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55)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55화
이길 수밖에 없는 게임 (2)
성소를 나온 후.
오진은 일단 집으로 돌아왔다.
계단에서 연초를 태우고 있던 하은이 그를 발견하곤 몸을 일으켰다.
“진짜 금방 왔네?”
“금방 온다 했잖아.”
“맨날 구라만 치니 믿을 수가 있어야지.”
하은이 피식 웃으며 다가왔다.
“베가는 어떻디?”
“뭐, 누나랑 비슷했지.”
며칠 전.
3일 동안 의식을 잃고 기절해 있다가 눈을 떴을 때 펑펑 눈물을 쏟으며 자신을 끌어안았던 그녀의 모습을 떠올렸다.
“비, 비슷하긴 씨발!”
퍼억.
하은이 얼굴을 붉히며 종아리를 걷어찼다.
“끄엑.”
“새끼 엄살은. 아 맞다. 너 없는 동안 협회 사람 왔다 갔다. 한준만이라고 했던가… 고릴라 비슷하게 생긴 사람.”
그새 부장님이 왔다 간 건가.
하긴.
요즘 들어 매일 자신의 상태를 체크하러 집에 오긴 했다.
“뭐라 했어?”
“뭐라 하긴. 너 아직도 정신이 오락가락한다고 만날 수 없다 하고 돌려보냈지.”
“오키. 잘했어 누나.”
아직 제대로 의식을 회복하지 못했는 핑계로 협회와의 접촉을 피하고 있는 중이었다.
‘그 사이 할 게 좀 있었으니까.’
자신이 의식을 차렸다는 사실이 알려진다면 토벌 사건의 중심에 선 인물이었던 만큼 온갖 연락이 쇄도했을 것이다.
현재 자신이 멀쩡한 상태라는 걸 아는 건 하은과 베가 둘뿐.
‘아, 리아크 자식도 있었지.’
뭐 어쨌든.
덕분에 의식을 되찾은 후 나흘 동안 미리 해야 할 일들을 처리해 둘 수 있었다.
“점심은 뭐 먹을 거냐?”
“칼로리 바.”
“아니.”
하은이 인상을 찌푸렸다.
“푸흐흐! 농담이야. 오늘은 할 일이 좀 있어서 점심은 거르려고.”
“그래? 음… 그럼 나도 나중에 먹어야겠다.”
“굳이?”
“이 누나도 할 일이 있거덩.”
하은은 그렇게 말하며 문을 지나쳐 집 밖으로 향했다.
“어디 가게?”
“비밀.”
“우리 사이에 비밀이 어딨어.”
“네가 할 소리냐 그게?”
하은이 중지를 추켜올렸다.
“여튼 누나 나갔다 올 테니 집에 얌전히 있어라.”
“음.”
얌전히 있을 만한 상황이 아니긴 한데.
“아, 맞다. 누나.”
“엉?”
“나한테 뭔 일 생겨도 걱정하지 마.”
“…또 뭔 짓을 하려고?”
하은이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다가왔다.
“푸흐흐! 할 일이 좀 있거든. 누나 걱정할까 봐 미리 말해두는 거야.”
“할 일이 뭔데.”
“비밀.”
“이 새끼가?”
그 뒤로 하은이 끈덕지게 달라붙었지만, 내용을 얘기하진 않았다.
“하아. 뭐, 진짜 걱정할 일 아니지?”
“응.”
“그럼 믿고 간다.”
하은이 불안하다는 듯 몇 번 뒤돌아보며 멀어졌다.
‘이 정도 말했으면 누나도 눈치채겠지.’
자신에 대해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는 그녀였다.
무슨 일이 생긴다 해도 걱정할 일은 없을 것이다.
“어디 그럼… 시작하기 전에.”
지난 나흘 동안 정리해둔 것을 머릿속에 떠올렸다.
‘우선 속초 중심지에 묻혀 있던 그거.’
하은이 박살 낸 검은 아지랑이의 정체는 아직 알아내지 못했다.
