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09
109. 사실 그들은 알고 있었다(3)
“그들도 인간입니다! 마계와의 전쟁이 코앞인 지금 힘을 합쳐도 모자를 판에 굳이 같은 인간을 죽여 적을 늘려야겠습니까!”
정정한다. 가까운 곳이 아니라 바로 내 밑에서 들려오고 있었다.
아니, 왜 여기서 싸우는 건데……. 난간 밖으로 살짝 고개를 내밀어 아래를 보았다. 테라스 그늘 아래에서 언쟁을 하고 있는지 한 남자의 뒤통수가 간신히 보였다.
차분하게 듣고 있던 뒤통수의 주인이 이 상황과 관계 없다는 듯 느긋하게 입을 뗀다. 찬물을 끼얹듯 정갈하고 우아한 말투가 조곤조곤 상대를 짓밟았다.
“목소리가 크구나. 너무 흥분해 있어. 푸른 피라면 머리를 차갑게 해야지.”
귀족답지 않아.
“하, 머리만 차가워서 되겠습니까. 가슴은요. 머리만 차가워서는 반쪽짜리 귀족일 뿐입니다. 아니, 애초에 저는 그런 노력을 하지 않아도 푸른 피이니 그런 것은 중요하지 않겠지요.”
전 타고나길 귀족으로 태어났습니다.
“……넌 네가 변경백이라는 것에 감사해야겠구나. 그렇지 않았다면 지금 내 앞에서 살아 있지 못했을 테니.”
“제 힘으로 얻은 자리에 감사가 웬 말입니까. 그리고 지금 협박하시는 겁니까? 죽었을 거라니, 그냥 어디 한번 죽여 보시지요. 현 상황에서 유능한 변경백을 죽인다면 제아무리 영웅이라 해도 폐하께서 가만두지 않으실 겁니다.”
“죽이지 않는단다. 말했잖니.”
씨발 무서워! 이 기 싸움 도대체 뭐야!
……하지만 호기심이 생긴다. 영웅이라니, 저 뒤통수의 주인이 영웅이라고? 네메세우스 장군님이나 크루엘은 아닐 테고, 그럼 스티그마 프리미로? 후작이잖아. 무려 후작인 영웅과 싸우는 상대는 누구지?
테라스 아래를 확인하기 위해 난간을 짚고 고개를 숙였다. 프리미로 후작의 뒷모습이 더 온전하게 보이고, 맞은편에 상대로 추측되는 이의 신발이 보였다.
“이러다 의미 없는 논쟁만 계속하겠구나. 본론으로 돌아가지.”
“……후작께서 뭐라 하시든 제 의견은 변함 없습니다. 바르바이족은 인간입니다. 힘을 합칠 수 있는 상대를 죽인다는 것은 말도 안 되고, 마계와의 전쟁을 앞둔 상태에서 그들을 죽이겠다고 병력을 낭비할 수는 없습니다. 설득하고 구슬려서 도움되는 아군으로 쓰는 것이 최선입니다.”
“그들은 야만족이지. 언제나 내 영지를 침범해 사람을 죽이고 무기와 식량을 약탈해 갔어. 그 땅에서 나고 자란 내가 기억하는 최초의 순간부터 지금까지 계속 그래 왔지. 그런 자들이 이제와 달라질 수 있다고 믿니? 대화로 해결이 가능했다면 진작에 해결되었겠지. 그들을 그냥 둔 채로 마계와 전쟁을 치른다는 것은 언제 뒤통수를 칠지 모르는 자를 등 뒤에 두고 싸운다는 것이나 다름없단다. 모조리 죽이는 수밖에 없어.”
“너무 폭력적인 대안입니다!”
“너는 너무 무르지.”
조금만 더 고개를 숙이면 상대의 얼굴이 보일 것 같은데.
하지만 그러다 눈이라도 마주치면 뻘쭘한 상황이 벌어질 것 같다. 순순히 포기하고 고개를 드는데, ─삐끗.
‘?!’
손을 놓쳤다.
자, 여기서 문제. 상체를 난간 밖으로 한껏 숙인 상태에서 손을 놓치면 어떻게 될까?
‘떠, 떨어진다아!’
몸이 난간을 중심으로 한 바퀴 빙글 돌며 떨어진다.
어떻게든 한 손으로라도 난간을 붙잡으려 했지만 허접한 내 힘으로 뭘 어쩌겠는가. 난간에 매달리기는커녕 손톱이 부러지는 느낌과 함께 그대로 추락했다.
체념은 빨랐다.
‘다행히 그리 높지도 않고, 머리부터 떨어지는 상황도 면했으니 죽지는 않겠지.’
낙법을 하면 그럭저럭 괜찮지 않을까.
눈을 감고 대충 타이밍을 세는데, 터억. 딱딱한 바닥 대신 단단한 무언가에 안정적으로 걸쳐지는 느낌이 들었다.
“……?”
“그럼 이렇게 하지.”
“?!”
“이 아이에게 결정을 맡기는 거야.”
