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11
111. 사실 그들은 알고 있었다(5)
“……이 자리를 탐내는 것은 맞는가?”
“당연히.”
“그렇다면 어찌하여 이 자리를 탐내는 거지?”
“에도아르도 데세르트는 황제의 자리에 걸맞는 인물이 아니기에.”
공작은 아주 오랜 시간, 진득하게 황제를 관찰해 왔다.
그렇기에 보았다. 보일 수밖에 없었다. 황관의 무게를 이기지 못해 짓눌려 죽어 가는 한 아이가. 수명을 대가로 기를 쓰며 황관의 무게를 버티고 있는 모습이 너무 선연해서, 공작은 그가 황제감이 아님을 쉽게 확신할 수 있었다.
고작 머리에 황관을 얹고 있는 것만으로도 제 목숨까지 깎아야 하는 인간을 어찌 황제라 인정하겠는가.
“쉽게 죄책감을 갖고, 그것에 쉽게 무너지지요. 황제란 무릇 앞을 보고 나아가야 하는데, 지나간 것들, 잃은 것들에만 시선을 두고 있으니 이를 어찌 황제라 부르겠습니까.”
환각을 보시지요? 속삭이듯 물었다.
황제의 입에서 무언가 다른 말이 튀어나오기 전에, 공작이 다시 말을 이었다.
“부정하실 필요 없습니다. 이미 확신하고 있으니까. 물론 어떻게 알았냐고도 묻지 마십시오.”
“…….”
“눈가를 반복하여 매만지고, 눈을 꾹 감았다 뜨는 행위를 자주 하시지요. 눈의 초점이 뚜렷하지 않거나 마치 무언가를 보듯 아무것도 없는 허공에 맞춰지기도 합니다. 그렇게 드러내 놓고 상태를 보이시는데, 모르려 해도 모를 수가 없지요.”
환각은 죄책감의 방증. 서류에 도장을 한번 잘못 찍으면 수많은 이들의 목숨이 사라진다. 차라리 전쟁터에 나가 직접 검을 휘두르는 것이 더 나을 정도로 많은 목숨이─
사람을 죽였다. 환각이 늘었다. 도장을 찍었다. 더 많은 환각이 보였다. 전쟁으로 인한 사망자 명단을 확인하고 나면, 악의에 가득찬 환각들로 시야가 새까맣게 물들었다.
“……아니, 그게 아니지.”
황제는 오른손 엄지로 왼 손등을 꾹 눌렀다.
공작의 말은 유려했으나 겨우 그 정도에 쉽게 흔들릴 만큼 어설픈 각오로 황제를 한 것이 아니었다.
고로, 다시 말한다.
“교묘하게 말을 돌리지 마라. 짐은 분명 어찌하여 이 자리를 탐내는가에 대해 물었다. 짐이 황제의 자리에 걸맞지 않는다는 것은 이유가 되지 않아.”
이번엔 공작이 입을 다물었다. 침묵은 그리 길지 않았다.
“……권력을 탐하는 것에 이유가 필요합니까?”
“틀린 말은 아니다만, 그 이유가 전부일 것 같지는 않더군. 정녕 그게 전부인가?”
상황이 역전되었다. 이번에는 황제가 공작을 몰아붙였다.
썩 유쾌하지 않은 상황에서도 한결같은 표정을 고수하던 공작은 금방이라도 답할 듯 대수롭지 않게 입을 열더니, 이내 멈칫- 시선을 올려 황제의 눈을 보았다. 황금안과 마주친 보라색 눈동자가 감기듯 휘어진 눈꺼풀 아래로 숨어들었다.
“사람이든 물건이든, 무언가를 지키기 위해서는 누구보다 강한 권력이 필요하지요.”
“……공 같은 사람에게도 지킬 것이 있나?”
“글쎄요. 어쨌건 황제는 그 권력의 정점입니다. 탐내는 것이 당연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기에 공작은 다시 한번 다짐한다.
상대가 누구든, 심지어 에도아르도라 할지라도, 기필코 그 자리를 차지하겠노라고.
“이유는 대충 알겠다만, 공도 잘 알고 있겠지. 짐이 고작 그 말 몇 마디에 이 자리를 내놓을 리 없다는 것을.”
“…….”
“왜 의미 없는 수고를 들여 가며 의미 없는 말을 하는지 모르겠군. 차라리 잘린 머리에서 황관을 거두어 가지 그러나.”
“─무슨 그런 무서운 말씀을 하십니까. 신은 정당하게 그 자리를 양도받을 생각입니다.”
그 과정에서 약간의 압박은 불가피한 일이겠지만.
우아하게 고개를 숙여 인사를 올렸다.
“어쨌거나 폐하의 뜻은 잘 알았으니 오늘은 이만 물러가도록 하지요.”
