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 Not That Kind of Talent RAW novel - Chapter 130
130. 외줄타기(4)
단이 이쪽을 보며 방긋 웃는다. 쟤는 무슨 볼 때마다 성격이 변해 있어. 그만큼 내가 익숙해진 거야, 아니면 후작저의 인물들이 쟤 성격에 영향을 준 거야?
아니, 지금 그걸 생각할 때가 아니지. 쓸데없는 생각들은 치워 버리고 단을 빤히 쳐다봤다. 표정을 굳히는 것도 잊지 않았다.
“……그 말을 하는 의도가 뭐지?”
“그냥 그런 소문이 있다고 전해 드리는 겁니다. 후작님도 알고 계셔야 할 것 같아서.”
“…….”
눈에 힘을 풀었다.
이 녀석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도통 모르겠다. 적인가, 아군인가. 애매하게 가까워져서 애매하게 편해지고, 애매하게 내 사람이 된 이 녀석을 어떻게 해야 할까.
……지금 고민해 봤자 답은 나오지 않는다. 다시 시선을 내려 서류를 보며 중얼거렸다.
“나만 평화롭네. 이곳이 군막이 아니었다면 전쟁이 터지지 않았다고 착각했을지도 모르겠어.”
“그런 일은 없지 않았을까요. 전쟁의 포문이 워낙 화려하게 터져서.”
“……그것도 그렇네.”
아 스트레스.
조용히 손수건을 꺼내 입에 댔다. 단의 상단에서 힘들게 구해 유통한 흡수력 좋은 천이라더니 과언이 아닌 듯 왈칵 나온 피가 새는 것 없이 삽시간에 손수건에 스민다.
그것을 착착 정리하여 주머니에 챙겨 넣으며 속으로 툴툴거렸다.
‘각혈 빈도가 줄긴 개뿔. 이전과 다를 게 없잖아.’
이게 다 스트레스 때문이다. 전쟁 초반에 자주 불려다녔을 때 지긋지긋하게 피를 토했던 것을 생각하면 틀림없어.
한쪽에서 따끔한 시선이 느껴진다. 고개를 돌리자 눈을 가늘게 뜨고 이쪽을 보는 단과 눈이 마주쳤다. 맞다, 쟤랑 대화 중이었지. 어디까지 이야기했더라.
……그래, 전쟁의 포문이 화려하게 터졌어쩌구.
“두 군주의 설전이 아주 화려하긴 했지.”
“외모도 화려했지요.”
“…….”
“농담입니다.”
“……넌 레멤베르랑 거리를 두는 게 좋겠다.”
차갑게 일갈하고 펜을 쥐었다. 그러나 손은 펜을 쥐기만 했을 뿐, 바로 움직이지 않았다.
상당히 인상적이었던 그날의 선전포고가 떠올라서, 어느샌가 나는 손가락으로 책상을 톡톡 두드리며 생각에 잠겼다.
***
생각 외로 마왕은 아주 정석적인 절차를 밟아 선전포고를 했다.
이걸 정석적이라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갑작스럽게 공격을 가해 온 것도 아니니 대충 비슷하다고 봐도 되겠지.
본인이 내린 마법 금지령은 어디에 팔아먹은 건지, 그는 제 마력을 과시하듯 전 대륙에 영상 마법을 띄웠다. 제국뿐만 아니라 각 왕국, 심지어 작은 시골 마을조차 이를 볼 수 있도록.
모두가 생소한 마법에 이목을 집중하는 가운데, 마왕의 대행을 맡은 건지 1군단장 제이카르가 화면에 모습을 드러냈다.
– 마계에서 인간계에 알린다.
형식 따윈 잘라먹은 시작이었다.
– 균형과 평화를 사랑하는 마계의 입장에서 제국의 대륙 정복 전쟁이 정도 이상으로 과열되어 위험하다고 판단한 바, 도를 넘은 제국의 행위가 인간계를 무너뜨리기 전에 막기 위한 목적으로 제국에 선전포고를 한다.
솔직히 여기서 뿜었다.
