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90)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90화
고대의 별자리 (1)
‘뭐야.’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머리가 지끈지끈 아프다.
‘왜… 누나가 거기 있는 거야?’
1회차 때 하은은 이신혁과 함께 다녔단 말인가.
그것도 친근하게 ‘누나’라 불릴 정도로 가까운 사이가 되어.
의문은 해결되지 않은 채, 기억은 이어진다.
-키에에에에엑!
-제길! 이 짜식들이 끈질기게!
하은은 배를 뒤쫓아 달려드는 흡혈귀들을 바라보며 왼쪽 눈가를 가리고 있는 안대를 풀었다.
달칵.
안대를 풀자 아름다운 외모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은 흉측한 파충류의 눈동자가 나타났다.
-으윽.
하은은 고통스럽다는 듯 신음을 흘리며 양팔을 앞으로 뻗었다.
화르르르륵!
강렬한 화염 폭풍이 배를 향해 달려드는 흡혈귀들을 휩쓸었다.
-키에에에에에엑!!
타오르는 불길.
흡혈귀들은 괴성을 지르며 바닷속으로 뛰어들었지만, 몸에 달라붙은 화염은 기름을 머금기라도 한 듯 물속에서도 강렬하게 타올랐다.
-하아, 하아!
하은은 고개를 끄덕이며 간판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신혁은 바닥에 떨어진 안대를 주워 그녀에게 내밀었다.
-자, 여기.
-땡큐.
-눈… 괜찮아? 오늘 꽤 많이 썼잖아.
-엉. 뭐 좀 아프긴 한데 그럭저럭 버틸 만해.
하은은 안대를 다시 착용했다.
-그래도 신혁이 네가 비싼 돈 들여 사준 눈인데 그 값은 해야지.
이신혁을 돌아보며 왼쪽 눈가를 더듬었다.
-…그런 생각으로 용마안 사준 거 아니야.
-엉? 그럼 왜 사준 거냐?
-그, 그건.
무언가 말하려던 이신혁이 뺨을 붉히며 말끝을 흐렸다.
-아냐. 아무것도.
-새끼, 싱겁기는.
하은이 픽 웃으며 이신혁의 이마에 가볍게 손가락을 튕겼다.
딱!
꽤나 묵직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아악! 뭐, 뭐야 누나?
-네가 그런 생각으로 사준 게 아니라도 언젠가 이 빚은 꼭 갚을 거야.
-…….
-뭐, 지금 당장은 힘들지만.
하은은 씁쓸한 눈으로 바다를 응시했다.
-지금은… 챙겨줘야 할 녀석이 있으니까.
처량하고, 처절하게.
입술을 짓씹은 채 드넓은 바다를 황망히 바라본다.
바닷바람을 타고 아련히 흩어지는 목소리를 끝으로.
-띠링!
[유실된 모든 기억들이 성공적으로 복구됐습니다.]이신혁의 기억이 끊어졌다.
“…….”
오진은 우두커니 선 채 멍한 눈빛으로 허공을 응시했다.
‘이신혁이… 누나한테 용마안을 사줬다고?’
그렇다면.
난?
그때 자신은 뭘 하고 있었단 말인가.
“뭐가… 대체 어떻게 된 거야.”
1회차 때.
자신과 하은에게는 대체 무슨 일이 일어났단 말인가.
그녀가 말한 ‘챙겨줘야 할 녀석’이란 건 자신을 가리키는 말일까.
하은이 살아 있었다면.
자신은 왜━ 세계를 멸망시켜 버린 걸까?
“…제기랄.”
생각을 이어가던 오진은 짧은 욕지기와 함께 고개를 저었다.
‘정보가 너무 적어.’
단편적인 기억들만으로는 추론할 수 없었다.
“일단은… 개화 단계를 더 높일 수밖에 없나.”
이건 모른다고 해서 다른 누구에게 물어볼 수 있는 것도 아니다.
1회차 세계에 대한 기억을 지니고 있는 건 이신혁 한 명뿐이었으니까.
“쯧.”
혀를 차며 상념을 털어낸다.
얼룩이 지듯 머릿속에 남은 기억들.
이신혁과 함께 있는 하은의 모습을 떠올리자 속이 뒤집히는 듯한 불쾌함이 끓어올랐다.
-누나!
하은을 향해 환하게 미소를 짓는 그의 모습.
‘지랄하지 마.’
그녀를 친근하게 ‘누나’라 부를 수 있는 건.
자신뿐이다.
자신만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자신의━
“…….”
오진은 굳게 입술을 닫은 채 발걸음을 옮겼다.
얼룩진 불쾌감이 끈적한 액체처럼 달라붙었다.
-달칵.
현관문을 열었다.
“권오진 이 새끼! 왤케 연락을 안 해?! 자주 전화하라 했잖아!”
문이 열리자마자 다급한 발소리와 함께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다녀왔어, 누나.”
