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82)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82화
로마의 성녀 (3)
“…그렇게 추측하시는 이유가 있습니까?”
오진은 날카롭게 눈을 빛내며 물었다.
“최근 이탈리아에서 흑성회가 세력을 넓히고 있다는 건 들으셨나요?”
“들었습니다.”
한국에서 활동하는 ‘올빼미’들과는 다른 파벌이겠지만.
어쨌든 흑성회가 세력을 넓히고 있다는 건 사실이다.
“그 흑성회로 추정되는 세력이 이사벨라 양의 저택 근처 자주 모습을 드러낸 게 확인됐어요. 암살 미수 사건이 일어난 시기랑도 묘하게 겹치고요.”
“그런 정보는 어떻게….”
“이탈리아 쪽에 신뢰할 수 있는 정보원이 하나 있어서요. 전투 쪽은 몰라도 정보력 하나는 기가 막혀요.”
“그렇군요.”
발할라 길드의 부길드장이 호언장담을 할 정도니 믿을만한 정보이리라.
“그렇다면 흑성회가 이사벨라 양을 암살하려고 한단 말씀이시죠?”
“뭐… 아직 정확한 물증은 없지만요.”
“흐음.”
짧은 침음을 삼키며 가늘게 눈을 떴다.
‘흑성회가 이사벨라를 노린다고?’
왜, 라는 의문이 가장 먼저 떠올랐다.
“그들이 그녀를 노리는 이유가 있습니까?”
“그건 저도 잘… 아!”
고개를 젓던 김선영이 짧은 탄성을 내지르며 손뼉을 쳤다.
“그러고 보니 이사벨라 양이 지닌 성흔이 ‘마수’에 대해서 엄청난 효능을 보여준다 들었어요.”
마수에게 상극이 되는 힘을 지니고 있다는 건가.
“마수에게 상극인 힘을 지니고 있다는 게 흑성회가 기를 쓰고 그녀를 죽이려는 이유가 될지는 모르겠지만요.”
“…….”
된다.
그녀는 아직 모르는 것 같지만.
흑성회… 아니, ‘검은 별’의 존재 자체가 마수와 모종의 연관이 있다.
‘세계적인 주목을 받고 있는 슈퍼 루키가 마수에게 상극이 되는 힘을 지니고 있다면.’
그들이 이사벨라를 노릴 이유는 충분하다.
‘2년 후에 벌어질 참사를 그녀가 막을 수 있다고 한 것도 그거였구만.’
이신혁은 6월 30일에 그녀를 만났어야 한다고 후회했다.
이사벨라는 최근 흑성회로 추정되는 세력에게 암살시도를 당한 적 있다.
두 가지 사실에서 얻을 수 있는 결론은 하나.
‘1회차에선 6월 30일 날, 이사벨라가 죽는다.’
그렇다면.
‘구해야 해.’
그날 그녀가 흑성회의 암살자들에게 당하지 않도록.
자신이 가서 그녀의 죽음을 막아야만 한다.
정해진 운명의 페이지를 새롭게 써내려야 한다.
“이탈리아에 있는 흑성회도 철저하게 조사하고 싶은데… 솔직히 그럴 여유가 없어서요.”
이우혁이 한숨을 내쉬며 말했다.
“그럼 제가 이탈리아로 가서 조사해 보겠습니다.”
“…예? 오진 씨가 직접요?”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아직 확실한 물증도 없을뿐더러 이탈리아에 있는 흑성회는… 한국과 비교하면 훨씬 더 세력이 큽니다.”
알고 있다.
이탈리아 쪽에 있는 흑성회를 이끄는 건 집행관 서열 3위라고 했던가.
지금 집행관 서열 6위라는 천도윤조차 감히 대적할 생각도 못 하고 있는 상황에 그곳에 가는 건 미친 짓이다.
‘하지만.’
그녀를 구하지 못한다면.
2년 후에 이탈리아를 휩쓴 핏빛 폭풍이 자신에게까지 불어 닥치게 된다면.
-아아아아아악!!
-사, 살려 줘!!!
