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a regressor RAW novel - chapter (99)
나는 회귀자가 아닙니다 99화
사기꾼의 승리법 (1)
깔끔하게 정돈된 사무실.
포마드 스타일로 머리를 정돈한 청년이 참담한 표정으로 고개를 떨궜다.
“정말… 그 방법 말고는 없는 걸까요?”
“물론 다른 방법도 있을 겁니다. 하지만 한시라도 빨리 협회를 손에 넣기 위해서는….”
“희생의 필요하다, 는 말씀이시군요.”
천우성은 씁쓸한 미소를 지으며 주먹을 움켜쥐었다.
“서두르셔야 합니다 우성 님.”
박건우는 갈등하는 천우성에게 설득을 이어나갔다.
“이대로라면 그 늙은 독사… 한태호에게 역으로 당해버리고 맙니다.”
협회장 한태호.
최근 겉으로는 움직임을 거의 보이지 않고 있지만 몇몇 흑성회 지부에서 특무관들과 함께 움직이는 모습을 포착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천우성과 흑성회의 연결고리를 찾기 위해 움직이고 있는 게 분명한 상황.
만약 그가 천우성과 흑성회가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를 찾아낸다면 협회를 손에 넣겠다는 계획은 수포가 된다.
“…그렇겠죠.”
천우성은 입술을 짓씹었다.
“어쩔 수 없는… 희생이 필요하겠죠.”
“검은 별의 뜻을 위한 일입니다.”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천우성의 눈가에 핑그르 눈물이 맺혔다.
격정에 찬 숨소리.
그는 핏줄이 보일 정도로 거칠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이번 일로 죄 없는 사람들이 죽을 걸 생각하면!”
콰앙!!
내려친 테이블이 반으로 쪼개졌다.
“각성자야 얼마가 죽더라도 상관없습니다! 하지만… 하지만 이번에 죽게 되는 건…!”
잔뜩 일그러진 천우성의 얼굴에 깊은 슬픔이 서렸다.
“…우성 님.”
박건우는 안타까운 표정으로 천우성을 바라봤다.
그가 얼마나 각성자를 증오하는지, 반대로 비각성자들을 얼마나 아끼고 사랑하는지 잘 알고 있었다.
“대를 위한 숭고한 희생입니다. 협회를 접수하시는 데 성공하신다면 더 많은 비각성자들의 목숨을 구하실 수 있을 겁니다.”
“…….”
천우성은 굳게 입을 다문 채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고 있습니다. 아무리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파도… 이건 어쩔 수 없는 일이라는 걸.”
깊은 한숨을 내쉬며 품속에서 검은 술잔을 꺼냈다.
“마수를 조종할 수 있는 성유물입니다.”
“옙!”
박건우는 검은 술잔을 받아들며 깊게 머리를 숙였다.
“구로동 밖으로는 피해자를 만들면 안 되시는 건 알고 계시죠?”
“물론입니다.”
“건우 씨라면 잘 해주실 거라 믿고 있습니다.”
방긋.
천우성은 순수하게까지 느껴지는 미소를 지으며 박건우의 어깨를 툭툭 쳤다.
“후후. 믿어주십쇼 우성 님! 언제든 명령만 내려주신다면 바로 작전에 돌입하겠습니다!”
“조만간 기회가 올 겁니다. 그때 부탁드릴게요.”
“예!”
박건우는 자신에 찬 목소리로 외치며 몸을 일으켰다.
“검은 별의 은총을.”
“검은 별의 은총을.”
둘은 짧은 구호를 나눴다.
그리고.
-치이이이이익!!!
시야가.
반전한다.
-띠링!
[각성자 ‘박건우’의 일부 기록이 성공적으로 전승됐습니다!] [창술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습니다!] [창술에 대한 이해도 상승에 따라 《나침반자리의 창술 Lv7》이 《나침반자리의 창술 Lv8》로 상승합니다.]익숙한 알람과 함께 푸른 메시지창이 떠올랐다.
“후우.”
기억을 모두 확인한 오진은 짧은 숨을 토해냈다.
창술에 대한 이해도가 상승했다는 메시지와 함께 박건우가 사용하던 창술이 머릿속에 흘러들어왔지만.
‘지금 이게 중요한 게 아니고.’
오진은 날카롭게 눈을 뜨며 이번 기억을 통해 얻은 정보를 정리했다.
“…협회를 손에 넣기 위해서 구로동을 습격한 거라고?”