뭐야 시발 내려 줘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피하지 않고 시선을 마주한 프리미로 후작이 이내 부드럽게 눈을 접어 웃는다. 위에서 갑자기 사람이 떨어졌음에도 전혀 당황하지 않은 태도였다.
“안녕, 후배님? 이렇게 가까이에서 보는 것은 처음이구나. 눈이 아주 마음에 들어.”
네? 뭐가 마음에 든다고요?
멍하니 눈만 깜빡이다 작동을 멈춘 뇌를 부추겨 가동시키며 고개를 홱 틀었다. 조금 떨어진 곳, 황당한 표정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내려 주세요.”
“얼마든지.”
“아니, 후작님. 이게 무슨…….”
하, 하는 한숨과 함께 그가 얼굴을 문지른다. 연거푸 마른세수를 하던 것도 잠시, 내 정체를 알아차린 듯 짜증 섞인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는 하르트 명예 백작이 아닙니까. 후배님이라니, 그건 또 무슨…….”
“두 번째 영웅이 세 번째 영웅에게 붙인 친근한 호칭이지.”
“그럼 네 번째 영웅인 크루엘 하르트에게도 후배님이라 하실 겁니까?”
“아니. 난 데온 하르트 명예 백작만 마음에 들어서.”
“……그럼 첫 번째 영웅인 네메세우스 장군은 선배님이라 부르시고요?”
“내가 왜 그를 그렇게 불러야 하니?”
“…….”
절대 지지 않고 맞서 언성을 높일 것 같던 입이 다물렸다. 말문이 막힌 것은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우리가 언제 봤다고 나를 마음에 드네 마네 하시는지……?
‘왜 혼자 친해지고 그러세요. 부담스럽게.’
그사이, 어이없음에 몇 번 입을 열었다 닫은 남자가 뒷목이 뻐근해지는 듯 손을 들어 주무른다. 짙은 한숨 섞인 질문이 툭 던져졌다.
“……의도하신 겁니까?”
“그럴 리가. 우연이란다.”
“후배님이라 하셨지요. 그렇다면 친분이 있는 것 아닙니까. 그에게 판단을 맡기는 것은 불공정합니다.”
“내가 그에게 건넨 첫인사를 벌써 잊은 거니? 난 그와 대화를 나눌 수 있을 정도로 가까이에서 보는 것이 처음이란다. 대화 역시 이번이 처음이지.”
“……하, 좋습니다. 좋아요. 어디 한번 물어보도록 하죠.”
남자가 고개를 돌려 나를 본다. 이글거리는 눈빛에 흠칫해서 물러서기도 전에, 인사가 이어졌다.
“일단 처음 뵙겠습니다. 텐더 아미아블입니다. 제국의 남부 변경에서 백작을 맡고 있지요. 이렇게 뵙게 되어 유감입니다.”
“이런, 생각하고 보니 아직 통성명도 안 했구나. 난 스티그마 프리미로란다. 후작이지. 조금 전엔 실례했어.”
“아…… 괜찮습니다. 데온 하르트입니다.”
“이런 예민한 문제에 휘말리시게 해서 죄….”
“시간도 없고, 통성명도 끝냈으니 전부 건너뛰고 바로 본론에 들어가도록 하자. 후배님은 우리의 대화를 들었지?”
“!”
반사적으로 모든 움직임을 멈췄다. 다행히 움직이고 있던 것도 아니고, 흠칫한 것도 아니라 눈치채지는 못했…긴 개뿔. 후작이 웃고 있었다.
그래, ‘영웅’을 상대로 뭘 숨기겠어. 아마 머리 위 테라스에 내가 있다는 것까지 전부 알고 있었겠지.
그래도 긍정을 하기엔 눈치가 보여 눈만 데굴데굴 굴리는데, 더 파고들 것 같던 그가 고개를 돌리며 자연스럽게 이야기를 건너뛰었다.
“적어도 마지막 서로의 의견을 정리한 것 정도는 들었겠지. ‘본론으로 돌아가지.’ 이후.”
그보다 훨씬 전부터 듣고 있었으니 당연히 들었다.
“우리의 논쟁 원인은 아주 간단해. 제국 최남부 지역과 맞닿은 곳에 사는 야만족.”
“바르바이족입니다.”
“이름이 너무 길어 입이 아프구나. 양해를 부탁하지.”
“…….”
싸, 싸우지 마…….
내 앞에서 싸울까 겁난다. 난 용사의 파편을 지니지 못한 이름뿐인 반쪽 영웅이란 말이야. 너희 둘의 싸움에서 살아남을 자신이 없다고.
“아무튼 그 야만족이 오래전부터 아주 골칫거리였단다. 나라가 아닌 부족이라 세부 지도가 아닌 이상 지도에도 표시되지 않는 놈들인데, 툭하면 영지에 쳐들어와 식량을 빼앗고 사람을 죽이니…….”
“판단을 흐리는 말은 하지 마십시오.”
“이건 판단을 흐리는 말이 아니라 사실이지.”