도시를 가득 채우고 있던 비명이 머릿속에 울려 퍼졌다.
피에 젖은 거리.
만연한 죽음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뭐, 그것까진 상관없지만.’
자신은 수많은 사람을 구하기 위해 장렬하게 희생하는 영웅도 아니요, 마왕을 무찌르기 위해 고행길에 오르는 용사도 아니다.
남을 속이고 등쳐먹는 한낱 사기꾼 나부랭이.
하지만.
적어도.
‘손에 쥔 것만큼은.’
이 한 줌의 온기만큼은.
무슨 수를 써서라도 지켜내리라.
‘그리고 이사벨라는 이용가치가 있어.’
1년 만에 6성에 도달한 슈퍼 루키.
마수에게 극상성의 힘을 지니고 있다는 각성자라면 분명 미래에 큰 도움이 될 게 분명했다.
‘이번에 내 쪽으로 끌어올 수 있다면.’
그녀에게 은(恩)을 만들어 입맛대로 조종할 수 있다면.
‘충분히 위험을 감수할만한 가치가 있어.’
오진의 입가가 비릿하게 올라갔다.
혀를 내밀어 입술을 핥았다.
‘고맙다 이신혁.’
그가 아니었다면 어디서 정확히 30일 날 그녀가 흑성회에게 습격당한다는 정보를 얻을 수 있을까.
이미 한참 전에 뒤져 나자빠진 회귀자지만.
그의 기억만큼은 자신에게 이어져 새로운 운명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그래도 만약 흑성회가 그녀를 노리고 있는 거라면… 직접 가서 확인할 필요가 있습니다.”
“으음.”
이우혁이 고민에 잠긴 표정으로 침음을 삼켰다.
미래가 창창하기 그지없는 ‘북극성의 사도’를 허망하게 잃어버릴 수도 있다는 걱정이 서린 눈빛.
“그럼 차라리 저도 같이….”
“길드장님. 이거 잊어버리신 거 아니죠?”
김선영이 이우혁의 눈앞에 흑성회의 정보가 든 USB를 흔들었다.
“지금 이탈리아를 신경 쓸 때가 아니잖아요?”
“그건 그렇지만.”
“신경 쓰지 않으셔도 됩니다. 이탈리아는 저 혼자 가겠습니다.”
오진은 단호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우혁이 끼어들면 오히려 귀찮아져.’
그에게 30일 날 이사벨라가 습격당할 거라는 걸 무슨 수로 설명한단 말인가.
적당한 말로 속여 넘길 수는 있겠지만, 의혹을 피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아, 그럼 이걸 가져가세요, 오진 씨.”
김선영이 포효하는 사자가 새겨진 카드를 하나 내밀었다.
그 뒤에는 연락처와 함께 처음 보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파올로 란초니. 아까 말씀드린 정보원의 연락처에요. 찾아가셔서 카드를 보여주면 협력해 줄 겁니다.”
“감사합니다.”
이탈리아에 대해 빠삭하게 알고 있는 정보원이 있다면 한결 작전이 수월해질 것이다.
“그리고… 오진 씨 혹시 이탈리아어 하실 줄 아시나요?”
“아뇨.”
솔직하게 말하면 영어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다.
그 똥통 같은 보육원에서 뭐 배운 게 있어야지.
“그럼 이게 도움이 되실 거예요.”
김선영이 방 한쪽으로 가더니 드륵 서랍을 열었다.
그녀가 꺼낸 건 귀에 착용하는 보청기처럼 생긴 장치.
오진도 익히 알고 있는 물건이었다.
“통역 장치인가요?”
성유석으로 만들어낸 기적 같은 장치 중 하나.
비교적 값싼 성유석으로도 만들 수 있는 덕분에 각성자가 아닌 일반 대중에게도 꽤 많이 보급된 물건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절대 싼 값은 아니다.
못해도 수천만 원은 된다.
“최고급 통역 장치에요. 듣고 말하는 건 이거 하나만 있으면 문제없을 거예요.”
