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
1. 마왕의 가장 강력한 패(1)
탁. 창백할 정도로 하얀 손이 기세 좋게 책상을 짚었다.
그 밑에 깔린 것은 다름 아닌 흰 종이.
짧은 공백을 두고 잠시 멈췄던 손이 종이만 남긴 채 천천히 물러난다.
멀어지는 손을 보던 남자가 시선을 내려 책상 위 종이를 눈에 담았다. 대수롭지 않게 종이를 향한 눈이 그 위에 적힌 ‘사직서’라는 글자를 보고 멈칫하더니, 이내 왕방울만 하게 커졌다.
그가 급히 고개를 치켜들기까지, 그 모든 과정을 조금의 흔들림도 없이 지켜보던 흰 머리에 붉은 눈을 한 사내는 당황이 고스란히 드러난 역안을 똑바로 마주하며 딱딱한 표정만큼 굳은 목소리로 말했다.
“일, 그만두겠습니다.”
***
제국에 ‘영웅’들이 있다면 마왕군에는 ‘군단장’들이 있다.
제국이 유능한 장수들을 내세운다면 마왕은 역시 ‘군단장’들을 내세울 것이다.
그만큼 군단장은 마왕의 검이자 방패이며 힘의 상징이다.
공식적으로 마왕의 군단장은 제1군단장부터 제12군단장까지 총 열둘이지만, 사실 공공연하게 숨겨진, 비밀이라는 수식어가 무색한 그런 군단이 하나 더 있다.
마왕성의 모든 이들로도 모자라 심지어 적인 제국군까지 알고 있지만 엄연한 비밀인 제0군단.
무려 ‘마지막 용사’를 죽인 자가 군단장을 맡고 있는, 사실상 마왕의 가장 강력한 패.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든든해지는 그런 패가, 갑자기 그만두겠단다.
“안 돼! 저어어얼대 안 돼!!”
너 같은 인재를 이렇게 놓칠 순 없다! 그런 의지로 마왕 카베르는 제 수하의 바짓가랑이를 붙잡고 늘어졌다.
평소에 말수가 없는 데다 별로 움직이지도 않아서, 직접 이곳까지 왔을 땐 웬일인가 싶기는 했다. 심지어 반갑기도 했다.
그런데 기껏 하는 말이 이거라니.
아마 진심은 아닐 것이다. 언제나 그렇듯 그냥 한번 해보는 말이겠지. 반드시 그래야 한다.
여전히 바짓가랑이를 꾹 붙잡은 채로 고개를 들었다. 붉은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치고, 침묵이 흘렀다.
아마 그라면 눈빛에서 무엇을 말하고자 하는지 눈치챘을 것이다.
‘내가 이렇게까지 하는데, 설마 정말 그만둔다고 하진 않겠지?’
의도가 제대로 먹혔는지 줄곧 굳어 있던 눈동자가 미세하게 떨렸다. 얼핏 보아서는 티도 나지 않았으나 그에게 집중하고 있던 마왕은 이를 기민하게 잡아챌 수 있었다.
흔들린다. 그렇다면 여기서 멈춰서는 안 되겠지.
줄곧 잡고 있던 다리를 놓고 벌떡 일어섰다. 대신 이번에 잡은 부위는 양어깨.
“도대체 왜?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부하들이 막 대해? 인간이라고 차별이라도 하는 거야? 어떤 새끼야?! 내가 당장 요절을…!”
다소 격한 음성과 달리 속내는 그들이 그럴 리 없다고 확신하고 있었다.
인간임에도 인정할 수밖에 없을 정도로 강한 무위.
아니, ‘인정’이 다 무어냐. 마족들에게 있어 그의 무위는 호승심조차 낼 수 없을 정도로 압도적인 수준이다. 호승심은커녕 모두가 경외하며 존경하고 있는데, 어느 간 큰 놈이 감히 그를 건드리겠는가.
그럼에도 굳이 이렇게 하는 데에는 다 이유가 있었다.
