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20
120. 불편한 일상(1)
이 시기에 데온 하르트가 자리를 비웠다. 공작은 쪽지를 구겨 쥐며 미미하게 인상을 찌푸렸다.
‘하필 지금…….’
내기를 시작한 지 얼마나 되었다고. 적어도 마계와 전쟁이 제대로 터지기 전에는 제거해야 하는데.
슬쩍 크루엘을 보니 언제나처럼 무표정으로 시립해 있다. 태연해 보이기까지 한 모습을 보고 있자니 괜히 심사가 뒤틀려 공작은 부러 매끄럽게 입꼬리를 올려 웃었다.
“이쯤 되니 정말 감탄이 나오는군요. 데온 하르트가 폐하의 명으로 자리를 비웠답니다.”
“…….”
“어쩜 이리도 운이 좋은지.”
세계가 가호라도 내리는 것일까.
매번 실패를 하고 타이밍을 놓치니 슬슬 오기가 생긴다.
“어서 돌아왔으면 하는군요.”
보라색 눈이 섬뜩하게 빛난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크루엘이 말없이 시선을 내렸다.
둘뿐인 공간에서 신경질적으로 서류에 펜을 휘갈기던 공작이 문득 떠오른 생각에 손을 멈췄다.
“그러고 보니 데온 하르트가 자리를 비워 짜증날 사람들이 이번엔 더 있는 것으로 아는데…….”
황제가 마계와의 전쟁을 알린 날 저녁, 저를 찾아와 얼빠진 소리를 늘어놓던 멍청이들.
데온 하르트 뱀파이어설에 진심으로 흔들려 확실히 조사해야 한다고 주장했었지. 그런 놈들이 귀족파라니, 어찌나 어이가 없던지.
크루엘이 알 수 없는 눈으로 저를 보든 말든, 공작은 얼굴에 한껏 비웃음을 띠고 중얼거렸다.
“정말…… 운이 좋단 말이지.”
***
제국이 전쟁 중지 선언을 했다. 마계와의 전쟁이 시작될 것 같다는 알림은 덤.
이 소식은 삽시간에 대륙 전역에 퍼졌다. 이에 대한 각 왕국의 반응은 다양했다.
“다, 다행이다…….”
“우린 살았어! 살았다고!”
“으허허헝헝!”
그 무시무시한 황제가 전쟁을 중지했다는 것에 안심하고 환호하는 왕국도 있었고.
“뻔뻔하군. 멋대로 전쟁을 시작해놓고 멋대로 멈추다니. 우리를 도대체 뭘로 보는 거지?”
“멋대로 멈춘다고 하면, 우리는 반드시 들어야 하나? 오만한 새끼.”
“우리 왕국이 제국에 지원을 하는 일은 없을 거다.”
마계 문제는 뒤로 미뤄 둔 채 그저 뻔뻔하고 오만한 행태에 분노하는 왕국도 있었으며.
“제국이 싫지만 현 상황에서는 제국이 망하지 않게 하는게 최우선이다. 완전하지 않은 상태로 맞붙고, 무너지는 꼴을 가만히 두고 볼 수는 없지.”
“제국은 인간계의 1차적인 방어벽이자 가장 강력한 방어벽이지. 제국이 망하면 인간계 전체가 망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지금까지 전쟁으로 물자와 병력을 상당히 소모했을 텐데, 마냥 손놓고 있을 수만은 없어.”
“제국이 싫더라도 지금은 제국을 위해야 한다. 무언가 해야 해.”
조금 더 머리를 굴리는 왕국도 있었다.
그리고 놀랍게도 이 모든 왕국 사이에서 공통점이 발견되었는데, 보고서를 통해 이를 가장 먼저 발견한 황제는 나직이 이를 드러내고 웃었다.
“공작의 수가 제법 먹힌 모양이군.”
적지 않은 왕국의 수많은 수뇌부들 중 하나 정도는 ‘그 발언’을 할만도 한데.
정말 놀랍게도, 제국에 강렬한 적의를 보인 왕국조차 빈말로도 ‘차라리 마계의 편에 서고 말지’ 따위의 말을 내뱉은 일은 없었다.
***
보약은 버렸다.
레멤베르가 정말 챙겨 줬더라. 인간계에 버렸다간 무서운 집사님이 증거를 찾아 나를 추궁할 것 같다는 어처구니 없는 불안감 때문에 인간계 말고 마계에 넘어와서 버렸지.
액체여서 그런지 정말 말도 안 되게 무거웠다.
어쨌든 큰 문제 없이 마왕성에 도착했다. 입구에서 신분 확인을 하고 당당히 입성하는데……. 이게 웬걸? 내가 성에 들어서자마자 지나가던 거의 모든 마족들의 고개가 나를 향해 돌아갔다.
전에도 이러긴 했는데, 이렇게 타오르듯 열렬한 시선을 보내진 않았던 탓에 뭐지? 싶은 순간.
“데몬 님!”
“데몬 님이시다!”
“데몬 님께서 오셨다!”
“어서 오세요!”
