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13
113. 사실 그들은 알고 있었다(7)
화들짝 놀라 옷깃을 여몄다.
감히 황제 앞에서 흐트러진 옷차림을 하고 있었다니. 물론 이제와서 그런걸 따지기엔 피범벅이 된 적도 있었고, 너무 멀리 와 버린 것 같지만……. 그래도 신경 쓰는 시늉을 하는 것과 안 하는 것은 차이가 크다.
……이 와중에 단추는 어디로 도망간 거야. 단추가 사라진 목 근처의 옷깃을 몇 번 여며 보다가 포기하고 슬쩍 고개를 들어 황제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그는 민망한 내 심정을 이해한 듯 모른 척 말을 돌렸다.
“손목도 확인하라. 뼈가 빠졌었다. 짐이 다시 끼워 넣었지만 혹시 모를 문제가 있을지도 모르지.”
***
마왕의 저주는 몸을 쇠약하게 만든다. 각혈의 빈도가 늘어난 것도 그 탓. 그것이 크루엘이 알고 있는 저주에 대한 정보였다.
그럼에도 이전과 다름없이 멀쩡히 움직이는 것은 정보가 잘못되었기 때문일까, 약점을 보이지 않기 위한 독기 어린 노력 때문일까.
크루엘은, 아니 크루엘을 비롯한 이 자리의 모든 사람들은 급히 낙인을 가리려 애쓰는 데온 하르트를 보며 후자를 확신했다.
‘각혈을 했음에도 그것에 대한 언급 하나 없이 손목이 아프다며 내밀었지.’
손에 묻어난 피는 대수롭지 않게 옷자락에 문질러 닦기도 했다.
진짜 약점인 각혈은 최대한 아무렇지 않게 넘겨 감추고 중요도가 약한 약점을 대신 내놓은 것이다. 이미 처치가 끝나 알아도 큰 쓸모가 없는 약점을.
취한 것도 아니고 쓸데없는 엄살도 아니었다. 황제도 그것을 눈치챈 듯 못 본 척 고개를 돌려 궁의에게 손목의 진료를 명했다.
“뼈는 이미 끼워 넣었기에 따로 할 처치는 없습니다. 붕대를 감아드릴 테니 당분간 손목의 사용을 자제하십시오. 그리고…….”
뒷말은 없었다. 무언가 더 말할 것 같던 궁의는 입을 다물고 데온을 눈물 어린 얼굴로 쳐다봤다. 그의 손을 두 손으로 꼭 잡은 모습에서 그를 안타깝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 여실히 드러나고 있었다.
마음은 이해하지만 이래서는 곤란하다. 기껏 서로가 숨기고 모른 척한 것을 다 드러내고 있지 않은가.
그만두게 해야 한다. 그러나 크루엘은 움직일 수 없었다. 공작이 보고 있었다. 그는 이미 의심받을 만한 일을 넘치도록 했기에 앞으로의 일을 위해서라도 이 이상 움직이는 것은 위험했다.
대신 황제를 돌아봤다. 다행히 그 역시 같은 생각을 한 듯 조용히 궁의를 불렀다.
“수고했으니 물러가라. 그리고 하르트 명예 백작, 그대는 이만 돌아가서 쉬는 것이 좋겠군.”
“……배려에 감사드립니다.”
데온이 등을 돌렸다. 본인이 멀쩡하다는 것을 증명하고 싶은 듯 부축해 드리겠다며 조심스럽게 말을 붙이는 전속 기사까지 거절하고 제 발로 당당히 이 공간을 벗어났다.
마침 들어오던 수하 센제르가 힐긋 그를 보더니 크루엘에게 시선을 던졌다. 시선은 이쪽에 둔 채 가볍게 주먹을 쥐었다 펴는 행동에 크루엘이 멈칫했다.
‘……몸 상태가 안 좋은 상황인데.’
꼭 해야 하나.
직접 짠 계획이다. 사람을 시켜 내내 주시하고 있었고, 드디어 기회가 왔다. 둘도 없는 기회임은 굳이 겪어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계획을 이행하느냐, 미루느냐.
……고민은 짧았다. 크루엘은 어느 정도 정리가 되어 가는 상황을 둘러보고는 센제르에게 다가갔다. 공작이 이쪽을 보는 것이 느껴졌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가서 데온에게 전해. 오늘만큼은 괜히 거리를 돌아다니지 말고 바로 집에 가라고.”
그는.
이것이 둘도 없는 기회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
데온 하르트가 황제의 손에 제압되고, 연회장을 빠져나가기까지.
이 모든 것을 조용히 지켜보던 원인 제공자 스티그마 프리미로는 스륵 눈을 내리깔며 생각에 잠겼다.
상황이 진정되고 여유가 생기니 보이는 것이 있다.
후배님, 데온 하르트의 술주정이.
‘익숙해.’
어딘지 모르게 익숙하다.
