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92)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92화
고대의 별자리 (3)
같은 남자가 봐도 탄성이 흘러나올 정도의 호감형 미남.
깔끔함을 넘어 산뜻함까지 느껴지는 청년이 방긋 미소 지으며 손을 내밀었다.
‘천우성.’
올빼미의 왕, 천도윤의 아들이자 흑성회의 ‘올빼미’ 파벌을 실질적으로 이끄는 존재.
그리고.
“임원이라 들었는데 생각보다 젊으시네요.”
협회에 몰래 숨어들어온 미꾸라지.
“하하! 절 지지해 주시는 분들이 많아 그렇게 됐습니다. 저로선 말로 표현 못 할 정도로 영광스러운 일이죠.”
영광스럽기는 개뿔.
꼼수와 협박을 이용해 임원 자릴 차지했으면서 잘도 떠드는구만.
‘하긴 뭐.’
그것도 능력이라면 능력이다.
“그보다… 협회에는 무슨 일로 오신 거죠?”
천우성이 가늘게 눈을 뜨며 오진을 살폈다.
“조만간 한국을 떠날 일이 있어서요. 일정에 대해 상의를 하려고 왔습니다.”
물론 한국을 떠날 계획 따윈 없었지만.
확인해 볼 게 하나 있었다.
“흐음. 또 이탈리아에 가시는 겁니까?”
역시.
이탈리아에 간 걸 알고 있군.
“하하. 이사벨라 양이 초대해서 말이죠.”
“로마의 성녀의 초대라니, 이거 너무 부러운데요?”
천우성이 능청스럽게 어깨를 으쓱였다.
“운 좋게도 이사벨라 양이 절 ‘아주 마음에 들어’ 하셔서요.”
“…그런가요?”
움찔.
천우성의 어깨가 가볍게 떨렸다.
오진은 그의 반응을 살피며 씩 웃었다.
‘좋아.’
생각대로 이사벨라를 경계하는구만.
‘하긴. 경계 안 하는 게 더 이상하지.’
섬뜩한 미소를 지으며 요염하게 피를 핥아 마시던 이사벨라의 모습을 떠올렸다.
간단한 손짓 한 번에 수백 명의 각성자를 쓸어버리는 압도적인 무력.
거슬리는 존재를 거침없이 학살하는 잔혹한 성격까지.
마르코 패밀리를 이용해 그녀를 제거하려던 계획이 실패하게 됐으니 지금 한창 똥줄을 태우고 있으리라.
‘그런 상황에서 이사벨라가 마음에 들어 했다는 사람을 함부로 건드릴 순 없겠지.’
사실 여부는 상관없다.
‘그럴 가능성이 있다’는 것만으로 상대의 움직임은 제약될 수밖에 없다.
‘그리고 뭐, 틀린 말을 한 것도 아니고 말이지.’
좀 다른 의미긴 하지만.
이사벨라가 자신을 아주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건 사실이다.
“그럼 부디 좋은 친분 쌓고 오시길 바랍니다. 로마의 성녀처럼 세계적인 유명인과 친해지신다면 협회에도 큰 도움이 될 테니까요.”
움찔했던 것도 잠시.
천우성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마주 잡은 오진의 손을 흔들었다.
“그나저나.”
그의 시선이 하은 쪽으로 향했다.
“뒤에 계신 분은 누….”
하은을 바라본 그의 눈이 크게 부릅뜨였다.
“……!!”
경악한 표정의 천우성이 한두 걸음 뒷걸음질 쳤다.
‘…뭐지?’
뭔데 하은을 보고 이렇게 놀란단 말인가.
“무슨 일 있으십니까?”
“아… 예? 하하. 아무것도 아닙니다. 그냥 너무 아름다운 분이셔서 그만.”
천우성은 애써 고개를 저으며 변명을 했지만.
‘거짓말이야.’
그가 놀란 건 단순하게 하은이 아름다워서가 아니다.
다른 이유가 있다.
‘대체 뭐지?’
그가 왜 하은을 보며 저리 경악하는지.
그 이유를 짐작하기 어려웠다.
“그쪽한테 관심 없으니 신경 끄지그래?”
하은이 불쾌하다는 듯 눈살을 찌푸렸다.
