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07
107. 사실 그들은 알고 있었다(1)
“마왕이 선전포고를 했지. 전쟁은 불가피하다.”
평화적으로 해결하는 방법 따윈 없다. 탁 트인 공간이 삽시간에 소란스러워졌다.
이해한다. 이미 타 왕국과 충돌을 빚고 있는 와중에 마계와의 전쟁이라니. 잃은 병력은 어떻게 보충하고 자금은 어떻게 한단 말인가. 연이은 전쟁으로 피폐해진 병사들의 정신력은 또 어떻고.
‘게다가 마계와의 전쟁에서 용케 이긴다 해도 더 이상 전쟁을 치를 여력이 없는 제국을 타 왕국들이 가만히 두고 볼 리 없지.’
이미 타 왕국과의 관계가 최악까지 치달은 이상, 제국의 몰락은 예정된 셈이다.
몰락의 길임을 알면서도 걸을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황제는 태연하게 말을 이었다.
“마계에 집중해야 하니 인간계 내 전쟁은 전면 중지한다.”
“실례지만 폐하, 전쟁 중이던 왕국들이 순순히 받아들일까요?”
“그럴 수밖에 없지. 인간계에서 마계를 상대할 수 있는 나라는 이 제국밖에 없으니까.”
그리고 황제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말은 거기서 멈췄지만 난 그가 뒤에 무슨 말을 덧붙이려 했는지 알 수 있었다.
‘그들은 오히려 제국을 지원해야 할 거다.’
제국이 망한다 하여 마계가 과연 거기서 멈출까?
그럴 리가. 제국이 망하면 곧 인간계가 망한다.
이러한 상황에서 다른 왕국들이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불만 표현은 아마 제국을 지원하지 않는 것 정도겠지. 그마저도 상황이 위태로워지면 적극 지원해야 할 것이다.
‘그래도 초반부터 굳이 지원이 부족한 상태로 전쟁을 치를 필요는 없으니. 저 말을 삼킨 것일 테고.’
현 상황에서 괜히 타 왕국의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요는 없다.
황제는 그렇게 판단했으리라.
‘하지만…….’
그의 의견은 한 가지 가정을 전제로 한다.
마계의 편에 붙는 왕국이 나오지 않는다는 가정.
절로 고개가 기울었다. 인간의 욕심과 이기심은 전쟁을 겪으며 많이 보아 왔다. 잃을 게 많은 권력자가 제 안위를 위해 마계의 편에 붙을 확률이 정말 없을까?
‘마왕은 인간인 나도 받아들였어.’
인간에 대한 특별한 적개심도, 편견도 없다는 뜻이다. 그러니 그라면 거절 대신 순순히 받아들이는 쪽을 택할 터.
한 번이 쉽지 그다음은 눈치 싸움이다. 권력자들은 앞다투어 제국을 배신하고 마왕에게 제 나라를 바치겠지. 종족이 뭐가 중요한가. 중요한 것은 제 안위인데.
‘뭐, 확실하지도 않은 걸 굳이 말할 필요는 없겠지.’
아직은 먼 미래다. 묻지도 않은 것을 말해 미움 사고 싶지도 않고.
몰라. 난 그런 생각 떠올린 적 없어. 떠오른 생각들을 모른 척 묻어 두고 태연한 얼굴로 황제를 보았다. 그는 다시 한번 이야기에 못을 박고 있었다.
“그러니 알아 두도록. 앞으로는…….”
“!”
비릿한 혈향이 코끝을 스쳤다.
잡은 지 시간이 좀 된 몬스터에게서 풍기는 혈향과는 차원이 다른 생생한 피비린내.
빌어먹을. 이건 또 무슨 상황이야. 순간 굳은 내가 미처 돌아보기도 전에, 바로 뒤에서 정갈한 목소리가 들렸다.
“제가 타이밍을 잘못 맞춘 모양입니다.”
잠시 비켜 주겠니?
