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08
108. 사실 그들은 알고 있었다(2)
살기 위해 벌인 판에 걸린 판돈이 제 목숨이라니. 이 무슨 희극인지.
그래도 결국 계산대로 되었으니 만족한다. ─만족했었다.
황제가 간신히 이루어 놓은 균형을 무너뜨리려 하기 전까지만.
‘그래, 오래 버티긴 했지. 슬슬 이 상황이 올 때가 되었다는 건 알고 있었어. 하지만…….’
이렇게 바로 부딪쳐 올 줄이야.
곧바로 대답할 수 없는 문제다. 황제도 그 사실을 아는 듯 어깨에 얹었던 손을 놓고 한 걸음 물러서며 너그러운 척 말했다.
“갑작스러울 테니 생각할 시간을 주겠다. 잘 생각해서 답해 주길 바라지.”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그래. 이번엔 오래 머물지 않고 가겠군.”
그래야 공평할 테니.
이러한 행동을 마왕에게 알리든 알리지 않든 상관없다. 데온 하르트가 굳이 먼저 입을 열지 않아도 지금까지 알아본 마왕이라면 곧장 알아차릴 테지.
아마 승부수를 던졌다는 것에 불쾌함을 느끼기는커녕 오히려 마찬가지로 데온 하르트를 재촉하고 유혹할 것이다.
마왕이 그에게 줬고, 줄 수 있는 것에는 무엇이 있으며, 제가 그에게 줄 수 있는 더 나은 것에는 무엇이 있을까. 그중에서도 당장 줄 수 있는 것은…….
“……그간의 노고를 인정하여 그대의 지위를 명예 후작으로 승격시키도록 하지. 아마 내일쯤이면 모든 서류가 처리되어 있을 거다.”
“…….”
갑작스럽다느니, 귀족들의 반대가 거셀 텐데 현 시국에 괜찮으시겠냐느니 하는 질문은 없었다. 심지어 감사하다는 인사조차도 없었으나 황제는 아무렇지 않게 넘어갔다.
당연했다. 속셈이 훤히 보이는 행동에 감사를 할 리도, 바랄 수도 없으니까. 그는 그저 덧붙일 뿐이었다.
“다시 한번 말해 두지. 그대는 인간이다.”
황제가 물러가라는 뜻을 담아 손을 내저었다. 아예 돌아서는 그의 등을 보던 데온이 조용히 걸음을 돌렸다.
그리고 멈칫.
“……에스페라네스는 어떻게 되었습니까?”
“천혜의 요새라더니 그 말이 과언이 아니더군.”
실패했구나. 레멤베르는 허언을 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다시 한번 깨달으며 데온은 멈췄던 걸음을 옮겼다.
***
실수했다. 황녀는 잘 손질된 손톱을 딱딱 물어뜯었다.
데온 하르트를 좋아한다고 알려진 상황인 만큼 사냥대회 출발 전에 그에게 리본을 건넸어야 했다. 최소한 손수건이라도 주었어야 했다.
‘하필 이 중요한 순간에.’
그 사실을 까맣게 잊어버리다니.
황제, 숙부님이 그를 데리고 자리를 옮겼다. 모든 것을 알진 못해도 상상을 초월하는 그녀의 ‘감’은 이게 무슨 상황인지 알리고 있었다.
어디에도 정착하지 않고 홀로 부유하는 듯하던 그를 확실하게 이곳에 묶어 두려는 것이다. 아마 숙부님의 성격상 부드럽게 회유하기는 힘들겠지. 부드러운 척하더라도 금세 단단하고 날카로운 본질이 드러날 것이다.
‘도움이 될 수 있었는데.’
숙부님은 성군보다는 폭군에, 그보다는 패왕에 더 가깝다. 친근하고 부드러운 군주가 아닌 엄격하고 카리스마 있는 군주.
그런 자의 회유나 설득은 극단적인 결과를 낳는다. 받아들인다면 숙부님을 충실히 주군으로 모시겠지만, 거절한다면 철저한 적이 되겠지.
평화적으로 그를 잡아 두는 방법은 결혼이다. 고리타분하지만 현재까지 사용될 정도로 효과가 좋은 방법이니 가장 시도해 볼 만한 방법이 될 터였는데…….
뒤늦게 도착한 야외 연회장에서 황녀는 타는 목을 축이기 위해 와인잔을 집어 들었다.
‘의미 없는 가정은 그만두자.’
지나간 것을 돌아볼 시간에 수습할 생각을 하라고 배웠다.
전쟁 때문에, 숙부님 걱정 때문에, 내정 때문에, 오라버니 걱정 때문에… 변명거리는 많았지만 이제와 그런 것이 무슨 상관인가.
가능한 숙부님께 타격이 없게, 유한 방법으로 데온 하르트를 붙잡아야 한다.