뒤늦게 찾아갔을 때는 이미 흔적도 없이 사라졌었으니까.
‘서울역 밑에 숨어 있었던 마수랑 연관된 건가?’
이번에 그 살덩어리 괴물 같은 마수가 나타난 건 아니었지만.
둘 다 도시 아래 은밀히 숨어 있었다는 공통점이 있었다.
“…이건 진짜 모르겠네.”
단순히 도시 아래 묻혀 있었다 해서 둘을 연관 지을 근거도 부족했을뿐더러, 정확히 어떤 힘이 묻혀 있었는지 확인이 안 되니 섣부른 추측을 할 수 없었다.
‘일단 둘 다 검은 별의 힘과 연관이 있는 건 확실해.’
물론 흑성회에서 말하는 ‘검은 별’이라는 게 하나는 아닐 것이다.
성좌들이 여럿이듯, 흑성의 성좌도 하나가 아닐 가능성이 크다.
‘베가도 서울역 아래에서 느껴지던 기운과 목동 게이트에서 느껴졌던 기운이 차이가 있다 말했고.’
어쨌든 이건 넘기기로 하고.
“다음은….”
오진은 스킬창을 열었다.
이번 토벌 작전에서 얻은 세 가지 스킬.
익시드와 변형, 그리고 수력친화.
‘익시드는 뭐… 시험해 볼 수가 없고.’
베가의 말마따나 함부로 사용해선 안 되는 스킬이었다.
‘변형은 생각했던 딱 그대로야.’
오진은 거울을 바라보며 변형을 사용했다.
우드득, 우득!
몸이 작아졌다 크게 만들 수도 있었고 얼굴 자체를 마치 다른 사람처럼 뒤바꿀 수도 있었으며 심지어 성대를 조정해 목소리까지 바꿀 수 있었다.
“이건 진짜 미친 성능이네.”
마력 소모가 상당하긴 했지만 크게 부담이 될 정도는 아니었다.
이 능력은 잘만 사용한다면 활용방법이 무궁무진하리라.
‘나한텐 특히 더.’
호랑이에게 날개를 달아준 게 아니라 제트엔진을 달아준 꼴 아닌가.
솔직히 이번에 물병자리 성흔을 얻은 것보다 이 변형이라는 스킬을 얻은 것이 더 큰 성과가 아니었나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아주 좋아.”
만족스럽다는 듯 환하게 웃었다.
‘그리고 마지막은.’
오진의 표정이 살짝 일그러졌다.
“…이 스킬은 좀 계륵이란 말이지.”
수력친화 스킬을 떠올리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설명만 읽었을 땐 뭐 이런 개사기 스킬이 있나 싶었는데.’
실제 실험해 보니 예상과는 전혀 달랐다.
설명 그대로 물을 흡수해서 상처를 치료할 수 있는 건 사실이었지만.
“물이… 너무 많이 필요하잖아 이건.”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수력친화 스킬의 효과를 보기 위해 필요한 물의 양이 많아도 너무 많았다.
‘긁힌 상처 하나 치료하는 데도 수십 리터.’
피가 흐를 정도의 상처를 치유하는 데는 백 리터가 넘는 물이 필요했다.
‘당연히 공기 중의 수분을 흡수해서 치료한다 뭐 이딴 꼼수도 안 통하고.’
흡수할 수 있는 범위가 상당히 넓긴 하지만 그렇다고 평소 수백 리터의 물을 챙기고 다닐 순 없는 노릇.
‘이게 게임처럼 인벤토리가 있는 것도 아니고.’
효과 자체는 좋지만 그 효과를 보기 위해서 필요한 자원이 너무 많았다.
수백 리터의 물을 챙기고 다닐 바에 그냥 성능 좋은 포션 한 병을 챙기고 다니는 게 효율적이리라.
“이건 뭐 강이나 바닷가 근처에서 싸우는 게 아닌 이상 실전에서 쓰긴 어렵겠네.”
그래도 전투가 다 끝나고 난 후 빠르게 상처를 치료할 때는 쓸 만할 것 같았다.
