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59)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59화
Heavy Rain (1)
[현재 일본을 거쳐 북상 중인 태풍 ‘노루’는 오늘 오후 8시경 중부 지방에 도착할 예정입니다. 기습적인 호우에 대비가 필요….]띡.
[최근 로마의 성녀라 불리는 이사벨라 콜그란데에 대한 암살시도가 수차례 발각되었다는 소식….]띡.
[협회는 정식으로 ‘뇌랑’의 퇴원 소식을 알렸으며 한동안 모든 면회 및 취재를 거절하겠다는 의사를 밝혔….]뚝.
뉴스의 채널을 돌리는 걸 멈추고 시동을 껐다.
‘발할라 길드에 대한 얘기는 없나.’
흑사자 이우혁이 당한 사건이라면 긴급 속보로 다뤄도 이상하지 않을 소식인데 어딜 둘러봐도 이우혁에 대한 얘기는 없었다.
발할라 길드 내부에서 숨기고 있는 소식이란 의미.
“…일단 가볼까.”
전에 한 번 찾아온 적 있는 발할라 길드의 건물로 들어갔다.
5성급 호텔에 들어온 것 같은 고급스러운 내부를 잠시 둘러보고 있자니 박창현이 나타났다.
“오셨군요.”
“우혁 씨 상태는 어떻습니까?”
“…….”
박창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깊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저었다.
“다행히 생명에는 지장이 없지만… 빈말로도 좋다고는 할 수 없는 상태입니다.”
“정확히 어떤.”
“그래도 의식은 차리셨습니다. 오진 씨에게 연락을 넣으라고 한 것도 길드장 님의 지시였고요.”
의식은 있다.
최악의 상황은 면했지만, 지금 상황에서 그걸 다행이라 할 수 있을까.
“자세한 건 직접 만나서 얘기하시는 게 좋을 것 같습니다.”
“예.”
박창현의 뒤를 따랐다.
삐비비비빅.
전에 가보지 못했던 구역으로 들어간 그는 아무것도 없는 벽에 카드를 가져다 댔다.
-드르르륵.
‘이런 공간이 숨겨져 있었던 건가.’
무슨 고대 던전 안에 있는 숨겨진 보물 방처럼 벽이 스르륵 옆으로 밀려났다.
벽 안에는 반짝이는 금화 대신, 빛바래져 가는 생명이 가까스로 삶의 자락을 붙들고 있는 모습이 보였다.
고가의 의료장비가 들어찬 치료실.
불빛이 새어 나오는 곳은 한 곳이 아니었다.
“…당한 게 우혁 씨 혼자가 아니었습니까?”
“예.”
박창현은 딱딱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당시 작전에 참여하지 않았던 저를 제외한 발할라 길드 전원… 흑성회에게 당했습니다.”
“…….”
오진은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복도를 걸었다.
일정 간격으로 떨어진 십수 개의 치료실에선 지난 10일간 질리도록 맡았던 병원 특유의 약물 냄새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사망자는….”
“없습니다. 아직, 까지는요.”
박창현은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마수를 막아설 땐 더없이 듬직하게 느껴졌던 그의 어깨가 초라하게 내려가 있었다.
‘발할라 길드 전원이 당하다니.’
말석이지만 한국 10대 길드에 들어가게 된 길드다.
그것도 20명 남짓한 소수의 길드원만으로.
한 명, 한 명이 다른 길드 간부급 실력자로 이뤄진 발할라 길드가 이토록 무력하게 당했다는 사실이 쉽사리 믿어지지 않았다.
‘아샤드 칸이 한 짓인가?’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에 고개를 저었다.
유진의 말에 따르면 흑성회 내에서 아샤드 칸의 직위는 그보다 한 단계 높다는 중급 정무관.
중급 정무관 혼자서 발할라 길드를 쓸어버릴 수 있었다면 흑성회가 이렇게 정체를 숨긴 채 은밀하게 활동할 리가 없다.
그 정도면 칠성(七星) 전체를 상대로도 전쟁이 가능할 텐데 뭐 하러 굳이 숨어다닐 필요가 있겠는가.
‘직접 들어보면 알겠지.’
의문을 뒤로하고 발걸음을 옮겼다.
박창현은 가장 구석진 곳에 위치한 치료실의 문을 조심스럽게 두드렸다.
-똑똑.
“형님. 오진 씨 모시고 왔습니다.”
“…들어와.”
문 너머로 들리는 힘없는 목소리.
-끼익.
문을 열자 침대에 누워 있는 이우혁의 모습이 보였다.
“…….”
퀭한 눈두덩과 홀쭉하게 들어간 뺨.
어딘가 초점을 잃은 듯 흔들리는 눈동자.
전에 그에게서 뿜어져 나오던 사자와도 같은 흉포한 기세는 없었다.
느껴지는 것은 짙은 패배감.