‘지금까지 깔아 둔 밑밥도 있으니까…….’
밀어붙인다면 이번 일에 관한 의혹은 어떻게든 넘어갈 수 있겠지.
한쪽 나무 사이로 걸어오는 데온을 발견하고 후다닥 달려갔다.
“백작님!”
“황녀 전하.”
“세상에 백작님, 사냥대회에서 일이 있으셨다면서요? 다친 곳은 없으세요? 제가….”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야기가 길어질 것 같아 걱정되는 마음에 드리는 말씀입니다만, 혹시 실례가 아니라면 자리를 옮겨도 괜찮으시겠습니까?”
“……?”
의도한 건가? 공개적으로 마음을 드러내기 전에 절묘하게 말을 끊었다.
하지만 이 정도에 순순히 넘어갈 정도로 호락호락하게 보였다면 큰 오산이다. 황녀는 부러 활짝 웃으며 큰 목소리로 답했다.
“단둘이라면 어디든 기꺼이요!”
“……흔쾌히 수락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구두 때문에 발이 아플 것을 배려하는 척 말을 꺼냈으니 이제 와 무를 수도 없다.
한 방 먹였다. 한순간이지만 얼굴에 스치는 낭패한 표정이 그가 인간이라는 것을 증명하는 것 같아 그녀는 기분 좋게 웃으며 발을 뗐다.
──그녀는 눈앞의 데온 하르트가 평소의 데온 하르트가 아님을 알고 있었다.
간혹 풀숲에서 들려오는 낯 뜨거운 신음을 피해 걷고 걸어 도착한 곳은 꽃이 활짝 피어 있어 운치 좋은 정원이었다.
벤치에 살포시 앉은 황녀가 고개를 들어 데온 하르트를 보았다. 그는 무례를 피하기 위해서인 듯 한 걸음 옆으로 비켜서 몸을 비스듬히 틀고 서 있었다.
곧장 입을 열지 않고 잠자코 기다리다가 그의 시선이 힐긋 닿는 순간을 노려 환히 웃었다.
“단둘이 보니까 더 좋네요. 하고 싶은 말이 뭐예요?”
“……저는 황녀 전하의 말씀을 더 잘 듣기 위해 자리를 옮겼습니다.”
“아, 그랬죠! 어디까지 말했더라?”
“사냥대회에서 제가….”
“아 맞아! 다친 곳은 없으신 거죠? 리본을 못 드려서 마음에 걸렸었는데 습격당하셨다니, 얼마나 놀랐던지……!”
“저는 괜찮습니다.”
“그래도 제 마음이 영 불편하네요. 마땅한 이유가 있는 것도 아니고, 실수로 까먹었던 터라…….”
“다시 말씀드리지만 괜찮습니다. 까먹을 만도 하죠.”
그저 황녀의 머리 빈 해맑음을 표현하기 위해 한 말이었는데, 무엇을 짚었는지 데온 하르트가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렸다.
그의 웃음을 마주한 황녀는 그대로 얼어붙었다. 소름이라는 이름의 벌레가 저 아래서부터 몸을 타고 기어 올라오는 기분이다.
저 웃음의 의미는 무엇이지? 질투? 서운함?
‘그럴 리가.’
새어 나오려는 헛웃음을 집어삼켰다. 저 웃음을 보고 연애와 관련된 감정을 떠올릴 정도로 머리가 비진 않았다.
그것은 명백한 비웃음의 형상을 띠고 있었다.
“까먹는 것이 당연합니다.”
그가 웃는다. 이번엔 양쪽 입꼬리를 올린 정상적인 웃음.
─아니, 저걸 정상적인 웃음이라고 할 수 있나?
깨끗한 느낌의 순수한 웃음이 아니다. 그는 웃음으로 제 말의 의미를 전하고 있었다. 전하께서는 똑똑하시잖습니까. 그러니 이 또한 능히 읽어 내시겠지요.
[까먹는 것이 당연합니다.]황녀는 의미를 해석하기에 앞서 제 가면이 견고한지 확인부터 해야 했다.
[전하께서는.] [저를.] [좋아하지 않으시니.]‘……알고 있었구나.’
얼굴이 달아올랐지만 그것은 잠시였다.
감정을 숨기고 뻔뻔함으로 대응하는 것은 능구렁이 같은 귀족들을 상대해야 하는 황족의 기본 소양이다. 그러니까.
‘아무렴 어때.’
당당해지자.
어차피 황녀가 데온 하르트를 마음에 두고 있다는 사실이 널리 알려진 탓에 그의 혼삿길은 황녀를 제외하곤 단단히 막혀 버렸다.
그러니 당황하지 말고 침착하게 밀어붙이자. 수작이 통하지 않는다면 정면 돌파로.
“데온 하르트 명예 백작.”
“…….”
