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24
124. 세계의 가호(1)
뒷말은 삼켰다. 그러나 늘 그렇듯 눈치 빠른 부관은 삼킨 뒷말까지 눈치채고 즉각 답했다.
“아닙니다. 진짜 피처럼 느껴지도록 혈향을 첨가한 것뿐입니다.”
“아니, 그냥 눈이면 충분한데 왜 굳이 이런 걸 만들어서…….”
“전쟁은 기후와 분위기에 큰 영향을 받으니까요. 인간계와 전쟁을 치를 때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지 않을까 해서 개발한 것입니다. 그보다 데몬 님, 손이…….”
애들 장난감용이 아니었구나. 하긴, 그러니 마왕의 허락이 필요한 거겠지.
‘그보다…….’
에드의 시선을 좇아 피가 뚝뚝 떨어지는 손끝을 보았다.
막대기만 자르려 했는데, 손가락까지 잘라 버렸네. 조금 베인 정도인데, 설마 고작 이 정도에 벤이 오진 않….
“데몬 님!”
……오네?
직업 정신에도 정도가 있지, 별것도 아닌 일에 오다니. 넌 피곤하지도 않냐?
황당한 눈으로 그를 보며 무심코 다친 손가락을 입에 넣으려 하는데, 누군가 손목을 잡아챘다.
“……에드?”
“벤, 어서 치료하도록. 생각보다 제법 깊게 베였다.”
다친 손가락을 손수건으로 감싼 그가 상처 부위를 지혈하듯 꾹 누른다. 찌릿한 고통에 절로 미간이 찌푸려졌다.
서둘러 벤이 다가오고, 에드가 손수건을 떼며 일어난다. 멎었던 피가 다시 퐁퐁 솟아나기 시작했다. 벤이 나직이 혀를 찼다.
“마법은 못 쓰니 일단 소독부터 하고… 지혈하고 꿰매야 할 것 같습니다.”
“데몬 님께서 피를 입에 넣는 일이 없도록 제대로 치료해 두길 바라지.”
연락이 왔는지 주머니에서 통신석을 꺼낸 에드가 벤을 향해 말을 툭 던지고 곧장 통신석을 연결하며 자리를 피했다.
저거 일부러 저런 거다. 벤이 반박할 틈을 주지 않았잖아.
벤도 억울한지 부들부들 떨었으나, 이내 투철한 직업 정신을 버리지 못하고 씩씩대며 상처를 치료하기 시작했다.
아 따가…! 자, 잠깐. 마취를 안 했는데…!
‘……음, 표정이 험악하네.’
그냥 입 닥치고 있자.
마취 없이 생으로 상처를 꿰매는 흔치 않은 경험에 넋을 놓고 있길 잠시, 꼼꼼히 매듭까지 지은 벤이 뒤늦게 그 사실을 깨달은 듯 흠칫 몸을 떨었다.
덜덜 떨리는 눈동자가 나를 향했다.
“데…몬 님, 그… 괜찮…으십니까?”
“네… 뭐…….”
누가 보면 내가 죽이려 드는 줄 알겠다. 공포에 질린 그를 진정시키기 위해 초연하게 웃어 보였다. 아프긴 했지만 내 몸에 해를 끼친 것도 아니고, 이미 다 끝났는데 내가 뭘 어쩌겠어.
……그런데 왜 더 떨고 있는 건데.
“어떻게… 어떻게 그런 실수를 할 수가 있지?”
“벤…?”
“정말 죄송합니다 데몬 님! 죽어도 할 말이 없습니다!”
전 주치의 실격입니다…!
얼핏 울먹이는 듯한 그 말을 듣고 나서야 그가 떠는 이유를 알 수 있었다. 그러니까 그는,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는 것이다. 직업 정신이 투철한 만큼 이런 유의 실수를 용납 못 하는구나.
“……정말 괜찮으니 더 사과할 필요 없습니다. 안 괜찮았으면 내가 진작 말했을 겁니다.”
무서워서 말 못 한 거지만. 정말 죽을 것같이 아팠으면 말했을 것이다. 나도 내 목숨은 소중하거든.