폐하께서 전쟁놀이를 더 즐기고 싶으시다는데 별수 있나. 여기서 더 뭐라 말을 보태거나 손을 쓸 수도 없는 노릇, 황제 놀이 좀 더 즐기시게 내버려 두어야지.
보라색 뱀이 눈을 접어 웃었다.
***
황제가 놓친 것이 있다. 데온 하르트가 눈치채고 스티그마가 동의했으며, 아미아블 변경백조차 반박하지 못한 불편한 진실.
‘타 왕국이 마계의 편에 설 가능성.’
‘더 나아가 제국의 귀족이 황제를 배신하고 마계의 편에 붙을 가능성.’
공작은 황제가 마계와의 전쟁을 선언한 순간부터 이미 그 가능성을 점치고 있었다.
그리고 황제를 만나, 대화를 나누고, 확신했다.
황제는 그 가능성을 배제해 두고 있다.
‘폐하께서는 참으로 순진하기도 하시지.’
마음 같아서는 그냥 방치해 두고 흘러가는 상황을 지켜보고만 싶지만, 그럴 수는 없다.
“‘나의 제국’을 그리 허무하게 잃을 수는 없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의식적으로 중얼거리며 손가락을 튕겼다. 연회장과 동떨어진 사람이 없는 공간 어디선가 검은 옷의 사내가 모습을 드러냈다.
“사에린에게 전하세요. ‘그들’을 이용하여 마족들에 대한 악소문을 퍼트리라고.”
“정확히 어떤 종류의 소문을 말씀하시는지…….”
“무엇이든 좋습니다. 배신을 밥 먹듯이 하고, 거짓을 숨 쉬듯 행한다는 소문도 좋고, 사람을 잡아먹는다는 소문도 좋아요. 현실적인 것이든 허황된 것이든, 사람들이 마족을 믿지 못하게 만들기만 하면 됩니다.”
빈민가에서 퍼진 소문은 곧 제국민들 전체에 퍼지고, 제국민들에게 퍼진 소문은 사용인들을 통해 귀족들에게 전달된다. 귀족들의 소문은 곧 황제에게 전달되니, 이를 제국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는 타 왕국들이 놓칠 리 없다.
그렇게 되면 감히 마계에 붙을 생각하는 인간도 없겠지. 구원교를 어떻게든 남겨 둔 이유 중 하나가 바로 이거였다.
사내로부터 긍정의 답을 들은 공작이 흡족한 미소를 띠며 멈췄던 걸음을 옮겼다. 그리고 이내 멈칫.
“……아, 혹시.”
“말씀하십시오.”
“용사의 파편을 가진 자가 그 힘을 잃거나, 특정 상황 혹은 부분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하는 사례가 있습니까?”
“제가 알기로는 없습니다. 명하신다면 조사해 보겠습니다.”
“아마 없을거라 생각되긴 하지만…… 그래도 혹시 모르니 조사해 보세요.”
“예.”
고개를 숙인 사내가 사라지든 말든, 공작은 고개를 숙인 채 턱에 손을 대고 중얼거렸다.
“그렇다는 건…… 지속적인 자해로군요.”
공작은 황제가 장갑을 끼지 않는다는 것을 안다.
언제였을까, 황제와의 대화에서 그의 손에 감긴 붕대를 언급한 적이 있었다. 황제는 경계하며 말을 돌렸지. 그리고 오늘, 그는 장갑을 끼고 왔다. 답은 뻔했다.
[상처가 낫지 않았다.]회복되지 않은 것인가, 지속적인 자해인가.
황제는 ‘영웅’이다. 용사의 파편은 인간의 모든 한계를 뛰어넘게 하는 것. 수명조차 거기에 포함되는 판국에 회복력이 포함되지 않을 리 없다.
그러니 답은 다시 두 개로 갈린다.
[용사의 파편이 힘을 잃은 것인가, 지속적인 자해인가.]얼마 전까지만 해도 전쟁터를 한바탕 휘젓고 있던 황제가 이제 와 힘을 잃었을 리 없다. 시기상으로도 맞지 않으니 이 가정은 폐기.
그렇다면 용사의 파편이 ‘회복력’에 한해서 힘을 잃은 것인가? 공작은 더 세부적으로 파고들고 분석하려는 의식을 여기서 차단했다.
굳이 가능성 낮은 것들에 연연할 필요가 있나. 가장 눈에 띄는 답이 바로 여기 있는데.
‘자해… 자해라……. 그러고 보니 특정 상황에서 손등을 눌렀었지.’
정확하겐 손끝을 세워 뭉근히 비틀듯 눌렀다. 필시 상처를 헤집은 것일 터.
‘어떤 상황이었지?’
─스트레스가 심해질 때, 눈의 초점이 어긋날 때, ‘죽은 자’가 떠오를 만한 상황에서.
……하.
“지독한 인간.”
환각을 그렇게 무식한 방법으로 버티고 있었다니.
