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441)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441화
막간-거래
‘여긴….’
오진은 감았던 눈을 천천히 떴다.
달 없는 밤처럼 지독한 어둠으로 뒤덮인 세계.
손을 뻗어도 닿지 않고 발을 허우적거려도 내디딜 수 없다.
끝없는 우주 속을 유영하는 것처럼 아득한 무력감이 몸을 짓눌렀다.
‘아, 으.’
보이지 않는다.
들리지 않는다.
느껴지지 않는다.
캄캄한 밤하늘 속에 홀로 내던져진 것처럼.
지독히도 공허하다.
‘나는.’
내가 누구였더라?
기억나지 않는다.
이곳이 어딘지, 무슨 이유로 이런 어두컴컴한 먹구름 속에 몸을 내던졌는지조차.
아무것도….
‘아니.’
검은 먹구름 속으로 가라앉는 의식을 필사적으로 붙잡았다.
입술을 짓씹으며 자신이 이곳에 온 이유를 머릿속에 떠올린다.
‘포기한 모든 것을… 되찾기 위해.’
그래.
그걸 위해 이 빛 한 점 없는 공간에 온 것이 아니던가.
쿠르르르르르릉!
간신히 의식을 부여잡으며 정처 없이 먹구름 속을 부유하고 있을 때.
거대한 굉음과 함께 먹구름의 해일이 거칠게 요동치기 시작했다.
‘저건….’
사납게 요동치던 먹구름의 해일이 서서히 반으로 갈라졌다.
아니.
갈라진다는 표현보다는 ‘찢어진다’는 표현이 더 잘 어울리라.
거대한 솜 인형을 두 손으로 난폭하게 잡아당긴 것처럼 난폭하게 흑천이 두 개로 나뉘고 있었다.
‘저 속에 내가 잃어버린 기억이 있다.’
오진은 힘껏 두 다리를 박차며 흑천과 흑천 사이에 만들어진 공간을 향해 나아갔다.
아니.
정확히는 나아가려 했다.
‘크윽, 컥!’
반으로 갈라지기 시작한 검은 먹구름의 급류에 의식이 휩쓸리며 오히려 몸이 뒤로 밀려났다.
한낱 인간의 의지로는 감히 거스를 수 없는.
태초에서 갈라져 나온 어둠.
흑천이 자신의 계획을 눈치채고 다가오지 말라며 저항하는 게 아니다.
길을 걸어가다 자신도 모르게 개미를 짓밟는 것처럼.
‘움직인다’라는 지극히 원초적이고 단순한 행동 하나만으로 자신을 저 멀리 밀어내고 있는 것이다.
‘가야 해.’
기회는 단 한 번.
뒤섞여 하나가 된 다시 흑천이 둘로 찢어지는 순간은 지금 이 순간뿐이었다.
오진은 급류를 거슬러 올라가는 연어처럼 흑천의 구름을 거슬러 올라갔다.
그리고.
‘아, 으.’
수천, 수만 마리의 개미들이 살점을 산 채로 잡아 뜯어먹는 듯한 끔찍한 격통.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전율스러운 고통이 그를 짓눌렀다.
1초도 되지 않은 시간에 몸이 분쇄기에 밀어 넣은 듯 조각조각 찢어졌다 도로 붙기를 반복했다.
‘아아아아아아아아!!’
그가 말했던 대로.
죽지는 않는다.
아니, ‘죽지만 않는’다.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파, 아프다고 X발!!!’
흑천의 격류를 거슬러 올라가려고 할 때마다 미칠 듯한 고통이 전신을 난자했다.
의식으로 이뤄진 육체가 부서지고, 찢어지고, 짓이겨지고, 쪼개지고, 갈라지고를 무한히 반복한다.
아프다.
정신이 아득해질 정도로.
머리가 이상해질 정도로.
너무나 고통스럽다.
‘이, 걸… 버티기만 하면 된다고?’
개소리.
본인이 겪어보지 않았기에 그딴 헛소리를 아무렇지도 않게 지껄일 수 있는 것이다.
죽음에는 이르지 않는다고 해도 고통은 실재한다.
거대한 망치로 살점을 짓이기는 듯한 고통도, 날카로운 칼날로 전신을 난자하는 듯한 고통도.