마수를 풀어 비각성자들을 학살한 게 대체 어떻게 협회를 손에 넣는 것과 이어진단 말인가.
오히려 이번 일을 천우성이 주도했다는 게 들통나기라도 한다면 이제까지 쌓아 올린 모든 걸 한 번에 잃을 수도 있는 위험천만한 일이었다.
‘협회장을 마수 사태의 주범으로 몰고 갈 생각인가?’
아니.
그렇게 되면 협회를 손에 넣기는커녕 ‘협회’라는 조직 자체가 날아갈 것이다.
만약 경찰청장 주도하에 서울 도심 한복판에서 일반인들을 향한 학살이 이뤄졌다고 상상해보라.
‘경찰이라는 조직 자체가 아주 기둥뿌리부터 뽑혀나가겠지.’
완전히 사라지지는 않더라도 최소한 협회가 지니고 있는 공권력을 비롯한 강력한 권한들이 대부분 날아가게 될 것이다.
‘그러면 협회를 손에 넣는 의미가 없어.’
싸그리 불타 잿더미만 남은 조직을 손에 넣는다고 달라질 건 없지 않은가.
“다른 방법이 있다는 건데.”
오진은 가늘게 눈을 뜨며 턱을 매만졌다.
‘잠깐.’
그때, 떡볶이집에서 들었던 대화가 머릿속에 떠올랐다.
-원래 그래서 구로동이랑 대림동이랑 같이 관리 센터가 들어서기로 한 건데 협회장이 반대하는 바람에 임원진들이 사비까지 털어서 센터 세운 거란다.
비각성자 안보관리 센터.
천우성이 주관해서 짓고 있는 비각성자가 보호 시설.
“아항. 그렇게 된 거구만.”
딱!
오진은 천우성의 계획이 뭔지 알겠다는 듯 손가락을 튕겼다.
“자작극을 벌이시겠다?”
무슨 이유에서인지는 모르겠지만.
협회장은 구로동에 비각성자 안보관리 센터가 지어지는 걸 반대했다.
‘아마 예산 문제겠지.’
전에 한 부장이 임원진들이 과하게 예산을 사용해서 자금이 많이 부족하다고 했었다.
‘아무리 취지가 좋은 일이라고 해도 예산을 초과하면서까지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니까.’
당장 내 통장에 돈이 없는데 대출까지 받아가면서 기부할 수는 없지 않은가.
뭐, 개인은 신념에 따라 그럴 수 있다 쳐도.
‘협회쯤 되는 대조직의 수장이라면 그런 선택을 할 순 없지.’
심지어 대림동과 구로동의 위치는 꽤 가깝다.
아마 대림동에 센터를 하나 개설했으니 구로동은 넘어가자 말했으리라.
‘그리고 천우성은 그 얘기를 단순한 협회장의 아집인 척 퍼트렸다.’
떡볶이집에서 만난 비각성자들은 협회 내부의 상황은 전혀 알지 못한 채 협회장을 비난하기 바빴다.
천우성이 의도적으로 협회장에게 불리하도록 정보를 조작했다 보는 게 맞으리라.
‘그런 상황에서 구로동에만 마수들이 날뛰게 된다면?’
뭐, 그 뒤는 뻔할 뻔자 아닌가.
‘협회장의 반대로 인해 무산된 구로동 비각성자 안보관리 센터. 그 안일함의 대가는 수백 명의 희생자… 뭐 이딴 기사가 나오겠지.’
그래서 습격 지역을 구로동으로 제한했던 것이다.
‘협회장의 반대로 센터 개설이 무산된’ 지역에만 피해자가 발생해야 했으니까.
“하.”
오진의 입에서 헛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래서 숭고한 희생이니 뭐니 개소리를 지껄였던 거야?”
협회를 손에 넣기 위해.
수백 명의 목숨을 벌레처럼 짓밟았으면서.
‘숭고한 희생’이라는 말을 씨부리고 있었던 건가.
“푸흐흐흐!! 새끼들 재밌네.”
오진은 한 손을 들어 얼굴을 덮으며 낄낄 어깨를 들썩였다.
“아주….”
손가락 사이로 드러난 눈동자에.
푸른 귀화(鬼火) 섬뜩하게 타올랐다.
“재밌어 뒤질 것 같네 이 씨발새끼들이.”
솔직히 수백 명의 사람이 죽게 된 건 별 감흥 없다.
그들의 얼마나 비참하게 죽었건, 처참하게 죽었건.
자신이 알 바 아니다.
하지만.