이러다 눈앞에서 머리 박고 죽을 기세라 부담스러운 마음에 서둘러 그를 말렸다.
그런데 평소라면 이쯤에서 그만뒀을 벤이 도리어 고개를 번쩍 들고 눈을 부라렸다.
“그래! 그거 말입니다. 왜 진작 말하지 않으셨습니까! 아프셨을 텐데요!”
처음 보는 사나운 태도에 흠칫 놀라 입을 다물었다.
내 침묵을 어떻게 이해한 건지, 벤이 높게 치솟았던 눈꼬리를 뚝 떨구고 침울하게 중얼거리듯 말했다.
“데몬 님… 주치의 앞에서 고통을 참으시면 안 됩니다. 마력석 신호에도 한계가 있는 데다, 요즘은 그 신호조차 불안정하단 말입니다. 데몬 님께서 어디가 불편하다, 아프다 표현하셔야 최소한의 고통으로 수월한 치료를 할 수 있는데…….”
“…….”
“마취 없이 생으로 꿰매다니… 그걸 버틴 데몬 님은 대체…….”
“…….”
“게다가 괜찮다고… 질책도 없이…… 이건 너무 너그러우신 거 아닙니까…….”
음, 이 분위기를 어쩌지.
잠시 눈을 굴리다가 꿰맨 티가 나는 손가락을 내밀었다.
“붕대는 감지 않는 겁니까?”
“아…! 아뇨, 감염 예방을 위해서라도 감아야 합니다. 잠시….”
벤이 주섬주섬 거즈와 붕대를 꺼내 상처에 대고 감고 있을 때, 그사이 통신을 마친 에드가 내게 다가왔다.
심히 죄송스러운 표정을 보아하니 무슨 일이 터진 모양이다. 내 잘못은 아닌 것 같고.
“데몬 님, 마왕님께서 부르십니다. 급히 같이 가 봐야 할 곳이 생겼다고 하셨습니다.”
역시나.
잘못한 것이 없으니 꿀릴 것도 없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자 이번엔 힐긋 벤에게 시선을 던진 그가 비꼬듯 재촉했다.
“아직도 치료를 못 끝냈나?”
“……이제 막 끝났다. 모셔 가. ……아, 데몬 님. 되도록 상처에 물이 닿지 않도록 하십시오.”
알겠다며 고개를 끄덕이고 에드를 쫓아 지체 없이 걸음을 옮겼다.
마왕의 집무실에 도착해 문을 열었을 때, 마왕은 골치 아픈 듯 이마를 짚고 있었다.
각도상 언뜻 보이는 짜증 가득한 얼굴과 달리 목소리는 언제나와 같이 상냥하게 날 맞이했지만.
얼굴조차 마주하지 않고 상대를 알아챈 듯, 미동도 없이 눈을 내리깐 그의 입에서 여상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왔어? 그렇지 않아도 기분이 좋지 않다고 들었는데, 기분 풀라고 해 놓고 이렇게 불렀네. 미안해. 급한 일이 생겼어. 아니, 급하다기보다는 귀찮고 짜증 나는 일이지.”
마침내 그가 고개를 들었다. 조금 전의 짜증은 온데간데없이 평온한 얼굴이 나를 마주한다.
표정 변화 봐라. 소름 끼치네. 역시 아무리 물렁해 보여도 마왕은 마왕이구나.
“요정족의 불평과 짜증을 들어 주러 갈 거야. 물론 이건 어디까지나 내 입장에서의 이야기지만.”
“…….”
“요정족들의 땅은 이곳 심연에 위치한 것치고는 상당히 아름답지. 때아닌 눈도 괜찮지만 기분 전환 하기엔 이쪽이 더 나쁘지 않을 거야.”
같이 가자.
마왕이 싱긋 웃으며 손을 내민다. 나는 가만히 그를 쳐다봤다.
‘평소 내가 아는 마왕이었다면 ‘같이 가지 않을래?’ 하고 권유형 말투를 썼을 텐데.’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말.