“…이거 너무 많이 받는 것 같은데요.”
정보원에 이어 최고급 통역 장치까지.
퍼줘도 너무 퍼줘서 되려 불안해질 정도였다.
“후후. 위험한 임무를 하시려는데 이 정도 지원은 당연하죠. 대신 이탈리아에서 정보를 얻으시면 저희에게도 공유해주세요.”
“물론입니다.”
발할라 길드는 자신의 손으로 직접 만들어낸 사냥개.
사냥개에게 물어뜯을 먹잇감에 대한 정보를 알려주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럼 저는 준비해서 바로 출발하겠습니다.”
“그렇게 급하게 가실 필요가 있나요?”
“늦는 것보단 빠른 게 좋은 법이죠.”
그들은 모르겠지만.
‘시간이 많지 않아.’
30일까지 일주일도 채 남지 않았다.
“도착해서 연락 한 번 드리겠습니다.”
오진은 발할라 길드를 빠져나와 집으로 향했다.
* * *
“엥? 이탈리아? 갑자기 웬 이탈리아?”
아이스크림을 퍼먹고 있던 하은이 동그랗게 눈을 떴다.
“발할라 길드 쪽에서 의뢰가 하나 들어와서. 일주일 정도 가게 됐어.”
“흐응. 이탈리아라.”
하은의 입가가 환하게 올라갔다.
“가면 그 뭐냐… 콜로세움? 그런 거 구경할 수 있는 거냐?”
초롱초롱 눈망울이 빛났다.
“캬하핫! 그 개똥통 보육원에 있을 때까지만 해도 살면서 우리가 같이 해외를 가볼 일이 있을 줄은 꿈에도 몰랐는데 말이야!”
무슨 해외여행이라도 즐기러 가는 듯한 말투.
아이스크림을 한 숟갈 푼 그녀가 오진을 향해 쓰윽 내밀었다.
“자, 입 벌려 아이스크림 들어간다!”
텐션이 상당히 높다.
근데 이 누나 뭔가 좀 착각하고 있는 거 같은데.
“같이, 가 아니라 나 혼자 가는 거야.”
“앙?”
단숨에 하은의 표정이 일그러졌다.
“무슨 의뢰인데 혼자가?! 당연히 나도 같이 가야지!”
역시.
같이 이탈리아로 가자는 뜻으로 받아들였던 것 같구만.
“잠입 임무라 나 혼자 가야 해.”
“나, 나도 할 수 있어! 잠입!”
“누나 기척 감추는 거 잘 못 하잖아.”
“그, 그건.”
하은의 시선이 허공을 방황했다.
사실, 잠입이 꼭 필요한 일은 아니다.
잠입은 어디까지나 기척을 잘 감추지 못하는 그녀를 두고 가기 위한 핑계.
그녀를 데려가지 않으려는 이유는 따로 있었다.
‘너무 위험해.’
이사벨라를 습격하는 일에 얼마나 많은 흑성회의 각성자들이 투입되는지 알 수 없는 이상.
그녀를 데려가는 건 위험했다.
‘나야 흑막이 있으니까 상대가 안 되겠다 싶으면 그냥 튀면 되지만.’
그녀는 그것도 아니지 않은가.
“그래서… 누나를 두고 혼자 가시겠다?”
“미안.”
“흥!”
하은이 잔뜩 삐친 표정으로 고개를 홱 돌렸다.
와구와구.
오진에게 내밀었던 아이스크림을 빼앗듯 입에 넣었다.
빵빵하게 볼을 부풀리며 투정하듯 발끝으로 정강이를 툭툭 쳤다.
“푸흐흐! 대신 나중에 일 말고 진짜 여행으로 가자.”
“…약속이다?”
“엉.”
스스로도 기척을 감추는데 영 재능이 없다는 걸 알고 있는지 굳이 떼를 쓰면서 따라오려 하진 않았다.
“그래서 언제 가게?”
“오늘.”
“엥? 바로 간다고? 비행기는?”
“비행기를 뭐 하러 이용해. ‘성소’를 통해서 가면 되는데.”
