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51)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51화
넘어서다 (1)
“…하.”
오진의 입에서 짧은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찬란히 타오르는 붉은 화염.
흩날리는 재와 먼지 속에서 의연히 서 있는 여인.
“누나.”
8년 전처럼.
아니 그보다 더 오래전, 처음 그녀를 만났을 때처럼.
보석처럼 반짝이는 그녀의 모습.
핏물과 살점만이 가득한 광경 속에서도 그녀는 여전히 아름다웠다.
“가만히 있어.”
그녀는 재킷 속에서 포션을 꺼내 살점이 한 움큼 떨어져 나간 오진의 어깨에 들이부었다.
아찔한 통증이 어깨를 타고 퍼졌다.
뭐 시간이 거꾸로 흐른 것처럼 상처가 재생되지는 않았어도 적어도 줄줄 쏟아지던 피는 멎었다.
아무래도 꽤 값나가는 포션인 모양.
“그거 비싼데.”
“앙?”
하은의 표정이 거칠게 일그러졌다.
“지금 그딴 게 중요해?”
“푸흐흐! 농담이야.”
오진은 어깨를 으쓱이며 웃었다.
아무리 돈을 밝힌다 해도 이 상황에서 포션 값을 아까워할 정도로 정신머리가 없지는 않았다.
‘덕분에 살았어.’
그녀가 와준 덕분에 잠깐 숨 돌릴 시간을 가질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그녀가 여기 왔다는 의미는.
-화르륵!
“크아아아아!!”
화염의 벽을 뚫고 높게 점프한 마수가 육중한 덩치를 앞세워 달려들었다.
송곳처럼 돋아 있는 가시들이 날카롭게 빛났다.
마수와의 거리가 빠르게 가까워졌을 때.
“흐읍!!”
콰득!
한 손에 대형 방패를 든 청년이 마수의 앞을 가로막았다.
날카로운 가시들이 방패에 막혀 밀려났다.
마수는 몸을 뒤틀며 방패를 뚫어내려 했지만.
“어딜!!”
묵직한 호통과 함께 성흔의 마력이 가득 담긴 망치가 마수의 머리통을 후려쳤다.
퍼석.
머리가 터지며 뇌수와 안구가 흘러내렸다.
“괜찮으십니까 오진 씨!”
박창현이 오진을 돌아보며 외쳤다.
든든한 그 모습에 오진의 입가에 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예. 괜찮습니다.”
“그, 그나저나 이 마수들 모두 오진 씨 혼자서 죽이신 겁니까?”
박창현은 주변 가득한 마수의 시체들을 바라보며 입을 쩍 벌렸다.
대충 훑어본 것만으로도 수십. 아니, 백은 넘어 보이는 마수의 시체들.
‘무슨 말도 안 되는….’
박창현은 믿을 수 없다는 표정으로 오진을 바라봤다.
아무리 북극성의 사도라고 해도 4성에 불과한 각성자가 혼자서 백 마리가 넘는 6성급 마수를 잡다니?
직접 보지 않았다면 헛소리하지 말라고 코웃음을 쳤을 만한 상황이었다.
‘같은 인간이 맞긴 한 건가?’
꿀꺽.
박창현은 마른침을 삼키며 긴장된 표정으로 오진을 바라봤다.
“우선 저놈들 먼저 처리하죠.”
창을 빙글 돌리며 바글바글 몰려드는 마수를 향해 발걸음을 옮겼다.
1분도 채 되지 않는 짧은 휴식에 불과했지만, 거칠어진 호흡과 들끓는 마력을 진정시키기엔 충분한 시간이었다.
“토벌대 쪽엔 미리 연락을 넣어놨어. 곧 다른 각성자들도 이쪽으로 올 거야.”
“역시 우리 누나밖에 없다니깐.”
토벌 작전에 참여한 다른 각성자까지 합류하게 된다면 한결 수월해질 것이다.
“…그러니까 무리하지 말고 적당히 시간만 끌라고.”
흥.
하은은 콧방귀를 끼며 몸을 돌렸다.
“후우.”