어, 어어? 귀족적인 어투의 표본이라 해도 될 만한 목소리의 주인이 나를 부드럽게 밀어내고 지나간다. 진득한 피비린내가 그 뒤를 따라 자취를 남겼다.
한 손에 피가 스민 나무 상자를 들고 절제된 걸음걸이로 빠르지도, 느리지도 않게 나아간 그가 황제의 앞에 멈춘다. 한 치의 수그림 없이 곧게 들어 올린 고개가 황제와 시선을 맞췄다.
“…….”
“…….”
영원과도 같았던 정적 끝에, 그가 천천히 한쪽 무릎을 굽힌다. 붉게 얼룩진 나무 상자는 옆에 내려놓고 고개를 조아렸다.
녹색 머리카락이 그의 움직임에 따라 스르륵 흘러내리고, 예의 그 정갈한 목소리가 다시 흘러나왔다.
“제국에 영광을. 신 스티그마 프리미로가 현재의 제국을 뵙습니다.”
스티그마 프리미로. 제국의 두 번째 영웅.
아무리 영웅이어도 그렇지, 저렇게 진한 피비린내를 풍기면서 들어오다니 너무하잖아. 주변 귀족들 얼어붙은 거 안 보이나?
……옷차림은 기이할 정도로 깔끔하지만.
‘그보다 묘하게 데자뷔가 느껴지는 것 같은데…… 기분 탓이겠지.’
주연과 장소만 다른 비슷한 상황을 겪었던 것 같지만 기분 탓일 것이다. 무시하자.
“일어나라. 그 옆의 상자는 무엇이지?”
“사정상 사냥대회에 참가할 수 없어 송구한 마음에 준비한 것입니다만…… 타이밍이 좋지 않은 탓에 차마 드릴 수 없을 것 같습니다.”
“내용을 말하라.”
“적장의 머리입니다.”
오…… 인간계 내 전쟁 중지 선언을 하자마자 적장의 머리를 들고 오다니.
하지만 스티그마의 잘못은 아니다. 몰랐는데 어쩌겠어. 황제의 말은 오늘 이후로 알려지게 될 테니 지금의 그로서는 그저 제 임무를 성실히 수행한 것밖에 없다.
황제가 잠시 침묵하더니 근처의 시종을 향해 손을 까닥였다. 스티그마가 순순히 다가온 시종에게 상자를 넘기고, 시종에게서 상자를 받은 그가 뚜껑을 연다.
바람에 실려 오는 혈향이 더 짙어졌다.
“……수고했다.”
영웅을 아끼는 황제의 대답은 예상 그대로였다.
스티그마 역시 예상했는지 가볍게 고개를 숙여 감사를 표한다. 상자를 다시 시종에게 건넨 황제가 한 걸음 걸어 나왔다.
“곧 명령이 전해질 것이다. 인간계 내 전쟁은 멈추고 마계와의 전쟁을 준비하게 될 터이니 미리 준비해 두도록.”
조용히 물러간 스티그마가 주변의 귀족에게 사냥대회 1위는 누구가 차지했느냐 묻는다. 와들와들 떨어대던 것과 별개로 대답은 착실히 했는지 그가 눈을 살짝 키우더니 이내 우아하게 미소 지었다.
그렇게 공식 몬스터 사냥 1위는 데온 하르트, 비공식 인간 사냥 1위는 스티그마 프리미로로 샤냥대회는 막을 내렸다.
……면 좋았을 텐데.
사냥대회는 끝났지만 끝나지 않았다. 무슨 뜻이냐고? 내가 시발 집에 가지 못하고 있단 뜻이지.
본래 황궁에서 주최하는 사냥대회가 끝나면 뒤풀이를 겸한 사교의 장이 열린다. 차라리 그 연회에 참석하느라 집에 못 가는 거였으면 나았을 텐데.
“일이 있었다 들었다. 몸은 괜찮은가?”
“괜찮습니다.”