데온 하르트. 마왕성에서는 ‘데몬 아루트’라 불리는, 사실상 마왕 다음가는 지위의 ‘인간’.
마왕성의 유일한 인간이라 다른 인간들은 어떨지 모르겠지만, 평소의 그는 확실히 다른 마족들과는 달리 누군가의 피를 보는 것을 극도로 꺼렸다.
그러니 이런 식으로 나오면 어떻게든 반응할 수밖에 없으리라.
─아니나 다를까.
막 집무실을 빠져나가려는 순간, 손목이 덜컥 잡혔다.
돌아보니 피를 연상케 하는 붉은 눈동자가 이쪽을 물끄러미 바라본다. 마왕은 애써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이제야 대화할 마음이 생긴 모양이군.’
뿌리치려 한다면 얼마든지 할 수 있다.
하나 상대는 가장 아끼는 수하, 그것도 방금 막 사직서를 낸 수하인 데다 애초에 이것을 의도한 것이기에, 그는 뿌리치는 대신 보란 듯이 한숨을 푹 내쉬며 자리에 주저앉았다.
“다시 한 번 묻지. 이유가 뭐야?”
“……죽이실 겁니까?”
그저 진심이 궁금했을 뿐이건만, 돌아온 것은 대답이 아닌 질문이었다.
죽일 거냐니. 무슨 그런 무서운 말을.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드니 눈이 마주쳤다. 섬뜩해 보이는 붉은 눈이 조금의 깜빡임도 없이 그를 보고 있었다. 헛웃음이 나왔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여기서 더 몰아붙였다간 정말 목이라도 뜯기겠군.’
용사를 제외하고는 상대할 자가 없는 마왕이라지만 그에게도 눈앞의 사내는 위협적이었다.
그가 작정하고 목을 노린다면 이쪽 역시 나름의 피해를 감수해야 할 테니까. 아마 상당히 귀찮아지리라.
상대를 진정시키려는 의도가 다분한 목소리가 부드럽게 흘러나왔다.
“내가 널 죽일 리가 없잖아. 그래서 이유가 뭐야? 그냥 궁금해서 그래.”
“……그건.”
잠깐의 침묵 끝에 그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왈칵.
‘…왈칵?’
“피! 피가!!”
“아.”
피가 쏟아졌다. 아주 자연스럽게, 서류가 가득한 책상 위로.
반사적으로 손을 뻗어 피를 받았다. 그 외의 행동은 생각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머리는 복잡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독인가? 아니, 피를 본 순간부터 독 감지 마법을 사용하고 있었지만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것은 하나다.
후유증.
공식적으로, 데온 하르트는 용사를 죽였다.
무려 ‘용사’다. 당연히 큰 피해를 감수해야 했고, 그 탓에 그는 원래도 그리 좋지 않던 몸이 완전히 망가져버렸다. 지금처럼 종종 피를 토할 때도 있었다.
‘사실은 그게 아니지만 어쨌든 후유증이 맞기도 하고, 결과도 같으니.’
각혈은 이전에도 몇 번 있었던 것 같지만, 그 빈도가 확연히 늘어버린 것이 선명히 보인다.
으득. 소중한 인재를 잃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절로 이가 갈렸다.
그때, 뒤늦게 상황을 자각한 건지 데온이 입을 막고 책상으로부터 두어 걸음 물러섰다. 누가 봐도 피를 억누르는 것 같은 목소리가 힘겹게 기어 나왔다.
“죄송합니다. 서류가….”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잖아! 주치의! 0군단장의 주치의를 불러와라!! 지금 담당 환자가 아픈데 어디서 뭘 하고 있는거야아아아아!!”
마왕성 전체를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포효에, 한바탕 소동이 벌어졌다.
***
저 멀리서 담당 주치의 벤이 헐레벌떡 달려온다.
마왕의 방 카펫에 지저분한 붉은 얼룩을 만들고 있던 나의 감상은 아주 단순했다.
‘시발, 망했다.’
