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80)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80화
로마의 성녀 (1)
다음 날.
부산에서 차를 끌고 집에 도착한 오진은 성유석이 한가득 들은 자루를 창고 방에 풀어놨다.
“와, 이렇게 보니까 진짜 많긴 하다.”
하은은 은은한 푸른빛으로 빛나는 성유석들을 바라보며 탄성을 내뱉었다.
“아 참. 이 성유석들은 내가 따로 가져갈게”
“엥? 돈으로 안 바꾸고?”
“쓸 데가 있어.”
“흐응.”
별 관심 없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뭐 어차피 여기 대부분은 네가 내기에 이겨서 딴 거니깐. 지지든 볶든 알아서 써.”
“땡큐.”
“하암. 그럼 난 숙취 좀 남아 있어서 한숨 자러 간다.”
하은이 쩍 하품을 하며 몸을 돌렸다.
달칵.
방문을 열고 들어가려다 슬쩍 이쪽을 돌아보며 음흉하게 웃었다.
“우리 오지니 누나랑 같이 잘래?”
얼씨구.
“할 일 많으니 먼저 주무십쇼.”
“헹. 고자 새끼.”
“아니.”
하은이 흥 콧방귀를 내뿜으며 문을 닫았다.
고요한 침묵이 거실에 내려앉았다.
그것도 잠시.
[으, 으으으으… 나의 아이야아….]좀비 바이러스가 퍼져 멸망한 세계에서 고기를 찾아 거리를 방황하는 좀비가 내지르는 신음과도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속이… 메스꺼우니라….]숙취에 시달리는 성좌라니.
수백 만에 달하는 각성자 중에서 이런 광경을 본 사람이 자신 말고 있을까.
“그러게 적당히 마셨어야지.”
어깨 위에 앉아 비틀거리는 베가를 손으로 감쌌다.
베가는 쓰러지듯 손바닥에 몸을 기울였다.
속이 풀리도록 그녀의 등을 슬슬 문질러줬다.
[하읏.]“음? 기분 나빴어?”
[아, 아니니라.]베가가 다급히 고개를 저었다.
[으으. 이렇게 머리가 지끈거리다니… 실로 무서운 독극물이로구나. 인간들은 어찌 그런 걸 아무렇지 않게 마실 수 있단 말이냐?]“푸흐흐! 적당히 먹으면 괜찮아.”
베가는 아예 오진의 손바닥 위에 벌러덩 드러누웠다.
[후훗. 포근하구나.]“좀 괜찮아?”
[아직 피곤하느니라.]투정을 부리듯 입술을 삐죽이더니 검지를 잡아끌어 배 위에 올렸다.
[본녀의 배를 쓰다듬을 수 있는 영광을 주겠느니라.]우리 누나 같은 말을 하는구만.
같이 지내서 옮았나?
“예이.”
지시에 따라 슬슬 배를 쓰다듬었다.
[…전생에도 본녀는 그대와 이런 시간을 보냈느냐?]문득.
베가가 물었다.
“아니. 그때는 이렇게 작아진 모습으로 같이 있지 않았어.”
옅은 미소를 지으며 자연스럽게 말을 이었다.
“주로 성소에서 만났지.”
마치 추억을 회상하듯 시선을 위로 올리며.
“지금처럼 자주 머리를 쓰다듬어줬어. 나의 아이라고는 부르지 않았지만… 마치 아이처럼 보살펴줬었지.”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거짓된 추억을 늘어놓았다.
[그럼 본녀는 그대를 뭐라 불렀느냐?]“처음부터 그냥 오진이라고 불렀어.”
담담하게 답했다.
[처음이라… 그대와의 첫 만남은 어땠느냐?]“첫 만남은….”
상상한다.
존재하지 않았던 시간을,
있지도 않은 둘만의 기억들을.
“천마의 세력과 싸우다가 피떡이 되고 성소로 도망쳤어. 그때 피를 너무 많이 흘려서 곧 죽을 것 같았는데… 베가 네가 나타나서 날 구해줬지.”
[…그랬구나.]“하하. 그걸 계기로 자주 찾아가게 됐어. 그러면서 친해졌고.”
가만히 얘기를 듣고 있던 베가가 슬쩍 시선을 피했다.
[…복잡한 기분이로구나.]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가?”
[전생의 본녀가 그대와 같이 있는 모습을 상상하니… 어째서인지 가슴이 욱신거린다.]기억에 없는 자신의 이야기들이 낯설게 느껴졌기 때문일까.
베가는 어딘가 초조한 표정으로 오진을 올려다봤다.
[그때와 지금의 본녀는… 똑같으냐?]“달라.”