이곳이 현실이 아닌 의식 공간이라는 생각이 티끌만큼도 들지 않을 정도로 생생하다.
‘왜 이렇게 고통받으면서까지 버텨야 하지?’
문뜩 검은 먹구름의 격류 속 휘청거리는 자신의 모습이 더없이 처량하게 느껴졌다.
어차피 지금 자신이 간직한 기억은 눈을 뜨고 나서 고작 한 달 정도의 기억에 불과하지 않은가.
심지어 그중 대부분이 과거의 기억을 떠올리기 위한 비참한 발버둥으로 점철된 시간이었다.
그런 지독한 기억 따위.
그냥 버려버리면 되는 거 아닌가?
굳이 기억할 가치도 없는 기억이지 않은가?
‘그래.’
자신이 이런 고통을 아득바득 버텨가면서까지 발버둥 칠 이유는 없다.
영상 속 자신도 그리 말하지 않았던가.
지금 내 선택에게 모든 걸 맡기겠다고.
‘포기하는 거야.’
하나도 빠짐없이.
한 줌도 남김없이.
모두.
포기해 버리면 된다.
그러면 이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다.
한 발자국만 물러서면 편해질 수 있다.
-그만해도 괜찮아.
문뜩.
하은의 목소리가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기억을 되찾는 거. 이제 그만해도 괜찮다고.
사라진 기억을 억지로 떠올리기 위해 발버둥치던 그를 향해.
그녀는 더없이 상냥한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네가 잊어도, 내가 기억하고 있다고.
그러니 기억을 떠올릴 필요는 없다고.
감정을 억누르며, 마음을 짓이기며.
그렇게 말해주었다.
‘…….’
한 걸음.
앞으로 내디딘다.
끔찍한 격통이 한층 강도를 더해간다.
‘아, 으.’
아프다.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견딜 수 없을 정도로.
고통스럽다.
하지만.
‘나, 는.’
쿠르르르륵!
흑천의 구름이 몸부림치듯 사납게 요동쳤다.
두 개의 흑천 사이.
조각조각 찢겨진 먹구름 속에서 무언가 보였다.
‘저건.’
희미한 별빛.
짙은 먹구름 속에 갇혀 있음에도.
찬연히 빛나는 별빛은 고고하게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아….’
본능에 이끌리듯 희미하게 빛나는 별빛을 향해 나아갔다.
어째서일까.
분명 처음 보는 별빛일 텐데, 한평생 곁에 있었던 것처럼 친숙하게 느껴졌다.
‘거문고자리의 성흔.’
앞으로 뻗은 오진의 손끝이 성흔에 닿는 순간.
우우우우우우우웅!!!
찬란한 은빛이 검은 하늘을 밝히며 환하게 타올랐다.
포근한 별빛이 몸을 감싸는 감각과 함께.
“아.”
흘러든다.
떠오른다.
잊고 있던 기억이, 지워졌던 추억이.
하나하나 머릿속에 새겨진다.
“하.”
입술 사이로 실소가 흘러나왔다.
오진은 왼쪽 가슴 위에 새겨진 성흔을 향해 손을 뻗었다.
성흔 옆에 새겨진 ‘열두 개’의 획.
‘12성.’
그 어떤 각성자도 도달한 적이 없다는 미답(未踏)의 경지에 발을 디뎠다.
은빛 빛무리를 몸에 두른 채 오진은 지그시 눈을 감았다.
“…누나.”
하은과의 기억이, 그녀와 함께한 추억이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그중에는 천마와 마지막 대결이 있기 전 사라졌던 기억들도 섞여 있었다.
“베가, 이사벨라, 카시아, 리아크.”
기억하고 있다.
잊지 않고 있다.
“다… 돌아왔어.”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감정에 몸을 짓이기는 고통조차 지워졌다.
하지만 감격에 차올라 있던 것도 잠시.
쿠르르르르릉!
굉음과 함께 두 쪽으로 쪼개져 있던 흑천이 다시 하나로 합쳐지기 시작했다.
“눈치챈 건가.”
오진은 눈을 찌푸리며 고개를 들어 올렸다.
그를 잡아먹을 듯이 밀려 들어오는 검은 먹구름의 해일이 보였다.
‘어디로 가야 하지?’
검은 먹구름이 사방에서 밀려오는 탓에 어디로 가야 이곳을 빠져나갈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그때.