깊게 호흡을 들이킨 후.
달칵.
쓰고 있던 안대를 풀었다.
흉악한 눈동자가 번들거렸다.
“누나?”
“끄응. 이건 아직 익숙하지 않아서 쓰기 싫었는데.”
하은은 신음을 삼키며 한 걸음 발을 뗐다.
세로로 찢어진 동공.
뱀의 그것과 같은 눈동자가 마수들을 향했다.
“키륵?!”
움찔!
용안(龍眼)과 마주친 마수들이 흠칫 몸을 떨며 뒷걸음질 쳤다.
“으윽!”
하은은 왼쪽 눈을 찡그리며 고통에 찬 신음을 흘렸다.
콰득, 콰드득!
왼쪽 눈가에 돋아난 흉측한 힘줄이 한층 굵어졌다.
“씨이. 진짜 드럽게 아프네!”
하은은 입술을 짓씹으며 양팔을 넓게 벌렸다.
우우우웅!
왼쪽 가슴에 새겨진 성흔이 이제까지 본 적 없던 강렬한 빛으로 타올랐다.
“누나 이건….”
“헤헹. 지난 3개월간 나도 놀고만 있던 건 아니었거든?”
그녀는 씨익 웃으며 넓게 펼친 양팔을 엑스자로 교차했다.
-화르르르르륵!
바닥에서 솟아난 붉은 화룡(火龍)이 똬리를 틀 듯 그녀의 몸을 휘감았다.
“그래도 각성자 짬밥만 치면 너보다 훨씬 더 긴데.”
화염에 휘감긴 하은이 거칠게 발을 내디뎠다.
쿠웅!
화산이 폭발하듯 거대한 화염이 솟구쳐 올랐다.
내디딘 대지가 쩌적 갈라지며 그 틈으로 붉은 화염이 치솟았다.
“━언제까지 우리 오지니 등 뒤에 숨어 있을 순 없잖아?”
화르르르르륵!!!
넘실거리는 화염.
질끈 묶은 적갈색 머리칼이 찬연히 휘날렸다.
“크, 크륵.”
“카라라락!”
타오르는 듯한 강렬한 기세에 겁먹은 걸까.
아니면 주변을 휩쓸고 있는 거대한 화룡의 위용에 본능적인 위협을 느낀 걸까.
마수들이 슬금슬금 눈치를 보며 물러나는 것이 보였다.
“너.”
하은이 시선이 향한 곳은 입안에 뚝뚝 핏물이 떨어지는 살점을 머금고 있는 마수.
아까 전 오진의 어깨를 물어뜯은 마수였다.
“그거 누구 건 줄 알고 함부로 뜯어간 거냐?”
사납게 이를 드러내며.
마치 총을 겨누듯 마수를 향해 손을 뻗었다.
-따악!
맑은소리와 함께 손가락이 튕겼다.
몸을 휘감고 있던 화룡이 마수를 향해 날아갔다.
화르르르르륵!
화염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아가리가 쩍 벌어지더니 통째로 마수의 몸을 씹어 삼켰다.
“크르르르륵!”
“키샤앗!!”
경로상에 놓여있던 다른 마수들도 사납게 몸을 뒤트는 화룡에게 휩쓸려 잿더미가 되었다.
“…허.”
오진은 압도적인 화력으로 마수들을 쓸어버리는 하은의 모습을 보며 탄성을 흘렸다.
‘저게 용안의 힘인가?’
구체적으로 어떤 성능인지 잘 알 수 없었지만.
용안을 사용한 이후 그녀의 몸을 두르고 있는 화염이 마치 ‘살아 있는 것’처럼 움직이는 것이 느껴졌다.
제 의지를 가진 것처럼 사방팔방 날뛰는 불덩이라니.
눈으로 보지 않았으면 믿기 어려울 정도로 압도적인 광경이었다.
뭐, 어쨌든.
‘덕분에 한 시름 놨네.’
씨익 웃으며 하은 옆에 섰다.
“뭐 누가 들으면 누나 어깨라도 물어뜯긴 줄 알겠다?”