저런 과격한 술주정은 드물 텐데. 도대체 왜 이렇게 익숙함을 느끼는 건지.
그냥 넘길 수도 있었으나 기묘하게 거슬린 탓에 스티그마는 답지 않게 조금 집요하게 파고들었다. 조금 전의 상황을 복기하고, 머릿속에서 다시 시간을 되돌려 하나하나 뜯어 살핀다.
──황제의 대사 중 걸리는 것이 있었다.
[이제 현실에 돌아올 시간이다.] [이곳은 전쟁터가 아니다.]……아아.
적을 찾는 술주정. 그를 제압한 황제가 정신 차리라며 내뱉은 발언.
스티그마는 남부에서 많은 전투를 겪었다. 아마 현 공식 영웅 중에서도 가장 많은 전투를 겪었고, 현재진행형으로 겪고 있는 영웅이겠지. 그만큼 그는 이 증상에 대해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다.
‘이건 단순한 술주정이 아니야.’
전쟁을 겪고, 다치고, 사람을 죽이고, 사람이 죽은 것을 본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겪는 증상이 있다.
증상의 영역이 아주 넓고 다양해 다 말할 수는 없지만 일부만 추리자면 환각과 환청, 사람 많은 곳을 극도로 기피하는 증상, 극도로 공격적이거나 우울해지고 무기력해지는 증상 등이 있겠지.
그중 공격적으로 변하는 증상 같은 경우, 눈에 보이는 사람 전부가 적으로 보이거나─
──오로지 ‘적’만을 찾아 헤매게 되는 증상이 있다.
스티그마는 이를 ‘Post-traumatic Stress Disorder’. 줄여서 PTSD라 명명했다.
‘그렇지. 그 어린 나이에 전쟁터에 나왔는데, 멀쩡한 것이 이상하지.’
육체적인 충격과 달리 정신적인 충격은 손을 댈 수 없는 영역이다. 심지어 본인조차 그 진행 정도와 심각성을 모르니 다루기 까다롭고, 사람에 따라 그때의 충격이 영원히 남아 일상생활에 강한 영향을 미치는 경우도 종종 발생했다.
데온 하르트는 14살 때 전쟁터에 나왔다고 들었다. 아직 정신이 단단히 여물지 못한 나이.
‘결국 너도 인간이었구나.’
실망은 없다. 오히려 감탄이 나왔다.
술로 인해 정신력이 약화되었을 때만 이러한 증상을 보인다는 것은, 달리 해석하면 맨 정신일 때는 놀라울 정도의 정신력으로 그것을 억누르고 있다는 뜻 아닌가.
알면 알수록 흥미로운 후배님이다.
데온 하르트에 대한 호감이 더 오르는 것을 느끼며 스티그마는 보일듯 말 듯 한 미소를 지었다.
***
도망치듯 연회장을 빠져나왔다. 리엔이 부축해 드리겠다 했지만 거절했다. 오히려 다른 명령을 내렸지.
[아뇨, 괜찮습니다. 그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쫓아오지 못하도록 막아 주셨으면 합니다. 이를테면 우리 기사단원이라든가, 저기 오고 있는 단이라든가…… 응? 단? 네가 왜 여기에 있… 아, 내가 데려왔구나.] [백작님……?] [명을 따릅니다.] [리엔 경? 아니, 잠시만요. 백작님! 로브를 두고 가셨습니다!’ [……리엔 경, 보내 주세요.] [예.]잊고 있었던 단의 등장에 대충 이런 상황이 펼쳐졌다.
순순히 단을 내 앞에 보내 준 리엔이 냄새를 맡고 슬금슬금 몰려드는 우리 측 기사단원들을 붙잡아 놓겠다며 물러간다. 조금 떨어진 곳에서 누군가 기어이 따라가겠다며 우기다 한 대 얻어맞는 소리가 들렸지만 돌아볼 수 없었다.
단과 눈이 마주쳤거든. 윽, 그 서운한 눈빛 좀 치워 줄래?
“……술 때문에 그래. 일부러 그런게 아니라 술 때문에 잠시 깜빡한 거야.”
“그러셨군요.”
“……미안.”
“사과하실 필요 없습니다. 어서 로브나 입으시지요.”
옷시중을 들겠다는 듯 그가 로브를 입기 편하게 들어 보인다.
그 모습에서 익숙한 누군가의 모습이 비쳐 잠시 말을 잃었다. ……기분 탓이겠지?
“그…… 괜찮으니까 내가 입을게.”
“아닙니다. 도와 드리겠습니다.”
“……에드?”
“그건 누구입니까?”
낯선… 아니, 친하지 않은 남자에게서 익숙한 남자의 냄새가 난다.
마계의 부관 에드를 떠올리며 떨떠름한 표정을 짓고 있는데, 그런 내 표정은 본 단이 흠칫하는가 싶더니 이내 양보할 수 없다는 듯 표정을 단단히 굳혔다.
