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44)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44화
폐관 수련 (5)
전율.
등을 타고 흐르는 섬뜩한 감각에 은빛 털이 곤두섰다.
‘뭐야.’
이상하다.
아무리 생각해 봐도, 되짚어 고민해도.
말이 되지 않았다.
‘어떻게━ 움직일 수 있는 거지?’
죽음의 충격이 얼마나 큰지 리아크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었다.
한창 수련에 몰두했을 때.
베가에게 부탁해 성역을 펼쳐 달라 한 적이 있었으니까.
그 당시 그를 상대해줬던 것은 베가였다.
‘나도… 스무 번이 한계였어.’
정신력 하나만큼은 남들에게 절대 꿀리지 않는다고 자부하는 리아크조차 스무 번의 죽음을 연달아 겪은 후엔 공포에 질려 움직이지 못했다.
죽음이란 건 상상 이상의 고통을 수반한다.
아니.
애초에 내장이 짓이겨지고 으스러진 뼛조각이 살점을 헤집는데 죽음이고 나발이고 정신이 멀쩡할 리가 없다.
‘그런데.’
왜.
스무 번도 넘는 죽음을 겪고선.
어떻게 저리 환하게 웃을 수 있단 말인가.
“뭐야? 뭘 멍 때리고 있어?”
드르륵.
창을 바닥에 질질 끌며 한 걸음 한 걸음 다가갔다.
머릿속이 타들어 가듯 뜨거웠지만.
당장이라도 쓰러질 듯 두 다리가 떨렸지만.
“━우리 아직 안 끝났잖아?”
움직인다.
타들어 가는 의식의 끈을 부여잡으며.
후들거리는 두 다리에 억지로 힘을 밀어 넣으며.
한 걸음.
또 한 번 앞으로.
“……!”
주춤.
리아크가 부릅뜬 눈으로 뒷걸음질 쳤다.
지금 이 순간.
그는 손가락 하나로도 상대할 수 있는 허약한 인간 하나에게 완전히 압도당했다.
‘이건.’
파랗게 질린 얼굴로 입술을 짓씹는다.
움켜쥔 주먹이 가늘게 떨린다.
‘의지가 뛰어나다’라는 단순한 표현으로는 설명이 불가하다.
이건.
‘제정신이 아냐.’
광기다.
의지를 초월한, 신념조차 넘어선.
순수하기까지 한 광기.
“크읏!”
본능이 경고했다.
지금 당장 이곳에서 도망치라고, 저 인간을 상대해선 안 된다고.
모든 감각이 시끄럽게 울부짖는다.
“헛… 소리!”
본능의 경고를 무시하며 리아크는 주먹을 들어 올렸다.
비틀비틀 다가오는 인간을 향해 달려들려 했을 때.
-우우우웅!!
신전을 뒤덮고 있던 은빛 빛무리가 사라졌다.
““아.””
오진과 리아크의 목소리가 겹쳤다.
시선이 자연스럽게 향한 곳에는 노한 표정으로 둘을 노려보는 여신이 있었다.
[그만두라는 말을 듣지 못한 게냐?]“죄, 죄송합니다.”
리아크가 머리를 조아렸다.
“…….”
오진은 어딘가 아쉽다는 표정으로 손에 쥔 창을 만지작거리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미안. 좀 흥분했나 봐.”
깔끔하게 사과했다.
[후우. 정말… 무모한 짓을 하는 건 리아크나 그대나 똑같구나.]베가가 한숨을 내쉬며 다가왔다.
오진의 뺨을 가볍게 꼬집으며 말을 이었다.
[참으로 못된 아이로구나. 어디까지 본녀를 걱정하게 만들 셈이냐?]장난스럽게 물었지만 목소리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진심으로 자신을 걱정했던 모양.
오진은 쓰게 웃으며 고개를 숙였다.
“앞으론 진짜 조심할게.”
[약속해야 하느니라?]베가가 조심스럽게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우리 여신님 이런 건 어디서 배워온 거지.
“응. 약속할게.”
사기꾼의 약속이라 얼마나 오래갈지는 모르겠지만.
[후훗. 그대를 믿겠느니라.]환하게 미소짓는 여신님의 모습을 보니 거짓말을 칠 생각도 쏙 들어갔다.
‘이번에 좀 너무 열을 내긴 했지.’
중간부터는 반쯤 정신줄을 놓고 싸웠다.
리아크가 기겁하며 뒷걸음질 칠 정도로 처절하게.
‘근데 이게 그렇게 놀랄 정도인가?’
