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88)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88화
로마의 성녀 (9)
“꿇어.”
낮게 울려 퍼지는 목소리.
로베르토라 불린 노인이 다급히 바닥에 엎드리는 게 보였다.
‘씨벌. 뭐야 이게.’
실눈을 뜨고 이사벨라의 모습을 살피던 오진은 마음속으로 쩍 입을 벌렸다.
‘마르코인가 뭔가 저 새끼 고위 각성자 아니었어?’
티비에서 봤을 때 분명 9성 각성자라 들었는데.
뭔 처음 게이트에 발을 디딘 1성 각성자마냥 허망하게 죽어버리고 말았다.
‘이게 집행관 서열 3위라고?’
발할라 길드가 천도윤 한 명에게 전멸했을 때부터 그들의 터무니없는 힘을 짐작하긴 했지만.
이건 정도를 넘는 강함이었다.
‘미친.’
아찔한 전율이 등골을 타고 흘렀다.
꿀꺽.
마른침을 삼켰다.
‘들키면 안 돼.’
지금 당장은 자신을 죽일 생각은 없어 보이지만, 지금 기절한 게 아니라는 사실이 들통난다면 언제 그 생각이 바뀔지 몰랐다.
‘호흡은 점차 희미하게.’
눈을 감고, 몸에 힘을 빼 축 늘어트렸다.
당장이라도 생사를 헤매는 중상자를 연기하며 이사벨라와 로베르토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죽여주십쇼, 여왕님!!”
“어머? 정말요?”
“커헉! 크르륵!”
이런 미친.
‘존나 무섭잖아.’
망설임 없이 부하의 목덜미를 손가락을 후벼 파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르코 패밀리의 조직원들이 울부짖었던 ‘마녀’라는 호칭이 딱 들어맞는 모습이었다.
‘그럼… 이사벨라가 2년 후에 이탈리아를 멸망시키는 주범이었다는 거야?’
머릿속이 뒤죽박죽 뒤엉키는 듯한 감각.
‘하지만 이신혁은 위성교가 이탈리아를 점령했다고 했잖아.’
그럼 지금의 ‘흑성회’가 2년 후에 ‘위성교’로 바뀌게 된다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지금 시점에서 위성교라는 조직에 대해서 아무도 정보를 모르는 게 납득이 가긴 하지만━
‘제기랄.’
뭔가 어긋난 퍼즐 조각을 억지로 끼워 맞춘 듯한 이질감.
앞뒤가 깔끔하게 맞아떨어지지 않은 불쾌감이 마음 한편을 콕콕 찔렀다.
‘이건 일단 나중에 생각하고.’
지금은 그녀의 대화에 집중해야 한다.
“사실 이번엔 꽤 위험했거든요.”
위험했다, 라.
‘거머리자리의 성흔은 밤이 되면 몇 배는 강해진다고 했던가.’
바꿔 말하면.
낮에 마르코 패밀리의 손을 피해 필사적으로 도망쳤던 건 연기가 아닌 진짜였다는 뜻이다.
‘그럼 내가 나서지 않았다면.’
이신혁이 회귀하지 않은 세계.
1회차에서 그녀는 어떤 삶을 보내게 됐을까.
“…….”
마르코 패밀리에게 붙잡힌 그녀가 어떤 짓을 당했을지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후훗. 그런 의미에서 오진 씨는 제 은인이라고 할 수 있겠네요.”
은인이라.
진짜 그렇게 생각한다면.
‘적어도 여기서 뒤질 일은 없을 것 같네.’
안도의 한숨이 흘러나왔다.
‘앞으로 이사벨라와 연관되는 건 피해야 해.’
그녀가 2년 후 대학살극의 주범이건 아니건.
이사벨라의 터무니없는 힘을 직접 본 이상 그녀와 더 연관되는 건 되도록 피하고 싶었다.
‘뭐, 그래도 이번 일이 끝나면 볼 일 없겠지.’
자신은 한국인이고 그녀는 이탈리아인이 아니던가.
이번처럼 직접 만나기 위해 오는 게 아닌 이상 당분간 그녀와 마주칠 일은 없었다.
‘그래.’
이번 일만 끝난다면 이사벨라와의 연은 자연스럽게 끊어질━
“하아아! 이 달콤한 냄새…! 역시 최고야!”
어?
“하앙! 하읏… 으읏!!!”