“아, 맞다.”
하은이 깜빡 잊고 있었다는 듯 손뼉을 쳤다.
성좌들이 기거하고 있는 세계, ‘성소’는 세계 각지에 그 입구가 뚫려 있었다.
성소를 통해 가면 마치 포탈을 이용한 것처럼 편하고 빠르게 해외로 이동할 수 있었다.
‘이탈리아로 통하는 입구가 어딘지는 모르지만.’
그건 베가가 있으니 가서 물어보면 된다.
“끄응. 그럼 일주일이나 못 돌아온다는 거지?”
“흐흐. 왜? 나 없으면 외로워?”
“얼씨구? 이게 또 누나한테 기어오르네?”
하은이 중지를 척 추켜올리며 사납게 눈을 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고개를 슬쩍 돌리며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뭐… 될 수 있으면 자주 전화해라.”
이거 출장 떠나는 남편이 된 기분이구만.
“푸흐흐! 알았어 누나.”
“쪼개지 말고.”
“푸헤헤헿!”
“이 새끼가?”
그렇게 하은과 가벼운 잡담을 나눈 후 바로 짐을 챙겨 집 밖으로 나왔다.
성소로 들어간 후 이탈리아로 통하는 입구를 찾아 이동했다.
다행히 로마 바로 근처에 있는 게이트가 하나 있었기에 로마와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도착할 수 있었다.
━그렇게 로마에 도착하기 걸린 시간은 고작 한 시간.
비행기로 10시간 이상 떨어진 나라라는 사실이 무색해질 정도로 빠른 시간이었다.
“이거 차 타고 부산 가는 게 더 오래 걸리겠네.”
오진은 피식 웃으며 김선영에게 받은 통역 장치를 귀에 꽂았다.
외계어나 다름없이 들리던 이탈리아어가 생생한 한국어로 번역되어 들려왔다.
“아아. 내 말도 잘 번역되나?”
대화를 나눌 상대가 없어 그것까진 아직 확인하지 못했다.
“일단 파올로부터 찾아갈까.”
이곳에 도착하자마자 파올로 란초니와는 이미 연락을 마쳤다.
발할라 길드의 소개를 받고 왔다는 말에 그는 자신의 위치가 찍힌 링크를 보내왔다.
‘레비비아라는 역 근처에 있다고 했지.’
일단 지도에 찍힌 곳으로 무작정 걸었다.
“여긴….”
그렇게 도착한 곳은 낡은 아파트들이 줄지어 들어선 거대한 집시촌.
‘이런 곳에 사는 건가?’
고개를 갸웃거리며 집시촌 안으로 들어갔다.
“씨벌. 대체 어디에 처박혀 있는 거야.”
집시촌 자체가 미로처럼 복잡한 데다가 처음 와보는 곳이다 보니 길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그렇게 집시촌 내부를 뱅뱅 돌아다니고 있던 도중.
“혹시 길을 잃으셨나요?”
모자를 푹 눌러 쓴 여인이 자신에게 다가왔다.
바다를 연상시키는 푸른 눈동자에 보는 것만으로 마음이 녹아내릴 것처럼 상냥한 미소를 지닌 여인.
모자 사이로 보이는 백금발의 머리칼이 더없이 아름답게 빛났다.
“당신은….”
사진으로만 봤지만.
틀림없다.
“허.”
오진은 황당하다는 표정으로 입을 쩍 벌렸다.
‘아니 씨발 이게 말이 돼?’
우연에도 정도가 있지 않은가.
공교롭다기보다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오진은 끝까지 말을 잇지 못했다.
“어, 어머? 혹시 절 알고 계시는 건가요?”
그녀는 살짝 당황한 표정으로 발그레 뺨을 붉혔다.
“동양분이시라 모르실 거라 생각했는데….”
눌러쓴 모자를 벗으며 손을 내밀었다.
어깨까지 흘러내린 황금빛 머리칼이 찬란히 빛났다.
“반가워요. 전 이사벨라 콜그란데라 해요.”
방긋.
로마의 성녀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