마중 나온 하은을 거칠게 끌어안았다.
‘아아.’
품속에 느껴지는 따스한 온기.
새끼 새를 손바닥으로 감싼 듯한 포근함.
‘그래.’
1회차 세계에 무슨 일이 있었건, 지금 느껴지는 이 온기만은 변치 않았다.
“어, 어어?”
당황한 표정으로 뺨을 붉히는 그녀의 왼쪽 눈가를 쓰다듬었다.
“뭐, 뭔데? 흐, 흐응~! 그, 그렇게 이 누님이 보고 싶었냐?”
하은이 콧대를 세우며 장난스럽게 물었다.
“응.”
끌어안은 팔에 힘을 더했다.
“보고 싶어 미치는 줄 알았어.”
“…어, 어?”
끈적하게 달라붙던 불쾌감이 씻은 듯 사라졌다.
씻겨 흘러간 감정의 빈자리를 행복이 채웠다.
“아, 으. 그, 그게. 그러니까.”
하은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으로 몸을 떨었다.
오진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지어졌다.
지금 세계에서 그녀의 이런 사랑스러운 모습을 볼 수 있는 건.
자신뿐이다.
“웨, 웬일이래. 뭐 잘못 먹었냐? 이탈리아 음식이 입에 안 맞디?”
하은은 평소와 다른 오진의 모습에 걱정과 흥분이 뒤섞인 표정으로 물었다.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오랜만에 누나 봐서 좋아서 그랬지.”
“크, 크흠! 하, 하여튼 새끼. 이 누나 없으면 어떻게 살라 그러냐?”
“…….”
그래.
그녀의 말마따나.
“…살 수 없겠지.”
그녀를 잃는다면.
그녀를 빼앗긴다면.
자신이 어디까지 망가지게 될지, 상상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1회차 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상관없어.’
중요한 건 지금.
자신의 곁에 그녀가 있다는 사실뿐이다.
“…진짜 괜찮냐? 뭔 일 있었어?”
이쯤 되니 하은도 이상함을 느꼈는지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누나.”
“어, 엉?”
조심스럽게 손을 뻗어 그녀의 뺨을 쓰다듬었다.
“한 번만 웃어줘.”
“…웃어 달라고?”
“응.”
“아니 뭔.”
하은은 어처구니없다는 표정으로 오진을 올려다보다가, 이내 푹 한숨을 내쉬며 방긋 입꼬리를 올렸다.
“이, 이러면 되냐?”
어색하기 짝이 없는 미소였지만.
“…응.”
이신혁의 기억 속에 보였던 서글픈 미소는 아니었다.
“충분해.”
이것만으로.
자신은 살아갈 수 있다.
“…….”
하은은 어딘가 안쓰러운 눈빛으로 자신을 바라봤다.
“아이 씨.”
포니테일로 묶은 적갈색 머리칼을 벅벅 긁었다.
“돌아오면 혼낼라 했는데. 이러면 혼내지도 못하겠잖아.”
무슨 일이 있었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오진의 상태는 평소와는 많이 달랐다.
“흐흐. 미안. 일이 바빠서 연락을 못 했어.”
이사벨라에 대한 건 일단 숨겼다.
말해봤자 괜한 걱정만 늘리게 되리라.
‘어차피 당분간 만날 일도 없을 테니까.’
이사벨라는 이탈리아에서 ‘성녀’를 연기하고 있다.
운영하는 자선 단체만 수십 개.
심지어 본인이 직접 봉사까지 참여하고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흑성회도 책임지고 있지.’
몸이 수십 개가 아니라면 살인적인 스케줄을 소화하느라 쉽게 이탈리아 밖으로 벗어날 수 없으리라.
‘그래서 헤어질 때 언제쯤 다시 돌아올 수 있냐고 물어본 거겠지.’
만약 그녀 쪽에서 자유롭게 한국을 올 수 있는 상황이라면 그런 질문 자체를 할 이유가 없다.
‘즉.’
자신이 그녀를 직접 찾아 이탈리아로 가지 않는 이상.
어지간해서 마주칠 일은 없다는 의미.
그리고 당연히 이탈리아로 돌아갈 생각은 눈곱만큼도 없었다.
‘적어도 내 몸 하난 지킬 수 있다는 확신이 설 때까진 절대 안 가지.’
여하튼 당분간 이사벨라와 마주칠 일은 없다.
그녀에 대한 건 나중에 설명하는 게 좋으리라.
“헹. 무슨 출장 가서 바람 핀 남편이 하는 변명 같네.”
“푸흐흐! 절 남편이라고 생각하는 겁니까, 누님?”
“어쭈? 이게 또 기어오르네.”
하은이 피식 웃으며 장난스럽게 옆구리를 꼬집었다.
“뭐, 후보 정도는 된다 하자.”
“영광입니다 누님.”