뭔데 씨발.
‘이거… 아니지? 그치?’
설마 저 정신이 살짝, 아니 많이 돌아간 여자에게 찍혀 버린 거 아니지?
‘에이~ 그럴 리가 없지.’
아무리 정신이 나갔다 해도 피 맛이 좋다는 단순한 이유로 졸졸졸 쫓아다닐 리가 없지 않은가.
그래.
이건 그냥 단순한 해프닝.
스쳐 가듯 지나갈 사고에 불과했다.
‘애초에 이사벨라는 흑성회의 집행관이잖아?’
뭐 그쪽 조직이 어떻게 굴러가는지는 몰라도.
조직원만 수천 명이 되는 대조직을 이끌면서 한가하게 남의 뒤꽁무니를 쫓아다닐 여유는 없을 것이다.
‘고럼, 고럼!’
걱정 마십쇼, 여러분!
저는 전~~~혀 X되지 않았습니다!
“절대━ 놓지 않을 거야.”
어쩌지.
X됐는데.
* * *
“아, 으.”
낮은 신음을 흘리며 눈을 떴다.
이제 막 의식을 차린 사람처럼 몽롱한 눈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 오진 씨!!!!”
와락!
이사벨라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안겨왔다.
“며칠째 깨어나지 않으셔서 얼마나 걱정한 줄 아세요?!”
그러게.
나도 며칠째 네가 옆에 계속 달라붙어 있어서 얼마나 똥줄 탔는지 아니?
“괜찮으신 거죠…?”
이사벨라는 걱정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자신을 올려다봤다.
그녀의 정체를 모르고 있었다면 꽤나 감동 받았을지도 모르지만.
‘씨벌.’
정체를 알아버린 이상 그저 소름 끼치게 느껴질 뿐이었다.
‘다 알고 봐도 연긴 줄 잘 모르겠네.’
눈물을 글썽이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언뜻 사랑스럽게까지 느껴졌다.
확실히 혀를 내두를 정도의 연기력.
‘하지만.’
다른 건 몰라도 연기력이라면 자신도 뒤지지 않는다.
“여긴… 어딥니까?”
“콜그란데 가문이 운영하는 병원이에요.”
“암살자들은 어떻게 된 겁니까?”
오진은 전혀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듯 이마를 찌푸리며 물었다.
“오진 씨가 기절하시고 난 후에 저희 가문 쪽 사람들이 지원을 왔어요. 암살자들은 지원이 오는 걸 보자마자 바로 도망쳤고요.”
“…그랬군요.”
그렇지 않다는 걸 알고 있지만.
안도한 표정으로 그녀를 바라봤다.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오진 씨 덕분이에요.”
“아뇨. 전….”
꾸욱.
입술을 짓씹으며 어깨를 떨었다.
“결국… 이사벨라 양을 지켜드리지 못했습니다.”
“아니에요! 오진 씨가 없었다면 전….”
“아뇨. 전 한심하게 기절해버리고 말았습니다. 이사벨라 양을 구한 건 제가 아니라 콜그란데 가문입니다.”
“…….”
그러니까.
“앞으로 이사벨라 양을 뵐 면목이 없네요.”
힘없이 어깨를 떨구며 그녀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좋아.’
지금이라도 늦지 않았어!
한시라도 빨리 손절하고 튀는 거야!!
“그게━ 무슨 의미죠?”
순간.
이사벨라의 목소리가 차갑게 식었다.
섬뜩한 기운이 방안을 가득 채웠다.
‘어?’
씨발?
“분명 오진 씨가 말씀하셨죠? 앞으로도 쭉 옆에 있어 달라고.”
“그게.”
“그렇게… 말씀하셨죠? 그쵸? 앞으로 이탈리아에서 쭉 저랑 같이 있으실 거죠?”
하하하.
인생 씨이발.
이게 이렇게 스노우볼이 굴러가네?
“그랬죠. 하지만 전 결국 이사벨라 양을 지키지 못했습니다. 제 옆에 이사벨라 양을 둘 자격 같은 건… 제게 없습니다.”
살려줘.
“그런 말씀 하지 마세요! 오진 씨는… 제 여, 영웅인걸요!!”
그래서 그렇게 침을 뚝뚝 흘리며 쳐다보신 건가요?
“…그렇게 말씀해주시니 마음이 좀 편해지네요.”