우우우우우웅!
왼쪽 가슴에 새겨진 거문고자리 성흔에서 한 줄기 빛이 뻗어 나오더니 나침반의 침처럼 어느 한 곳을 가리켰다.
본능적으로 알 수 있었다.
이 별빛의 길을 따라가면 흑천의 밖으로 빠져나갈 수 있다는 것을.
“크읏…!”
쿠르르르륵!
한 걸음 발을 떼니 뱀처럼 몸을 휘감은 검은 먹구름이 강하게 그를 잡아당겼다.
“이까짓…!”
파지지지직!
푸른 뇌전이 번뜩이며 몸을 옭아매는 검은 먹구름을 태웠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다시금 밀려 들어온 검은 먹구름이 그를 붙잡았다.
마치 이곳에서 넌 나갈 수 없다는 듯이.
“더럽게… 질척, 이네!”
한걸음, 한걸음.
몸을 옭아매는 검은 먹구름을 불태우며 조금씩 앞으로 나아갔다.
“하아, 하아!”
턱 끝까지 차오르는 숨.
성흔이 새겨진 왼쪽 가슴이 칼로 찌르는 듯 아려왔다.
‘조금만… 더!’
흑천을 완전히 빠져나가기까지 남은 걸음을 고작 열 걸음.
오진은 이를 악문 채 거문고자리 성흔에 온 정신을 집중했다.
“크읏….”
한 걸음.
푸른 뇌전이 먹구름을 불태웠다.
두 걸음.
늪에 빠진 듯 발목까지 먹구름이 차올랐다.
세 걸음.
뱀처럼 몸을 타고 올라온 먹구름이 오른팔을 잡아당겼다.
네 걸음.
뇌전으로 날카로운 칼날을 만들어 먹구름에 붙잡힌 팔을 잘라냈다.
다섯 걸음.
칼날을 휘두르던 왼팔이 먹구름에 묶였다.
여섯 걸음.
거칠게 몸을 비틀어 어깨부터 팔을 뜯어냈다.
“조금만… 더어…!”
우드득.
검은 먹구름에 붙잡힌 몸에서 섬뜩한 파골음이 들려왔다.
하지만 이건 실제 육체가 아닌 의식 공간 안에 있는 의식체.
팔이 뜯겨 나가고 다리가 잘리고 전신이 으스러져도.
의식을 잃지만 안으면 얼마든 몸을 재생할 수 있었다.
“아, 으. 아아아!!!”
일곱 걸음.
여덟 걸음.
아홉 걸음.
그리고.
쿠르르르르르르르르륵!
둘로 쪼개져 있던 흑천이 다시 하나로 합쳐졌다.
마지막 한 걸음만을 남겨 놓은 오진의 의식이 흑천의 먹구름에 완전히 뒤덮혔다.
‘아.’
전신을 옳아메는 검은 먹구름을 바라보며 나지막이 탄식을 흘렸을 때.
화르르르르르르륵!
검은 불꽃이 먹구름을 집어삼키며 사납게 타올랐다.
“이건….”
“그 마지막 한 걸음을 못 내디뎌서 여기 갇힐 셈이냐?”
검은 불꽃 너머.
자신과 똑같은 얼굴을 한 또 한 명의 ‘오진’이 그를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천마?”
“뭘 그렇게 놀란 표정을 짓고 있어? 내 흑천과 네 흑천이 하나로 합쳐져 있으니 당연히 내 의식도 여기 갇혀 있는 거지.”
그의 말마따나.
두 개의 흑천이 하나로 합쳐진 거니 그의 의식이 이 공간 안에 있는 것도 당연했다.
“너….”
오진은 말끝을 흐리며 천마를 바라봤다.
천마 또한 자신과 마찬가지로 검은 먹구름에 전신이 묶여 있었다.
아니.
‘묶여 있다’라는 표현은 옳지 않으리라.
이미 흑천과 한 몸이 되어버린 듯 검은 먹구름의 그의 몸과 이어져 있었다.
“거래를 하자.”
“거래?”
“그래, 거래.”
천마는 오진에게 가까이 다가오며 말을 이었다.
“내 부탁을 하나만 들어준다면, 이곳에서 나갈 수 있도록 도와줄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
그 ‘부탁’의 내용을 들은 오진은 나지막한 헛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