[……!]휘둥그레 눈을 뜨는 그녀를 바라보며 피식 웃었다.
“지금이 더 예뻐.”
[크, 크흠! 성좌를 상대로 입에 발린 아부라니! 무, 무엄하기 그지없구나!]무엄하다 꾸짖는 것 치고는 입가가 승천하듯 올라갔다.
[…어쨌든. 전생의 본녀는 그대를 ‘나의 아이’라 부르지 않았단 말이구나.]“응.”
[후훗.]베가가 가볍게 날아올랐다.
손을 뻗어 머리를 쓱쓱 쓰다듬었다.
[흐으응~ 나의 아이의 머리칼은 참 부드럽구나. 쓰다듬는 맛이 있어.]기분이 좋은 듯 콧노래까지 흥얼거렸다.
“아 참, 베가. 혹시 ‘뇌신체’가 뭔지 알고 있어?”
히드라와 싸우던 도중.
두 다리가 ‘뇌전’으로 뒤바뀌었던 것을 떠올렸다.
그때야 워낙 급박한 상황이라 미처 신경 쓰지 못했지만, 폭발하듯 몸이 앞으로 쏘아졌던 기억만큼은 생생하게 남아 있었다.
[뇌신체(雷神體)는 스킬명 그대로 육체 자체를 뇌신의 것으로 바꾸는 능력이니라. 뇌전으로 이뤄진 육체는 물리 법칙을 초월하여 여러 기적을 행할 수 있느니라.]“어?”
뭐야?
설명만 들으면 존나 센 스킬 같은데?
[실제로 아주 강력한 스킬이니라. 마력 소모가 극심하다는 단점이 있지만 그 위력만큼은 거문고자리 성흔의 기술 중에서도 상위권이지.]“그 정도였을 줄은 몰랐는데.”
아직 단서를 얻었을 뿐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는 건 아니었지만.
베가가 저렇게 말할 정도라면 시간을 투자해서 수련해 볼 가치가 충분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지금 그대의 수준에서 익힐 수 있는 기술은 절대 아니… 지만.]베가는 짧은 헛웃음을 흘리며 말을 이었다.
[그대라면 또 모르겠구나.]“원래라면 몇 성에서 익히는 기술인데?”
[최소 9성은 돼야 익힐 수 있는 기술이니라.]“…….”
이번에는 오진조차 헛웃음이 흘러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9성이라고?’
9성 이상은 인간을 벗어났다 일컬어지는 영역.
단서에 불과하다 해도 그걸 5성에 익히게 되다니.
“자유롭게 사용할 수 있게 되기만 하면 엄청나겠네.”
[너무 조급해하지는 말 거라. 익시드만 해도 그렇지만 수준에 맞지 않는 기술은 육체를 망치게 되는 법이니.]그녀의 말마따나.
익시드만 사용해도 몸 내부가 너덜너덜해지는데 거기에 뇌신체까지 사용하면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육체가 망가질지도 몰랐다.
‘이건 좀 더 성이 높아지고 나서 본격적으로 수련하는 게 맞겠네.’
뱁새가 황새 따라가면 가랑이가 찢어지듯.
‘성’에 맞지 않은 기술을 무작정 빨리 익힌다고 해서 좋을 건 없다.
“알았어. 이건 천천히 연습해 볼게.”
[후훗. 기특한 아이로구나.]베가가 또 한 번 머리를 쓰다듬었다.
[으음.]머리를 쓰다듬던 그녀가 피곤하다는 듯 눈가를 비볐다.
[아무래도 본녀는 이만 쉬어야겠구나.]“숙취 때문에?”
[그것도 있지만. 어제 너무 오랫동안 현신해 있었느니라.]“아.”
하긴.
어제는 6시간이 넘게 현신해 있었긴 했지.
“알았어 들어가 쉬어.”
[그대도 오늘은 편히 쉬거라.]베가가 펜던트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 그럼.”
베가도 돌아갔겠다.
‘퀘스트를 해볼까.’
오진은 창고 방 안으로 들어가 자루 안에 가득 든 성유석을 향해 손을 뻗었다.
‘흑천.’
손바닥에서 흘러나온 검은 먹구름이 성유석을 뒤덮었다.
‘몇 개가 필요하려나?’
솔직히 천 개가 넘게 모았는데 이것도 부족하다고 한다면 꽤 골치 아팠다.
-우우우웅!
흑천이 성유석 안에 깃든 푸른 빛을 흡수하자 마력이 몸 안으로 흘러드는 게 느껴졌다.
각성자의 성흔을 흡수했을 때보다는 훨씬 적은 양이었지만.
‘그래도 늘어나는 게 어디야.’