확실히 죽음의 공포와 고통은 대단했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불타버리는 게 아닐까 걱정될 정도로.
하지만.
‘그래도 참을 만했던 것 같은데.’
확실히 아프고, 고통스러웠지만.
고작해야 ‘참으면’ 끝날 문제 아닌가?
‘뭘 그리 호들갑을 떠는지.’
참고 견뎌서 끝나기만 한다면 얼마든 웃으며 참을 수 있다.
이제까지 그에겐 참는다고 해서 끝나지 않는 일들이 더 많았으니까.
“약속은 개뿔!”
하은이 성난 표정으로 다가왔다.
베가와 손가락을 걸고 있는 모습을 슬쩍 내려다보더니, 귀를 쭈욱 잡아당겼다.
“아, 아아아.”
“하여튼 지가 뭐라고 맨날…!”
아무래도 단단히 화가 난 모양.
“미안하다니깐.”
“…에휴.”
말을 섞기도 싫다는 듯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몸은 괜찮아? 어디 아픈 곳은 없고?”
리아크의 손톱에 갈가리 찢겨나갔던 오진의 모습이 떠오르자 괜히 가슴이 철렁거렸다.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오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장난스럽게 답했다.
하은의 표정이 살짝 풀어졌다.
“근데 좀 지치긴 하네.”
긴장이 한 번에 풀렸기 때문일까.
급격한 피로가 몰려왔다.
“누나 여기 좀 앉아봐.”
“엉? 갑자기 왜?”
“얼렁.”
송하은이 고개를 갸웃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풀썩.
그녀의 허벅지 위에 쓰러지듯 누웠다.
“뭐, 뭐 하는 짓이야!”
하은이 얼굴을 붉히며 버럭 소리쳤다.
“푸흐흐.”
이러면서도 자세를 잡아 눕기 편하게 만들어주는 게 우리 누나의 매력이란 말이지.
“나 10분만 잘게.”
“이, 이익… 이 새끼가…!”
하은이 부들부들 몸을 떨며 주먹을 들어 올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흥.”
눈을 감자마자 새액새액 잠든 오진을 내려다보며 들어 올린 주먹을 살며시 내렸다.
“못 산다니까 진짜.”
잔잔한 미소와 함께 잠든 오진의 이마를 가볍게 탁 두들겼다.
[으음.]그런 둘의 모습을 베가가 복잡한 시선으로 바라봤다.
잠시 고민에 잠겨 있던 그녀는 이내 한숨을 내쉬며 몸을 돌렸다.
[리아크여.]“예. 베가 님.”
[실전을 겪어보니 어떠냐? 본녀의 말이 이해되느냐?]“…….”
리아크는 굳게 입을 다문 채 지그시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했습니다, 뼈저리도록.”
짧은 전투 속에서 보여줬던 폭발적인 성장.
아무리 회귀자라 해도 전투 도중 그 자리에서 스킬을 창조해내는 경이로운 재능과 성흔의 마력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탁월한 센스.
이제까지 베가를 대신하여 많은 각성자를 지켜봤지만, 오진만큼 압도적인 재능을 지닌 각성자는 없었다.
[후훗. 그래. 역시 그대가 인정할 정도로 뛰어난 재능이로구나.]“…….”
리아크는 잘근잘근 입술을 깨물었다.
‘아냐.’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을 억지로 삼켰다.
‘그게 중요한 게 아냐.’
탁월한 재능 따위.
언제든 ‘벽’에 가로막히면 허망하게 좌절되게 마련이다.
자신이 그러했던 것처럼.
하지만.
‘저 인간이 진정으로 무서운 건.’
비틀, 비틀.
수십 번의 죽음을 겪으면서도 몸을 일으킨 오진의 모습이 떠올랐다.
‘저 인간은 미쳤다.’
예를 들어.
펄펄 끓고 있는 기름 속에 손을 집어넣은 채 아무렇지 않다는 듯 낄낄 웃고 있는 사람이 있다고 치자.
그 사람을 ‘참을성이 뛰어나다’거나 ‘의지가 굳건하다’라는 말 따위로 설명할 수 있는가?
‘광기에 가까운 의지.’
그것이.
‘오진’이라는 인간이 지닌 진정한 무서움이었다.
“왜….”
리아크는 거칠게 주먹을 쥐었다.
“왜 저는… 저렇게 미치지 못했던 걸까요.”
아득한 과거.
베가에게 영혼의 일부를 부여받아 초월체로 되살아난 후.
그는 자신을 구원해준 베가를 위해 필사적으로 단련에 매진했다.