이빨 빠진 늙은 사자가 혹여 다른 포식자가 오지 않을까 눈치를 보며 죽은 먹잇감 주변을 배회하는 듯한 절절한 무력감이 이우혁에게서 흘러나오고 있었다.
‘뭐야 이거.’
무슨 일이 있었기에 사람이 이 정도로 바뀔 수 있단 말인가.
“…크으, 쿨럭! 추한 모습을 보여드렸군요.”
이우혁은 오진의 눈동자에 떠오른 감정을 읽었는지 힘없이 웃었다.
“무슨 일이 있으셨던 겁니까?”
“보시는… 대로, 입니다. 윽! 놈들과 싸웠고, 꼴사납게 패배했죠. 쿨럭! 쿨럭! 그것도… 단 한 명한테.”
자조 섞인 목소리.
이우혁은 핏물 섞인 기침을 토해내며 입술을 짓씹었다.
‘한 명이라고?’
오진의 입이 쩍 벌어졌다.
설마.
“…아샤드 칸이었습니까?”
“아뇨. 오진 씨가 주신 정보로 그를 찾긴 했지만… 저희와 싸운 건 그가 아니었습니다.”
역시.
아샤드 칸은 아니다.
그렇다면 대체 누가.
“천도윤.”
이우혁은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지독한 악몽을 떠올리듯 눈가가 떨렸다.
“저희와 싸운 노인의 이름… 크윽! 입니다. ‘올빼미의 왕’이라 불리더군요.”
“…….”
꾸욱.
주먹을 움켜쥐며 말을 이었다.
“압도적… 이었습니다.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일방적으로 당했죠. 솔직히 살아서 도망친 것만 해도 기적이었습니다.”
짙은 패배감에 휩싸인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올빼미의 왕.
오진은 가늘게 눈을 떴다.
그 불길한 이명(異名)을 머릿속에 새기며 유진에게 흡수한 흑성의 성흔을 떠올렸다.
‘올빼미자리의 성흔.’
스스로를 올빼미의 왕이라 칭한다면.
그의 정체가 뭔지 짐작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흑성회의 집행관.’
살쾡이를 쫓다가 호랑이를 만난 격이다.
오진은 등골을 타고 흐르는 섬뜩한 감각을 느꼈다.
‘강할 줄은 알았지만.’
설마 혼자서 발할라 길드 전원을 압도할 정도로 강했다니.
새삼 흑성회란 조직이 얼마나 아득한 힘을 지니고 있는지 알 수 있었다.
‘이거 나중에 세계를 멸망시켰다는 게 내가 아니라 흑성회 아냐?’
자연스럽게 그런 의문이 떠오를 정도.
물론. 1회차의 기억 따윈 없으니 대체 무슨 일이 일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지만.
저런 거대한 규모를 지닌 조직이 세계의 멸망에 아무런 영향도 주지 않았을 리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천마가 이끌던 조직이 흑성회라던가… 아니 그러면 내가 흑성회를 이끌게 된다는 건데.’
도무지 상상할 수 없는 미래였다.
‘추측해 보려 해도 뭔 단서가 있어야지.’
이건 그냥 새하얀 도화지에 점 몇 개 찍어놓고 뭘 그렸는지 알아맞혀 보라는 격이니 알 도리가 있나.
“하아.”
깊은 한숨을 내쉬며 상념을 끊었다.
“우선 그때의 상황을 자세하게 얘기해주실 수 있습니까?”
“예.”
이우혁이 고개를 끄덕였다.
“쿨럭! 쿨럭! 크흡! 퉷!”
핏물 섞인 가래를 종이컵에 뱉으며 입을 열었다.
“하아, 하아… 후우. 저흰 오진 씨가 주신 전화번호를 토대로 놈들을 추적했습니다. 꽤 시간이 걸렸지만… 놈들의 꼬리를 잡는 데 성공했죠.”
여기까진 박창현에게 들어 알고 있는 사실.
“놈들이 숨어 있던 곳은 판디누스 길드의 지부였습니다. 기록상으로는 창고로 쓰고 있다 되어 있는데… 흑성회 놈들의 아지트였었죠.”
판디누스 길드.
또 그 이름이다.
“거기가 흑성회의 본부였던 겁니까?”
천도윤이 그곳에 있었다면 본부였을 가능성도 있으리라.
“아뇨. 본부는 아니었습니다. 일개 지부에 불과했죠. 뭐… 지부라 해도 전에 백운산에 있었던 것보다는 훨씬 더 큰 규모였습니다만.”
어쨌든.
“거기서 더 이상 정보가 이어지지 않아 습격을 결정하게 됐습니다. 아, 물론 오진 씨한테도 연락드리려 했습니다만.”
독에 중독당해 중환자실에 쓰러져 있다는 얘길 들었겠지.