“나와 혼인하는 것은 어….”
“황녀 전하.”
아.
그의 입에서 저를 부르는 단어가 튀어나온 순간, 황녀는 실패를 직감했다.
아니나 다를까, 어디 한번 말해 보라는 듯 입을 꾹 다문 그녀에게 정중하지만 명백한 거절의 뜻을 담은 말이 떨어졌다.
“저 따위에게 고귀한 삶을 낭비하지 마십시오.”
하나뿐인 인생이지 않습니까.
…….
황녀는 데온 하르트가 등을 돌려 사라질 때까지 어떠한 말도 할 수 없었다.
마지막 제안이었다는 것은 그 역시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리도 단호한 거절이라니.
너무도 깔끔하고 단호해서 더 질척일 생각도 들지 않는다. 가족 간의 사이가 돈독한 현 황실에서 황녀의 청혼을 거절했으니 평생 혼자 살 생각이라 보면 되는 것일까.
‘……그러고 보니 여자 관계가 지나칠 정도로 담백했지.’
설마.
한 가지, 예상하지 못했던 가정이 떠올라 황녀의 얼굴이 굳어졌다.
평생 여자 없이 혼자 살 각오. 지나칠 정도로 담백한 여자 관계. 어쩌면, 애초에 ‘황녀’가 그를 꾀어내려 했던 것부터가 잘못된 것이 아니었을까.
“……남자를 좋아하나?”
황녀는 상당히 열린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
용케 살아서 연회장에 돌아왔다! 이건 기적이야!
하도 긴장하고 정신이 없던 탓에 모든 걸 기억하진 못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은 확실히 기억한다.
황제가…….
‘이걸 꼭 떠올려야 하나?’
……내게 시간을 더 줬다. 아마 온 지 얼마 안 되었음에도 마계에 다녀오는 것을 허락했던 것 같은데.
다른 건 몰라도 곧 다시 마계에 가 봐야 한다는 것 정도는 알겠다. 앞으로는 마계든 인간계든 머무는 시간이 극도로 짧아질 것 같다는 것도.
그 이외의 대화 내용이나 겪은 일들은 뭐…… 굳이 떠올리고 싶지 않으니 기억 저편에 묻어 두기로 하자.
‘그런데 왜 자꾸 날 쳐다보는 거지?’
예전에 겪었던 연회에서 힐긋힐긋 보던 시선과는 조금 다른 느낌이다. 뭐라 숙덕이는 것 같기도 하고…….
“연달아 황족과 개인적인 대화를…….”
“황녀 전하와의 대화는 무슨 이야기인지 알 것 같…….”
“……살인귀지만 역시 영웅이라는…….”
“그보다 외모가 잘생겼…….”
“……폐하와는 대체 무슨 이야기를…….”
황녀 전하? 황녀 전하 이야기가 왜 날 보면서 나와?
뭔진 모르겠지만 날 향한 시선들이 따갑다. 집에 가도 되는지 확신할 수 없으니 일단 자리라도 피해 있는 게 좋겠어.
다행히 실내 연회를 열 때와 별반 다를 것 없이 건물은 일부 개방되어 있었다. 아니, 실제로 실내에도 작지만 있을 건 다 있는 연회가 열려 있었다.
시끌시끌한 밖이 부담스러운 귀족들이 들어와 쉬거나 업무와 관련된 대화를 나누기 위해 들어오는 듯했다.
‘밖에 비해 수가 적어서 시선도 줄긴 했는데…… 음…….’
그만큼 더 강렬해져서 별 의미가 없달까.
실내에 들어서자마자 순식간에 쏠리는 시선들에 잠시 멈칫한 나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척 음식들을 주워 담고 슬금슬금 테라스로 대피했다.
커튼까지 꼼꼼하게 치고 나서야 긴장이 탁 풀려 근처에 놓인 의자에 주저앉았다. 그제야 눈치를 보듯 슬금슬금 속이 비었음을 알리던 위가 배고픔을 호소한다. 들고 온 음식을 집어 입에 넣으며 멍하니 넋을 놓았다.
‘피곤해.’
돌아온 지 얼마나 되었다고 다시 짙어지기 시작한 눈 밑을 매만지며 소리 없는 한숨을 내쉬었다.
황제고 마왕이고 일단 지금은 아무 생각도 하지 말자. 나도 좀 쉬어야지.
그렇게 생각 없이 과자만 와작와작 집어먹길 한참, 큰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지금 다 죽이자는 겁니까!”
아씨 깜짝이야! 튕기듯 놓쳤던 쿠키가 바닥에 닿기 전에 황급히 잡아챘다.
도대체 누구야? 왜 싸우는 건데. 잡은 쿠키를 입 안에 밀어 넣고 소리가 들린 곳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테라스 밖, 야외 정원 어딘가 가까운 곳에서 목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