***
야외 연회장에 돌아온 황제가 가장 먼저 발견한 것은 다름 아닌 한쪽에서 벌어지고 있는 칼부림이었다.
뒷걸음질 치다 테이블에 막힌 녹색 머리칼의 사내가 곤란하다는 표정을 지으며 고개를 숙인다. 그 위를 가로지른 단검이 테이블 위를 장식하고 있던 촛대를 부쉈다. 와장창! 커다란 소음이 울려 퍼지고, 곳곳에서 숨죽인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이 소란의 중심에서 시원스럽게 흩날리는 흰 머리칼을 본 황제는 조용히 손을 들어 얼굴을 덮었다.
“이건 또 무슨…….”
***
때는 불과 15분 전, 스티그마는 말없이 잔을 들이켜는 데온 하르트를 보고 있었다.
술을 한 모금 넘길 때마다 붉은 눈동자가 꺼림칙한 기운을 담고 가라앉고, 또 한 모금 넘기자 본래도 표정이 적던 얼굴에서 감정이 빠져나간다.
이 모든 과정을 코앞에서 지켜본 그는 나직이 웃었다.
‘그럼 그렇지. 황제를 상대로 그 말도 안 되는 부탁을 한 자가 정상일 턱이 있나.’
미묘하게 정상적이다 했더니, 이런 본성을 숨기고 있었던 모양이다.
생각지 못했던 사실을 알게 되었지만 크게 신경 쓰진 않는다. 애초에 데온 하르트가 마음에 든 이유는 성격 따위가 아닌 ‘제 가문을 멸했다’라는 행동 때문이었으니까.
아마 데온 하르트가 지금보다 더 미친놈이거나 조금 전보다 더 정상적인 인물이었어도 그를 향한 호감은 여전했을 것이다.
‘오히려 본성이 드러났는데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얌전해서 의외이기도 하고.’
그보다 이쯤이면 슬슬 입을 열 때도 되었는데, 영 답이 없다.
결국 기다리다 못한 스티그마가 데온을 불렀다.
“후배님?”
“전 모르는 일입니다.”
“……뭐?”
또렷한 붉은 눈동자가 이쪽을 직시한다. 저 태도도, 말도 이해되지 않아 스티그마는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취한 건 아닌데, 뭐지? 무언가 위화감이 느껴진다. 아직 본성이 전부 드러난 것이 아닌가?
“그 말은, 8년 전쟁 이후 논공행상에서 후배님이 청했던….”
“저는 모르는 일입니다.”
이와 관련된 질문은 받지도, 답하지도 않을 테니 하지 말라는 명백한 신호.
“……그래, 모르는 일이구나.”
이유는 알 수 없지만 맨 정신의 데온 하르트는 이 주제에 관해 대화 나누는 것을 거부하고 있다.
─그렇다면 정신을 흐리게 만들면 되겠지.
근처에 서 있던 기사에게 손짓해 맡겨 두었던 술을 돌려받았다.
“한잔하지 않겠니? 마침 부하들에게서 빼앗은 술이 있단다.”
“……그래도 되는 겁니까?”
“내 부하들인데 무슨 문제가 되겠니. 게다가 이건 내가 금지한 종류의 술이거든.”
지나가는 시종에게 손짓해 깨끗한 빈 잔을 받아 후배님의 손에 쥐여 주었다.
북부에서 힘들게 구해 온 술이랬던가. 스티그마가 담당한 지역은 최남부이니 확실히 구하기 힘들었으리라.
부하 A의 피눈물이 담긴 술을 아무렇지 않게 잔에 따르며 피식 웃었다. 적잖이 불안했는지 미심쩍은 눈으로 잔을 살피던 데온이 슬쩍 질문을 던졌다.
“금지한 술이라면… 마약이라도 들어 있는 겁니까?”
“뭐, 그런 것도 금지 목록에 포함되지만 이건 아니니 걱정 마렴. 그냥 조금 독할 뿐이란다. 설마 내가 후배님께 마약을 먹일까.”
독한 술, 좋아하지?
스티그마가 유혹하듯 눈웃음 지었다. 그를 물끄러미 보던 데온은 잔을 한번 살피고는 망설임 없이 곧장 들이켰다.
……그걸 몇 번 더 마시게 했을 뿐인데.
고개를 꺾었다. 단검이 공기를 가르는 소리를 내며 얼굴이 있던 자리를 찌르고 들어왔다. 이를 명백히 인지한 스티그마가 어색한 웃음을 흘렸다.
방금 분명 쉭- 소리가 났었다. 정말 나를 죽이려 했구나.
“음…… 후배님, 이쯤에서 그만두지 않으련? 이러다 연회장이 완전히 엉망이 되겠구나.”
“너어어… 적이라며어…….”
“사실 거짓말이었단다. 적이 아니야.”
“적이라며어…… 적이라며어어어!”
이런.
한 걸음 물러서며 나직이 혀를 찼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런 거짓말을 하는 게 아니었는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