균형…풉, 과 평화르을… 사랑…크흑, 하는…마계라니……. 시간이 많이 흘러 마계와 전쟁을 치렀던 이들이 살아 있지 않을 정도라지만, 그래도 그런 거짓말에 속을 정도는 아니다.
당장 역사서만 봐도….
‘……평민들이 역사서를 볼 일이… 있긴 한가?’
아, 아아?
조용히 입을 틀어막았다. 멋대로 뿜고 멋대로 입을 틀어막아서 주변은 또 피를 토하신 거냐며 난리가 났지만, 그들의 목소리는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귀족의 품위 어쩌구 하며 의무적으로 교육을 하는 귀족가도 아니고, 그저 잘 먹고 잘살면 만족하는 평민들이 역사에 관심을 둘 리가 없다! 제이카르는, 아니 마왕은 이걸 노린 건가!
– 목적이 목적이니만큼 우리는 제국이 이 이상 움직이지 않겠다 약속하면 순순히 물러나 ‘줄’ 의향도 있다.
와 미친. 쟤 방금 도발했어.
어쩐지 보지 않아도 황제의 표정을 알 것 같아 떨떠름하게 화면을 보고 있길 잠시, 화면 밖 한쪽에 시선을 던진 제이카르가 다시 정면을 응시하며 부드럽게 입꼬리를 올렸다.
분명 처음 보는 미소일진대, 왜 이리 익숙한지.
‘누구를 흉내 내며 웃었는지 알겠다…….’
마왕.
걔가 웃는 것 하나는 예쁘게 잘 웃긴 하지. 긴장을 풀어 주는 미소라고 해야 할까.
– 보고 있나, 황제? 그쪽에도 주술사가 있겠지. 마왕님께서 허락하셨다. 할 수 있다면 이 마법에 간섭하여 어디 한번 답해 보도록. 부러 장벽을 낮추었으니 어렵진 않을 것이다.
……그것도 말이 예뻐야 통할 텐데 말이지. 제이카르는 말투부터가 탈락이다.
그보다 이로써 주술사가 마법의 영역에 손을 뻗칠 수 있다는 것이 증명되었군. 황실에는 전속 주술사가 있으니 적어도 주술사를 구하는 쪽의 문제는 걱정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주술사의 실력이 저 마법에 간섭 가능한 정도인지의 여부와 황제가 저 말에 응하느냐의 문제인데….’
황제는 도발을 피하는 자가 아니다. 분명 주술사를 불러 간섭하게 할 테지.
아니나 다를까, 장벽을 낮추었다는 말이 사실인지 주술사의 실력이 뛰어난 건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아 허공에 뜬 화면이 치직- 흔들리더니 이내 황제의 얼굴로 바뀌었다.
금발 금안의 황제치고는 젊은 사내가 옥좌 팔걸이에 올려 둔 책 위에 팔을 걸치고 가당찮다는 듯 화면을 노려보고 있었다.
– 그대가 짖는 소리는 잘 들었다. 마족은 사람의 말 대신 독특하게 짖을 줄 안다는 새로운 정보를 얻었군. 서기관에게 제대로 기록해 두라 해야겠어.
여기저기서 웃음이 튀어나왔다.
긴장을 풀기 위한 거짓된 웃음소리. 아마 다들 느끼고 있으리라. 자칫하면 제국이 인간계에서 완전히 고립될 수 있다는 것을. 그렇게 되면 어떠한 지원도 없이 홀로 외롭게 마계와 싸워야 한다는 것을.
그래서 나는 웃을 수 없었다.
‘이거 완전히 말려 버렸는데.’
다른 이들보다 황제에 대해 조금 더 잘 알고 있는 만큼 확신한다. 황제는 대륙 정복을 절대 포기하지 않는다. 아마 숨이 붙어 있는 한, 검을 쥐려 하겠지.
그런 상황에서 제이카르가, 아니 마왕이 황제가 순순히 물러설 상황을 대비해 ‘물러나 줄 수 있다’라며 도발까지 했으니 어떻게 되겠는가.