최근에 뇌염을 주로 사용하다 보니 마력은 아무리 많아도 부족하게 느껴졌다.
-띠링!
[성유석을 흡수함에 따라 퀘스트, ‘별을 삼키는 하늘의 악마①’가 진행됩니다.] [현재 달성률 : 2.7%] [현재 달성률 : 8.4%]성유석을 흡수할 때마다 달성률이 쭉쭉 올라갔다.
‘와 씨, 몇 개를 잡아 처먹는 거야.’
대략 300개 정도 흡수했을 때쯤 달성률은 32%.
‘천 개를 다 써야 100%를 찍을 수 있겠네.’
제리킴과의 내기나 성유석이 두 개씩 나오는 기현상이 없었다면 얼마나 오랜 시간이 들었을지 생각하니 까마득했다.
“뭐, 어쨌든 깨기만 하면 되지.”
고대의 별자리라.
대체 어떤 능력일지 호기심이 끓어올랐다.
-우우우웅!
그렇게 500개 정도의 성유석을 흡수했을 무렵.
-띠링!
[성유석 안에 깃든 별의 힘이 충분치 않습니다!] [진행도가 올라가지 않습니다.] [현재 달성률 : 50%] [이후 진행도를 높이기 위해서는 더 높은 격의 성유석이 필요합니다.]“엥?”
달성률이 50프로가 됐을 무렵.
갑자기 진행도가 막혀 버렸다.
“더 높은 격의 성유석이 필요하다고?”
오진은 눈살을 찌푸리며 다른 배낭 속에서 축구공만한 크기의 성유석을 꺼냈다.
히드라를 잡고 나온 두 개의 성유석.
‘이걸로 100프로를 채울 수 있으려나?’
흑천을 사용해 성유석 안에 깃든 마력을 흡수했다.
-띠링!
[현재 달성률 : 61.2%] [현재 달성률 : 72.4%]“제기랄.”
절로 거친 욕설이 흘러나왔다.
‘그냥 양만 많으면 해결되는 게 아니었어.’
최소 히드라급 이상의 괴수가 떨구는 성유석이 필요했다.
‘그럼 8성급 괴수를 잡아야 하는 건가?’
히드라가 7성급 보스격이니 그에 걸맞은 성유석을 얻기 위해서는 못해도 8성급 괴수를 잡아야 한다.
아니.
아무리 8성급 괴수라 해도 엘리트나 보스급 괴수가 아니라면 히드라가 떨구는 성유석보다 낮은 품질의 성유석을 지니고 있을 가능성이 크다.
‘8성급 엘리트 이상의 괴수를 잡아야 하는 건가.’
나름 괴수 청정국이라 불리는 한국 안에 그 정도로 강력한 괴수가 등장하는 게이트는 거의 없었다.
있다 해도 특정 길드가 독점하고 있는 경우가 대부분.
“끄응.”
잠시 고민을 이어가던 오진이 딱! 손가락을 튕겼다.
‘그러고 보니 발할라 길드한테 보상을 아직 못 받았었지.’
발할라 길드를 대신해 장석호와 접촉해준 대가로 고품질의 성유석을 얻으면 되리라.
겸사겸사 그때 얻었던 정보들을 발할라 길드 쪽에 전달해서 흑성회를 압박하고.
“지금쯤이면 슬슬 다 회복했을 테고.”
아무래도 발할라 길드 쪽에 들려야 할 것 같다.
“끙차.”
오진은 남은 성유석들을 정리하고 몸을 돌렸다.
발할라 길드 쪽으로 연락하기 위해 스마트폰을 들었을 때.
-찌릿.
“아.”
흔들리는 시야.
따끔한 통증과 함께 머릿속에 무언가 흘러드는 게 느껴졌다.
‘이건.’
오진은 눈이 크게 뜨였다.
이제는 꽤 익숙해진 현상.
[각성자 이신혁의 기억 일부가 성공적으로 복구됐습니다.]이신혁의 기억이.
눈앞에 펼쳐졌다.
* * *
화르르르륵!!
-아아악!!
사, 살려줘!!!
화마(火魔)에 휩싸인 도시.
짙은 피비린내가 코를 찔렀고, 끔찍한 비명이 도시를 가득 채웠다.
오진은 고개를 두리번거리며 주변을 살폈다.
무너진 건물의 잔해는 한국에서 쉽게 볼 수 있는 양식이 아니었다.
‘여긴….’
저 멀리 불길에 휩싸인 콜로세움이 우르르 무너져 내리는 게 보였다.
‘이탈리아?’
폐허가 된 도시의 정체는 이탈리아의 수도, 로마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