제발 그런 굳건한 의지는 다른 곳에서나 내세웠으면 좋겠다.
“사죄의 의미이니 부담스러워 하실 필요 없습니다.”
“사죄……?”
“제가 감히 마스터를 시험했잖습니까.”
“……?”
몰라. 모른다고. 시험이라니 그게 무슨 개소리야. 도대체 언제 그런 건데?
아무튼 대충 분위기를 보아하니 절대 양보하지 않을 것 같다. 그럼 그냥 안 입으면 되겠지, 뭐.
“생각하고 보니 로브는 안 입어도 될 것 같은데. 어차피 지금은 밤이라서…….”
“그런 문제가 아닙니다. 가슴팍을 그렇게 다 까고 다니실 겁니까?”
아, 반사적으로 풀어 헤쳐진 옷깃 사이를 매만졌다. 이쯤에 마왕의 낙인이 있었지.
그것을 손끝으로 쓸고 있는데 아직 끝나지 않은 듯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리고 눈에 띄는 외모는요? 백발과 붉은 눈은 거의 상징이나 다름없지 않습니까.”
“……줘. 입을게.”
“입혀 드리겠습니다.”
“…….”
내 옷에 꿀이라도 발라놓았나.
어쨌든 더 거부할 수도 없어 순순히 겉옷 시중을 받았다. 사용인도 아니고,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 데다, 어쩐지 에드가 떠오르게 하는 인간에게 시중을 받다니, 기분이 이상했지만 어쨌든 이걸로 저 끈질긴 놈을 쫓아낼 수 있었으니 만족한다.
이제야 간신히 혼자가 되었네.
‘처음엔 쪽팔려서 혼자 있고 싶었는데…….’
엉망이 된 내 옷차림과 연회장 꼴을 보면 내가 취했을 때 무슨 짓을 한 것이 분명하다.
세상에는 부정할 수 없는 현실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다.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이 안 나고, 그 베일을 들춰 볼 용기도 없지만 알게 모르게 눈에 보이는 정황이 나를 정신적으로 두들겨 패고 있었다.
분명 그랬는데…….
‘지금은 정신적으로 피곤해서 혼자 있고 싶네……?’
단 너 이 자식.
내 정신을 쏙 빼서 쪽팔림을 상쇄시킬 계획이었다면 아주 성공적이었다고 말해 주고 싶다.
단을 떠올리니 머리가 다 지끈거린다. 그러니 다른 생각을 해 보자. 연회장에서 내가 취했을 때…….
‘이런 거 말고!’
잊고 있었던 쪽팔림이 다시 밀려온다. 빨리 다른 생각을……!
……그래, 궁의. 나를 진찰했던 궁의를 떠올리자. 그 사람이 진찰만 한게 아니라 좀 특이한 행동을 하더라.
‘처음엔 내 손을 잡길래 뭔가 했는데.’
손가락으로 손바닥에 글을 썼다. 해석하고는 얼마나 어이가 없던지.
[제가 제발 건강하시라고 말씀드렸지 않습니까!]느낌표까지 아주 분명하게 썼었다.
어… 그래……. 그러면서 보약도 챙겨 줬었지…….
황당함에 그를 보자 울망한 눈으로 시선을 마주해 오는데, 내가 다 소름이 돋았다. 나이도 드실 만큼 드신 분께서 왜 이러세요…….
적절한 타이밍에 황제가 제지해 주어서 망정이지, 조금만 시간을 더 지체했다면 주먹을 날렸을지도 모른다.
‘아, 젠장.’
진정은 커녕, 마음이 더 어지러워졌다. 떠올릴 생각을 잘못 선택했어.
소름이 돋은 팔을 쓸어내리며 걸음을 재촉했다. 어서 집에 돌아가 쉬어야지.
“하르트 명예 백작님?”
“……?”
뭐야, 피곤한데 누구야?
“안녕하십니까, 저는 크루엘 하르트 님을 모시고 있는 센제르라 합니다. 크루엘 님의 말씀을 전하기 위해 왔습니다.”
“…….”
리엔은 이런 놈을 막지 않고 뭐 했대?
……아, 내가 미친개들을 막으라 시켰구나. 몸이 여러 개도 아니고, 이런 놈 하나 정도는 놓칠 만도 하다.
크루엘의 전언이라…… 무슨 개소리를 하려는 건지. 일단 해 보라는 뜻을 담아 고개를 까닥였다.
“오늘만큼은 괜히 거리를 돌아다니지 말고 바로 집에 가라 하셨습니다.”
“……뭐?”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뭐야, 지가 내 보호자라도 돼? 도대체 무슨 속셈이야?
무언가 좀 더 설명을 해 주길 바라는 마음에 그를 봤지만 녀석은 내 반문엔 답도 주지 않고 사라졌다. 상관을 닮아서 재수 없기가 하늘을 찌르네. 퉤.
‘……일단 다시 본론으로 돌아오자.’
침착하고, 생각을 해 보는 거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