“하하. 죄송합니다. 이거 실례를 범하고 말았네요.”
천우성은 깍듯이 고개를 숙이며 사과했다.
“어쨌든 두 분처럼 뛰어난 각성자를 협회로 모실 수 있게 되어 크나큰 영광입니다.”
한환 미소와 함께 주머니에서 명함을 꺼냈다.
“혹시 제 도움이 필요하시면 언제든 편하게 연락해주세요.”
“예. 물론이죠.”
오진은 천우성의 명함을 받아들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두 분 모두 좋은 하루 되시길 바랍니다.”
형식적인 인사말을 끝으로 천우성이 멀어졌다.
“흐응. 저놈이 흑성회의 스파이란 말이지?”
하은은 멀어지는 그의 뒷모습을 바라보며 가늘게 눈을 떴다.
“겉보기엔 그 정신 나간 집단에 들어간 놈이라곤 전혀 생각이 안 드는데 말이야. 생긴 것도 멀쩡하고.”
“속은 썩어빠진 놈이니까 절대 관심 주지 마.”
놈이 하은에게 관심을 보였던 게 신경 쓰여 괜히 목소리가 거칠어졌다.
“응? 뭐야, 우리 오지니 질투하고 있는 거야?”
하은이 씨익 입꼬리를 올리며 옆구리를 쿡쿡 찔렀다.
“새끼 귀엽기는.”
“…아니 그런 뜻이 아니라.”
“캬하핫! 하여튼 이 누나 없으면 어찌 살려고 하냐? 요놈, 요놈!”
“…….”
착각하고 있다고 말해주고 싶었지만, 저렇게 좋아하는 걸 보니 말하기가 망설여졌다.
“그나저나.”
하은이 팔짱을 끼며 날카롭게 눈을 떴다.
“…이사벨라면 그 로마의 성녀 맞지? 네가 걔랑은 어떻게 알고 있는 거냐?”
“저번 임무 때 잠깐 만났어. 우리 히드라 잡은 거 기억나지? 그때 방송을 봤다고 아는 척해오더라고.”
“친하다는 건?”
“구라지. 얘기도 별로 안 해봤어.”
“흐응.”
하은은 미심쩍다는 듯 자신을 바라보다가 이내 고개를 끄덕였다.
“뭐, 어쨌든 언젠가 저놈이랑도 싸워야 하는 거지?”
“그렇겠지.”
‘언젠가’라고 표현할 만큼 오래 남지 않았을 수도 있다.
흑성회의 움직임은 점차 과격해지고 있었으니까.
‘아직까진 아는 사람들만 아는 정도에 불과하지만.’
아마 머지않아 한국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악명을 떨치게 되리라.
‘아니, 그게 아니지.’
오진은 씨익 입꼬리를 비틀어 올렸다.
머지않아 ‘자신의 손으로 직접’ 그들의 악명을 널리 퍼트리리라.
‘어디 한 번 열심히 숨어보라고.’
숨어도 좋다.
피해도 상관없다.
‘억지로 머리끄덩이를 붙잡아 끄집어내 주마.’
정체를 꼭꼭 숨긴 채 음지를 기어 다니는 바퀴벌레들을 만천하에 드러나게 만들 것이다.
그리고.
‘금이빨 빼고 모조리 씹어먹어 줄게.’
저번엔 아쉽게도 이사벨라 때문에 마르코 패밀리의 성흔을 흡수하지 못했다.
하지만 이번엔 다르다.
그들이 지닌 성흔과 마력, 성유물까지 남김없이 먹어치워 주리라.
이제까지 마경에 숨어들어 필사적으로 쌓아 올린 모든 것을.
자신의 손으로 직접 앗아가 주리라.
‘비각성자들을 보호하는 센터를 만들고 있다고 했던가.’
어쩌면 힘없는 이들에게 있어서는 흑성회는 구원자나 다름없을지도 모른다.
약자를 보호하고, 강자에게 칼을 겨누는 영웅일지도 모른다.
‘어쩌라고.’
상관없다.
그들이 구원자건 영웅이건 무슨 의미란 말인가.
‘나는.’
깊게 가라앉은 눈으로 하은을 응시했다.
아무렇지 않은 척 으스대며 웃고 있지만.