난 그저 사직서나 내고 일을 그만두려 했던 건데. 하필 그때 피가 올라와 가지고 서류도 더럽히고, 카펫도 더럽히고, 담당 주치의까지 번거롭게 만들고… 이거 누가 봐도 처맞기에 딱 좋은 상황 아닌가.
처맞기만 한다면 다행일 것이다.
상대는 마족. 인간이었다면 단순히 화를 내고 넘어갈 일도, ‘네 목숨으로 사죄해라!’라며 검을 휘두를 놈들이다.
때문에 나는 하얗게 질린 채 뻣뻣하게 굳어서는 필사적으로 벤의 진찰에 응했다.
“데몬 님, 제 말 들리십니까? 이게 몇 개로 보이시죠?”
“세 개입니다.”
착실한 대답으로 살기 위한 몸부림을 대신하며 조금 전 상황을 다시 떠올렸다.
내 이름은 데온 하르트. 약간의 오해가 있어 마왕성에서는 ‘데몬 아루트’라 알려져 있다.
아니, 아니지. ‘약간’이 아니지. 내가 사직서를 낸 이유가 바로 이 ‘오해’에 있는데.
무슨 오해냐 하면, 마왕을 비롯한 마왕성의 모든 이들이 내가 무지막지하게 강하다고 착각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 웃기는 소리. 아마 이 성의 요리사가 나보다 더 강할 것이다. 적어도 그 요리사는 ‘마족’이지 않나.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계속되는 과한 평가는 내게 공포심마저 선사했고, 더 늦기 전에 발을 빼야 함을 경고하는 듯 했다.
후한 평가가 좋지 않냐고? 그것도 적당해야 좋지.
지나친 고평가는 후환을 두렵게 만든다. 특히 내가 있는 곳은 마왕성. 심지어 마왕마저도 나를 과하게 평가하고 그에 맞춰 대우하고 있는데, 진실이 밝혀진다고 생각해 봐라.
아마 그날이 내가 죽는 날이 되겠지. 죽더라도 곱게 죽지는 못하리라.
‘도망치고 싶다.’
하지만 이대로 말없이 도망치면 분명 마왕이 ‘너 같은 인재를 놓칠 수는 없지!!’라며 군대를 끌고 쫓아올 것이다. 자칫하면 잡히는 거로도 모자라 감금되거나, 최악의 경우엔 죽을지도 모른다.
인간들 중에서도 ‘갖지 못한다면 부숴버리겠어!’ 하는 녀석이 있는데, 마족이라고 없을 리가.
적끼리 닮는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는데. 하필 인재를 아끼는 것만큼은 제국의 황제를 닮아가지고.
사실대로 말해봤자 믿어주지도 않을 테고, 믿는다 해도 ‘지금까지 날 속여?!’라면서 내 목을 날려버릴지도 모르니….
그래서 직접 마주하고 매듭을 지으려 했다. 여차하면 분위기를 살펴 사직서와 함께 그만두겠다는 말을 남기고 바람처럼 사라질 생각도 있었다.
설마 마왕이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질 줄은 몰랐지만.
“안 돼! 저어어얼대 안 돼!!”
어느 정도 말릴 거라 예상하긴 했다.
‘하지만 이건 내 계획에 없었다고!’
바짓가랑이라니, 마왕이라는 작자가 자존심도 없냐?!
속으로 절규를 내지르면서도 나는 미동조차 할 수 없었다.
그야, 무서웠으니까.
‘내 다리에 마왕이! 시발, 마왕이이이이이!!’
상대는 무려 마왕. 매번 용사들과 맞부딪히면서도 큰 피해 없이 마왕성을 지킨 역대 최강의 마왕이다. 그가 손가락 하나만 까닥해도 내 목숨은 그대로 끽- 날아가 버린다.
그러니 잘못 움직였다가 자칫 그를 차버리기라도 한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굳이 시험해 보지 않아도 충분히 예상 가능한 일이었다.
때문에 그가 먼저 손을 뗄 때까지 동상처럼 미동도 없이 서 있었다.
어찌나 긴장했던지, 마왕이 조금만 늦게 손을 뗐더라면 분명 몸에 쥐가 났을 것이라 장담한다.