괜찮으니까 이제 그만 보내 줬으면.
황제는 사냥대회의 끝을 고함과 동시에 나를 붙잡고 조용한 숲으로 끌고 갔다.
사실 끌고 간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내겐 끌고 간 것이나 마찬가지다.
무려 황제가 이렇게 제안하는데 누가 감히 거절할까.
참담한 심정으로 그를 따라나서길 한참, 시간이 지나도 좀체 열리지 않던 그의 입이 열리고 나온 말은 사냥대회에서 일어난 소란과 내 몸에 대한 안부였다.
“괜찮다니 다행이지만 황실에서 개최한 대회에서 문제가 일어났으니 짐이 책임을 져야겠지. 그대의 저택에 보낼 상금에 액수를 더 얹어 보내도록 하겠다.”
은근슬쩍 돈으로 때우고 넘어가려는 것이 느껴졌지만 순순히 넘어갔다.
어차피 바라는 것을 말하라 해도 진짜 바라는 것은 들어줄 리 없고, 그 외에는 딱히 바라는 것도 없으니까.
“감사합니다.”
“그리고…… 그대가 잡은 식물형 몬스터는.”
여기서 잠시 흠칫했다.
설마 황제도 그 터무니없는 소문을 들은 건 아니겠지. 퍼지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았고, 황제도 도착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듣지 못했을 거란 희망을 좀 가져 보고 싶은데.
하지만 그럴 리가 있나. 황제의 정보력을 잘 알고 있기에 미약한 희망은 곧장 내팽개쳤다.
‘의심하려나.’
황제라면 의심할지도 모른다.
근데 정말 내가 조종한 게 아닌데. ……어쩌다 보니 데려오긴 했지만.
“조만간 사람을 보낼 테니 공격 방식과 대응 방식 등의 기록을 남기는 데 도움을 주었으면 좋겠군.”
“알겠습니다.”
만족스러운 듯 나른한 한숨을 내쉰 그가 제 왼 손등을 만지작거린다. 장갑을 낀 손이 눈에 들어왔다.
그러고 보니 이상하네. 황제는 보통 장갑을 안 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검을 쥐고 움직이는데 손끝의 감각이 무뎌진다고 싫어하지 않았나?
내심 고개를 갸웃거리던 그때, 황제가 나직이 내 이름을 불렀다.
***
“데온 하르트.”
중요한 이야기로 넘어가려는 것을 느낀 듯 녀석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붉디붉은 눈이 묵직한 기세를 드러내며 조용히 저를 쳐다본다. 매번 느끼는 것이지만 ‘어느 쪽’이 들어야 할 이야기인지 판단하는 능력 하나는 정말 수준급이다.
‘아니, 지금의 경우는 일단 듣고 기억할 것을 나눈다고 봐야 하나.’
하지만 언제까지고 그렇게 지낼 수는 없을 텐데.
지금 그게 중요한 것은 아니니 상관없지만. 데온 하르트의 눈을 마주하던 황제가 급할 것 없이 느긋하게 입을 뗐다.
“이번 전쟁에는 그대 역시 참전하게 될 거다.”
인간계 내에서의 전쟁은 마왕의 옆에 보내 두었지만, 이번엔 아니다.
데온 하르트는 검을 들고 마왕군을 처리해야 한다. 어쩌면 마왕 측 진영에 서서 제국군을 베어 내게 될지도 모르지.
“그러니 이제 슬슬 확실히 정해야 할 것 같은데.”
한 걸음. 얼마 남지도 않은 거리를 더 좁혀 그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모두가 암묵적인 동의하에 모른 척 외면했던 것을 직면해야 할 순간이 왔다.
황제는.
데온 하르트가 중립임을 알고 있다.
마왕 또한 이를 알고 있으리라. 그렇기에 데온 하르트가 지금까지 멀쩡히 살아 있을 수 있는 것이겠지.