근처 목욕탕에 가서 뜨끈하게 몸 한 번 지지고 오면 어지간한 상처는 다 회복될 테니깐.
‘그것도 뭐 외상만 치료되는 거지만.’
실험해 본 결과 과도한 마력 사용으로 인한 내상까지는 치료되지 않았다.
“쩝… 그래도 없는 것보단 낫겠지.”
포션 말고도 외상을 빠르게 치료할 수 있는 수단이 늘어난 것만으로 나쁘지 않은 성과였다.
“정리는 여기까지면 됐고.”
이제 판디누스 길드에 대한 일을 처리할 차례.
“뭐, 이건 어려울 것 없지.”
어려울 것 없는 정도가 아니라 한숨이 나올 정도로 쉽고 간단한 일이다.
“아, 아.”
목 한 번 가다듬고.
-뚜르르.
한 부장에게 전화를 걸었다.
[오, 오진 씨? 의식이 돌아오신 겁니까?!]다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예. 아직 좀 몽롱하긴 하지만… 많이 괜찮아졌습니다.”
[휴우. 다행이네요 정말.]진심으로 걱정했는지 목소리에서 깊은 안도감이 느껴졌다.
‘이건 솔직히 좀 감동이네.’
어쨌든 지금 그게 중요한 건 아니고.
“일어나서 기사를 좀 봤습니다. 지난 일주일 동안… 많은 일이 있었더라고요.”
[…판디누스 길드 얘기를 들으신 겁니까?]“예.”
[안 그래도 그것 관련해서 오진 씨에게 여쭤보고 싶은 게 많습니다. 지금 바로 협회로 와주실 수 있을까요?]“아뇨. 그것보다 먼저 부탁드릴 게 하나 있습니다.”
[부탁이요?]오진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기자회견을 준비해 주세요. 판디누스 길드와 최종철 사이에 관계를 증명할 수 있는 결정적인 증거를 가지고 있습니다.”
경악에 찬 목소리가 들려왔다.
[오진 씨. 잠깐… 그, 그 말이 진짭니까?]“예. 최종철은 별빛 호수 길드와 연관되어 있던 게 아닙니다.”
[그런….]한준만은 충격에 잠긴 목소리로 말끝을 흐렸다.
오진의 말이 사실이라면 지금 여론 전체가 뒤바뀔 정도의 큰일이었다.
[알겠습니다. 바로 준비해 드릴게요. 장소는 여의도로 괜찮습니까?]“예. 그편이 안전하고 좋겠네요.”
[…조심하십쇼 오진 씨. 이 사실이 퍼지면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릅니다.]한 부장이 딱딱하게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만큼 최종철의 뒷배가 어디였는지에 대한 건 큰 이슈였다.
“알고 있습니다. 아… 그런 의미에서 기자회견 때 경호원을 좀 붙여주실 수 있나요? 아직 제 몸 상태가 완전히 회복된 건 아니라서요.”
[경호원이라… 알겠습니다, 오진 씨. 저만 믿으세요.]한 부장이 자신에 찬 목소리로 말했다.
[경호라면 진짜 유명하신 분이 계시거든요.]알고 있다.
협회 각성자 중에 세 손가락 안에 꼽힐 정도로 유명한 사람이었으니까.
“알겠습니다. 그럼 믿고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한 시간 안에 다시 연락드릴게요.]통화를 끊었다.
“어디 그럼.”
슬슬 나도 준비 좀 해볼까.
뭐, 딱히 준비할 게 많지도 않았다.
-우우우웅!!
오진의 왼쪽 가슴에 새겨진 성흔이 빛을 뿜었다.
평소와 같은 푸른 뇌전 없이.
고요하게.
* * *
“협회 소속 특무관 최우진이라 합니다.”
“얘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기자회견장에 들어서기에 앞서.
오진은 최우진과 인사를 나눴다.
날카로운 눈매를 지닌 차가운 인상의 남자.
‘전견(畋犬) 최우진.’