느긋하게 자신이 회복하기 기다리고 있을 여유는 없었으리라.
“계획은 나름 순조로웠습니다. 기습은 성공했고, 대부분 제압에 성공했었죠.”
“아샤드 칸도 거기 있었습니까?”
“아뇨. 그는 나중에 나타났습니다. 그만 온 건… 아니었지만요.”
거기서 천도윤을 만난 건가.
“처음엔 흑성회의 고위 간부를 잡을 수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잘됐다 생각했지만… 오만한 생각이었죠.”
천도윤은 단신으로 발할라 길드 전원을 쓸어버렸다.
압도적으로, 절대적으로.
손 한 번 제대로 써보지 못한 채.
패배했다.
“하아.”
깊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문제는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기적적으로 어찌 도망치긴 했지만, 기껏 잡은 흑성회의 꼬리를 놓치게 됐다.
“그럼 더 이상 놈들을 추적할 단서는 없는 겁니까?”
아샤드 칸도 바보가 아닌 이상 숨어 지내던 아지트가 발각됐으니 꼬리가 잡힐만한 정보들을 다 은폐했을 것이다.
기존에 얻은 정보들은 다 쓸모없어졌다 생각하는 게 옳다.
“아뇨, 그건 아닙니다.”
“…아니라고요?”
이 상황에서 무슨 단서가 남아 있단 말인가.
“처음에 놈들을 제압하는 과정에서 한 흑성회원과 얘기할 기회가 있었습니다. 그는… 흑성회에 대해 꽤나 자세한 정보를 가지고 있더군요.”
“하지만 결국 놓친 거 아닙니까?”
흑성회의 내부 정보를 지닌 조직원을 찾아냈다고는 하나, 천도윤의 등장으로 제압은 실패해버렸다.
수갑 풀린 범죄자에게 협력을 기대하긴 어렵다.
“그렇긴 합니다만. 이번 건 경우가 좀 다릅니다.”
다르다고?
“그쪽에서 먼저 협력하고 싶다 접근한 거거든요.”
“……?”
뭐 잡아서 정보를 캐낸 게 아니라 그쪽에서 먼저 접근했다고?
‘그 말은.’
오진의 눈이 날카롭게 빛났다.
이우혁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 그는 내부고발자였습니다. 무슨 이유에선지 흑성회에 몸담고 있었지만… 오히려 흑성회에 대해 깊은 증오심을 품고 있더군요.”
“…….”
흑성회와 같은 폐쇄적인 범죄 조직이라면 충분히 있을 법한 일이다.
멀쩡히 잘 돌아가는 것처럼 보이는 회사도 그 내부가 썩어 있는 일이 비일비재한데 대놓고 몸을 숨기고 활동하는 범죄 조직이야 말할 것도 없지 않겠는가.
“그럼 저를 부른 것도 그것 때문입니까?”
내부고발자가 있다는 걸 알았다면 이제 그와 은밀하게 접촉해서 흑성회의 정보를 얻어내야 할 때.
당연한 말이지만.
내부고발자와 접촉할 사람으로 발할라 길드원이 갈 순 없다.
이번 사건으로 흑성회의 경계를 한 몸에 받고 있을 테니까.
아니 무엇보다 박창현을 제외하면 지금 다 움직일 수도 없다.
“…예. 그렇습니다.”
이우혁은 살짝 놀란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품속에서 종이를 꺼내 오진에게 내밀었다.
“그 내부고발자의 연락처입니다.”
“…….”
“물론. 위험한 일을 부탁드리는 건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까득.
이우혁은 사납게 이를 갈았다.
“이대로라면 놈들에 대한 단서를 영영 놓치게 될지 모릅니다.”
흑성회는 그의 동생을 납치해 죽인 조직.
아무리 무력하게 패배했다고는 하지만.
이대로 추적을 포기할 수는 없었다.
“보상은 섭섭지 않게 해드리겠습니다.”
“흐음.”
오진은 가늘게 뜬 눈으로 고민에 잠겼다.
이우혁의 말마따나 위험천만한 일이지만.
‘그렇다고 이 기회를 놓칠 수도 없어.’
보상도 보상이지만.
흑성회에 대한 단서가 끊어지는 건 오진으로서도 원치 않는 일이었다.
‘정보가 필요해.’
새하얀 도화지 위에 찍힌 몇 개의 점.
미래라는 이름의 불투명하고 불친절한 그림.
그 그림의 점과 점을 잇는 ‘선’을 만들어내기 위해선.
흑성회를 조사할 필요가 있었다.
그들의 계획을 조사하고, 파헤치고.
바닥 끝까지 털어먹어야 할 필요가 있다.
‘나는.’
다른 누구도 아닌.
━‘회귀자’였으니까.
“알겠습니다.”
오진은 종이를 받아들였다.
“이 일, 제가 맡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