별들의 예언에 따라 찾아올 ‘흑천’의 어둠에서 그녀를 지켜주기 위해.
수백, 수천의 밤을 새우며 발버둥 쳤다.
하지만.
‘결국 벽을 넘지 못했지.’
수백 년이 넘도록 그는 깨달음을 얻지 못한 채 정체됐다.
너무나 큰 좌절감에 빠져 더 이상 수련에 매진하지조차 않았다.
‘내 의지가 부족했던 거야.’
오진이 지닌 광기에 가까운 의지.
그것이 있었다면 이렇게 한심하게 멈춰 서 있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리아크여?]“아뇨. 아무것도 아닙니다.”
쓴웃음과 함께 고개를 저었다.
“…….”
리아크는 하은의 허벅지에 누워 곯아떨어진 오진을 돌아보았다.
‘내 패배다.’
재능도, 의지도 그를 넘어서지 못했다.
심지어 추잡한 질투에 이성을 잃고 날뛰기까지 했다.
참패.
더 이상 그를 인정하지 않을 변명거리가 없다.
-쿵.
리아크는 누워 있는 오진을 향해 한쪽 무릎을 꿇었다.
“역천의 별이여.”
정중하게 고개를 숙이며.
“부디━ 흑천의 어둠에서 직녀성의 빛을 지켜주소서.”
간절한 목소리로 애원했다.
* * *
그렇게 한 달이란 시간이 더 흐르고 성소에 온 지 3개월째가 됐을 무렵.
“슬슬 돌아가야겠네.”
대련을 마친 오진은 아쉽다는 듯 말했다.
리아크가 눈살을 좁혔다.
“돌아간다고?”
“엉.”
“크흥! 이제 5분 좀 넘게 버티게 됐으면서 수련을 등한시할 셈이냐!”
리아크는 퉁명스럽게 말했지만, 그의 목소리에도 짙은 아쉬움이 담겨 있었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지난 3개월간 오진과 꽤나 정이 쌓였기 때문.
“처음에 3초 컷이었는데 5분이면 솔직히 많이 발전했지.”
“그래봤자 컵라면이 익을 시간보다 좀 더 버틴 게 아닌가!”
“엥? 너 컵라면 알아?”
“전에 네놈이 먹는 걸 보고 따라 먹어봤다.”
“아이 씨 어쩐지 몇 개 빈다 했더니.”
“훌륭한 맛이더군.”
“이 새끼가?”
어느새 둘은 서로에게 장난스럽게 농을 던질 정도로 친해졌다.
오진은 쓰게 웃으며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다고 천년만년 여기 있을 순 없잖아.”
슬슬 협회 쪽에도 신경을 써줘야 했다.
‘그리고 수련 효율도 슬슬 떨어지고 있고.’
아무리 꼼수를 부린다 해도 리아크 하나와 백날 대련만 해서 성장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
그에겐 실전이 필요했다.
‘부활’이라는 안전장치조차 없는 진짜 실전이.
“크르릉.”
리아크는 뚱한 표정으로 팔짱을 꼈다.
“흐흐. 뭐냐? 간다니까 아쉬워?”
“무, 무슨!”
리아크가 버럭 외쳤다.
“헛소리하지 마라 인간! 진정한 전사에게 외로움 따윈 없다!”
“아, 예~ 예.”
“크르릉!”
오진은 낄낄 웃으며 지난 3개월간 이것저것 쌓인 짐들을 챙겼다.
침낭에 베개에 각종 인스턴트와 조리도구까지.
“옜다. 컵라면 몇 개 두고 갈 테니 심심하면 먹어라.”
“…….”
리아크는 컵라면을 받아들며 굳게 입을 다물었다.
“…인간.”
“응?”
“…….”
리아크는 한동안 말을 못 하고 입술을 달싹이더니 이내 획 고개를 돌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고, 고맙다.”
오진과 대련을 하면서 다시 한번 ‘벽’에 도전해볼 의지가 생겼다.
용기가 생겼다.
어찌 감사의 인사를 하지 않을 수 있을까.
“푸흐흐흐!! 어엉? 뭐라고~? 잘 안 들리는 데에~?”
“크, 크릉!! 네노옴!”
리아크가 은빛 털을 곤두세우며 날카롭게 이를 드러냈다.
오진은 배를 부여잡고 웃음을 터트렸다.
‘자, 그럼 돌아가 볼까?’
스스로의 몸 하나 정도는 지킬 수준까진 올라왔다.
이젠.
“직녀성의 사도가 누군지 알려줘야지.”
당당히 세상 앞에 마주 설 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