“내 어깨나 마찬가지지. 저건 내거니까.”
“아니 그게 왜 누나 거야.”
누구 맘대로.
“캬하핫! 원래 동생 건 다 누나거나 마찬가지란다?”
“뭔 그딴.”
“오지니 넌 내 허락 없인 밥도 먹지 말고, 물도 마시지 말고, 숨도 쉬면 안 돼.”
나치도 그 정돈 아니었어.
“━다치지도 말고 알았지?”
“손발이 찌그러질 져서 다칠 것 같아.”
“이 씹새끼가?”
“너무 감동적인 말이었습니다 누님.”
눈물이 멈추지 않아.
주륵주륵.
“지, 지, 지는 그때 막! 존나 오글거리는 말 아무렇지 않게 하더니!!”
“푸흐흐!!”
낄낄 웃음을 터트리며 그녀의 허리를 거칠게 잡아끌었다.
“어, 어어?”
퍼억!
화염을 뚫고 달려드는 마수의 머리를 걷어찼다.
끌어안은 그녀의 허리를 가볍게 두드리며 몸을 돌렸다.
“뭐 일단 노력은 해볼게.”
우리 누나가 이렇게 걱정하는데 다치면 안 되지.
“…두 분 정말 사이좋네요.”
박창현이 헛웃음을 흘리며 이쪽을 돌아봤다.
가볍게 어깨를 으쓱이고는 몰려드는 마수들을 향해 발을 박찼다.
-파자자자작!!
화염을 뚫고 튀어오르는 푸른 뇌전.
무시무시한 기세로 몰려들던 마수들이 점차 뒤로 밀려나기 시작했다.
그렇게 조금 시간이 흐르자.
“무, 무슨 마수가 이렇게 많아!”
“어 저기 저거 뇌랑 아냐?”
“와 씨. 지금 이 숫자를 상대로 저 세 명이서 버티고 있던 거야?”
“미친. 이건 루키 수준이 아니잖아?”
연락을 받고 모여든 각성자들이 참전했다.
“키에에에엑!”
“카락! 칵!”
마수들이 밀려나는 속도가 한층 더 빨라졌다.
‘좋아.’
승기는 확실히 이쪽으로 넘어왔다.
[하아, 하아, 하아!]우리 여신님도 슬슬 한계가 온 것 같고.
‘끝내볼까.’
오진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최종철 쪽으로 몸을 돌렸다.
“아, 아아.”
그는 파죽지세로 밀리고 있는 마수들을 내려다보며 덜덜 몸을 떨었다.
“왜? 왜? 왜? 왜? 왜? 왜? 왜?”
신경질적으로 뺨을 긁는다.
피부가 벗겨져 피가 흐르는 뺨을 계속해서.
멈추지 않고.
벅, 벅, 벅, 벅, 벅, 벅.
“왜 지는 거야? 응? 왜?”
손톱에 살점이 긁혀 떨어진다.
“시키는 대로 했잖아? 하라는 대로 다 했잖아?”
우득. 우드득.
기형적인 각도로 고개를 돌리며 대답 없는 의문을 쏟아낸다.
“근데, 근데, 근데.”
끼익.
망가진 목각인형처럼 돌아간 머리가 오진을 향한다.
“왜에에에에에━!!! 못 죽이는 거냐고오오오━!!!”
광대뼈가 드러날 정도로 벗겨진 살점.
최종철은 뺨의 피부를 모두 벗겨낸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지, 광대뼈 위로 손을 쑤셔 넣어 스스로의 안구를 손으로 후벼 파기 시작했다.
“오, 오지나. 저, 저, 저 새끼 저거 왜 저래?”
하은이 입을 쩍 벌리며 창백하게 질린 표정으로 물었다.
“아아━ 왜? 왜? 왜? 왜? 왜? 왜에에에에에에에!!!!”
“꺄아아아악!! 씨발 저거 진짜 눈깔 뽑는다!!”
“크르륵! 큭! 죽여! 죽여! 죽여! 죽이란 말이야아아아아!!”
으적.