마왕과 황제의 데온 하르트를 가운데에 둔 신경전. 거기서 암묵적으로 형성된 규칙은 참으로 기묘했다.
[데온 하르트를 억압하지 말 것.]정보가 빠져나가는 것이 걱정되어 실력 이하의 지위에 머무르게 하지 말 것.
마찬가지의 이유로 상대의 진영에 넘어가려는 데온 하르트를 억류시키지 말 것.
데온 하르트를 그만한 지위에 앉혀 두고서 그에게 기밀 정보를 노출시키지 않는 것 또한 군주의 역량이다. 더군다나 그는 묻는 것엔 거짓 없이 답하니 고문할 필요도 없다.
이러한 규칙하에 진행된 게임은 상당히 흥미로웠다.
[누가 더 데온 하르트를 유용히 사용하는가.] [누가 먼저 데온 하르트를 끌어들이는가.] [만약 데온 하르트가 진영을 정했다면, 상대는 얼마나 빠르게 이 사실을 알아차리고 손을 쓰는가.]세 번째의 경우에는 데온 하르트 또한 이 게임에 적극 참여하는 셈이 되겠지. 판돈은 본인의 목숨이 될 터.
그러니 필사적으로 중립을 유지하려는 것 역시 이해는 한다만.
“그대는 인간이다.”
상황이 이렇게 치달은 이상 더 기다려 줄 수는 없다.
“이곳에서 나고 자랐고, 그 모든 발판 또한 이곳에 있지. 태양 아래에서 태어났다면 필시 이유가 있을 텐데 태양 빛에 약하다는 이유만으로 평생을 해가 존재하지 않는 곳에서 살 수는 없지 않은가.”
“…….”
“이곳에 있어라.”
저주 따위는 마왕을 죽이면 없어지겠지.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생각 외로 부드러웠다.
이 모든 상황을 초래한 장본인은 그저 알 수 없는 붉은 눈으로 물끄러미 황제를 올려다보았다.
데온 하르트는.
제가 중립이기에 황제와 마왕이 죽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일부러 의도했다. 살기 위해서였다.
마왕군이 되라는 마왕의 말을 거부하면 죽는다. 그렇다고 황제를 배신하고 마왕의 편에 설 수도 없었다. 그에겐 돌아가서 해야 할 일이 있었으니까.
그래서 철저한 중립이 되었다.
누군가 검을 들고 사람을 다치게 하면 검을 쥔 ‘누군가’를 원망하지 ‘검’을 원망하진 않는다. 마찬가지로 상대가 제 검을 빼앗아 저를 베는 상황에서 ‘검이 나를 배신했다’라며 분노하는 머저리는 없다.
데온은 ‘검’이 되었다.
‘검의 주인이 달리 있나. 손에 쥔 자가 주인이지.’
처음엔 이러한 속셈을 알 길이 없었던 두 군주는 데온이 한 번 더 양측 진영을 오가자 기민하게 상황을 알아차렸다.
뚜렷한 물증은 없지만 확신한다. 그때 마왕이 흥미로운 눈초리로 저를 보다가 싱긋 눈을 휘어 웃었고, 황제가 묘한 눈초리로 저를 보다가 가소롭다는 듯 웃었으니까.
괘씸했으리라. 그러나 죽이기엔 아깝다.
제 편이 아니지만 상대의 편도 아니다. 묻지 않은 것은 굳이 먼저 말하지 않지만 묻는 정보엔 순순히 답한다. 먼저 나서는 일은 없지만 명령하면 충실히 따른다. 거기다 살짝 오해가 있긴 하지만 실력 또한 훌륭하다.
끌어들이기만 하면, 유용한 패가 된다.
그렇게 두 군주의 암묵적인 동의하에, 데온 하르트는 저를 상품으로 내건 게임을 주관할 수 있었다.
‘참가자는 마왕과 황제.’
‘진행자는 데온 하르트.’
‘상품도 데온 하르트.’
‘예비 참가자 역시 데온 하르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