“데-세.”
“데-세.”
뭐, 뭐야. 이거 뭐야. 데세는 또 뭐고.
주위에 마족들이 점점 모여든다. 심상치 않은 기세에 나도 모르게 주춤 물러섰다.
그러거나 말거나 가슴에 붉은 심장 모양 브로치를 단 마족들이 두 손을 들어 올리며 ‘데-세’를 외친다. 시발 무서워!
차마 그들을 뚫고 내성까지 도망칠 자신이 없어 그저 얼어붙은 채 오들오들 떨고 있는데, 인파가 갈라지더니 한 여자아이가 나타났다.
“데몬 님! 어서 오세요!”
“……리리넬?”
“네!”
세상에 리리넬! 날 구해 주러 왔구나!
11군단장이 납시었으니 이 미친 무리들도 떨어져 나가겠지. 그런 생각을 하며 리리넬을 보는데, 무언가가 눈에 들어왔다. 가슴팍의 붉은 무언가가…….
순간 뇌가 정지했다.
‘……뭐지? 왜 리리넬 가슴팍에도 브로치가 달려 있는 거지?’
그뿐이랴. 옷차림도 뭔가 이상하다.
리리넬이 쓰고 있는 검은 모자 한가운데에 붉은 심장 모양이 수 놓아져 있다. 손에 들고 있는 검은 천에도 붉은 수가 얼핏 보이는 것이 영 불안한데…….
“교주님! 교주님이시다!”
“오오, 교주님!”
……교주니임?
아니겠지. 설마 아닐 거야. 저 귀여운 아이가 그럴 리가 없잖아. 마족이지만.
무언가 착오가 있길 바라는 내 마음을 가볍게 지르밟으며 리리넬이 손에 든 검은 천을 펼친다. 한가운데에 붉은 심장이 새겨진 천이 나부끼며 동시에 어마어마한 함성이 울려 퍼졌다.
“와아아아!”
“데-세.”
“데-세!”
역시 얘네 데몬교 신도들이었냐?!
분명 얼마 전까지만 해도 나름 정상적이었던 것 같은데, 도대체 언제 이렇게 사이비스럽게 변한 거야? 마왕은 이 지경이 되도록 뭐 하고 있었고?
이 모든 것의 원흉인 듯한 리리넬을 돌아봤다. 그녀는 흐뭇한 미소를 띤 채 ‘데-세’를 외치는 마족들을 보고 있었다.
“리리넬?”
“네, 데몬 님!”
“이게 다 뭡니까? ‘데세’는 또 뭐고.”
“데몬 님을 존경하는 자들이에요! ‘데-세’는 데몬 님 만세를 줄여서 표현한 것이고요! 어떠세요?”
“어떻…어떻냐고……. 아, 혈압…….”
아, 안 돼. 침착하자. 여기서 혈압이 심하게 오르거나 피를 토하면 주치의 벤이 달려올 것이다. 마왕성에 오자마자 또 한바탕 일을 치를 수는 없지.
힘겹게 마음을 가라앉히고 조용히 리리넬을 불렀다.
“무슨…… 누가 이런 걸 알려 줬습니까?”
“2군단장한테 조사를 맡겼죠! 인간계의 종교라는 건 이렇다던데, 아닌가요?”
“아예 틀린 건 아닌데…….”
드벨라니아아아!
장난도 정도껏 쳐야지, 순수한 애를 이렇게 망쳐 놓으면 어떡해!
일단 이 심란한 무리부터 치워야겠다. 리리넬이 교주이니 리리넬한테 말하면 되겠지?
“마음은 고맙지만 내가 좀 피곤해서…… 해산시킬 수 있습니까?”
지금 당장.
영영 해산시키면 더 좋고.
“앗, 그런……! 당연하죠! 죄송해요, 데몬 님. 제가 너무 마음만 앞섰나 봐요…….”
리리넬이 허둥지둥 손을 내젓는다. 언제 그랬냐는 듯 그 많던 인파가 우르르 사라졌다.
조금 전보다 한결 조용해진 배경을 두고 리리넬이 눈치를 살피더니 조심스레 말을 붙였다.
“마왕님께 가실 거죠? 문 앞까지 모셔다드릴게요.”
“……부탁합니다.”
교주가 옆에 있으면 그 미친놈들도 달라붙진 않겠지.
정말 끔찍할 정도로 어마어마한 환영식이었다.
***
“왔구나. 생각보다 빨리 왔네.”
집무실 책상 앞에 앉아 서류를 처리하던 마왕이 고개를 들고 웃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붉은 눈과 마주한 마왕의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진다. 무언가 알아차린 듯 눈이 가늘어졌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 느릿하게 걸음을 옮겨 데온의 앞에 섰다.
“너…….”
허리를 살짝 숙여 얼굴을 바짝 대고, 눈을 마주한다. 섬뜩한 역안이 붉은 눈을 들여다봤다.
“무언가 중요한 말을 들었구나.”
뭐지? 뭘까?
무슨 말을 들었길래 이 인간 아이가 이렇게 표정 관리를 못하는 것일까.