어쨌건 무슨 심경의 변화가 있었는지, 눈이 마주치자 손을 뗀 마왕이 벌떡 일어섰다. 바지를 놓은 것은 좋지만, 이번에 잡은 것은 내 어깨!
어떻게든 나를 붙잡겠다는 나름의 어필인지 양어깨에 손을 얹은 그가 눈을 마주하며 줄줄이 말을 뱉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입니다, 마왕님.
“도대체 왜? 뭐가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애초에 제가 사직서를 낸 이유는,
“부하들이 막 대해? 인간이라고 차별이라도 하는 거야?”
부담스러울 정도로 너무 잘 해줘서 그런 겁니다.
댁들은 ‘실력에 걸맞은 대우’라 생각하고 있겠지만, 난 아니라고. 진짜 아무 능력도 없단 말이야!
오히려 신체 능력은 일반인보다도 떨어지는 허약한 인간일 뿐인데.
‘처음 영입을 시도했을 때, 그때 의심했어야 했어.’
나 같은 인간이 무슨 쓸모가 있다고 그런 건지 의심했어야 했다.
거절했다간 그 자리에서 죽여버릴 것 같은 분위기라서 어쩔 수 없었지만….
……어? 그러네. 생각하고 보니 처음부터 선택지 따윈 없었네.
‘……인생.’
목구멍까지 치민 한숨을 눌러 삼켰다. 지금이라도 이곳을 탈출해야 한다.
최종 보스인 마왕이 생각보다 내게 잘 해주고 있으니, 아예 가능성이 없는 이야기는 아닌….
“어느 새끼야?! 내가 당장 요절을….”
아니! 아니 아니!!
성큼성큼 집무실 문을 향하는 그를 기겁하며 붙잡았다.
누구 잡을 일 있나. 그쪽이 부하들을 요절내면 누가 욕을 먹겠어? 당연히 원인인 내가 표적이 될 거 아냐!
거봐라, 잘 해줘도 너무 잘 해주지 않는가. 아 제길, 왜 눈물이 날 것 같지?
다행히 진정한 모양인지 마왕이 한숨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다시 한 번 묻지. 이유가 뭐야?”
어째, 목소리가 착 가라앉은 것이 얼핏 살기가 느껴지는 것 같다.
착각일지도 모르겠지만 조심하는 게 좋을 것 같아 나는 대답하는 대신 그의 눈치를 살피며 물었다.
“……죽이실 겁니까?”
아, 이게 아닌데. 너무 긴장한 나머지 말이 직설적으로 튀어나오고 말았다.
역시나, 마왕의 상징인 역안이 이채를 띠고 이쪽을 향한다.
저 눈빛은 무슨 의미일까.
‘어떻게 알았지?’ 정도의 눈빛일까, ‘이걸 죽여, 살려?’ 하고 고민하는 눈빛일까.
어쩌면 ‘이래서 눈치 빠른 부하는 귀찮다니까’라는 의미일지도 모른다.
지, 지금이라도 사과해야 하나…? 아니 그 전에, 사과한다고 해서 살려주기는 할까?
아무리 생각해도 암울한 미래밖에 떠오르지 않는다.
강렬한 눈빛을 차마 피하지도 못하고 그저 안절부절못하며 입술만 달싹이는데, 속내를 파헤치기라도 할 듯 내 얼굴을 샅샅이 뜯어보던 마왕이 이내 고개를 저었다.
“내가 널 죽일 리가 없잖아. 그래서 이유가 뭐야? 일단 들어나 보자.”
잠시 머뭇거리긴 했으나, 그건 잠시였다.
어차피 담판을 지으려 했으니 이건 꼭 필요한 절차다. 도망칠 수 없으며, 도망쳐서도 안 된다.
때문에 막 입을 여는데.
“……그건.”
왈칵.
익숙하디익숙한, 비릿한 혈향이 입안부터 코끝까지 화악 퍼져나갔다.
“피!! 피가!”
“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