오진은 옅은 미소를 지으며 살며시 그녀의 손을 잡았다.
“하지만 이사벨라 양이 괜찮다고 해도 제가 괜찮지 않습니다.”
“오진 씨….”
“조금만… 조금만 제게 시간을 주실 수 없습니까?”
희미하게 떨리는 목소리.
간절함이 서린 눈빛으로 그녀를 응시했다.
“우선 한국으로 돌아간 후 저 자신이 이사벨라 양의 옆에 서 있기 충분하다 생각이 들 때, 꼭 이탈리아로 돌아오겠습니다. 약속드립니다.”
응.
다신 안 돌아올 거야.
“…….”
이사벨라는 가늘게 뜬 눈으로 지그시 오진을 바라봤다.
꿀꺽.
팽팽한 긴장감이 흘렀다.
그리고,
“약속… 이에요?”
이사벨라가 새끼손가락을 내밀었다.
‘그렇지!’
일단 어찌 감금 사육 엔딩만큼은 피했다.
“예. 그때는 이사벨라 양과 함께 로마 시내를 구경하러 돌아다녀 보고 싶네요.”
“후후. 맡겨주세요! 로마에는 볼거리가 가득하다고요!”
들판에 핀 꽃처럼 환하게 웃으며 새끼손가락을 걸었다.
“한국 가셔도 자주 연락 주시고요!”
“물론이죠.”
바로 차단.
아니, 근데 그러면 나중에 한국까지 쫓아오려나.
진퇴양난이네 씨벌.
“그러고 보니 배고프시죠, 오진 씨?”
이사벨라가 눈을 반짝이며 말을 이었다.
“제가 맛있는 요리를 만들어 드릴게요!”
그 요리 재료가 전 아니죠?
“잠깐만 기다려 주세요!”
후다닥.
이사벨라가 병실 밖으로 나갔다.
“…하아.”
간신히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게 된 오진은 깊은 한숨을 토했다.
침대에 벌러덩 드러누운 채 그녀에 대한 생각을 머릿속에서 정리했다.
‘일단 지금 당장 죽일 생각은 없어.’
먹잇감이니 뭐니 해도.
그냥 잡아먹을 생각이었다면 엘릭서까지 사용해서 자신의 상처를 회복시킬 이유는 없었다.
‘반응을 보면 내 피가 환장하게 맛있는 거 같긴 한데.’
만약 순수하게 ‘피’만이 목적이었다면 어디 중세 고문 기구 같은 것에 묶어둔 채 피만 쭉쭉 뽑아낼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심지어 한국으로 돌아가겠다는 것도 석연치 않아 했지만 받아들였다.
“…대체 무슨 생각이지?”
그녀가 진정 원하는 게 뭔지 쉽게 짐작이 가지 않았다.
‘어쨌든, 앞으로 이사벨라랑 연관되는 건 피해야 해.’
자신을 최상품 먹잇감이라 부르는 여자다.
연관돼서 좋을 리가 없다.
‘뭐, 결국 언젠간 만나야겠지만.’
그녀는 2년 후에 이탈리아에서 벌어질 대학살극의 주범이다.
가만히 놔둘 수는 없었다.
물론.
‘그것도 나중 얘기지.’
지금 자신과 그녀의 격차는 날벌레와 두꺼비 사이나 마찬가지.
재빠르게 날아서 멀찍이 도망가지 않은 이상, 살아남을 방법은 없다.
‘그나마 다행인 건 내가 정체를 알고 있다는 걸 모르고 있다는 것 정도려나.’
자신은 알고.
그녀는 모른다.
이건 앞으로 그녀와의 관계에서 유리한 고점을 차지할 수 있는 유의미한 격차가 될 것이다.
“하아….”
다시 한번 깊은 한숨을 토해냈다.
‘누나.’
보고 싶어요, 씨발.
그렇게 하은의 얼굴을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20분 정도 시간을 보내고 있자,
“식사하세요, 오진 씨~”
이사벨라가 쟁반을 들고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쟁반 위에는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파스타가 올려져 있었다.
“감사히 먹겠습니다.”
“아앗! 제가 먹여 드릴게요!”
이사벨라는 오진에게서 포크를 빼앗고는 토마토 파스타를 돌돌 말아 내밀었다.
“자, 앙~ 하세요, 오진 씨!”