최종철은 광기에 찬 괴성을 내지르며 자신이 뽑은 눈알을 입안에 넣고 짓씹었다.
“씨이이발!! 저 하후돈 씹새 저거 지 눈깔 처먹고 있어 오지나!!!”
진정해 누나.
옷 그만 잡아당기고.
“저, 저 새끼 원래 저런 또라이였어?”
“그럴 리가.”
아무래도 저 검은 성유물에 완전히 정신을 잠식당한 모양.
오진은 입술을 질끈 깨물며 발작을 일으키는 최종철을 향해 달렸다.
‘더 내버려 두면 뭔 짓을 저지를지 몰라.’
기회가 될 때 빨리 처리해야 한다.
-타닥!
발작을 일으키는 최종철에게 다가간 후.
‘폭뢰.’
10연격.
-파지지지지지직!!!
낼 수 있는 최대의 힘을 담아 창을 내질렀다.
“아, 아아.”
하지만.
-퍼석.
우우우우웅!!
“크윽!!”
최종철의 손에 쥐어져 있던 구슬이 깨지며 검은 기운이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오진의 몸이 형편없이 뒤로 튕겼다.
“━아아아아아아아아!!!”
최종철이 두 팔을 번쩍 들어 올렸다.
폭발하듯 뿜어져 나온 검은 기운이 넓게 펴졌다.
그리고.
쿠르르르르르르릉!!!
“어, 어어?”
“저, 저거 뭐야?!”
도시 중심지에서 검은 원기둥이 솟구쳐 올라 최종철에게서 흘러나온 기운과 뒤섞였다.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처럼 땅이 흔들렸다.
아니.
흔들리는 것만이 아니다.
-쿠릉! 쿠르르릉!
“무, 무너진다아아앗!!”
“피해!!”
뒤틀리고 끊어진 지각이 파도처럼 출렁인다.
수십 층의 빌딩들이 도미노 쓰러지듯이 무너져 내렸다.
“…미친.”
오진은 핼쑥한 표정으로 붕괴하는 도시를 바라보았다.
붕괴가 가장 심하게 일어나고 있는 것은 도시 중심지.
‘만약 저기에 있었다면.’
뭘 해볼 틈도 없이 무너지는 빌딩 사이에 깔려 생매장당했으리라.
‘대체 뭔데 씨발.’
무슨 수를 써야 이렇게 도시 하나를 작살 낼 수 있단 말인가.
“크륵! 크락! 히, 히히히! 그래, 그래, 그래!!”
붕괴가 계속되는 와중.
최종철의 광기 어린 웃음소리도 이어지고 있었다.
“내가, 내가, 내가 직, 접? 죽이면? 되는? 거? 지?”
우득! 우드드득!
주변에 넓게 퍼져 있던 검은 기운이 최종철을 향해 몰려들었다.
풍선 안에 한계까지 바람을 불어넣은 것처럼 그의 몸이 부풀어 올랐다.
곧.
“크륵! 카샤아아아앗!!”
뱀의 하반신과 사마귀의 팔.
여덟 갈래로 찢어진 입을 지닌 ‘마수’가 된 최종철이 소름끼치는 괴성을 내질렀다.
“…뭐야.”
오진은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최종철, 아니 ‘최종철이었던 것’을 바라보았다.
‘사람이… 마수가 됐다고?’
더없이 불길한 감각이 등골을 타고 퍼졌다.
“크윽.”
오진은 움켜쥔 창에 힘을 더했다.
‘빨리.’
본능이 경고한다. 울부짖는다.
한시라도 빨리 저 괴물을 죽여야 한다.
죽이지 않으면━
“어? 나? 왜? 왜왜? 왜 이런? 몸이? 됐? 카륵?”
죽는다.
“베가! 조금만 더 버텨줘!!”
돌아오는 대답이 없다.
“…베가?”
고개를 돌려 그녀를 돌아보았다.
[미안, 하… 구나. 나의, 아이야. 더는….]베가의 몸이 은빛 빛무리가 되어 흩어졌다.
“…….”
축복이 사라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