“마음에 안 들어.”
그래.
천우성이란 인간 자체에 대해서.
참을 수 없는 혐오감이 끓어올랐다.
‘어른의 탈을 쓴 애새끼라.’
고작 그런 놈이 올빼미 파벌을 실질적으로 이끌고 있던 왕의 대리인이라 불렸단 말인가.
“이런 걸 보면 흑성회란 놈들도 별거 아닌 거 같네.”
1회차에 어째서 그들이 아닌 ‘천마’가 세계를 멸망시켰는지 이해할 수 있었다.
다른 흑성회 파벌은 모르겠지만.
적어도 올빼미 파벌에는 한 세계의 멸망이라는 거창한 위업을 달성할만한 능력이 없다.
“이게 마수를 조종했던 성유물인가.”
오진은 박건우의 품을 뒤져 검은 술잔을 꺼냈다.
반쯤 검은 마력이 차올라 있는 술잔.
‘전투를 멈춰라.’
우우웅!
의지를 담아 술잔에 명령을 내리니 검은 마력이 넘실거리며 사방으로 뻗어 나가는 게 느껴졌다.
‘마수들의 움직임이 멈췄어.’
와이어를 타고 근처 건물 옥상으로 올라간 오진은 저 멀리서 이우혁과 하은, 한준만과 치열하게 전투를 이어가고 있던 마수들의 움직임이 뚝 멈춘 걸 확인했다.
다들 갑작스럽게 움직임을 멈춘 마수들을 바라보며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두리번거리고 있었다.
“마수를 조종하는 성유물이라.”
겉보기만 봐서 정확히 몇 성급 성유물인지는 알 수 없었지만.
성유물 안에 담긴 아찔한 마력을 생각해 봤을 때 상당히 높은 등급의 성유물인 것 같았다.
‘흡수할까?’
잠깐 고민이 들었지만.
‘아니, 나중에 쓸 곳이 있을 수도 있어.’
고개를 저으며 검은 성유물을 품속에 넣었다.
“자… 어떻게 해야 하려나.”
다시 박건우의 시체가 있는 곳으로 내려온 오진은 팔짱을 끼며 생각에 잠겼다.
‘상황은 최악이야.’
체스로 치면 이미 체크 메이트가 나온 상황.
천우성이 나서서 ‘이렇게 될 줄 알았습니다’라고 말하면서 눈물 한 번 짜주면 그대로 협회장 라인은 몰락하게 된다.
‘이미 마수 사태로 인해 피해자가 발생한 시점에서 끝난 게임이지.’
이번 사건의 핵심은 피해가 얼마나 발생했는지가 아니었다.
‘피해가 발생했다’라는 사실 자체.
그리고 그 원인이 누구에게 있는지가 핵심이었다.
‘이대로면 협회장 라인은 싸그리 날아가고 천우성의 손에 협회가 넘어가겠지.’
승자가 정해져 버린 게임.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승패를 뒤덮을 수 없다.
‘그래.’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푸흐흐흐!”
오진은 낄낄 웃으며 어깨를 들썩였다.
박건우의 품속을 뒤져 주먹보다 살짝 작은 크기의 구슬을 하나 꺼내 들었다.
꽤나 대중적으로 보급된 성유물.
상대가 게이트 안에 있건, 지구 반대편에 있건 자유롭게 연락을 주고받을 수 있는 통신 전용 성유물이었다.
‘스마트폰보다 보안 면에서는 훨씬 뛰어나지.’
특정 마력 주파수로 연락을 오가는 거기 때문에 기록이 전혀 남지 않는다.
“어디 그럼.”
고개를 들어 협회 건물이 있는 여의도 쪽을 바라봤다.
천우성의 모습이 보이지는 않지만.
저 높은 건물 위에서 확신하고 있으리라.
자신의 승리를.
“다 끝났다고 생각해?”
오진은 비릿하게 미소지었다.
“아니지. 그러면 안 되지.”
그러고 싶었다면.
제일 먼저 날 죽였어야지.
-우우우웅!
손에 쥔 통신 구슬이 진동했다.
누구에 온 연락인지는 굳이 확인할 필요도 없다.
‘변형.’
얼굴을 바꾼다.
목소리를 바꾼다.
“예, 천우성 님.”
구슬을 들어 올리며 말을 이었다.
“작전은 성공했습니다.”
오른쪽 눈가에 한 줄기 검흔이 그어진 사내.
박건우는 왕의 대리인을 향해 정중하게 머리를 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