얼굴 위에 우아한 미소를 덧씌운 후작이 몇 걸음 걸어 나가더니 돌아서며 부드럽게 양팔을 펼친다. 웃음기 하나 없는 갈색 눈동자가 나를 직시했다.
“그래서 내가 폐하께 말씀드렸단다. 마계와 전쟁을 치르시겠다면 그 전에 야만족은 정리하시는 편이 좋을 것 같다고. 그들은 왕국이 아닌 부족이니 인간계 내 ‘전쟁’이라 치기에도 애매하잖니? 폐하의 지원은 바라지 않으니 내가 손수 쓸어 버리겠다 했지.”
그렇다면 황제의 입장에서 크게 반대하지 않았을 것이다.
스티그마 프리미로의 병력이 조금 아깝긴 하지만 괜히 억지로 막아서 가장 중요한 스티그마 자체를 잃을 수도 없을 테고.
“그런데 제가 반대했습니다.”
“어리석었지.”
“판단에 영향을 주는 말은….”
“아무튼, 폐하께서는 야만족과 맞닿은 곳에 영지를 둔 아미아블 변경백과 나, 둘이서 조율을 통해 내놓은 방안에 따르겠다 하셨단다. 기한은 3일.”
아미아블 변경백의 눈빛이 흉흉하다. 이러다 정말 둘이 싸우는 거 아니야……?
일이 터지기 전에 서둘러 손을 들고 후작의 말을 받았다. 결론은 그거잖아.
“두 분의 의견이 좁혀지지 않아 제게 선택을 맡기시려는 겁니까? 포섭이냐 박멸이냐?”
마계와의 전쟁에 전면 돌입하기 전에 바르바이족을 박멸하여 후환을 없애는가, 포섭하여 마계를 상대할 또 하나의 아군으로 만드는가.
후작이 만족스럽게 웃었다.
“정확해. 똑똑하구나.”
“그런데…….”
두 사람의 언쟁은 확실하게 들었고, 기억한다. 그렇기에 나는 의문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고개를 갸웃 기울였다.
“제 착각이라면 죄송하지만, 아미아블 변경백은 그들이 마계의 편에 서지 않으리라 확신하는 것 같습니다.”
“같은 인간이잖습니까. 제국을 적대한다 해도 최소한 마계의 편에 서지는 않겠지요.”
“정말 그럴까요?”
“…….”
높은 신분이라 그런가? 황제도 그렇더니 아미아블 백작도 참 생각이 순수하다.
‘아니지, 보통 높은 신분일수록 더 썩기 마련이지.’
이건 그냥 본인들이 책략가보다는 우직한 장수에 가까워서 그런 모양이다. 상대가 황제도 아니고, 내게 의견을 물은 상황이니 모르겠다면 알려 줘야지.
부러 그의 눈을 똑바로 보고 또박또박 말을 뱉었다.
“같은 인간이라 하여 무조건 인간의 편일 것이라는 보장은 없습니다.”
“…….”
아미아블 변경백이 입을 딱 다문다. 후작은 옆에서 고개를 끄덕였다.
“옳은 말이지. 아미아블 변경백, 너는 너무 세상을 이상적으로 보고 있어. 누군가의 판단을 좌우하는 것은 압도적인 무력과 증오란다. 만약 마계가 압도적으로 강하다면 ‘사람’들은 순식간에 그쪽에 붙을 거야. 마찬가지로 증오하는 상대를 조지기 위해서라면 악마에게 영혼을 파는 이 또한 존재하겠지. 영혼도 팔 수 있는데 마왕의 편에 붙는 것 정도를 못할까. ‘종족’은 중요하지 않아.”
조지다니. 고상한 말투로 그런 말을 잘도 한다. 아니, 본인도 실수한 것 같은데. 한순간이지만 그 단어를 뱉고 불쾌한 표정을 지었던 것을 보면.
좀 더 유심히 그의 얼굴을 살피려 했으나 동요 없는 목소리가 날 불렀다.
“알다시피 야만족은 우리와 사이가 나쁘지. 마계의 편이 될 가능성을 생각해서라도 박멸하는 것이 좋아. 그렇지 않니, 후배님?”
“네……?”
“탁월한 대답이야. 후배님이 이쪽의 손을 들어 주었으니 야만족과 관련한 것은 내 의견에 따라 진행하도록 하지. 폐하께는 내가 보고할 테니 변경백은 이만 물러가렴.”
난 분명히 말끝을 올렸을 텐데.
차마 뭐라 하지도 못하고 그저 황당하단 시선을 보냈으나 후작은 상상 이상으로 뻔뻔했다.
당당하게 가라는 시선을 보내는 그를 향해 무슨 그런 억지가 다 있냐는 표정을 짓던 변경백은 더 이상 입씨름해 봤자 소용없다는 것을 아는 듯 흐린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먼저 물러가겠습니다. 두 분은…….”
“난 후배님과 좀 더 대화를 나눌까 해서.”
“?”
나, 난 왜?
“예, 알겠습니다.”
“아니, 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