“헹, 그런 줄 알면 좀 더 이 누님한테 신경 쓰라고.”
하은이 배시시 미소 지으며 살며시 팔을 끌어안았다.
이사벨라에겐 미치지 못하지만, 나름 존재감 넘치는 부드러움이 팔을 감싼다.
“요건 뭐냐?”
팔을 끌어안은 채 어깨에 머리를 기대고 있던 하은이 오진의 손에 들린 봉투를 가리켰다.
“햄버거 사 왔음.”
“와 씨, 햄버거? 이게 얼마 만이냐?”
“흐흐. 오랜만에 보니 또 그립지?”
“안 그래도 먹고 싶었는데 새끼. 역시 이 누나 맘을 잘 안다니까.”
거실 소파에 앉아 포장해 온 햄버거를 꺼냈다.
“우물우물. 캬하! 역시 기네스니 뭐니 해도 오리지널이 최고지!”
하은은 햄버거를 크게 한 입 베어 물며 파르르 몸을 떨었다.
그렇게 그녀와 함께 와퍼 두 세트를 깔끔하게 먹어 치운 후 느긋하게 소파에 등을 기댔다.
“자, 누님이 티비 보기 편하게 무릎을 대령하거라.”
“싫은데.”
“아 왜! 오늘 너 응석 부리는 거 다 받아줬잖아!”
“그건.”
듣고 보니 그렇긴 한데.
“기왕 응석받아주는 거 오늘은 내가 누나 무릎 베고 누울래.”
오늘은 응애 모드로 간다.
“오지니 넌… 한 짝 밖에 없는 누나의 다리를 혹사시키고 싶은 거니?”
“아니.”
여기서 치트키를?
“아이 씨. 알았다 알았어. 드러워서 참.”
“히히힛! 앗싸아~!”
하은이 낄낄 웃음을 터트리며 무릎 위에 머리를 올렸다.
“아따 우리 오지니 허벅지 많이 튼실해졌네.”
피식.
오진은 자신의 무릎을 베고 누운 하은의 머리칼을 가볍게 쓰다듬었다.
아까 전에 느꼈던 꺼림칙한 기분 따위.
이젠 기억조차 제대로 나지 않았다.
‘그래.’
언제까지고 이 온기를 느끼기 위해서는.
‘강해져야지.’
그 누구도 건드릴 수 없을 정도로.
감히 대적할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일단 한동안은 퀘스트 깨는 것에 집중할까.’
발할라 길드에게 성유석을 부탁해 뒀지만.
그동안 손 빨고 가만히 기다리고 있을 생각은 없었다.
‘혹시 부족할 수도 있으니깐.’
퀘스트를 깨는 데 얼마나 성유석이 필요한지 알 수 없는 이상 최대한 많은 양의 성유석을 확보해두는 게 좋으리라.
“오지나 내일은 뭐 일 있냐?”
“왜?”
“누나 협회 갈 일 있는데 같이 갈려?”
“협회?”
협회는 왜?
“왜 그 준만인가? 그 사람이 나한테도 너처럼 협회에 출퇴근은 안 하는 형태로 들어가면 어떠냐고 해서.”
준만 씨는 언제 또 누나한테 연락했다냐.
‘하긴, 뭐.’
하은도 이번에 8성 각성자로 올라섰다.
오히려 영입 시도를 하지 않는 게 이상하리라.
“공짜 월급 준다는데 안 갈 이유가 없잖아? 그리고 그… 뭐냐. 너도 협회에 들어가 있으니깐.”
“그래? 그럼 낼 같이 갈까?”
안 그래도 내부 파벌 문제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확인해 볼 생각이었다.
“히히. 이젠 직장까지 같아졌네.”
하은은 뭐가 그리 기쁜지 무릎 위에 머리를 베고 누워 배시시 미소를 지었다.
“…거 참.”
오진은 못 말리겠다는 듯 피식 웃었다.
문뜩.
한 가지가 궁금해졌다.
“누나.”
“응?”
“누난 나한테… 빚을 졌다고 생각해?”
“빚? 으음.”
하은이 고민하듯 입술을 오므렸다.
“글쎄. 예전에는 그렇게 생각했는데 지금은 딱히?”
빙글.
허벅지를 베고 누워있던 하은이 몸을 돌려 자신을 올려다봤다.
“이렇게 이쁘고 섹시한 눈나가 같이 있어 주는 것만으로 빚 청산은 다 끝난 거 아니니?”
캬하핫!
으스대듯 어깨를 으쓱였다.
“…그래?”
“엑. 뭐야. 여기서 그렇게 넘기면 쪽팔린다구 인마.”
“괜찮아.”
“뭐가 괜찮아?”
“그냥… 다.”
오진은 입가에 옅은 미소를 지으며 그녀의 머리칼을 쓰다듬었다.
하염없이.
더없이 소중한 보물을 쓰다듬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