환하게 웃는 그녀의 모습을 보면 전에 그 피에 굶주린 마녀와 진짜 동일인이 맞나 의구심이 들었다.
‘…이거 연기 맞지?’
그녀의 본성을 알고 있음에도.
들꽃 같은 미소와 함께 포크를 내밀고 있는 그녀의 모습은 마치 사랑에 빠진 소녀처럼 보였다.
‘처음부터 몰랐으면 모를까 이런 건 원래 연기란 걸 알고 보면 보이는 법인데.’
그녀의 연기력이 아무리 뛰어나다 해도.
애초에 지금 그녀의 모습이 꾸며낸 모습이라는 사실을 알고 있는 입장에서 보면 보이게 되는 법인데.
“헤헷. 맛있으신가요? 오랜만에 만든 거라 잘 됐을지 모르겠네요.”
어째서인지.
지금 수줍게 미소 짓는 그녀의 모습은 연기라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정신 차려 새끼야.’
수백의 각성자를 일격에 쓸어버리며 피를 핥아 마시는 모습을 보지 않았던가.
지금 보이는 모습은 어디까지나 정교하게 만들어진 가면에 불과했다.
그녀의 본성은 피에 미친 마녀.
흑성회 서열 3위 집행관 거머리 여왕이었다.
“맛있습니다.”
“정말요? 하아… 다행이다. 한국인이셔서 입맛이 다르면 어쩌지 걱정했거든요.”
이사벨라는 깊은 안도에 찬 표정으로 가슴을 쓸어내렸다.
출렁.
파괴적인 중량감을 지닌 무언가가 존재감을 과시했다.
“…….”
하은이 하나.
하은이 둘.
하은이 셋.
좋아, 진정했어.
“잘 먹었습니다.”
“아직 더 있어요! 많이 많이 드세요!”
벌써 세 그릇을 비웠는데 대체 어디서 나온 건지 새로운 파스타가 담긴 접시가 계속 등장했다.
“자, 아~ 앙!”
뭐지.
먹잇감이 먹기 좋게 살찌우는 건가.
“우물우물.”
그렇게 기어코 다섯 그릇을 채우고 난 후.
오진은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럼 전 이만 가보겠습니다.”
“하지만 아직 몸이….”
“보시다시피 멀쩡합니다.”
엘릭서를 먹었는데 멀쩡하지 않을 리가 없지.
‘근데 막상 생각하니 존나 아깝네 엘릭서.’
그때 자신이 입은 상처 정도야 강에 한 번 들어갔다 나오면 다 낫는 상처였다.
엘릭서를 자신이 아닌 하은이 마셨더라면.
‘…다리도 다 재생됐을 텐데.’
못내 아쉬웠지만.
‘뭐, 언젠간 내가 직접 만들어주면 되지.’
그러기 위해서 손에 넣은 물병자리의 성흔 아닌가.
“성소까지 바래다 드릴게요.”
“그러실 필요까진.”
“바래다, 드릴게요.”
“넵.”
영광입니다, 여왕님.
* * *
“…언제 다시 돌아오시나요?”
성소 앞에선 강우를 바라보며 이사벨라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이사벨라 양의 옆에 설 정도로 강해지면 돌아오겠습니다.”
최대한 책잡힐 일 없도록 두루뭉술하게 답했다.
“…빨리 돌아오셔야 해요?”
이사벨라가 눈물을 글썽거리며 말했다.
그녀의 정체를 모를 때라면 주인을 떠나보내는 강아지를 본 것 같은 기분이 들었겠지만.
‘강아지가 아니라 피에 굶주린 야수지.’
오진은 꿀꺽 마른침을 삼키며 몸을 돌렸다.
━그때.
“오진 씨.”
탁.
이사벨라가 어깨를 붙잡았다.
“……!”
씨발?
‘뭐 실수한 거라도 있나?’
움찔 어깨를 떨며 똥줄 타는 심정으로 고개를 돌리니,
-쪽.
이사벨라가 까치발을 들어 뺨에 입을 맞췄다.
“헤헤. 그, 그럼 나중에 연락할게요!”
그녀는 손을 붕붕 흔들며 저 멀리 도망쳤다.
“…….”
부드러운 감촉이 잔향처럼 뺨에 남았다.
“이거 진짜… 연기 맞지?”
오진은 당최 알 수 없다는 듯 눈살을 좁히며 성소 안으로 발걸음을 옮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