한 번 맡은 사건은 끝까지 추적한다는 유명 각성자였다.
“특무관이 같은 특무관을 경호한다는 게 좀 우습긴 한데… 뭐, 사건이 사건이니 넘어가죠.”
최우진은 영 오진이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차가운 눈빛을 보냈다.
하긴.
그의 입장에서 보면 오진은 거의 낙하산이나 다름없게 특무관이 된 각성자였다.
‘좋게 보려야 볼 수 없겠지.’
상관없다.
맘에 안 든다고 해야 할 일을 소홀히 할 사람은 아니었으니까.
“이쪽으로.”
오진은 최우진의 경호를 받으며 기자회견장으로 들어섰다.
-찰칵! 찰칵! 찰칵!!!
쏟아지는 플래시 라이트.
“오진 씨! 당시 상황에 대해서 한 말씀!!”
“진짜 각성한 지 반년밖에 안 되신 게 사실입니까?!”
“이번 사건으로 인해 국민적인 영웅으로 추앙받고 계신 데 그에 대한 각오 한 마디 부탁드립니다!!”
몰아치는 질문들을 무시하며 단상에 섰다.
오진은 바글바글 모인 기자들을 쭉 훑어보며 입을 열었다.
“반갑습니다. 협회 소속 특무관 권오진이라 합니다.”
꾸벅 고개를 숙였다.
“오늘은 개인적인 질문은 받지 않겠습니다.”
“…예? 질문을 안 받으신다고요?”
기자들이 당황한 표정으로 오진을 바라봤다.
질문을 안 받을 거라면 뭐 하러 기자회견을 한단 말인가?
“제가 이 자리에 온 건 여러분들에게 반드시 알려드려야 할 사실이 있기 때문입니다.”
침착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마수로 변한 최종철과 싸웠을 때, 그에 대한 중대한 사실을 알아냈습니다.”
나지막이 말을 잇는다.
“중대한 사실이란 게 무엇입니까?!”
“최종철은… 별빛 호수 길드가 아닌 판디누스 길드의 일원입니다.”
“허업!”
“그, 그 말이 사실입니까?!”
오진의 폭탄 발언에 기자회견장이 술렁였다.
“사, 사실관계를 입증할 증거는 있으십니까?!”
증거라.
그야 당연히.
“물론 가지고 있━ 커헉! 컥! 쿨럭!”
가지고 있을 리가 있나.
“꺄아아아아아아악!!!!”
“피, 피가!!!”
“뭐, 뭐야!!! 무슨 일이야!!!”
터져 나오는 비명.
“쿨럭! 쿨럭!! 커헉!! 카학!!!”
오진의 입에서 검붉은 핏덩이가 쏟아졌다.
자리에 쓰러진 채 발작을 일으키듯 몸을 떨며 눈을 뒤집어 깠다.
“제기랄!!!”
최우진이 다급히 달려왔다.
콰르릉!!
강렬한 기세가 폭발하듯 뿜어져 나왔다.
“뭐, 뭔데 대체. 무슨 상황이야?!”
“서, 설마 죽은 건 아니겠지?”
“일단 빨리 찍어!”
기자들은 혼란에 빠진 표정으로 카메라 셔터를 눌렀다.
“오진 씨!! 괜찮습니까 오진 씨!!!”
“커헉… 쿨럭! 쿨럭!”
“제기랄! 응급팀!! 응급팀 불러!”
최우진은 사납게 외치며 쓰러진 오진을 몸을 살폈다.
바닥에 쏟아진 검붉은 핏물.
핏물을 살짝 손으로 찍어 혀에 가져다 댄 최우진의 표정이 거칠게 일그러졌다.
“…이건.”
퉤!
그는 핏물을 뱉으며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했다.
“독… 독에 당했다.”
딱딱하게 굳은 표정으로 주변 협회원들을 돌아봤다.
“입구 막아.”
그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지금부터 여기 있는 전원 용의자입니다.”
서늘한 시선이 기자들을 향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