‘걸어오는 싸움은 피하지 않고, 도발에는 기꺼이 응하는 우리의 폐하께서 어떤 선택을 하시겠느냐 이 말이야…!’
다행히도 황제 역시 머리가 제법 돌아가는 덕에 직설적으로 ‘정복 전쟁 안 그만둘 건데? 계속할 건데?’라고 답하는 대신 상대 말의 맹점부터 꼬집었다.
– 마족이 균형과 평화를 사랑한다니, 천지가 뒤집힐 일이군. 그대들이 얼마나 잔인한지는 온 세상이 알고 있을진대, 어디서 뻔뻔하게 거짓을 입에 올리는가. 당장 짐이 이렇게 얼굴을 드러내고 있는 것에비해 마왕은 1군단장의 뒤에 숨어 그를 조종하고 있지 않나. 그런 놈을 군주로 둔 녀석들의 성격이야 안 봐도 훤하다.
사람 좋은 가면을 쓰고 거짓을 일삼으며, 내부 분열을 유도하거나, 뒤통수를 치지.
“……오.”
“…….”
다시 흐름이 바뀌었다. 언제부턴가 뿌려져 있던 마족에 대한 불신이 거름이 되어 싹을 틔운다. 불안이 감돌던 사람들의 눈빛에 굳은 의지와 생기가 서렸다.
일개 제국민의 입장에서는 다행이긴 한데, 이해가 가지 않는다. 마왕이 황제에 대해 아예 모르는 것도 아닌데 어째서 간섭을 허용한 거지? 이런 상황을 예상하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까지 생각이 미친 순간, 허공에 뜬 화면 바로 옆에 새로운 화면이 생겼다.
– 숨었다니, 말이 섭하네.
흰자와 검은자의 색이 뒤바뀐 역안. 싱긋 미소 짓는 익숙한 얼굴.
마왕이다. 안 그럴 것처럼 보이더니, 결국 그도 황제의 도발에 넘어간 모양이다.
간섭 차단도 아니고 아예 화면을 하나 더 만들다니….
‘아니, 마력이 남아도세요? 그보다 마법 금지령은 진짜 버린 거야?’
– 설마 황제가 직접 나설 줄이야. 덕분에 처음으로 얼굴을 직접 보게 되었네. 물론 직접이라기엔 애매하지만, 그래도 그림이 아닌 살아 움직이는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니…. 나이는 알고 있었지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젊게 생겼어. 정말 의외야.
– ……말의 요지를 흐리고 있군. 혹 짐의 발언에서 무언가 켕기는 부분이라도 있었나?
– 켕기는 부분이라니, 뭐가?
마왕이 눈을 접으며 그린 듯한 미소를 지었다. 눈 빼고는 인간과 별 차이 없는 호감형 외모가 빛을 발했다.
– 우리가 한 말에 거짓은 없는데?
하녀들이 감탄을 표하는 소리가 들렸다.
저거 분명 의도한 거다. 일부러 눈웃음을 지어서 인간과 다른 부분을 감췄어.
“저 얼굴이면 뭘 해도…….”
“저 사람, 아니 저 마족… 마왕이지? 믿겠습니다, 마왕님…….”
황제도 저 웃음의 의도를 눈치챈 듯 설핏 미간을 좁혔다.
여기서 한 방 먹일 수 있는 대응법은 황제도 지지 않고 화사하게 웃는 건데, 황제가 화사…한 미소를 지을 리가 없다. 으, 상상만 해도 소름이 돋네.
소름이 돋은 팔을 쓸어내리는 사이, 역시나 얼굴을 이용한 맞대응보다는 논리를 택한 듯 황제가 으르렁거리듯 목을 울리며 입을 열었다.
– 이 위선자가…….
– 흐음?
– 역겨우니 어쭙잖은 가면은 집어치워라. 짐이 물러나면 마계도 물러나겠다 했나? 우습지도 않지. 마계와 인간계의 전쟁이 있었던 이후 많은 시간이 흘렀다 하여 과거 그대들의 행적과 발언이 묻힐 줄 알았더냐. 그럴 리가!