나름대로 관리를 한다고 한 것 같지만, 고작 그 정도로 오랜 시간을 산 마왕의 눈을 속일 수는 없다.
손을 뻗어 턱을 쥐고 들어 올렸다. 금방이라도 꿰뚫어 볼 듯 눈을 마주하고 읊조리듯 조용조용 묻는다.
“이야기해 줄 생각은?”
“…….”
“그래, 없겠지. 그런데 지금 이 상황을 내가 어떻게 받아들일지 걱정은 안 해? 네 목숨이 위태로울지도 모른다는 생각은?”
대답은 없었다.
마왕은 오히려 그 모습에서 결정적인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마왕이나 황제, 마계나 제국에 관한 정보였다면 이렇게 동요했을 리 없다. 그렇다고 황제의 편에 붙었다고 하기엔 침묵이 너무 노골적이다. 정말 황제의 편이었다면 그럴싸하게 둘러댔겠지.
그러니 남은 건…….
“황제가 승부수를 던졌구나.”
“……그, 렇습니다.”
“괘씸하게도.”
하긴, 시기가 시기이니 그럴 만도 하지.
이를 내게 침묵했다는 것은 흔들린다는 것일까, 그저 내게 들키고 싶지 않았을 뿐일까.
아마 후자이리라. 이를 알게 되면 황제가 괘씸한 것과 별개로 나 역시 거기에 동참할 테니.
“넌 내가 눈치채지 못했으면 끝까지 말하지 않을 생각이었겠지?”
“…….”
“괜찮아. 이해 못 하는 것도 아니니.”
하지만, 그래…….
이건 확실히 못 박아 두어야겠다.
턱을 쥔 손을 미끄러지듯 내려 목을 감싸 쥐었다. 자연히 낙인의 위치에 엄지가 닿아 그것을 꾹 누르자 이 상황에 두려움을 느끼는지 데온의 몸이 티 나지 않게 떨렸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이 어디인지 잘 알고 있겠지.”
도망친다 하여 내가 놓아줄 것 같은가.
아무리 네가 자유롭게 제국과 마왕성을 오간다지만 이걸 망각해서는 곤란하다.
[네가 있어야 할 곳은 여기야.]“대답이 없네.”
“…….”
“왜, 또 바짓가랑이라도 붙잡아 줘?”
가늘게 눈을 휘어 웃었다.
대답 없는 데온의 목을 놓고 돌아서서 창문을 열었다. 세 개의 둥근 달이 훤히 드러난 탁 트인 풍경이 펼쳐졌다.
“달이 예쁘지?”
“…….”
“넌 햇빛에 약하지. 그러니 태양을 신경 쓸 필요 없는 이곳을 택해. 언제나 밤이라지만 저렇게 밝은 달이 뜨는데 뭐 어때.”
이러한 배경을 등지고 데온을 향해 양팔을 펼치며 활짝 웃었다. 환한 달빛 탓에 역광이 드리웠다.
“이곳에 있는다면 나를 제외한 모든 마족들이 네게 무릎을 꿇을 거야. 아니, 원한다면 나도 꿇어 주지.”
객관적으로 따졌을 때 데온 하르트가 이렇게까지 해 가며 잡아야 할 정도의 인물이냐 묻는다면 망설임 없이 고개를 저을 것이다.
하지만 마왕에게는 그 무엇보다 이 권태로움을 쫓아낼 인물이 중요했고, 또한 현재 황제와 벌이고 있는 암묵적인 게임에서 이기는 것이 중요했다.
그렇기에 망설임 없이 말할 수 있었다.
“갖고 싶은 것이 있다면 뭐든 쥐어 주지. 이곳을 택하기만 한다면 지금까지 그랬던 것처럼 인간계에 나가는 것에 대해 크게 터치하지 않을 거야. 인간계의 땅이 갖고 싶다면 점령해서 줄 수도 있어.”
제국의 황제는 그 지위상 데온 하르트에게 무언가를 주는 데 이것저것 제약이 많을 것이다.
하지만 이곳은 마왕의 권력이 절대적인 곳. 마왕은 그가 바라는 것이 무엇이든 황제가 주는 것 이상의 것을 줄 수 있노라 자신했다.
마음 같아서는 좀 더 몰아붙여 확답을 얻어 내고 싶지만…….
‘몰아붙이는 것은 여기까지.’
더 몰아붙였다간 오히려 마음이 떠날 수도 있으니.
마왕은 순순히 물러섰다.
“그러니 잘 생각해 봐.”
이만 가 보라는 손짓에 데온은 말없이 몸을 돌렸다.
얼마 되지 않는 걸음이 문 앞에 도달했을 때, 마왕이 한 가지 잊었다는 듯 그의 등에 대고 덧붙였다.
“돌아온 것은 환영하지만 낙인은 지우지 않을 거야.”
“…….”
오히려 그 낙인에 위치 추적 기능 외의 다른 것을 추가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을 알기에, 데온은 침묵으로 답을 대신하고 문을 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