희미하게 몸을 떨고 있는 그녀의 손을 가볍게 움켜쥐었다.
“으응? 뭐, 뭐냐 갑자기?”
사과처럼 뺨을 붉히며 시선을 피하는 하은.
그녀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손에 움켜쥔 이 온기를 놓지 않기 위해서라면.
‘다른 건 필요 없어.’
힘없는 이들이 얼마나 고통받건 희생당하건 알 바 아니다.
그녀를 지킬 수만 있다면.
수천, 수만의 목숨 따위 웃으며 짓밟아 줄 수 있다.
“…오지나?”
그렇게 살아왔다.
그렇게 살아가고 있다.
그렇게 살아가는 방식 외에.
다른 삶의 방식은 모른다.
“걱정 마. 누나는 그놈이랑 싸울 필요 없어.”
“엥? 그게 무슨 말이야?”
“그놈을 상대하기 위해 준비해둔 비장의 수가 있거든.”
그런 건 없지만.
“누나는 가만히 있으면 돼.”
그래도 되도록.
자신이 만들 것이다.
“헹. 또 무슨 소릴 하나 했더니.”
하은이 입술을 삐쭉 내밀며 팔짱을 낀 팔에 힘을 줬다.
뭉클.
부드러운 감촉이 팔을 감싼다.
“내가 그래도 지금 당장은 너보다 훠~얼씬 세거든요? 누나 이번에 8성 찍은 거 모르니?”
“푸흐흐. 잘 알고 있지.”
하은이 으스대듯 콧대를 세우며 말을 이었다.
“너야말로 가만히 있어 인마. 이 누나가 지켜줄 테니깐.”
“그래, 그래.”
“아, 이 새끼 못 믿는 눈치네. 수련실 가서 함 떠볼래?”
“그 전에 점심이나 먹으러 가자, 배고프다.”
“오, 좋다. 뭐 먹을래? 이 누나 취업 기념으로 쏠게!”
하은이 환하게 웃으며 팔을 잡아끌었다.
“…….”
오진은 옅은 미소를 지은 채 그녀의 뒤를 따라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 * *
협회에 위치한 임원진 전용 사무실.
고급스러운 의자에 앉은 천우성이 누군가와 통화를 나누고 있었다.
“예, 찾았어요. 아버지!”
[홀홀홀. 설마 그런 곳에 ‘용안’을 가진 자가 숨어 있을 줄이야.]전화기 너머로 들리는 능글맞은 웃음소리.
[이로써 계획을 좀 더 앞당길 수 있겠구나.]“헤헤. 준비는 이미 다 끝내뒀습니다!”
천우성은 참기 힘들다는 듯 안달 난 목소리로 외쳤다.
먹음직스러운 생일상을 눈앞에 둔 어린아이와 같은 모습.
젠틀했던 이미지는 어느새 씻은 듯 사라지고 청년의 껍데기를 쓴 소년이 남아 있었다.
[홀홀홀. 그간 많이 기다렸던 모양이구나.]“이날이 오기를 얼마나 애타게 기다렸는지 아버지도 잘 아시잖아요!”
한껏 들뜬 목소리.
[그래, 그래. 이 아비가 어찌 네 맘을 모르겠느냐.]노인은 나지막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좋아. 바로 계획을 시행하거라.]“예! 아버지!”
천우성이 밝은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아… 하지만 지금 당장 직녀성의 사도를 처리하는 건 어려울 것 같아요.”
“거머리 여왕이 뇌랑에게 관심을 보이고 있다네요.”
[…….]거머리 여왕, 이라는 말에 전화 너머의 노인은 굳게 입을 다물었다.
[홀홀홀…. 그년이라면 조심해야겠지.]“예.”
[하지만.]노인의 목소리가 섬뜩하게 가라앉았다.
[만약 계획의 방해가 된다면 망설이지 말고 그자를 처리하려무나.]“명심하겠습니닷!”
착!
천우성이 허공에 경례를 취하며 외쳤다.
[홀홀홀.]그의 당찬 대답이 퍽 마음에 드는지 전화 너머로 노인의 웃음소리가 흘러나왔다.
[아들아.]“네, 아버지!”
[네 어멈의 일을 잊지 않았겠지?]흠칫.
천우성의 어깨가 떨렸다.
