기가 흘러나왔다.
그림자가 넓게 펼쳐지며 검은 뱀들이 기어 나왔다.
“나라고… 나라고 괜찮을 리 없잖아!!!”
“거짓말!”
이사벨라가 질세라 핏빛 기운을 몸에 둘렀다.
“그만.”
하은의 입에서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녀는 이사벨라를 돌아보며 날카롭게 눈을 떴다.
“만난 시간이 짧으니 괜찮다고? 그거 진심으로 하는 소리야?”
“……아.”
만약 그렇다면.
이중에서 가장 ‘괜찮지 않아’야 할 사람은 다름 아닌 하은이었다.
“…죄송해요. 너무 흥분해서 실언을 했어요.”
하은을 향해 꾸벅 머리를 숙인 이사벨라가 몸에 두른 핏빛 기운을 거둬들였다.
“미안해 언니.”
“하아. 아냐, 나도 네 마음 이해하니까.”
카시아 또한 넓게 펼친 그림자를 다시 거둬드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나도 잠깐 쉬러 갈게.”
하은이 지친 표정으로 지하를 향해 터벅터벅 걸어 내려갔다.
“…….”
침실 쪽을 보니 누워서 곤히 잠들어 있는 오진의 모습이 보였다.
잠들어 있는 오진에게 다가간 하은은 조심스럽게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오진과 함께했던 추억들이 파노라마처럼 머리를 스쳐 지나간다.
보육원에서 처음 그를 만났을 때의 기억.
보육원을 나와 같이 살기 시작했을 때의 기억.
눈과 다리를 잃고 그에게 기대어 살았을 때의 기억.
용마안으로 저주를 풀고 몇 년 만에 그를 봤을 때의 기억.
천도윤에게 붙잡혔을 때의 기억.
오랫동안 품어왔던 마음을 고백했을 때의 기억.
그리고, 그리고, 그리고.
셀 수 없는 추억들이.
헤아릴 수 없는 기억들이.
떠오르고.
사라진다.
“…아.”
그제야 깨달을 수 있었다.
‘나, 오지니랑 계속 같이 있었구나.’
삶의 어디를 둘러봐도.
그는 항상 그녀의 옆에 있었다.
언제나. 어디에나.
하지만.
“정말… 다 잊은 거야 오지나?”
이제 더 이상 그의 기억 속에 그녀의 모습은 존재하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