언성이 높아진다. 세상이 침묵에 잠겼다.
고요한 공간을 뚫고 황제의 목소리가 하늘 높이 치솟았다.
– 지식과 지혜, 그리고 과거에 있었던 일들은 기록을 통해 후손들에게 전해진다. 같은 실수를 막기 위해, 이를 말미암아 더 나아가기 위해! 이것이 바로 그 증거겠지!
팔걸이에 올려 두었던 책을 들어 화면에 대고 흔든다.
– 이 궁의 서고에 잠들어 있던 역사서다. 과거 마계와 있었던 전쟁을 제법 세밀하게 기록해 두고 있지. 제법 흥미로운 내용이 많더군. 그중 일부만 읽어 보자면…….
책을 펼치고 페이지를 찾아 촤르륵 넘긴 그가 원하던 부분을 찾은 듯 시선을 한곳에 고정했다.
– 전쟁 중 궁지에 몰린 한 인간 왕이 처절하게 외쳤던 말이 있다. 어째서 가만히 있던 인간계를 침범했느냐 물었지. 그러자 마왕이 가볍게 비웃으며 대답했다.
거기까지 말하고 황제는 고개를 들었다.
화면 너머의 누군가를 보듯 맹렬한 황금빛 눈동자로 화면을 똑바로 쳐다보며, 천천히 말을 잇는다. 느릿하지만 진중한 목소리가 세상을 울렸다.
– “마족으로서, 해가 드는 땅을 탐하는 것이 당연하지 않나?”
누군가 마법을 쓰기라도 한 듯, 그 순간만큼은 어느 누구도 입을 열지 못했다.
그야말로 소름 끼치는 정적.
나조차도 하염없이 화면의 금안을 쳐다보는데, 황제가 영원할 것 같던 정적을 깨트리며 못을 박았다.
– 결국 제국의 행보는 핑계이자 인간계 내부의 분열을 유도하기 위한 것일 뿐, 본디 호시탐탐 인간계를 노리고 있던 것 아닌가.
– 핑계라니, 제국이 물러나면 우리도 물러나겠다는 말은 진심이라니까? 속는 셈 치고 한번 물러나 봐. 그러고도 마계가 물러나지 않으면 그때 다시 움직여도 늦지 않겠지.
두 군주 모두 서로에게 말을 하는 듯하면서 끝내 이 화면을 보고 있는 대다수의 인간들을 선동하고 설득하겠다는 목적은 잊지 않는다.
아마 방금 나온 마왕의 발언에 고개를 끄덕이는 자들이 적지 않겠지. 이를테면 공격적인 정복 전쟁을 펼쳐 나가던 제국을 불안한 눈으로 보던 타 왕국 사람들이라든가, 당장 제국 내부에서 마계와의 전쟁을 반대하던 사람들이라든가.
이를 모를 리 없는 황제가 지지않고 다시 목소리를 내었다.
– 당장은 그렇겠지. 이 책에는 마족들의 수명에 관한 이야기도 나온다. 인간과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길더군. 그래서 어렵지 않게 추측할 수 있었다. 현재 인간계에서 제국이 가장 거슬리는 상대이니 이런 식으로 견제하며 시간을 끌다가 세월이 지나 세대 교체가 일어나고 제국이 쇠퇴하면 그때 수월하게 집어삼키려는 속셈이 아닐까, 하는… 제법 그럴싸한 추측을 말이지. 결국 짐에게, 현 세대의 인간들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단 두 개인 셈이다.
황제가 무엇을 의도하고 저 말을 꺼내는지, 나는 다음 말을 듣고 나서야 알 수 있었다.
– 마계조차 껄끄러워할 정도로 강한 현 제국을 앞세워서 당장 전쟁을 치러 후손들의 안전을 꾀하느냐, 언젠가 사라질 헛된 희망에 기대 도피하고 시간을 미루어 후손들을 멸족에 이르게 하느냐.
마계와의 전쟁 원인을 완전히 바꿔 버렸다.