의미 없는 눈싸움을 멈추고 그의 손 위에 내 손을 얹었다.
시야가 바뀌었다.
***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이로써 이 게임의 주도권이 아직 내게 있다는 것을 확인했다.
그렇다면 황제 또한 다르진 않겠지. 조금 안심했다.
‘여유로운 척하더니.’
권유형 말투도 버릴 정도로 마음이 급한 모양이네.
필시 내 기분이 나쁘다는 이야기를 들어서 그런 것이리라.
‘내가 황제의 편이 될까 봐 걱정이라도 되나 보지?’
응? 마왕.
이 게임에서 패배할까, 겁이라도 나나 봐?
***
마왕은 곧장 요정족의 땅으로 이동하지 않았다.
[어, 마왕님, 데몬 님. 여긴 무슨 일로…?!] [가자.] [!?]그는 마왕성의 정원 어딘가로 이동해 괴식물을 가꾸던 히엔을 납치하다시피 데리고 이동했고, 마침내 나는 금발에 녹색 눈을 한 뾰족한 귀의 미남자를 볼 수 있었다.
“네 그 마기 때문에 세계가 맡긴 씨앗이 오염이 되어 버렸다. 어떻게 책임질 거지?”
물론 그는 마왕을 보기가 무섭게 서슬 퍼런 기세로 따졌지만.
나는 숨죽이고 눈을 굴려 그가 마왕의 눈앞에 들이민 주먹만 한 씨앗을 살폈다. 마치 곰팡이가 핀 것처럼 검은 얼룩이 잔뜩 생겨 있는 모습.
저게 그 마기에 오염된 건가? 내가 보기엔 그냥 곰팡이 같은데…….
생각이 끝나기도 전에 씨앗에서 검은 연기가 스멀스멀 나왔다. 오, 제기랄. 마기 맞네.
“……히엔.”
팔짱을 낀 채 요정왕으로 보이는 남자의 항의를 무표정으로 듣던 마왕이 턱으로 씨앗을 가리켰다.
“소생 가능한지 살펴봐.”
“네, 네……!”
손을 덜덜 떨며 씨앗을 받아 든 히엔이 극도의 흥분으로 눈을 빛내며 씨앗을 살핀다. 순수한 흥미로 빛나던 눈은 이내 마왕이 물어본 ‘소생 가능 여부’를 떠올린 듯 삽시간에 생기를 잃고 가라앉았다.
표정만 봐도 알 수 있었다.
불가능하구나.
“싹을 틔우고 자라게 하는 것은 아예 불가능하진 않을 것 같지만… 마기에 오염된 것은 어찌할 수 없습니다.”
“……이런.”
“책임져라.”
요정왕이 고운 미간을 험악하게 일그러트리며 으르렁거린다.
마왕이 곤란한 듯 뺨을 긁적이더니 화제를 돌리려는 듯 다른 질문을 던졌다.
“세계가 직접 맡긴 거라고 했나?”
“그래. 우리는 세계의 의지를 가장 존중하는 종족이지. 그렇기에 세계가 이 씨앗을 믿고 맡긴 것이고.”
“그럼 그렇게 필사적일 이유가 없잖아.”
“뭐?”
마왕이 어깨를 으쓱했다.
“네 입으로 말했지, ‘존중’이라고. 그런데 왜 그깟 씨앗 하나에 쩔쩔매는 거지? 이건 세계를 존중하는 것을 넘어 마치 너희 종족이 세계의 개라도 되는 것 같은데.”
“무슨 헛소리를!”
“헛소리가 아니라 그냥 그렇게 보인다는 거지.”
응 그래, 헛소리가 아니라 그냥 도발로 보이네.
생존을 위해 마왕으로부터 슬금슬금 멀어졌다. 요정왕의 표정으로 보건대, 거짓말이 아니라 정말로 사람 하나 죽일 것 같은 기세다.
그러나 생각 외로 그는 분노를 터트리지 않았다. 오히려 땅이 꺼질듯한 한숨으로 분노를 삭히고 한결 차분해진 목소리로 해탈한 듯 중얼거렸다.