밝게 빛나던 소년의 표정이 차갑게 식었다.
섬뜩한 증오가 서린 눈으로 까득 이를 갈았다.
“물론이죠.”
굳게 쥐어진 주먹 위로 검은 마력이 넘실거렸다.
“그날 이후로 한순간도… 잊은 적 없어요.”
[홀홀홀, 그래.]노인은 만족스럽다는 듯 웃었다.
“검은 별의 은총을.”
[검은 별의 은총을.]짧은 구호를 마지막으로 통화가 끊어졌다.
“…….”
고요함만이 남은 방 안.
“올빼미들이여.”
-슈슈슈슈슉!
나지막한 그의 부름에 검은 깃털들이 휘몰아치더니 검은 로브를 입은 사내들이 사무실에 나타났다.
“지금 당장 계획을 시행하세요.”
“…허나.”
한 사내가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봤다.
“지금 계획을 시행하면 많은 비각성자들이….”
“어쩔 수 없어요.”
칼로 내려치듯 단호한 목소리.
천우성은 천천히 발걸음을 옮겨 사내를 향해 걸어갔다.
저벅, 저벅.
한 걸음 내디딜 때마다 검은 마력이 넘실거리며 방안을 가득 채웠다.
“허업! 큽!”
천우성에게 흘러나오는 숨 막히는 기세에 사내는 파르르 몸을 떨었다.
고통스럽다는 듯 목을 움켜쥔 채 꺼억 꺼억 몸을 뒤틀었다.
“이건 검은 별의 뜻을 따르기 위한 숭고한 희생입니다.”
“커헉! 꺽!”
“설마… 검은 별의 뜻을 잊지는 않으셨겠죠?”
천우성의 눈빛이 섬뜩하게 빛났다.
“그르륵, 꺽!”
사내의 얼굴이 파리하게 질렸다.
“대답, 안 하십니까?”
천우성의 점차 사납게 일그러져 갔을 때,
-푸욱!!!
“커헉!!”
사내의 배를 꿰뚫고 기다란 창날이 빠져나왔다.
“후후. 이런 쓸모없는 놈의 대답을 기다리실 필요 없습니다, 우성 님.”
흑빛 창으로 사내의 배를 꿰뚫은 것은 오른쪽 눈가에 기다란 검흔(劍痕)이 새겨진 중년 사내.
“건우 씨.”
박건우.
흑성회의 상급 집행관이자, 천우성의 오른팔 격인 존재였다.
“━잘하셨습니다!”
천우성은 환한 미소를 지으며 엄지를 척 들어 올렸다.
“후후후. 감히 검은 별의 뜻에 의심을 품는 자는 살려둘 수 없죠.”
“하하! 역시 건우 씨 밖에 없다니까요.”
천우성은 마음에 쏙 든다는 듯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박건우는 유려한 동작으로 창에 묻은 핏물을 가볍게 털어내며 정중하게 한쪽 무릎을 꿇었다.
“우성 님. 이번 작전은 제가 책임지고 통솔하겠습니다.”
“아, 건우 씨라면 안심이죠. 믿고 맡길게요.”
“옙!”
박건우는 힘차게 대답하며 몸을 일으켰다.
“그럼 바로 계획을 시행하겠습니다!”
슈슈슈슉!
그는 배가 꿰뚫린 채 절명한 사내의 시체와 함께 허공에 흩어지듯 사라졌다.
박건우의 뒤를 따라 다른 올빼미들도 사무실 안에서 모습을 감췄다.
“…자.”
천우선은 협회 건물 아래로 보이는 서울 거리를 내려다보며 방긋 웃었다.
“이제 시작이야.”
이제.
그토록 증오하고 저주했던 각성자들에게 복수할 날이 머지않았다.
“하아.”
양팔을 넓게 벌린 채 고개를 들어 올렸다.
푸른 하늘을 향해 손을 뻗었다.
“엄마… 보고 있지?”
천우성의 입가에 애틋한 미소가 지어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지켜봐 줘.”
애틋한 미소가 사라지며 증오로 점철된 일그러진 미소가 입가에 걸렸다.
“내가 꼭━ 복수해줄게.”
청년의 껍데기를 뒤집어쓴 소년은.
회색빛 거리를 내려다보며 나지막이 중얼거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