“그래… 그 말대로 우리 종족이 세계의 개도 아니고, 씨앗 건은 이미 돌이킬 수 없게 되었으니 넘어가고…….“
가만히 듣고 있던 히엔이 손을 번쩍 들었다.
“저…… 그럼 이 씨앗은…….”
“……네가 갖든지.”
“감사합니다!”
매번 느끼는 거지만 얘도 진짜 정상이 아니야…….
황당하단 수장들의 시선이 느껴지지도 않는지, 히엔이 희희낙락하며 조심스럽게 씨앗을 만지작거린다.
주변은 보이지도 않는다는 듯한 태도에 요정왕이 마왕을 돌아본다. 내게도 읽힐 정도로 선명한 눈빛이 ‘쟤 뭐냐?’라고 묻고 있었다. 그걸 모를 리 없는 마왕은 조용히 이마를 짚었다.
잠시 침묵하던 요정왕이 다시 천천히 말을 이었다.
“……마물부터 어떻게 좀 처리했으면 하는데.”
“우리도 열심히 사냥 중이야. 다만 처리하는 수보다 불어나는 수가 더 많을 뿐이지. 용사라도 있다면 조금 억제되었겠지만…….”
예전에 마왕성에서 회의를 하며 이와 비슷한 대화가 오갈 때 마왕이 저런 식으로 말하며 나를 본 적이 있기에 잠시 긴장했으나, 다행히도 내게 시선이 닿는 일은 없었다.
‘……아니, 근데 왜 내가 긴장을 하고 안심을 해야 하는 거지?’
억울하네. 나랑은 상관없는 일인데.
아예 그들로부터 시선을 떼고 다시 몇 걸음 옮겨 마왕으로부터 더 떨어졌다. 그러다 보니 자연히 호숫가에 도달했는데, 그곳에서 무언가를 발견할 수 있었다.
‘뭐지? 웬 사람이…….’
마족? 요정족?
마왕을 대하는 요정왕의 태도를 봐선 마족이 연못에 있는 것이 가능할 리 없고. 그럼 요정족인가?
……지느러미가 달려 있는데?
“마치 용사의 탄생을 기다리는 듯한 발언이군. 넌 용사가 나타나지 않길 바라고 있어야 할 텐데. 그러고 보니 내가 세계가 벼르고 있다고 말해 준 적이 있었나?”
아, 웃었다. 나한테 웃어 준 거, 맞지?
누군진 모르지만 웃는 게 상당히 우아하시네.
“글쎄, 하지만 내가 이 말을 했던 것은 확실히 기억하지. ‘어차피 용사는 등장할 테고, 나는 그를 맞이하게 되겠지. 이건 지금까지 그래 왔던 일이다. 이제 와서 새삼 두려워해야 할 이유는 어디에도 없어.’”
“너…….”
한쪽에서 벌어지는 두 종족 우두머리들의 살벌한 대화는 의도적으로 외면했다. 눈앞의 지느러미 인간이 수면 밖으로 쑤욱 나오지만 않았어도 평생 외면 가능했을 텐데.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깜짝 놀란 와중에도 지느러미가 인간의 다리로 변하는 것은 제법 신비로웠다. 타박. 그렇게 드러난 하얀 발이 지면을 밟는다.
“마왕은 이번에 탄생하는 용사의 손에 죽을 거예요.”
고상하고 맑은 목소리에 나는 할 말을 잃었다. 목소리에 감탄해서? 아니, 두 수장의 주목을 끌어모으는 내용 때문에.
갑자기 등장하셔서 그렇게 이목을 끄는 말을 하시면 어떡합니까…….
역시나, 마왕과 요정왕의 시선이 이쪽을 향해 있다. 다행히도 내가 아닌 저 여자에게 집중되어 있다지만 그 시선의 범위에 있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혀 다시 슬금슬금 자리를 이동…하려 했으나 여자에게 잡혔다!
히엔, 히엔! 살려 줘! 여기선 네가 가장 나은 것 같아. 차라리 네 옆에 있을래!
‘……씨앗에 홀렸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